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결국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많은 것들이 설명되기 시작한다. 앞서 이 모든 이야기가 출발했던 의문점을 제시한 바 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서 출발함이라는 포스팅에서 처음으로 제시했던 질문들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거의 외우다시피 할 만큼 자주 봤던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는데 전부 외우고 있던 드라마의 스토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거의 들린다고 여겼던 영어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드라마는 완전히 낯설었던 경험을 말하면서 발생한 의문들을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다.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익숙했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찌는가?


그리고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더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의 대답은 처음부터 명백하고 단순했다. 바로 언어의 부재가 바로 그 답이다. 하지만 위의 질문들은 언어의 부재를 통하여 언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대답은 좀 더 심화될 필요가 있다.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봤을 때, 인식구조는 자막에서 영상과 소리로 넘어간다. 즉, 자막을 먼저 확인하고 그 확인된 자막의 내용을 영상이나 소리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자막이 말소리와 동기화(sync)가 맞지 않을 때, 드라마를 보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느껴봤다면 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막이 말소리와 동기화가 되면 그 때부터는 자막의 내용이 하나의 언어적 구조물로써 작동하면서 이야기가 성립되고 드라마의 말소리와 영상은 그 이야기에 실제감과 몰입감을 부여한다. 반면, 언어를 직접 들으면서 보는 드라마는 영상을 보는 와중에 소리를 듣기 때문에 영상과 소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 경우 소리가 언어적 구조를 형성하고 이 언어적 구조는 영상과 동시에 인지된다. 자막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 차이는 결국 정보량의 차이로 이어진다. 자막과 함께 보는 경우는 자막을 먼저 확인하기 때문에 주요 영상의 누락이 축적되고 영상을 길고 세세하게 살펴볼 시간이 부족하다. 또, 말소리에서 직접 전달될 수 있는 억양과 발음에 따른 미묘한 감정 표현, 그 캐릭터의 출신지역이나 성장환경 등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 등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자막으로만 나타나게 된다. 이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자막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은 시나리오에 영상과 배우의 목소리를 첨부하면서 글을 읽는 것과 같고 자막 없이 보는 것은 입체적인 공감을 통하여 충실하게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된다.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들은 주로 짤막한 대사들인데 이들이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자막 읽기에 숙련되었고 그 자막을 거의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자막이 머릿속에 해당 언어의 뜻을 이미 전개시켜 놓았고 그 다음 대사를 듣게 되거나 혹은 대사를 듣는 동시에 자막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후적으로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대사의 길이로도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 단어의 개수가 한 두 단어일 때는 자막과 배우의 대사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영어가 들린다고 생각하지만 대사의 길이가 늘어나면 영어는 무시하고 자막만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막을 보는 동안은 영상도 보지 못하게 된다. 여하튼, 자막을 통해 영어를 들을 수 있다는 인식의 오류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자막이 사라진 순간 잘 들린다고 착각했던 영어 안 들리게 되는 것이다. 


자막이 없어져서 영어가 들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직접 드라마의 영상을 눈으로 보고 대사를 듣게 된다. 자막이 있었을 때는 자막이 들어야할 것과 보아야할 것을 가이드 해주었지만 동시에 보고 듣는 것에 할애할 시간을 빼앗고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제시하기 때문에 주마간산 하는 식으로 드라마를 보게끔 했다. 자막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날 것으로 영상과 소리를 직접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풍부한 비언어적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그로 인하여 공감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은 언어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종합적인 인지를 구성하지 못하고 단지, 각 장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서적 요소나 캐릭터에 대한 미묘한 공감과 애정으로만 남게 된다. 대사와 같은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고 공감되지 못한 그러한 인지들은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들은 기억하기도 쉽지 않고 기억을 환기하기도 쉽지 않으며 접한 정보를 가공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의 드라마를 시청한 느낌은 현저하게 느낀 장면과 정서 몇 가지로 축약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드라마가 현실과는 달리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인식되는 정황을 통하여 이야기의 영상과 소리가 시공간을 도약하면서 정신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언어가 없을 경우 시청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언어가 영상과 소리의 널뛰기를 매개해서 드라마를 성립시켜 주는 것인데 그러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막도 사용하지 않으면 드라마가 하나의 연속체가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일관성 없는 묶음 같은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이에 대해서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포스팅한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결국, 일련의 실어증 체험으로 자막 없이 미국드라마를 본 것에 대한 의문점은 모두 풀었다. 실어증을 체험하는 것에는 실패했고, 드라마를 자연관찰하듯이 보는 것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통해서 그 동안 이론적으로 듣기만 했던 다양한 것들을 실제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자막을 통해서 어떻게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체감하게 된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드라마가 결국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서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가 실은 실어증 체험이나 언어적인 훈련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큰 기대 없이 영화나 드라마를 쪼개어 가면서 보게 되었다. 즉, 장면 전환으로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끊고 다시 정리하고 보는 식이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여 보니 언어가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소한 손동작이나 표정 등 영상으로 제공되는 모든 것이었다. 이건 언어가 없기 때문에 보인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자막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수십번 반복하면서 본 드라마도 자막 없이 보게 되면 전혀 새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자막으로 인한 경우가 많았다. 


자막이 있으면 눈은 끊임없이 자막과 영상을 오가게 된다. 눈으로 영상을 보면서 귀로 대사와 음악을 들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눈으로 영상과 자막을 보고 귀로 음악을 듣는 식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눈은 매우 바쁘게 자막과 영상을 오가게 된다. 앞서 언급한 현실 관찰처럼 눈은 사물을 따라가면서 관찰한다. 눈은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움직이고 오가는지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본능적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대사가 있을 때 마다 눈은 자막을 향한다. 드라마가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대사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모든 장면이 대사에 맞춰 구성되어 대사와 영상은 그 순간 최대의 시너지를 내게끔 되어 있지만 자막으로 보는 사람은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영상을 미묘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상당량의 영상을 보지 못하고 넘어가게 된다. 또, 대사가 길면 어떻게 될까? 그 대사를 전부 빠르게 읽어야 한다.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맥락에 따라 파악까지 해야 한다. 당연히 대사가 길어지면 눈은 거의 자막으로 넘어가 있고 빠르게 대사를 읽고 영상으로 눈이 돌아와도 영상에 의식이 집중되지 않는다. 눈은 영상을 보고 있어도 머리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없는 것이다. 결국, 자막과 함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은 본인은 제대로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용의 상당부분이 누락된 채로 그것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정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자막이 대사와 싱크가 안 맞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중에는 자막의 존재 자체를 잊을 정도로 편안하게 시청하게 된다. 나아가 어느 순간부터 배우들이 한국말로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느끼거나 영어를 바로바로 알아듣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즉, 정리하자면 자막이 있으면 외국어의 어색함도 없고 어떤 문화적인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도 못하며 상당부분의 영상이 누락됨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드라마 속에 현전하고 있어 시청자가 느껴야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미국과 대한민국은 의사소통하는 법부터 문화적인 코드까지 전부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상당부분의 중요한 영상이 누락되거나 영상을 보는데 방해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니 입모양도 한국어와 다르고 억양 발성도 전부 다르다. 또, 결정적으로 모르는 단어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그 언어적 의미가 소통된다면 당연히 전체의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따른 다른 이질적인 요소까지 전부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여겨야 할까?


반대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는 이 모든 이질성이 극대화되어 튀어나온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제시되는 상황과 배우의 표정 손짓 등 사소한 디테일을 통하여 그것을 해석하게 되는데 공감되는 것도 있고 이질적인 것도 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 중 하나를 찾아낸 것이 페퍼의 눈동자였다. 드라마에서 시공간 널뛰기 없이 어느 정도 연속적인 시선 처리와 제한적인 시공간의 상황을 보여줄 경우에는 많은 디테일한 의미들이 영상을 통해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제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직접 보는 경험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저런 미국 드라마에 대한 시도가 없었다면 한국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과 대사와 표정이 너무 일체화되어 있어서 느끼는 것이라곤 그저 배우가 연기를 잘 하네 못 하네 정도에 불과하다. 무언가 새로 발견할만한 문화나 행동양식이 없고 그저 모든 것이 친숙하고 그저 공감하고 말고 하는 것만 있다. 아마 이것이 미국 드라마를 원어민이 볼 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반면 모르는 외국어의 드라마는 이 모든 것이 이질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외국 드라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면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사가 나오기 전에 그 대사가 나올 맥락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 표정 등에 의해서 공감이 발생하고 그렇게 생긴 공감을 언어가 규정하고 전개시킨다. 그래서 상황과 대사가 엉뚱하게 어우러져 오해를 낳기도 하고, 그 모든 상황과 표정을 통하여 그 말의 무게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산전수전 다 뚫고 만나러 가서 절박한 표정으로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시청자들은 그 캐릭터가 겪은 수많은 간난신고를 통해 그 마음의 진실성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좋아한다.”라는 대사와 함께 마무리된다. 이제 시청자에게 그 “좋아한다.”라는 대사는 그 캐릭터가 수많은 간난신고를 뚫고 행동하게 된 원인이자 그 결과가 된다. 즉, “그 캐릭터가 상대를 그렇게 좋아했다.”라고 짤막하지만 무거운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과 맥락이 언어와 연결되면서 그 언어가 실체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로 종결되면서 그 디테일한 부분은 그 감상과 무게를 대사에 더하고 누락된다. 


하지만 자막으로 통해서 보게 되면 장면장면에서의 맥락 설정이 완전 반대가 된다. 원래 드라마의 구조는 각종 상황과 캐릭터의 표현을 통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이 대사를 통하여 규정되고 전개되고 마무리된다. 하지만 자막을 읽는 경우에는 먼저 자막을 읽고 언어적 맥락이 먼저 파악된 다음에야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대사가 짧고 영상이 주된 액션영화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사가 많고 상황이 주로 언어적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나 말이 많은 영화 장르일 경우에는 자막을 파악하고 해당 자막에 맞춰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아무래도 언어적 맥락 파악이 우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막으로 미국 드라마를 보게 되면 그 공감의 상당부분이 퇴색된다. 자막으로 보는 것 때문에 영상의 중요 부분이 누락되고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을 경우 발견했을 가장 사소한 디테일들, 몸짓이나 손동작 등이 누락되고 그만큼 공감되는 정도가 낮아지게 된다. 원작자가 100의 공감을 전달하려고 했다면 자막을 보는 시청자는 대략 80정도 공감하는 것 같다. 세세한 디테일은 사라졌지만 그 이야기의 골간은 분명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재미있다. 하지만 만일, 자막 없이 본 드라마를 자막과 함께 다시 보게 될 경우에는 그 헛헛한 느낌과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배우들은 극중 상황에 따른 특유의 문화와 행동양식 등을 충분히 녹이려고 노력하지만 자막으로 보는 경우에는 이미 자막에 맞춰서 모든 영상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자막에서 제시해주는 언어적 맥락을 지탱해주는 영상이나 내용은 수용되지만 그와 상관없는 세세한 디테일들은 완전히 누락된다. 따라서 배우가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어지간해서는 판단하기 어렵고 배우들이 전달해주는 생동감도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자막으로 통해서 언어적 맥락이 머릿속에서 전개되고 대사를 맞추기 때문에 짧은 대사는 잠깐이지만 서로 공존한다. 또, 나와 같이 거의 드라마를 외우다시피 했던 경우에는 실은 외운 것은 자막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막을 외웠기 때문에 자막의 첫마디만 봐도 다음 자막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전개될 정도가 되면 영어를 한국어처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즉, 상대방이 다음에 할 말이 “고맙다”라는 것을 알고 머릿속에는 “고맙다”라는 말이 이미 준비된다. 그리고 배우가 “thanks”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말이 머릿속에서는 바로 준비된 “고맙다”라는 대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결국, 영어가 들린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완벽한 오류였던 셈이다. 


자막을 통해 영상과 소리를 통해 제시되는 모든 이질성이 사라지고, 영상과 상황에 따른 전개로 대사가 연결되지 않고, 대사를 먼저 확인하고 그에 따라 영상을 취사편집하게 되는데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 거의 드라마 대사를 외우다시피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거은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개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자연은 아름답고 그 속의 다양한 동식물들은 아무런 말이 없어도 우리를 매혹시키고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언어를 모르면 보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처음에는 언어를 백지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니 어떤 언어적인 기능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고 또 다시 좌절되기 때문에 답답함과 좌절감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설정한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져서 ‘모든 것이 언어다’식의 얼버무리기 식의 결론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자연관찰에 몰입하게 되면서 그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선, 언어가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스스로의 가설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유사한 상황에 처해 보면 된다. 즉, 내가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인을 관찰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관찰이지만 동시에 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평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해답은 금방 튀어나왔다. 전혀 괴롭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모르는 외국어도 그 의미를 몰라서 괴롭지는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음성이 어우러져서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계속 시선을 주는 것으로 인한 무례가 아니라면 사람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웅얼거리면서 말하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니라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말은 모르는 외국어임에도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또렷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입고있는 옷과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은 그들이 일시적인 관광객인지 국내에 거주중인 것인지 알게 해주고, 표정과 목소리의 톤, 몸짓은 그들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려준다. 잠깐의 관찰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외국인을 관찰할 경우 모르는 언어가 개입하고 있지만 전혀 고통스럽지고 괴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척 흥미진진하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기능이 작동하고 다시 좌절하면서 고통을 겪는다는 가설은 폐기해야할 것 같다.


새로운 해답을 찾아 생각이 표류하다가 고통에 초점을 맞춰보게 되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 생기는 그 고통에 대해서는 앞서 포스팅한 미드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 대하여 고찰함 2에서 명칭실어증과 개인적인 경험을 버무려서 명칭을 모르는 것에 대한 고통과 답답함을 언급했다. 이 경우 소설이나 텍스트 등 언어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향유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기호 하나 때문에 무지의 벽에 부딪히고 답답해지면서 읽고 있던 맥락보다 지금 현재 눈앞의 기호 하나를 모른다는 맥락에 매몰되어서 전체 맥락이 단절되고 갑자기 글에 대한 흥미도 급격하게 사라지는 그러한 고통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고통과 답답함은 마치 자신의 위치와 맥락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생기는 당혹감 또는 갑작스러운 급격한 시공간적 변화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감과 매우 닮아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 되면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이 전부 동일하다. 앞서 명칭실어증에서 모르는 기호에 마주쳤을 때는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라면 자고 있는 사이에 본인도 모르게 대한민국에서 몽고로 옮겨진 사람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현실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과 언어적 맥락의 상실이라는 것에 천착한 나머지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겪는 고통도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언어적 맥락이 꼬일 때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이 꼬일 때도 비슷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드라마와 자연 관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자연 관찰은 언어 없이 가능한데, 드라마는 힘든 것일까?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대조하는 질문을 하니 갑자기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딱따구리를 발견했을 때, 딱따구리의 맥락은 무척 뜬금 없었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없었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날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그 외에 별도의 맥락이 주어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딱따구리는 날아와서 나무를 두들기다가 날아갔다. 딱따구리의 생태, 종의 종류, 서식지 등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딱따구리의 의사를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고통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몰입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과 드라마 시청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연 관찰은 일종의 현실이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수많은 엉뚱하고 알 수 없는 맥락들이 섞여있다.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마주치고 또 그것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경험세계라는 맥락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현실적 경험세계라는 맥락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내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금 신기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어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드라마의 맥락은 어떠한가? 우리는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의 동시에 관찰하고 그 사람만의 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엿보면서 관음증을 즐긴다. 1초전에는 뉴욕 맨하탄의 커피샵에서 노닥거리는 연인들을 보다가 그 다음 1초 후에는 사하라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제정신인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드라마가 실은 언어적 질서를 통하여 구축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결국 글이다. 하얀 노트 위에 글로 작성된 것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영상을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 배우들의 대사로 연결된 한편의 문학인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와 배경의 사실성 등은 그 문학을 더욱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집중해서 드마라를 보게 되면, 현실적 맥락에 충실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는 자연스레 관찰이 이루어지고 고통스럽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면이 확 바뀐다. 또,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도시에서 시골로 바다에서 사막으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관찰하는 사람은 갑자기 변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내용은 계속 전개되고 있다. 현실적 맥락은 이미 꼬였다. 물론, 용을 써서 바로 이전 맥락을 놓아버리고 다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한두 번은 어찌 노력해서 적응해도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피곤해지고 집중력은 떨어지게 된다. 결국, 길을 잃고 답답함과 고통에 매몰되고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맥락이 꼬이는 이유는 그 현실적 맥락의 전환을 언어적 맥락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에 대한 순수한 자연관찰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언어적인 산물이었고 그 사이에 있는 배우와 소품으로 이루어진 영상들도 현실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잘 통제된 언어적 배치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어증 체험과 영어에 대한 호기심은 당분간 사그라들었다. 막연하게 괴물같은 언어 기능을 상정하는 식의 얼버무리기식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론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론으로는 옳고 그름을 검증하기도 어렵고 무언가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어렵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고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서 딱따구리 같은 것을 보았다. 딱따구리를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또, 그것이 아무리 산 아래에 있는 집이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가는 길을 멈추고 그 딱따구리가 날아올라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것을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딱따구리의 출현은 갑작스러웠고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새로운 것과 조우하는 신선한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딱따구리 관찰은 정말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 딱따구리가 신기해서 보는 행위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물며 디지털이 아닌 맨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경험도 너무 오래간만이었다. 덕분에 어렸을 적 아날로그 시절 추억으로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던 각종 자연관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산이나 들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널려 있었다. 잠자리, 메뚜기, 물고기, 하늘소, 개구리, 뱀 등 신기한 곤충이나 생물을 잡으러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이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히 보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물론,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죽치고 앉아서 관찰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이면 자연스레 질릴 때까지 눈앞의 곤충이나 생물의 동작 하나하나에 흠뻑 몰두했었다. 어떠한 언어도 발화되지 않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순간이 충실하고 충만했다.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인기 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처럼 짜릿하고 흥분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좋아 죽는 그런 것들도 시골의 산과 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신기한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매력이 반감되었다. 꽃잎 위에서 사냥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면 그 사마귀가 숨죽이고 있는 모양에 따라 같이 숨죽이고 앉아서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손가락만한 말벌이 주는 위압감에 도망가 보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수많은 생명들 속에서 매우 충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충만한 경험에서 언어는 없었다. 언어 없이 매우 충만했고 모든 것과 교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에서 언어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언어는 경험에 몰두하는데 방해였기에 말을 줄이고 그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기 위해서 더 집중했었다. 이제 자연관찰에서 언어 기능의 개입은 없다고 전제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언어 기능이 개입하지 않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떠오른다. 만일 앞서 내린 결론에서처럼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당연히 뛰어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뛰어난 운동선수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언어적인 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언어적인 것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그것을 말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작품 위에 얹어질 뿐이지 그 알맹이가 될 수 없다. 또, 좌뇌와 우뇌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언어적 기능은 좌뇌의 일부에서만 작동할 따름이다. 이제 생각이 다시 반전되었다.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제 앞서 내렸던 얼버무리기식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가 대두된다. 어째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자연관찰과 달리 고통스러울까? 아마도 문제 설정을 다시 해야할 것 같다.

페퍼의 눈동자에 드러난 선명한 동공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즐거운 경험은 겨우 한 번에 불과했다. 그 한번을 제외하면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도전은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지옥의 경험의 계속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이 계속 반복 되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실제로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연이어 지속하지는 못하고 한 편을 보고 쉬면서 정신적인 에너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편씩 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롭고 정신적으로 답답해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으니 바로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고통의 원인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와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이다. 가련, 일종의 자연관찰을 하는 상황이다. 개미의 행동에 흥미를 느껴서 지그시 그것을 관찰할 때,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못해서 괴롭지는 않다. 자막 없이 보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개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전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적인 어떤 기능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드라마는 괴롭고, 자연관찰은 괴롭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서 처음 떠올린 해답은 자연관찰은 개미와 의사소통을 기대하거나 개미가 말을 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므로 언어를 쓰겠다는 기대가 없고 따라서 언어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영어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 정도 아는 단어가 들려오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언어 기능이 작동하게 되고 또 그것이 좌절되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오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독하게 괴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를 접으면 언어기능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인간을 동물 관찰하듯 관찰했던 동물학자나 전혀 미지의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스스로 속한 고유문화에 의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관찰하듯이 관찰하면 언어 기능을 잠시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관찰을 하듯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상황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언어도 이미 알고 있는 문법이나 실제 철자 같은 것을 배제하고 그냥 들리는 구어(口語)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면 언어 기능을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세상을 자연관찰 하듯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드라마를 시청했다. 몇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그 언어 기능은 꺼지지 않았고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항상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처음 한두 번 15분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집중해서 관찰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엔 정신력이 방전되어 퍼져버리고 다시 고통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관찰을 하려고 한다고 스스로 되새기면서 몇 번의 도전을 했지만 고통은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  어째서 드라마도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자연 현상처럼 관찰할 수 없는 것일까? 언어 기능을 잠시 꺼두어 이 고통과 답답함을 물리치겠다는 계획이 계속 좌절되면서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의지로 작동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 작동하면서 내 삶을 지배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언어 기능을 끄려는 노력이 축적될 때마다 그 실패로 인한 절망감도 축적되었고 어느 순간 부터는 이 언어 기능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점점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지면서 오히려 생각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의 관찰에는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반전되어서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언어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언어 기능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항상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감각에 의한 지각과 이러한 지각이 맥락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전부 언어적인 기능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연 관찰을 할 때 언어적 개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레벨의 밑바닥에서 언어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완전히 언어 기능에 따라 작동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결론은 약간 친숙한 결론이었다. 정신분석이나 언어철학 등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 언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논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왔다. 또,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와 개념이 허상에 불과하고 중생들은 그 허상에 매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나 꿈과 구별되지 않는 현실을 의미하는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것도 맥락상 연결되는 바가 있다. 친숙한 결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으로 스스로를 유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했기에 여기에서 만족해야 하는데,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우스운 점은 이 언어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임의로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말이라는 점이다. 막연하게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붙인 말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에 다양한 것들이 붙어서 개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지배하는 무서운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언어 기능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혀 그것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능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국, 스스로 대충 만든 단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개념이 되어 이제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이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는 꼴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지배하고 운용하면서 고통을 주기도 하는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언어 기능이란 것을 상정해버리게 되면 인간이란 그저 언어 그 자체의 단말(terminal)이 되어 버린다. 삶의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것이 그냥 일종의 언어에 의한 환상처럼 되어 버리고, 결국,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조직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나 환상 소설 등에서 수십번 우려먹은 듯한 흔해빠진 결론이고, 인간의 하찮음과 부족함을 강조하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낄 뿐 그 외에 소득은 없는, 무언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심히 생각을 전개한 보람도 없이 그냥 알 수 없음이라고 얼버무리는 그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결론은 상당기간 내 스스로가 좋아하는 형태의 결론이었다. 우주의 광활함 앞에서 먼지처럼 작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세상의 위대함에 흠뻑 젖으면서 자뻑에 빠지는 자기만족적인 결론이었다. 이번에 그런 식의 결론이 좋지 않다는 자각을 처음 얻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하다 보니 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돌파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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