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상관없는 결론


 본 서평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추억하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서평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2004년 쯤 읽었던 것 같다. 약 15년 전에 읽은 셈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조금 씁쓸한데, 당시 파국을 맞은 내 자신 때문에 행동이 통제가 되지 않으면서 ‘나’라는 주체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파국 이전에는 나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다독이며 산다고 생각했다면, 파국 이후에는 알 수 없는 깊은 곳, 즉, 무의식이나, 번뇌, 운명 같은 것이 내 의식을 조작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의식을 조작하는 것, 가령, 꿈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링크), 가령, “눈을 감고 있는데, 개의 모습을 본다.”라는 모순적인 정보들이 그대로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의식은 주어진 정보들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과를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처럼 모자라고 주어지면 우리는 아내를 머리에 쓰려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것들을 나는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보았으니 내가 어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뭐, 결론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앙리 베르그손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분은 아니지만 철학사에서 종종 매우 중요한 인물로 튀어나온다. 현대 철학의 기초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의 철학이라는 말도 들어봤지만 솔직히 그 내용을 잘 모른다. 그리고 책을 읽었을 때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인상만 강하게 받았다. 생각해보면 이분만 어렵지는 않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은 항상 너무 난해하고 어려웠던 것 같다. 


 난해한 내용과 번역투의 어투로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책임에도 오래된 기억 속에 이 책이 중요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한 가지 이야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근육에 힘을 준다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설명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어떤 근육에 힘을 강하게 주면, 그 근육이 더 강한 힘을 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위에서 힘을 준다.”라는 내용이다. 가령, 손으로 꽉 쥐는 힘, 악력을 생각해보자. 처음 힘을 줄 때는 손가락과 손아귀에 힘을 준다. 하지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려고 하면 손목이 밖으로 꺾이고, 그 다음은 팔꿈치와 어깨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리까지 힘이 빡 들어간다. 즉, 우리가 손을 더 강하게 쥐려고 하면, 점점 힘이 들어가는 부위가 많아진다. 어떤 근육 하나에 더 강하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근육 주변의 다른 근육들이 같이 수축하는 것이다. 이를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혼동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술가들이다. 벽 너머로 사람을 치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거리에서 강한 파워를 내는 타격법인 발경을 설명할 때 무술가들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타격을 넣을 때, 강하게 치고 싶은 마음에 힘을 주려고 하면 오히려 속도가 느려지고 타격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가령, 주먹을 뻗는 근육에 힘을 주려고 하면, 주먹을 당기는 근육도 같이 힘이 들어가서 실제로는 주먹을 뻗는 속도가 둔중해지고 체력 소모는 심해진다. 그래서 무술가들은 필요없는 힘인 졸력(拙力)을 빼는 훈련을 한다. 비슷하지 않은가?


 동양의 무술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양의 철학자로부터 들었더니 무척 신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양과 서양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즉, 동양 특유의 주관적이고 상호적인 세계관과 서양 특유의 객관주의적 개체적 세계관을 대립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동양의 발경법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기(氣), 음양오행론, 천인감응 같은 것들이 떠올라 막연하고 추상적인 자연스러운 움직임 같은 것을 상상했다. 즉, 천지에 감응하여 흐느적거리면서 춤을 추는 무희같은 것을 떠올린 셈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베르그손으로부터 이를 생리적으로 분석한 이야기를 듣게 되니 저절로 작동하던 선입견이 사라지면서 무술가들의 발경법이 근육의 생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매우 분석적이고 진지하며 효과적이었다.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 뒤로 흥미가 생겨 많은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서양의 연금술, 신비주의 등은 동양의 영향을 받은 티가 심하게 났다. 종교와 오컬트적인 세계관이 맹위를 펼쳤고, 과학자들은 탄압을 받았었다. 이게 근대 이전이다. 서양은 근대 이전에는 오늘날 말하는 동양과 거의 비슷했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연금술과 미신을 배격하던 그들의 계몽 운동이 성공하면서 음지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연금술과 미신으로 점철되었던 과거 서구의 모습을 동양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역으로 동양은 생각보다 더 오늘날 말하는 서구적이었다. 인도와 중국, 아랍의 문명은 찬란했고, 무슨 비논리적이고 신화적이고 주관적인 그런 것이 아닌 논증과 경험을 통하여 납득할만한 지혜들을 전하고 있었다. 물론, 주술과 오컬트, 연금술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비합리성을 파악하고 비난하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절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술을 읽어보면 그 면밀하고 구체적인 논증에 오늘날의 지식으로도 설득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고, 엉뚱하게 동양을 재발견했다. 이는 사소하지만 굉장히 큰 변화였다. 이러한 태도 변화가 있고 나서야 진정으로 동양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교의 큰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중국의 한의학이나 음양오행론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고대에도 경제와 사물의 법칙을 궁구한 천재들의 지혜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신세계였다. 새롭게 발견된 오래된 신세계를 탐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번역된 책들은 솔직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학은 거의 번역된 것이 없고, 천문학과 의학 등은 너무 중구난방이었다. 번역은 이해하기 힘들었고, 번역서에는 역자의 개인적인 관점이 심하게 반영된 경우도 많았다. 결국, 원서를 직접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그저 번역서만 조금씩 흝어보다가 말았다.


 그러나 Anki를 알게 되면서 공부가 시작되었다. 목적은 구장산술(九章算術) 같은 수학이나 기술서, 천문학 같은 책을 원문으로 직접 읽고 이를 블로그로 소개하는 것이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무려, 15년 전 해보고 싶었던 것을 시도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앞의 포스팅에서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종교적인 나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야기했다. 기존에는 객관적인 현상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분석하고 수학적으로 제시한 것만 과학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 구분했다. 과학은 과학대로 과학이 아닌 것은 과학이 아닌 것 그대로 읽고 공부하고 향유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과학적이지 않은 확률이나 통계, 실험식 같은 것들을 과학이랍시고 제시될 때면 무척이나 거부감이 생겨 공부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과학사와 과학철학 등의 도움으로 선입견을 깨고, 과학이 단순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진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몸부림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러한 거부감을 극복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1년 정도 후에 다시 전공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화학 공부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화학은 정말 공부하기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수학이나 물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정합성과 아름다움을 화학에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선 명칭부터 그렇다. 화학 교과서를 보면 화학에서 화합물에 체계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정작 교과서에서는 그 이름을 잘 쓰지 않는다.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이름들이 너무 많아서 그 이름이 혼용되어 헷갈리기 일쑤였다. 또, 법칙이나 이론 등이 제시되지만 너무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가령, 결합을 구성하는 Octet rule이니 결합법칙이니 각종 법칙을 제시하지만 실은 잘 맞는 몇몇 화합물이 있을 뿐이고 예외는 너무 많다. 그런데 왜 예외인지는 아리송하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다가 이론이 이해가 된다 싶으면, 그 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고 혼란에 빠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성적을 내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진리의 교시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하나하나 구축해나가는 인간의 몸부림이라고 본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수학 교과서를 보면 마치 진리의 계시처럼 정리와 증명이 나오고 예제들이 나온다. 이런 정리나 증명이 왜 필요한지는 이야기가 없다. 학생은 그냥 공부해야만 한다. 물리학은 그보다 조금 나아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을 제시하면서 그 원리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앞에 원리와 현실에서의 적용 정도를 제외하면 그 뒤는 그저 수학이다. 하지만 화학은 물리학이나 수학과 그 결이 상당히 다르다. 온갖 시행착오의 흔적이 화석처럼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계시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예외가 많은 이론들이 끊임없는 실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나은 이론이 등장하지만 과거의 이론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학은 이런 방식인 것일까?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복잡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이 다루고 있는 복잡성은 2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소의 식별이고 다른 하나는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이다.

   

물리학이나 수학과 달리, 화학은 원소를 식별해야 한다. 지금이야 원자론과 주기율표가 연구되고 양자역학으로 이러한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식별해낼 수 있지만 화학의 여명기에는 얼마나 많은 원소가 있는지 몰랐고, 그 원소의 구조는 더 몰랐기에 원소를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원소를 단일한 에테르로 환원시키는 사람, 지수화풍의 4가지 원소로 귀결시키는 사람. 신이나 정령으로 해석하는 사람 등 다양한 해석이 있었고, 이 해석들을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에 화학은 연금술과 같이 각종 신비가 버무려진 중구난방의 기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화학의 용어체계가 그렇게 난잡한 것은 원자론과 분자론이 나오기 이전부터 연금술, 의약 제조, 산업 같은 분야에서 기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야는 재료의 출처, 관련 현상, 사용되는 목적, 형이상학적인 의미 등으로 이름을 만들어냈다. 같은 원소들이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다른 원소들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산업 현장의 기술은 당시의 기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대에도 쓰이는 경우가 있어서 해당 명칭을 폐기하기도 어렵다. 원소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현상을 통해서만 해당 원소의 존재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수소 같은 원소는 금속에 강산을 섞었을 때 나오는 폭발하는 기체로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물을 만드는 원소와 어떻게 같은지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현상이 있을 때마다 그 현상을 일으키는 원소를 상상하여 유추하는 식으로 원소를 식별했기에 실험방법이 발전하고 원자론이 등장하여 증명될 때까지 원소의 식별은 굉장히 많은 혼란과 함께 했다. 덕분에 화학은 연금술이나 특정 화합물을 만드는 기술의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 다음 복잡성은 상호작용의 복잡성이다. 원소는 분자 상태로 존재하지 순수하게 원자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순수하게 탄소를 모아서 순수하게 수소원자와 결합시킬 수 없다. 따라서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탄소가 포함된 화합물과 수소가 포함된 화합물을 반응시켜야 한다. 가장 간단한 화합물을 합성할 때에도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고 다양한 부산물을 같이 봐야만 한다. 거기에 용매가 되는 물질까지 고려하면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약한 상호작용은 무시하고 주된 상호작용 위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지 않도록 실험을 하고 그 실험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화학작용을 분석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화학의 이론체계가 정비되고 오늘날의 마법같은 화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화학적 개체인 원소를 식별하고 그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려는 화학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나는 화학 그 자체보다는 화학 탐구의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형식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원소의 식별에서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의 2가지 항목으로 식별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화합물이 색깔, 밀도, 질량, 상(phase), 반응 등의 다양한 요소로 분류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서 원소의 분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분류된 원소들은 서로 별개의 요소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관계가 된다. 상호작용은 원소와 해당 시스템, 원소와 다른 원소의 상호작용으로 각각의 경우도 항상 2항 관계를 기본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2항 관계가 정밀하게 파악되면 그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원소와의 2항 관계를 해석하게 된다. 물론, 매우 복잡한 다수의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기본적으로 2개체 간의 상호 작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다른 원소들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2개체가 할 수 있는 상호작용은 서로 당기느냐 서로 밀쳐내느냐는 2가지로 나뉜다. 아마도 서로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서로 밀쳐내고 당기는 것 두 상호작용이 서로 팽팽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2항 관계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화학만 2항 관계로 해석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물리도 2항 관계였다. 서로 다른 물질 2개의 상호 작용이 물리다. 수학도 함수에는 등호(=)나 부등호(>, >=, <, <=)가 항상 1개다. 변수가 몇 개이든 항상 두 가지 값을 비교하는 2항 관계인 것이다. 화학에서 화합물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틀은 개별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든지 분자와 전체 공정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든지 역시 기본적으로 2항 관계로 분석한다. 사람이 어떤 집단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도 사람과 개별 사람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사람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 사람과 관계를 분석한다. 역시 2항 관계다. 

    

그렇다면 3가지 개체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동시에 분석하지 않는 것일까? 물리학에는 3체 문제라는 꽤나 오래된 난제가 있다. 서로 만유인력으로 상호작용하는 3개의 물체들이 매순간 상호간에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위치가 어떻게 되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예측하는 문제인데, 일반적인 해법을 구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2개의 물체일 경우에는 만유입력 법칙으로 간단하게 일반적인 해법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3개가 되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부분에서 수학이 2항의 형식이 아닌 3항의 형식이였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마치 4차원을 사람이 상상할 수 없듯이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만일, 인간이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학의 양상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껏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부분 2항 관계로 지식이 전개된다. 너무 광범위하게 2항 관계가 보인다. 인간사도 대부분 2항 관계로 일어난다.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어떤 집단과 친한지 적대적인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등 끊임없이 2항 관계가 전개된다. 이것은 이 우주가 2항 관계로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아마도 음양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2항 관계에 의한 해석은 끝없이 해석만 있고 오류투성이에 가끔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2항 관계로 환원시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산도 있고 구름도 있고 새도 있지만 하늘과 땅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다양한 성소수자와 무성, 양성이 있지만 여전히 남녀다. 마치 2항 관계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2항 관계를 넘어서 보려고 해보지만 3체 문제는 일반 해를 구할 수 없고,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방법은 상상되지 않는다. 3항은 안되는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반전해볼 수 있었다. 세상이 모두 노랗게 보인다면 세상이 노란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노란 물이 들거나 노란 렌즈를 착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상식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지성이 닿아있는 과학과 학문 그리고 인간사까지 전부 2항 관계가 개입된다면 어쩌면 세상이 2항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2항 구조로 인식하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신경(neuron) 관련 내용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인체의 신경 시스템도 좌뇌와 우뇌, 중심과 말엽 등의 2항 구조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과학자들이 인간 인식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신경시스템을 2항 구조로 나누어 판단하는 것이든 아니면 실제로 인간의 신경시스템이 명백한 2항 구조로 설계되었든 결국 2항 구조로 수렴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증명하지 않았고 아무도 옳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의 2항 구조를 혼자서 발견하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면서 내 관심사는 과학보다는 사람과 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진리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어떤 지식의 틀의 반영이라고 자각하면서 과학을 인간의 흔적인 인문(人文)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인간의 오류와 대비되는 과학적 지식을 숭상해왔지만 과학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니 인간에 대해 통찰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통찰을 도달할 수 있는 길로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관심사는 과학에서 문학, 역사, 철학 등 온갖 인문학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20대 중반의 1년 정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로부터 지금까지 대략 20년간 내 삶의 방향은 이 책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선배의 펌프질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자마자 총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괴델 에셔 바흐는 당시 읽었던 다른 어떤 종류의 책으로부터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구성으로 방대한 분야를 통합한 책이다. 바흐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패러독스를 거쳐 에셔의 그림과, 현대 수학이 마주친 혁명적인 변화 그리고 불교의 선문답을 어우러지게 하면서 알고리즘과 생물학까지 통섭하고 있는 미친 책이다. 언급한 모든 분야에서 수박 겉핥기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핵심을 전문적으로 간결하게 짚어나가고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난이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각의 내용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선배와 같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정말 독서를 많이 했고 박학한 교양과 깊은 지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문과였기 때문에 수학, 논리학, 컴퓨터 부분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바흐의 음악 이론은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에셔의 그림들과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고 몇 번 접해본 그리스의 패러독스, 불교의 선문답 위주로 책을 읽고 해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모임은 간단하게 한 번 읽는 수준으로 흐지부지 끝났지만 개인적으로 그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나름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서사와 지식 위주의 독서를 했다면 이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 경험은 간결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와 조각조각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조화로운 가운데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강렬한 열망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괴델 에셔 바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그렇다 변주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음악, 논리학, 생물학, 수학, 패러독스, 인공지능, 그림, 불교의 선문답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심도 있게 펼쳐지지만 그 핵심에 어떤 비슷한 무엇인가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징적으로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은 인간의 지성이 극대화 되는 부분이고 동시에 인간 지성의 한계가 노출되는 무한히 순환하는 어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잘 모르니 계속 이렇게 감상적으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사와 현대 수학 그리고 논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패러독스와 선불교의 선문답을 읽어보고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도 읽어보게 되었다. 덕분에 어떤 환상적인 비전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한세계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이었다.

       

칸토어의 무한 증명, 또, 튜링머신으로 그것을 증명한 튜링, 그들이 증명한 것은 오직 극도의 추상적인 사유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 상상과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하게 초월한 영역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려보기도 힘든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 말하고 있는 양자의 행동도 계산하고 증명은 가능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저 계산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기괴한 세계다. 마지막으로, 괴델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참인 명제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 무슨 말인가? 증명되지 않은 참인 명제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지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시절에 제시된 패러독스를 통해서 다시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선불교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분야에서는 혁명적인 발전과 동시에 어떤 지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지성 자체가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을 알게되는 지성, 진리의 극한에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해버린 지성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 상태,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는 상태를 다시 어떤 절대적인 일관된 이성으로 뛰어넘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으로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가능성과 다양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거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책을 통해서 결국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이 통찰하였고 덕분에 그 지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무한하고 항상 옳다는 식의 계몽주의적인 맹목적인 믿음을 거둘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 제한이 있고 부족한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때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본인도 인지심리학자로서 인간 정신의 구조나 지성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의 곳곳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통찰을 조금씩 읽어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접근을 20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지속하게 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를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추상적인 느낌만 있는 수준이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꼭 알아야 할 어떤 진리가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얻었고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관련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덕분에 꽤 오랜 기간 방황하기는 했지만 좋든 나쁘든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되었다. 

     

덧붙이면 괴델 에셔 바흐』에서 선불교를 인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저자가 지성의 한계를  지성의 미혹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불교의 지혜를 선문답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해석이 되었고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나는 이공계인데 수학 성적이 가장 나쁘다. 솔직히 수학으로만은 전교1등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공부했지만 실제 성적은 평균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 대한 완벽하게 잘못된 접근이고 동시에 나 개인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수학에 대한 접근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당시에는 본고사라고 해서 각 대학별로 수능 외의 시험을 각 대학별로 주관식 서술형으로 보던 때라서 문제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게다가 해당 문제를 풀어낸 과정에 대하여 일일이 서술하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어야만 답안을 정확하게 작성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풀면서 논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도 고민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가 없어지고 수능과 본고사로 시험방식이 대체됨에 따라서 국어와 영어,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되었다.

 

수능이 나온 배경의 한 축에는 주입식 위주의 교육에서 단순히 암기하여 맞추는 학력고사가 아니라 창의적 교육을 하고 암기보다는 합리적인 추론과 창의적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식의 시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수능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러한 수능의 장점에 대해서 엄청나게 홍보하면서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의 시험을 엄청나게 비판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러한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훨씬 유리했고 암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언론의 홍보에 따라서 주입식 교육을 증오하고 암기를 격렬하게 배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는 수준에서 멈췄으면 이익만 보고 끝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누구도 가지 않는 한발을 더 나아가버리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국사나 세계사의 역사 과목이나 생물, 지리 같은 과목들은 필연적으로 암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암기하는 것이 공부의 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야기를 만들고 생생하게 함으로써 이런 단순 암기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만 공부는 결국 암기의 형태로 마무리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학은 나에게 결코 암기의 대상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요인 때문인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시계문제를 풀면서 직접 시계를 관찰하고 증명하고 풀어낸 것으로 인하여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심상도 같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 나에게 수학은 지혜의 학문이었다. 사물을 관찰하거나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서 이를 기반으로 증명하는 것이 내가 수학에 가진 심상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과 사물에 대한 관찰이지 암기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에게 수학은 단순하고 기계적 반복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나의 이런 심상은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일인데, 이미 다년간의 신비주의 연구 경험을 통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몸에 붙으면서 수학에서 암기라는 행위를 축출하는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해당 문제를 풀었던 경험을 다 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푸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푼다는 식의 유형을 외우지 말고 해당 문제를 최대한 다각도로 살펴보고 진지하게 고찰한 후 해당 개념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구축해 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지혜의 단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활용하기 시작한 심상을 이용해서 개념의 정의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차근차근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실제로 정신과 뇌를 훈련하고 개발한다고 생각했다. 더 어려운 문제를 풀면 풀수록 집중력과 뇌가 개발된다는 식의 심상을 구축했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정말 탐욕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심상에는 해당 문제를 전혀 외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같이 프로그램 되었다.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겠지만, 이 실험은 정말 처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열정적으로 수학만 공부했고, 하나의 문제를 3일 밤낮을 붙잡고 고민해서 풀기도 했지만 대학입시에서 가장 성적이 안 좋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능과 본고사 모두 최악의 결과를 받았다. 슬프지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국어였다. 아마도 거기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신비주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스스로 골몰하던 문제에 대한 가장 밀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책은 G. 폴리아의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학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문제 유형을 외우고 이를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기와 문제유형에 대한 학습을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론인 셈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현재까지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이 개발되지 않았고 나중에 개발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을 내가 해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전환해서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이 무협지에서 수련하듯이 정신과 뇌를 단련하는 개념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통해서 해당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고 근원적인 개념부터 구축해서 정신을 과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는 것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에 천착한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해서 시험을 잘 보겠다.”하는 오기도 같이 작동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많이 어리석은 행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망각이 되었다. 나중에는 똑같은 수학문제를 3분 안에 다시 봐도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냥 문제 풀이를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학문제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해당 문제를 기본적인 개념으로 축소하는 것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기본 개념만 강화된 것이고 문제 유형을 외울 생각이 없으니 그 문제 유형이라는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런 지식은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그런 문제의 유형이나 해법을 외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다 보니 그 쪽으로의 무의식적인 거부도 작동해서 사고의 틀도 왜곡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망각의 영향 때문에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간단하게 풀다가도 5분 후에 보면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푼다. 그런데 이번에는 3일 밤낮을 집중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러니 매일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서 수학문제가 쉽게 풀리기도하고 어렵게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간단한 문제도 못풀기 일쑤였다. 그리고 망각하는 것이 무의식적 억압으로 작동한 것인지 어떤 문제를 쉽게 풀게 되면 그 문제를 다시 풀 때 그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문제 풀이를 많이 할수록 수학성적이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 문제풀이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생각이 억압으로 작동하면서 자승자박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두 번째 모험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슬프지만 객관적으로는 부작용말고는 없다.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공부법이라니 이런 희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되지는 않는다.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시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얻고 스스로 발전했겠는가를 따지는 기회비용을 들이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난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호기심과 열정을 꺾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기심과 열정을 꺾었으면 당연히 게임과 친구, 만화책 등에 몰두했지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가 아깝다는 식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 연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성공은 모두 나만의 유일한 경험이 되어주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되어주어서 내가 스스로의 비루한 삶이라도 온전히 그 삶의 주인이 되게 해주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집안이 그러하듯이 나의 집도 공부에 대한 압박이 무척 강했다. 어머니는 매일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했고, 실제로 손을 붙잡고 공부를 시켰다. 학교에 가는 것이 휴식이라고 느낄 정도로 어머니는 공부를 시켰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책을 암기해오라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보고서도 전혀 좌절하지 않고 그냥 산수와 국어만 줄기차게 공부 시켰다. 공문수학, 재능수학 같은 것을 풀다가 어느 날인가에는 스케치북만한 크기의 문제은행이라고 하는 것을 복사해 와서는 매일 그것을 풀게 했다. 이 문제은행은 정말 더럽고 치사한 방식의 문제들만 모아서 학생들을 고문하기 위한 문제집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이 문제집을 풀다가 6학년에 그만뒀는데 그것을 풀던 형과 나는 문제은행을 더 이상 풀지 않게 되었던 그 날을 해방의 날로 생각할 정도였다.

 

나는 반에서 딱 가운데 정도의 성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도 그 정도로 문제를 풀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집이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슬픈 것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산수 공부에 투자했지만 산수 성적도 반에서 딱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머리가 나빠서일까? 산수에 재능이 없어서일까? 공부의 효율이 나빴기 때문일까? 아마도 세 가지 전부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젊어서 공부를 정말 잘했다고 한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친척들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냥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정교사를 부르거나 과외를 하지 않고 어머니가 직접 우리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설명을 못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중학생이 되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설명을 정말 못했다. 기본적으로 어머니는 설명하기 보다는 제시하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게 당연하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거기에는 꼬맹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징검다리는 전혀 없었다. 교과서와 거의 동어반복을 하고 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설명을 듣고 우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면 답답해하고 조금 더 윽박지르는 식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의 설명을 듣는 것이 고역이 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상황은 이런 것이다. 초등학교 도덕 시험에서 대충 이런 문제가 나왔다.

 

문제: 길거리에 떨어진 돈을 주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을 가진다.

주위를 둘러보고 돈의 주인을 찾아주고, 돈의 주인이 없으면 가진다.

경찰 아저씨에게 준다.

 

답은 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번을 골랐다. 당연히 틀렸고, 어머니한테 혼났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주워서 무조건 경찰 아저씨에게 주는 사람이 있어요? 돈에 주인이 누구인지 적혀있는 것도 아닌데? 옆집 형은 저번에 돈을 주워서 가져왔는데, 그럼 그 형은 잘못된 건가요?”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하지만 시험에서는 번을 골라야 하는 거야?”

 

당연히 납득이 가지 않으니 왜요?”라고 하면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머니의 결론은 항상 그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설명이 아니었다. 그저 답에 대한 인증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산수로 넘어가면 더 심해졌다. 그나마 초등학교 산수는 수를 세는 것에 가까워서 참을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단순한 작업을 하면 어떻게든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점점 문제가 복잡해지는 중학교에서는 어머니의 설명을 듣는 것이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그러다가 계기가 왔다. 중학교 수학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 중에서 시계문제가 있다. 시계의 분침이 30분 지나가면 시침은 어디에 멈추는가 하는 식의 문제였다.



 


분침과 시침이 동일한 시간에 이동하는 각도의 차이를 파악하고 그것을 맞추는 문제인데, 이미 누나와 형이 이 문제를 어머니와 같이 연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포기하고 이 문제가 나오면 풀지 않고 바로 넘어갔었다. 그리고 다시 내 차례가 와서 공부할 때 다시 이 문제가 나오게 되었고 어머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때 이 문제를 설명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이 문제를 풀 줄 모르는구나. 그런데 모른다고 절대 이야기하기 싫어하시는구나.”


그렇다. 나는 그 때 어머니가 이 문제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왜 모른다고말하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이 문제를 꼭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풀어내면 어머니한테 내가 어머니보다 수학을 잘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머니의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1~2시간씩 들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스스로 그렇게 수학문제를 풀어보겠다고 불타오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설명이 끝나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매일 3~40개의 수학문제를 2~3시간씩 풀어도 전혀 흥미가 가지 않던 수학이라는 학문에 처음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밖에 나와서 실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계의 움직이는 원리를 파악해보려고 끙끙대었고, 시침과 분침의 운동이 서로 일정한 비율로 비례하는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 분침이 한 바퀴(360)를 돌면 시침이 1시간(30)을 움직인다는 가설을 세웠다. 당시, 이 가설이 무척 자신이 없었는데, 우리 집 시계는 분침이 한 바퀴를 돌기 전에 시침이 다음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시간을 꼬박 기다리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시침과 분침의 운동이 내 생각과 똑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이 문제를 풀 완벽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것을 정리해서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이 경험은 당초 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과 경쟁심, 공부에 대한 지겨움과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심 같은 것들이 엉겨서 반항심 비슷하게 이 문제에 도전하게 되었다. 원했던 것은 어머니의 설명을 그만 듣고 어머니한테 으스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어머니부터의 진정한 인정이었다. 그것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그냥 마지못해 잘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주는 눈빛과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내가 수학을 잘 한다고 확신하셨고 그 영향으로 내 스스로도 내가 수학을 잘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경험은 정말 중요했다. 아마 이 날 얻은 어머니로부터의 인정이 없었다면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인정으로 가슴이 충만해지지 않았다면 그 뒤로도 여전히 마지못해 공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날 이후 수학을 잘 하고 싶은 마음과 수학이 재미있다는 마음이 생겼다. 다른 과목은 시험공부에서 그저 점수만 잘 받으면 되지만 수학만은 정말 잘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그러한 인정을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 뿌듯해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수학에 대한 뜻깊은 경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슬프게도 나는 수학을 잘 못한다. 계산은 틀리기 일쑤고, 가정을 세우거나 문제풀이 모형을 만드는 것도 사실 매우 서툴다. 그래서 수능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과목도 수학이었다. 사실, 수학에 재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수학을 너무 과도하게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스로 수학을 잘 한다고 믿기 위해서 노력했다. 수학에 대한 애정으로 인하여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학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버렸다. 그 시간에 다른 수험공부를 했으면 더 좋은 성적을 받았을 것이지만 나는 그 시간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한 착각이 없었다면 아예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수학을 못했지만 수학을 통해서 얻은 자존감이 나를 지탱해주는 큰 근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교훈>

-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설명도 잘하는 것이 아니다. 

-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꼭 잘하는 것은 아니다. 

- 특히, 좋아하는 과목을 꼭 잘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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