악몽과 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 - 03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불안감과 공포는 점점 구체화되고 빈번해졌다. 처음에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귀신이 뒤에 달라붙어서 속삭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신체적 이상이 있는지 살폈고, 일시적인 기력 저하인지도 실험해보았다.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이 두 가지 모두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심리적 원인뿐이다.


 물론, 누군가 실제 귀신이 있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반론할 수 있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 전부 귀신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귀신, 악몽, 환상 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친구였고 이들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나를 공포와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트라우마로 군림했다. 처음엔 완전히 패배해서 삶이 파괴되었지만 15년 정도 아등바등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방법을 개발하고 조금씩 상황이 개선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경우 진짜 귀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딱히 귀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경험상 진짜 귀신이라고 판단할만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이다. 직면한다는 것은 그 심리적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것이다. 보통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고독한 사색가가 되어 그 사건을 기억해내어 분석하려고 한다. 기억을 들여다보고 차분히 분석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무척 좋은 방법이지만 결코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결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흡연자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그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저 그 담배의 맛을 기억해서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면 그는 매우 어이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기억으로 그 맛을 생생하게 떠올린다면 담배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는커녕 담배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렬해질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 즉시 모든 욕구가 가라앉고 평온해진다. 하지만 기억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그런 효과를 낼 수 없다. 이는 기억이 실제 생활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저 욕구가 존재했다는 기억과 그 욕구가 해소되었다는 기억 정도만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욕구를 해소시킨 실체는 기억으로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결코 경험이 될 수 없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억을 통하여 트라우마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고, 불안해질 수 있다. 심하면 발작이 일어나거나 완전히 방어적으로 행동하여 모든 것을 피하고 잠수를 탈 수 있다. 이 때, 기억은 심리적 문제를 불러오기 위한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 것일 뿐, 심리적 경험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를 혼동하면 엉뚱한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가령, 지금과 같이 불안과 공포가 귀신으로 구현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는 귀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고 순식간에 귀신이 생생하게 구현되기 시작한다. 기억과 분석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신적 믿음을 질책한다. 스스로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귀신을 떠올리고 이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귀신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잘못된 감각기관을 질책하고 이 귀신이 환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므로 다시 재발하게 된다. 믿음에 따라 거부된 귀신은 낯선 타인, 범죄자 등으로 본인의 믿음에 부합하는 형태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려면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귀신이 나타나 공포와 불안을 뇌 속에 주입하는 상황에 서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를 바라보는 것이 직면이다.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위하여 귀신의 공포가 극대화하는 상황을 만들어 본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을 끄고 거의 헐벗은 몸으로 덥고 습한 바람을 맞는다. 무더운 습기가 피부를 덮으면서 피부에는 땀이 흐른다. 습기와 땀이 조금씩 맺히면서 불쾌함이 올라오고 온 몸이 질척질척 거리고 답답해진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응결된 수분을 증발시키면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으스스한 한기가 더해진다. 몸은 더위에 힘들어하면서 땀을 흘리지만 으스스한 한기가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렇게 더운데 몸이 으스스한 것은 귀신 때문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뇌리를 덮고 귀신의 존재를 불러온다. 어둠은 귀신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강조하여 두려움을 키운다. 그리고 그 귀신은 다시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켜 마음을 흔든다. 이 때,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일어나는 작용들을 차분히 바라본다. 

 

 우선 차분해야 한다. 일상에서 갑자기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면 거기에 휘둘려 벌벌 떨게 된다. 눅눅하고 음습한 환경과 심리적 요인이 공포와 불안을 불러오고 그 공포와 불안은 귀신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현현한다. 그리고 그 귀신이 다시 공포와 불안을 실체화하고 극대화하여 마음을 핀치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일어날 상황을 떠올려 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면 이를 막을 수 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오면 휘둘리는 마음을 코끝으로 전환한다. 콧구멍에서 들락날락하는 숨을 구체적으로 느낀다. 코끝에 스치는 기류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집중하면 정신적 에너지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코끝의 감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렇게 하면 공포와 불안을 형성하던 에너지가 코끝으로 이동하면서 귀신을 구체화하던 에너지가 약해진다. 귀신이 희미해지면 그로 인한 공포와 불안도 약해지게 된다. 여기에서 집중력을 더욱 강화하고 유지하면 귀신과 공포 그리고 불안을 완전히 잠재우고 온전히 명상에 들어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봉인하게 되므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주도권을 되찾아 차분해지는 정도에서 집중을 멈춘다. 


 마음의 주도권을 찾아왔으면 머릿속에서 활개치고 있는 귀신이나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약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때, ‘본다’라고 하는 행위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이는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다. 


 경험상 주의를 기울이면 심상이 보인다. 가령, 코를 스치는 숨을 ‘본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코를 스치는 숨을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새 숨이 내 코 사이를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머릿속으로 코를 들락날락 거리는 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코에서 느껴지는 실제의 감각과 어우러져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해준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겪어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에 따라 퍼포먼스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상황에 대한 그림 또는 모델이 본능적으로 그려지고 이를 인식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차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그려지는 그림이나 상황 모델을 본다.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 주의를 집중한다. 즉, 으스스한 한기나 피부에 돋은 소름, 귀신의 환상 등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공포나 불안 등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요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지하철에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있는 나이 먹은 아저씨가 보인다. 조금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항상 볼 수 있는 삶에 무게를 버티다가 잠시 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날에는 유난히 아저씨의 코가 보인다. 살짝 기름이 배여서 광택이 흐르고 맑게 빛난다. 기름이 맑아서인지 피부색이 그대로 투과되어 조금 노란색으로 보인다. 그 때 허영만 화백의 “꼴”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코에서 황색의 상서로운 광택이 있으면 금전이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는 상서로운 기운이 뭐야? 라고 웃으면서 지나갔는데 이 아저씨의 코의 광택을 보니 바로 상서롭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아저씨에게 좋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순간 떠오른 것은 허영만 화백의 “꼴” 뿐만은 아니다. 한문에서 自(스스로 자)자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글자이면서 실제로는 코를 형상화한 상형자(象形字)라는 점도 같이 떠올랐다. 그래서 관상에서 말하는 코에 나타난 징후로 자기 자신을 살핀다고 한 것은 관상가들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전통적인 생각을 좀 더 심화시켰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한자 문화권의 뿌리부터 코를 그 사람의 자신으로 봐왔기에 “콧대가 높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라는 표현들이 흔하게 사용되었고 관상은 그저 그 전통을 신뢰하고 이를 좀 더 세분화하고 술수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 번 터진 생각은 봇물처럼 이어지고 기억을 들추어내 사실들을 꿰기 시작한다. 암으로 투병하시던 분이 코가 얽어서 생기를 잃고 쭈글쭈글하게 수축된 것이 떠오른다. 면접관의 자신만만한 미소 가운데 광택을 내며 빛나던 코도 떠오른다. 한자문화권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코를 사람의 자신감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관상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을 오류가 많이 섞인 관찰 결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류를 가려내면 나름 쓸만한 정보의 원천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이기 때문에 코를 자신감이나 자존감과 연관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논리들이 떠오른다. 인간의 몸이란 매우 합리적인 것 같지만 굉장히 오래된 원시적인 체계도 같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코에서 자기 자신의 징후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로 내 자신의 코를 관찰하여 나의 상태를 계속 연동해서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허영만 화백의 “꼴”을 본 것은 이 경험을 하기 2년 전쯤이었다. 당시에는 나름 유행하는 컨텐츠여서 봤을 뿐이다. 재미있게 보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본 것은 아니고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2년만에 관련 지식이 나타나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한 번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식도 아니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어설프게 관상을 볼 수 있었다. 만화책 한 번 보고 관상을 볼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하는 부분이 제일 신기했다.

             

아는 것도 없는데 갑자기 스스로 관상을 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이 부분을 조금 깊게 고찰해보았다. 관상가들은 기본적으로 얼굴지도라는 것을 사용한다. 즉, 재물은 콧방울을 보고 배우자는 입술을 보는 식이다. 그리고 나이에 따라서 반응하는 얼굴 부위가 있다. 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얼굴지도도 모르고 관련 용어를 하나도 모르니 실제 관성을 볼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아저씨의 코를 보면서 상서롭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얼굴에 나타나는 징후가 상서로운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얼굴을 보고 상서롭다고 느끼면 관상이 좋은 것이고 불길하다고 느낀다면 관상이 좋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이 상황에서 얼굴 지도만 암기하면 이 느낌을 구체적으로 풀 수 있으니 관상이 완성되는 셈이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생겨난 자신감을 믿고 관상을 볼 수는 없었다. 자신감이 상당해도 머리는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어떻게 관상을 보나 의심하고 계속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라 내 마음 내키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선입견과 미모에 따라서 마음껏 날조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따름이었다.

            

이 관상 보는 경험과 같이 갑자기 알아지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나름 상당히 많은 책을 읽는 편이지만 깊고 자세하게 책을 보지 않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내용을 한번 주마간산식으로 맛만 보고 정말 필요한 책만 다시 읽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이렇게 주마간산식으로 읽은 책들이 대략 2년 정도 지나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이 덮은 책들인데 2년 후에 종종 떠오르는 것이다. 그 기간은 신기하게도 항상 2년 정도이다. 

         

책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의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행동, 누군가의 조언, 당시의 이상했던 상황 같은 것도 2년 후에 갑자기 알아지게 된다. 게다가 이런 경험의 특이한 점은 그냥 깨달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같이 생기고, 실제로 자주 사용할 수 있도록 몸에 장착되는 수준으로 체득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관상이 떠오르면서 그 때부터 관상을 볼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이렇게 돌팔이가 되는가보다 생각했다.

           

이런 뜬금없는 지식의 각성 경험과 같이 고려해볼 만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입이 말하는 경험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이야기들이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이런 경험이 하도 많아서 말은 입으로 하는 것이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너무나 많다. 앞서의 경우처럼 갑자기 알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을 하다보면 기억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온갖 경험과 생각, 책에서 읽은 내용들이 튀어나온다. 생각을 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머리로 생각하고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리고 머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필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없는지 생각하느라 정신없다. 말이 다 끝난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시 스스로 복기해야만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찾아보면 상당 부분 틀리고 왜곡된 것들이 많다.

             

어린 시절에는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라는 말을 믿었기에 말을 하다보면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을 끌어다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실은 아무런 효용이 없는 설명이다. “온 우주가 알고 있어.”, “모든 것은 신의 뜻이야.”라는 말처럼 항상 이유를 찾는 우리의 정신을 다독일 수는 있지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2년 전에 경험한 지식과 내용은 허영만 화백의 “꼴”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나마 지식 각성이 가지는 몇 가지 특성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2년이 지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2년 내에는 새롭게 알아지는 것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새롭게 알아지는 것들은 어떤 경이로움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진다. 즉, 2년 정도 지난 지식을 갑자기 알게되는 경험은 마치 계시를 받듯이 확 알아지는 경험으로 확연한 변화와 각성의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일상적인 새로운 지식을 알아지는 경험은 최근 자판기 커피의 가격이 300원에서 400원으로 인상되었다는 것을 안 것처럼 별다를 것 없는 경험이다. 

            

두 번째는 의외성이다. 모든 경험이나 지식이 2년 내에 갑자기 알아지는 것이 아니.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진 의외의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나 지식이 2년 만에 알아질 때는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뜬금없이 그 방향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가령,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여자가 지하철 봉을 잡고 있다가 밀어내면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떠올린 것은 바디랭귀지에서 “사람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한다.”라는 점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아저씨의 코’처럼 무척 뜬금없이 과거에 읽었던 바디랭귀지 책을 다 떠올리게 되었다. 즉, 현실에 영향을 받는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나타날 준비가 완료되어 현실의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격발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무의식이 모든 것을 안다.” 식의 가설을 적용되기에는 이 무의식은 지나치게 오류가 많았다. 엄청난 확신과 자신감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잘 살펴보면 온갖 잡동사니가 어우러져 때로는 기괴한 체계를 형성한다. 과거의 경험은 왜곡되어있고 지식은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고 오류를 수정해도 결론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하다. 즉, 나는 스스로 완전 돌팔이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관상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식이나 경험이 2년이라는 기간을 지나서 다시 지하수가 용출되듯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이 숙성한다는 면에서 어떤 知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플라톤식 사고방식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은 당연히 부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정보가 정보 그 자체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환경과 준비,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고 그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의식을 들먹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무의식은 2년마다 올라오는 각성 경험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각성된 지식의 오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것을 신경 세포인 뉴런(neuron)과 연계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고결한 영혼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으로는 이렇게 관찰된 것들을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뉴런은 무척 비합리적이고 패턴 순응적이어서 개인의 모순적인 행동이나 일관되지 못한 믿음들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정: 2019/01/17 PM 3:16  문구 및 제목(전편→01) 수정.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이 요상한 호기심 덕분에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상당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지친 나머지 대사가 많지 않은 액션 영화인 아이언맨 1편을 골라봤다. 이미 몇 번을 봤던 영화이기 때문에 그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어서 막막한 느낌은 덜 할 것이고, 자막 없이 보는 것과 자막을 보면서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고 싶기도 했다. 영화가 재생되었고 아이언맨 토니의 비서 페퍼가 회사에 있는 악당의 노트북에 접속하여 거래내역을 몰래 다운을 받는 와중에 악당인 오베디아가 나타나자 페퍼가 긴장하면서 데이터를 저장한 USB를 빼돌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아래는 그 장면 중에 캡쳐한 화면이다.




위의 장면을 보면 페퍼역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의 동공이 깨끗하게 보인다. 무슨 대단한 장면은 아니다. 솔직히,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대치하는 이런 장면은 미국 영화에 너무나 많이 나와서 식상한 장면이고, 또, 영화의 스토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장면도 아니다. 그냥 페퍼가 좀 위험해 보였다가 위기에서 무난히 탈출하는 장면일 뿐이다. 그래서 자막을 보면서 영화를 볼 때는 그냥 조금 긴장했다가 별 일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장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 장면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백하게 동공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일본의 만화책에서 사람이 흥분할 때 동공이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박을 하는 갬블러들이 상대의 동공을 관찰하여 상대의 패를 읽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종 영화나 만화, 소설책 등에서 눈이 읽히지 않도록 선글라스를 하고 다니는 것을 묘사한 장면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동공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내용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냥 허구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으로 거의 관찰하기 불가능한 것을 관찰할 정도로 관찰력이 좋은 특이한 사람이 있거나, 혹은 마술사들처럼 숙련된 도박사들은 그것을 관찰할 정도로 잘 훈련이 되어있는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즉, 일상적으로 동공을 관찰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일반인에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들려오는 ‘눈은 마음의 창’이고 하는 이야기도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사람들의 눈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그저 눈에 초점이 있거나 없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만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장면으로 돌아와 보면 페퍼의 눈동자 속의 동공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동양인의 검은 눈동자와 달리 푸른 눈은 조명 아래에서 그 동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눈을 본 순간 갑자기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단박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공이 이렇게나 잘 보일 정도면 아무리 얼굴에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어도 그 동공은 모든 심리적 사건에 따라 확장하고 수축하므로 그 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속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가령, 스캔들이 난 배우에게 스캔들 상대방으로 예상되는 이름을 제시하면 그 배우가 아무리 묵비권을 행사해도 이름을 들었을 때 그 동공이 확장되는 사람이 스캔들 상대방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눈이 드러난다는 것은 동공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민낯에 이어 마음까지 속속들이 전부 까발려지게 되는 셈이다. 눈이 이토록 중요한 비밀을 마음껏 누설하기 때문에 눈이 가지는 의미는 동양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동공이 잘 보이는 이들에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눈을 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게 된다. 이들은 당연히 친애의 감정도 눈으로 나누게 된다. 상대의 눈을 서로 응시하면서 말하는 것이 당연한 습관인 것이다. 그것은 비즈니스를 하는 관계라면 서로 속이는 것이 없다는 신뢰의 보증이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서 서로의 눈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서로의 영혼이 손에 닿을 듯이 잡히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또, 눈에 너무나 많은 비밀이 드러나므로 공적인 자리에 노출될 때는 선글라스를 끼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아주는 최후의 방벽이 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타인의 얼굴을 볼 때, 보는 것은 표정이다. 그래서 얼굴을 전체적으로 관찰하고 눈이나 코 등 특정 부위를 별도로 응시하는 경우는 잘 없다. 눈이 마주치긴 하지만 바로 피한다. 눈을 똑바로 마주 대할 때, 차분히 응시하는 것은 약간 무례하게 느껴지고 남자들 사이라면 싸움까지 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눈은 눈매와 눈빛의 강약으로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지 산만한지 정도는 보여주지만 어느 정도 꾸밀 수 있는 부분이고 보통은 딱히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동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열심히 관찰해서 보더라도 그 동공이 이전에 비해서 확장되었는지 축소되었는지를 알려면 정말 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뚫어지게 눈을 바라보면 무례하게 느끼고 굉장히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동공이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면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눈부터 보는 것이 너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눈을 드러냄으로써 상대에게 자신이 진실됨을 보여주는 것이 선행하는 예의이기 때문이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진심으로 마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눈을 보인다는 것은 숨기는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로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눈이고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무례하지 않다. 반대로 눈을 가리는 것이 무례하다.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샤이(shy) 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눈을 가리지는 않는데 눈을 피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처리도 눈에서 외부로 확장되므로 화장은 눈을 강조하는 눈 화장이 발달하고 화장의 가장 핵심적인 부위도 눈이다. 옷의 색깔도 눈의 색깔에 맞춰서 코디한다. 반면, 동양인들은 전체적인 윤곽 위주로 꾸미고 눈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서양인들의 화장을 볼 때마다 그 과한 눈 화장이 이상했는데 이제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왜 서양인들은 그렇게 선글라스를 선호하면서도 안경은 싫어하는지도 납득하게 되었다. 서구권에서 미남미녀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묘사하면서 눈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것도 배우자의 장점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이다.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이 보여주는 맥락은 사회생활로도 확산된다. 타인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눈을 보면서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신뢰는 훨씬 직접적이다. 동양인은 상대방을 판단함에 있어서 신분, 사는 환경, 현재 모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추정해야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눈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눈을 통해서 확보하는 신뢰는 단순히 추상적인 신뢰가 아니고 그의 진실성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정도의 매우 구체적인 신뢰가 된다. 또한, 구체적인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이고 그 집단이나 소속된 환경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집단이나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서 신뢰감을 확인하고 신뢰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인이라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그에 따른 다양한 보증이 필요하고 그것을 판단함에 있어 그 사람의 신분과 소속 환경 등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사람을 사귀는 것도 바로 그 사람을 사귀는 것 보다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중산층의 한국어 사용자를 사귀는 것과 같다. 즉,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환경에 소속되는 것에 가깝다. 


또, 타인에 대한 판단이 매순간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담백하게 이루어지므로 인간관계가 상당히 깔끔해진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설득은 금방 끝나고 곧바로 상대에게 자신이 의견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그냥 설득을 포기해야 한다. 눈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의사소통을 모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실은 그들은 이미 동양인이라면 모든 예의를 내려놓고 술 먹으면서 쌍욕하고 이리저리 흔들고 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서 상대방이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납득하는 과정을 그냥 눈빛 한번 마주침으로 끝낸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정이 없고 메마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눈 푸른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눈동자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과정을 쓸데없이 괴롭게 술을 먹고 망가지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친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상호적인 과정이다. 이들은 눈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에 따른 강력한 공감으로 서로 묶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불쾌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 무례하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흙발로 침투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정말 이상한 사람들과 공감하면 자신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고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눈을 쉽게 노출하지 않고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서 상대의 진실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게 된다. 또, 타인과 교감함에 있어 서로 교감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매우 명백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반면, 동양인들은 그런 관계에 무덤덤하고 자신이 노출된다는 불안감이 없기 때문에 얇지만 넓게 관계를 이룬다. 또, 당연히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도록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눈일 경우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깊이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동공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이라면 교감이 진행되지 않게 될 것이고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이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의사소통의 가장 확실한 기반이 되는 눈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과 맺는 친교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공감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용감한 사람들은 친교를 맺겠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예의와 의사소통 방식을 새로 익힐만큼 부지런하고 영민해야 하고 친교를 맺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제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에 와서는 검은 눈을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들의 사회에서 과거 검은 눈이 상당히 많은 배척을 받거나 오해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위의 장면에서 페퍼의 동공을 본 순간 떠오른 것들을 나열한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므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 일부는 과장되었고 일부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설명되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의 삶과 행동의 저변에 그러한 경향성이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동자를 강조하는 장면은 드문 것이 아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눈동자만 보여주는 영화도 상당했던 것 같다. 아마 위의 장면도 일부러 눈을 강조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눈에 대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있기에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수시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처음으로 그게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막을 쓰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미국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전제에 마주쳐 그것을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