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을 정보로 인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연한 이야기라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인간이 오감으로 주위의 사물들과 교감한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인간은 그 오감으로부터 주입되는 정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자취하던 방의 위층이 옥상이었고 그 옥상에는 세탁을 할 수 있도록 세탁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세탁기를 돌렸는데 그럴 때마다 세탁기는 일정한 주기로 쿵쿵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그 쿵쿵 소리는 낮게 그리고 힘있게 울리면서 내 방과 공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규칙적인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발생하는 불규칙한 소음이라면 어지간히 큰 소리 아니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규칙적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규칙적인 주기를 머리가 자동으로 인식하고 그 주기에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쿵 소리를 마음속으로 따라하면서 다음 쿵 소리가 규칙적인 주기를 준수하는지 계속 신경쓴다. 그래서 쿵 소리가 들린 후 다음 쿵 소리까지 긴장이 발생하고 계속 쿵 소리를 따라간다. 쿵 소리에 신경쓰느라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보도를 걸을 때 바닥에 깔린 규칙적인 타일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그 타일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그 규칙성이 준수되는지 신경쓰면서 그 타일 위에 걷는 내 발도 규칙성을 갖추면서 걷게 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약간 강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세탁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활동이 강제로 정지되고 그 소리에 몰두하게 된다. 공부는 당연히 못하고, 글을 쓰거나 게시판을 둘러보는 등의 활동도 모두 하기 힘들어진다. 이 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크게 음악을 틀거나 매우 쉽게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을 시청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회피하거나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종속된다.


사람은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눈앞에 절벽이 있는데 아무 걱정 없이 그 정보를 무시하고 절벽 밖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눈앞의 절벽을 인식하는한 그 절벽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절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절벽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지 거기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 절벽 밖으로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할 의도 없이 태연하게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생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뛰어내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정보에 반응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방식들은 매우 다를지라도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절벽이 있기에 절벽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온갖 태도가 나온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그 핵심에는 반드시 절벽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절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이 그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정보 종속성”이라고 지칭한다. 왜냐하면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마음은 정보가 제공되면 반드시 그 정보와 함께 일어나서 그것에 얽혀 전개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정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감으로 지각된 사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면에서 올라온 마음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 종속성은 당연한 것들로 나타난다.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고, 맛있는 것을 보면 침이 꿀떡 넘어가면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나면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모두 그저 그것과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똥을 만나면 역하고, 향기로운 향에는 이끌리듯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이 과정을 의식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노력해보자. 노력해서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마다 눈이 썩는 것 같고, 맛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역겹고, 헤어진 옛 연인을 볼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다시 처음부터 사귀듯 하게끔 노력으로 할 수 있는가? 보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게 된다면 진화의 과정에서 일찍 탈락했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생각해보면 그 과정의 지독함과 지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평생 그냥 참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맛있는 것을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이 역겹게 느끼게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그만둔 순간부터 즉시 식습관은 원상복귀한다. 만일, 식습관을 제어해서 맛있는 것을 맛없고 역겹게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이어트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식증이라는 병적인 상태로 몰아넣을 정도의 압력이 필요하고 거식증에 걸린 순간부터는 삶이 다이어트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당연히 쉽게 되지 않는다. 


정보에 반응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은 인간의 생명체로서의 기능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또한, 경험이라는 사건을 통과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저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마약을 찾거나 마약을 찾아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에 중독되면 그 자극적인 경험은 그 때부터 끊임없는 갈증과 갈구를 낳고 일상생활 내내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경험이 없었다면 마약은 그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중독된다.”라고 하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경험된 방식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똑같은 상황,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는 좋아할 수 있고 누구는 싫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보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미 내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맛있다고 확립된 음식을 맛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이미 싫어하고 구역질 나는 똥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입맛대로 정보에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통해서 실제 그것을 체득하게 되고 해당 정보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델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을 쉽게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것일 뿐, 먹어보지 않은 것이라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일단 맛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렇게 부정할 수 없다. 마약에 중독되기 전이라면 삶을 건전하게 꾸려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회피할 수 있지만, 마약에 중독된 후라면 회피가 불가능하고 그저 감내해야만 한다.


마약이나 낭떠러지와 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보 종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은 그러한 정보 종속성의 향연이다.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상대는 그 호의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상호성의 법칙, 스스로 한 행동의 일관성을 스스로 깰 수 없게 되는 일관성의 법칙, 군중심리나 외모 그리고 권위 등에 종속되는 인간의 행동 같은 것도 정보 종속성으로 설명이 된다. 여기서 제시된 모든 법칙은 이미 법칙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 개인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정보 종속성이라는 개념은 꽤나 유용하다. 왜냐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잘못된 해법을 피해서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구역질나는 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똥을 피해 다른 길을 가거나 똥이 그 길목에 놓이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평소 좋아하던 맛있는 빵집이나 음식점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빵이나 음식을 먹고 자제력 없는 자신을 탓했다. 이건 마치 똥을 보고 구역질 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똑같다. 음식점이나 빵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식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자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열심히 외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다시 불행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좋아하는 음식점과 빵집이라는 정보가 나타나면 거기에 그냥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 종속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똥을 피해서 가듯이, 맛있는 음식점이나 빵집을 피해서 다녀야 한다. 정보에 노출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곳을 피해 다니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음식점이나 빵집을 보면서 식욕이 돌았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똥을 향기롭게 느끼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비하를 초래하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보다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상황을 전부 피할 수 없다. 항상 사건은 일어나고 세상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학원을 빼먹고 PC방으로 놀러가는 아들을 보고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동일한 상황에서 계속 화가 치민다. 무섭게 호통치면서 질타하는 상사에게 두려움이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그 상사가 입만 열어도 끔찍하고 두려워진다. 장시간의 노동 끝에 막걸리 한 잔에서 즐거움을 찾는 습관이 있다면 노동 후에 항상 막걸리가 그리워진다. 트라우마가 되었든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 되었든 한 번 결정된 것은 변하지 않고 반복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어서 피해갈 수가 없다. 정보 종속성은 이런 상황에도 도움이 된다.


정보 종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저절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의도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화나는 상황에 처하면 화가 나게 되고, 즐거운 상황에 처하면 즐거운 기분이 된다. 어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날아갈 듯이 행복했는데 다음날 삶의 목표가 없어졌다는 공허감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오늘 신기했던 장난감은 내일 바로 싫증나고 오늘 첨단 유행을 달렸던 옷들은 다음 시즌 유행에 뒤쳐진 퇴물이 된다. 이 모든 변덕에는 “나 자신”이 없다. 내가 화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에 저절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한다. 내가 너무 유행을 좇고 있거나 탐욕스럽거나, 소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려고 자신의 탐욕을 꾸짖고 소심함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보 종속성은 그런 자책이 똥의 냄새가 향기롭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애시당초 잘못된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연관관계를 만들지 않게 되면 많은 감정들이 날아간다. 죄책감, 자책감, 한심함, 스스로에 대한 경멸, 자랑, 자만 등이 모두 그저 반응하는 것에 스스로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따라붙는 2차적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나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은 지금이나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몸의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이고 싶은데 그것을 제어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답해진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의 근육이 부들거리면서 떨리고 정신적으로 무척 부산스러워 진다. 이런 경향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면 상황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몸을 비비꼬면서 꿈틀거리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특이한 행동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에게 그런 행위는 자신의 혀를 빠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그냥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물론, 그러고 있을 때는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큰 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거나 누구나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인지하지만 그 외의 일들은 꿈결처럼 조용히 지나간다. 지속적으로 혀를 빠는 습관으로 인하여 혀의 근육이 너무 발달해서 혀로 내 코를 핥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 크고 강력한 혀가 앞니를 밀어버렸고, 앞니가 크게 앞으로 돌출되어 나와서 치과 교정을 해야 했다. 치과 선생님은 혀가 앞니를 밀지 못하게 혀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장치를 입안에 끼워넣었고 결국, 혀를 빠는 행위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혀를 빠는 행위를 대체한 행위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다. 왼손의 엄지손톱 끝을 살짝 다른 손톱으로 잘라서 뾰족한 부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뾰족한 부분으로 피부를 긁는 것이다. 이것은 자해와는 다르다. 자해와는 달리 상처가 나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를 손톱으로 긁으면 그 부위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행위가 혀를 빠는 행위보다 조금 나은 것이 적어도 손톱으로 피부를 긁으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혀를 빠는 행위는 몰입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나마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는 즉시, 이 행위에 1~2시간 씩 몰두하게 되므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앉기만 하면 몸을 비비꼬거나 손톱을 긁으면서 스스로를 잊고 망아의 상태로 몰입해버리니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분석해보면 1시간을 앉아 있을 때 30분은 몸을 비비꼬다가 30분은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무아지경에 있거나 망상에 빠져있는 것으로 실제 공부하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주관적 느낌으로는 책의 제목을 읽고 일단, 앞으로 펼쳐질 재미없는 공부시간을 떠올리면서 이런 재미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리고 펼쳐질 지옥같은 공부시간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다가 앉아있는 자신의 몸이 답답하다고 보내오는 신호에 짜증이 나고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못이겨 정신적으로 퇴행해서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가 될 수 없으니 시험성적을 잘 받고 싶었던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아이디어를 강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발악한 것에 가까웠다. 자세를 바꿔보고 다리를 꼬아보고 하면서 신체를 구속해보기도 하고, 수시로 기지개를 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퇴행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다보니 멍하니 앉아있지는 않게 되었고 반대로 몸의 답답한 감각은 계속 올라와서 조금만 힘들어져도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움직일 때는 정신이 맑아지는데 앉으면 다시 고통을 참다가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냥 앉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앉아서 공부가 되지 않으니 굳이 머리를 굴리는데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공부의 효율이 붙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실험을 하다보니 걸으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명확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체화된 방식은 아래와 같다.


우선책을 1페이지 가량 혹은 챕터 별로 잘게 쪼개서 집중해서 읽는다다 읽는데 2~3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책은 놓고 일어나서 걷는다걸으면서 그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걸으면서 관련 내용을 전부 떠올렸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돌아와서 확인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복습처럼 떠올리고 해당 내용을 확정한 후 책의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우선, 걷기 시작하니까 평소에 앉아서 공부할 때 느껴야 했던 신체의 답답한 느낌이 다 사라지고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신체에 걷는다는 목적과 방법을 부여해서인지 난잡하게 비비꼬이던 몸이 정렬되고 걷는다는 목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몸을 세워서 걷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주의력과 통제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도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주의력과 통제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집중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면 졸음이나 지겨움 같은 장애요소가 나타나지 않아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굉장히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걸음을 걷는 코스 동안 책을 보지 않고 해당 내용을 상기하려고 노력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책을 암기하지 않고 내용만 흝어본 다음에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을 암기한 것이 아니니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책을 달달 외울 수 있게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읽은 내용을 스스로 상상하고 구축하게 된다(물론, 이 때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계속 스스로를 북돋워야 한다.). 한 페이지의 짧은 구간의 이야기가 어떤 구조로 작성되어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당장, 책을 보면서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내가 떠올린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서로 비교하게 된다. , 잔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거하고 서로 안 맞으니까 이게 맞을 것 같아.” 따위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적은 정신에너지를 들여서 해당 내용을 완전히 떠올리게 된다. 원하는 코스를 다 걷기 전까지는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으므로 미심쩍은 부분과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추론을 하면서 코스를 걷게 된다. 그리고 책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읽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아쉽지만 요약이나 축약은 힘들다.).


이 방식이 훈련되기 시작하면서 중학생쯤 되었을 때는 머릿속으로 책의 전개를 쭉 이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돌리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이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는 정말 좋아서 하다보면 책의 내용들이 꿰어지면서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 때 스스로 내가 이것을 공부했고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엇다. 다른 친구들은 교과서를 끊임없이 베끼고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했는데 그렇게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혀를 빨거나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들은 모두 일종의 유아 퇴행현상이었다. 결국,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이런 퇴행은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큰 마이너스 요소였다. 결국,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적인 것은 이러한 퇴행현상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아쉽게도 많은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극복할 방법과 자원이 준비되어 있다면 시도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도 모르고 시도해서 실패할 경우 스스로의 자존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퇴행현상을 극복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내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게 퇴행현상이고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할 것이고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냥 내일 시험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 1차원적으로 아이답게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다. 만일, 그 때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추려서 극복하고 나서 공부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40이 넘는 시점까지도 이 습관인지 기질인지 모를 것들은 여전히 잘 남아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먼저 고치려고 했다면 인생이 헤어날길 없는 미궁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건드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나 다행인지!

 

퇴행현상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걸어다니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몸에 붙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기술을 얻었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은 평생을 줄기차게 써먹은 기술이다. 만일, 계속 앉아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면 평생 교과서를 연습장에 받아쓰면서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숙련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식의 공부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퇴행 덕분에 머리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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