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 체험과 영어에 대한 호기심은 당분간 사그라들었다. 막연하게 괴물같은 언어 기능을 상정하는 식의 얼버무리기식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론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론으로는 옳고 그름을 검증하기도 어렵고 무언가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어렵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고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서 딱따구리 같은 것을 보았다. 딱따구리를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또, 그것이 아무리 산 아래에 있는 집이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가는 길을 멈추고 그 딱따구리가 날아올라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것을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딱따구리의 출현은 갑작스러웠고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새로운 것과 조우하는 신선한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딱따구리 관찰은 정말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 딱따구리가 신기해서 보는 행위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물며 디지털이 아닌 맨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경험도 너무 오래간만이었다. 덕분에 어렸을 적 아날로그 시절 추억으로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던 각종 자연관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산이나 들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널려 있었다. 잠자리, 메뚜기, 물고기, 하늘소, 개구리, 뱀 등 신기한 곤충이나 생물을 잡으러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이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히 보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물론,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죽치고 앉아서 관찰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이면 자연스레 질릴 때까지 눈앞의 곤충이나 생물의 동작 하나하나에 흠뻑 몰두했었다. 어떠한 언어도 발화되지 않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순간이 충실하고 충만했다.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인기 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처럼 짜릿하고 흥분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좋아 죽는 그런 것들도 시골의 산과 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신기한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매력이 반감되었다. 꽃잎 위에서 사냥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면 그 사마귀가 숨죽이고 있는 모양에 따라 같이 숨죽이고 앉아서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손가락만한 말벌이 주는 위압감에 도망가 보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수많은 생명들 속에서 매우 충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충만한 경험에서 언어는 없었다. 언어 없이 매우 충만했고 모든 것과 교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에서 언어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언어는 경험에 몰두하는데 방해였기에 말을 줄이고 그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기 위해서 더 집중했었다. 이제 자연관찰에서 언어 기능의 개입은 없다고 전제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언어 기능이 개입하지 않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떠오른다. 만일 앞서 내린 결론에서처럼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당연히 뛰어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뛰어난 운동선수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언어적인 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언어적인 것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그것을 말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작품 위에 얹어질 뿐이지 그 알맹이가 될 수 없다. 또, 좌뇌와 우뇌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언어적 기능은 좌뇌의 일부에서만 작동할 따름이다. 이제 생각이 다시 반전되었다.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제 앞서 내렸던 얼버무리기식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가 대두된다. 어째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자연관찰과 달리 고통스러울까? 아마도 문제 설정을 다시 해야할 것 같다.

페퍼의 눈동자에 드러난 선명한 동공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즐거운 경험은 겨우 한 번에 불과했다. 그 한번을 제외하면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도전은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지옥의 경험의 계속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이 계속 반복 되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실제로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연이어 지속하지는 못하고 한 편을 보고 쉬면서 정신적인 에너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편씩 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롭고 정신적으로 답답해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으니 바로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고통의 원인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와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이다. 가련, 일종의 자연관찰을 하는 상황이다. 개미의 행동에 흥미를 느껴서 지그시 그것을 관찰할 때,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못해서 괴롭지는 않다. 자막 없이 보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개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전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적인 어떤 기능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드라마는 괴롭고, 자연관찰은 괴롭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서 처음 떠올린 해답은 자연관찰은 개미와 의사소통을 기대하거나 개미가 말을 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므로 언어를 쓰겠다는 기대가 없고 따라서 언어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영어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 정도 아는 단어가 들려오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언어 기능이 작동하게 되고 또 그것이 좌절되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오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독하게 괴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를 접으면 언어기능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인간을 동물 관찰하듯 관찰했던 동물학자나 전혀 미지의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스스로 속한 고유문화에 의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관찰하듯이 관찰하면 언어 기능을 잠시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관찰을 하듯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상황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언어도 이미 알고 있는 문법이나 실제 철자 같은 것을 배제하고 그냥 들리는 구어(口語)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면 언어 기능을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세상을 자연관찰 하듯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드라마를 시청했다. 몇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그 언어 기능은 꺼지지 않았고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항상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처음 한두 번 15분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집중해서 관찰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엔 정신력이 방전되어 퍼져버리고 다시 고통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관찰을 하려고 한다고 스스로 되새기면서 몇 번의 도전을 했지만 고통은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  어째서 드라마도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자연 현상처럼 관찰할 수 없는 것일까? 언어 기능을 잠시 꺼두어 이 고통과 답답함을 물리치겠다는 계획이 계속 좌절되면서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의지로 작동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 작동하면서 내 삶을 지배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언어 기능을 끄려는 노력이 축적될 때마다 그 실패로 인한 절망감도 축적되었고 어느 순간 부터는 이 언어 기능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점점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지면서 오히려 생각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의 관찰에는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반전되어서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언어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언어 기능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항상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감각에 의한 지각과 이러한 지각이 맥락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전부 언어적인 기능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연 관찰을 할 때 언어적 개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레벨의 밑바닥에서 언어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완전히 언어 기능에 따라 작동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결론은 약간 친숙한 결론이었다. 정신분석이나 언어철학 등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 언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논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왔다. 또,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와 개념이 허상에 불과하고 중생들은 그 허상에 매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나 꿈과 구별되지 않는 현실을 의미하는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것도 맥락상 연결되는 바가 있다. 친숙한 결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으로 스스로를 유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했기에 여기에서 만족해야 하는데,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우스운 점은 이 언어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임의로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말이라는 점이다. 막연하게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붙인 말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에 다양한 것들이 붙어서 개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지배하는 무서운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언어 기능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혀 그것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능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국, 스스로 대충 만든 단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개념이 되어 이제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이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는 꼴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지배하고 운용하면서 고통을 주기도 하는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언어 기능이란 것을 상정해버리게 되면 인간이란 그저 언어 그 자체의 단말(terminal)이 되어 버린다. 삶의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것이 그냥 일종의 언어에 의한 환상처럼 되어 버리고, 결국,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조직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나 환상 소설 등에서 수십번 우려먹은 듯한 흔해빠진 결론이고, 인간의 하찮음과 부족함을 강조하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낄 뿐 그 외에 소득은 없는, 무언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심히 생각을 전개한 보람도 없이 그냥 알 수 없음이라고 얼버무리는 그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결론은 상당기간 내 스스로가 좋아하는 형태의 결론이었다. 우주의 광활함 앞에서 먼지처럼 작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세상의 위대함에 흠뻑 젖으면서 자뻑에 빠지는 자기만족적인 결론이었다. 이번에 그런 식의 결론이 좋지 않다는 자각을 처음 얻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하다 보니 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돌파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이 요상한 호기심 덕분에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상당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지친 나머지 대사가 많지 않은 액션 영화인 아이언맨 1편을 골라봤다. 이미 몇 번을 봤던 영화이기 때문에 그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어서 막막한 느낌은 덜 할 것이고, 자막 없이 보는 것과 자막을 보면서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고 싶기도 했다. 영화가 재생되었고 아이언맨 토니의 비서 페퍼가 회사에 있는 악당의 노트북에 접속하여 거래내역을 몰래 다운을 받는 와중에 악당인 오베디아가 나타나자 페퍼가 긴장하면서 데이터를 저장한 USB를 빼돌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아래는 그 장면 중에 캡쳐한 화면이다.




위의 장면을 보면 페퍼역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의 동공이 깨끗하게 보인다. 무슨 대단한 장면은 아니다. 솔직히,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대치하는 이런 장면은 미국 영화에 너무나 많이 나와서 식상한 장면이고, 또, 영화의 스토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장면도 아니다. 그냥 페퍼가 좀 위험해 보였다가 위기에서 무난히 탈출하는 장면일 뿐이다. 그래서 자막을 보면서 영화를 볼 때는 그냥 조금 긴장했다가 별 일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장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 장면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백하게 동공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일본의 만화책에서 사람이 흥분할 때 동공이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박을 하는 갬블러들이 상대의 동공을 관찰하여 상대의 패를 읽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종 영화나 만화, 소설책 등에서 눈이 읽히지 않도록 선글라스를 하고 다니는 것을 묘사한 장면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동공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내용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냥 허구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으로 거의 관찰하기 불가능한 것을 관찰할 정도로 관찰력이 좋은 특이한 사람이 있거나, 혹은 마술사들처럼 숙련된 도박사들은 그것을 관찰할 정도로 잘 훈련이 되어있는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즉, 일상적으로 동공을 관찰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일반인에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들려오는 ‘눈은 마음의 창’이고 하는 이야기도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사람들의 눈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그저 눈에 초점이 있거나 없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만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장면으로 돌아와 보면 페퍼의 눈동자 속의 동공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동양인의 검은 눈동자와 달리 푸른 눈은 조명 아래에서 그 동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눈을 본 순간 갑자기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단박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공이 이렇게나 잘 보일 정도면 아무리 얼굴에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어도 그 동공은 모든 심리적 사건에 따라 확장하고 수축하므로 그 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속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가령, 스캔들이 난 배우에게 스캔들 상대방으로 예상되는 이름을 제시하면 그 배우가 아무리 묵비권을 행사해도 이름을 들었을 때 그 동공이 확장되는 사람이 스캔들 상대방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눈이 드러난다는 것은 동공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민낯에 이어 마음까지 속속들이 전부 까발려지게 되는 셈이다. 눈이 이토록 중요한 비밀을 마음껏 누설하기 때문에 눈이 가지는 의미는 동양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동공이 잘 보이는 이들에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눈을 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게 된다. 이들은 당연히 친애의 감정도 눈으로 나누게 된다. 상대의 눈을 서로 응시하면서 말하는 것이 당연한 습관인 것이다. 그것은 비즈니스를 하는 관계라면 서로 속이는 것이 없다는 신뢰의 보증이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서 서로의 눈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서로의 영혼이 손에 닿을 듯이 잡히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또, 눈에 너무나 많은 비밀이 드러나므로 공적인 자리에 노출될 때는 선글라스를 끼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아주는 최후의 방벽이 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타인의 얼굴을 볼 때, 보는 것은 표정이다. 그래서 얼굴을 전체적으로 관찰하고 눈이나 코 등 특정 부위를 별도로 응시하는 경우는 잘 없다. 눈이 마주치긴 하지만 바로 피한다. 눈을 똑바로 마주 대할 때, 차분히 응시하는 것은 약간 무례하게 느껴지고 남자들 사이라면 싸움까지 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눈은 눈매와 눈빛의 강약으로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지 산만한지 정도는 보여주지만 어느 정도 꾸밀 수 있는 부분이고 보통은 딱히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동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열심히 관찰해서 보더라도 그 동공이 이전에 비해서 확장되었는지 축소되었는지를 알려면 정말 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뚫어지게 눈을 바라보면 무례하게 느끼고 굉장히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동공이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면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눈부터 보는 것이 너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눈을 드러냄으로써 상대에게 자신이 진실됨을 보여주는 것이 선행하는 예의이기 때문이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진심으로 마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눈을 보인다는 것은 숨기는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로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눈이고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무례하지 않다. 반대로 눈을 가리는 것이 무례하다.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샤이(shy) 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눈을 가리지는 않는데 눈을 피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처리도 눈에서 외부로 확장되므로 화장은 눈을 강조하는 눈 화장이 발달하고 화장의 가장 핵심적인 부위도 눈이다. 옷의 색깔도 눈의 색깔에 맞춰서 코디한다. 반면, 동양인들은 전체적인 윤곽 위주로 꾸미고 눈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서양인들의 화장을 볼 때마다 그 과한 눈 화장이 이상했는데 이제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왜 서양인들은 그렇게 선글라스를 선호하면서도 안경은 싫어하는지도 납득하게 되었다. 서구권에서 미남미녀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묘사하면서 눈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것도 배우자의 장점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이다.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이 보여주는 맥락은 사회생활로도 확산된다. 타인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눈을 보면서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신뢰는 훨씬 직접적이다. 동양인은 상대방을 판단함에 있어서 신분, 사는 환경, 현재 모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추정해야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눈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눈을 통해서 확보하는 신뢰는 단순히 추상적인 신뢰가 아니고 그의 진실성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정도의 매우 구체적인 신뢰가 된다. 또한, 구체적인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이고 그 집단이나 소속된 환경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집단이나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서 신뢰감을 확인하고 신뢰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인이라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그에 따른 다양한 보증이 필요하고 그것을 판단함에 있어 그 사람의 신분과 소속 환경 등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사람을 사귀는 것도 바로 그 사람을 사귀는 것 보다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중산층의 한국어 사용자를 사귀는 것과 같다. 즉,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환경에 소속되는 것에 가깝다. 


또, 타인에 대한 판단이 매순간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담백하게 이루어지므로 인간관계가 상당히 깔끔해진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설득은 금방 끝나고 곧바로 상대에게 자신이 의견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그냥 설득을 포기해야 한다. 눈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의사소통을 모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실은 그들은 이미 동양인이라면 모든 예의를 내려놓고 술 먹으면서 쌍욕하고 이리저리 흔들고 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서 상대방이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납득하는 과정을 그냥 눈빛 한번 마주침으로 끝낸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정이 없고 메마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눈 푸른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눈동자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과정을 쓸데없이 괴롭게 술을 먹고 망가지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친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상호적인 과정이다. 이들은 눈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에 따른 강력한 공감으로 서로 묶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불쾌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 무례하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흙발로 침투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정말 이상한 사람들과 공감하면 자신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고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눈을 쉽게 노출하지 않고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서 상대의 진실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게 된다. 또, 타인과 교감함에 있어 서로 교감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매우 명백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반면, 동양인들은 그런 관계에 무덤덤하고 자신이 노출된다는 불안감이 없기 때문에 얇지만 넓게 관계를 이룬다. 또, 당연히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도록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눈일 경우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깊이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동공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이라면 교감이 진행되지 않게 될 것이고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이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의사소통의 가장 확실한 기반이 되는 눈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과 맺는 친교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공감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용감한 사람들은 친교를 맺겠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예의와 의사소통 방식을 새로 익힐만큼 부지런하고 영민해야 하고 친교를 맺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제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에 와서는 검은 눈을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들의 사회에서 과거 검은 눈이 상당히 많은 배척을 받거나 오해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위의 장면에서 페퍼의 동공을 본 순간 떠오른 것들을 나열한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므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 일부는 과장되었고 일부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설명되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의 삶과 행동의 저변에 그러한 경향성이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동자를 강조하는 장면은 드문 것이 아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눈동자만 보여주는 영화도 상당했던 것 같다. 아마 위의 장면도 일부러 눈을 강조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눈에 대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있기에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수시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처음으로 그게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막을 쓰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미국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전제에 마주쳐 그것을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완전언어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니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또는 일상 활동을 그림이나 기호들로 표현하는 보드 등을 이용해 힘들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즉, 힘들게 대화가 가능한 셈이다. 또, 언어 능력만 없어지거나 극소량 남고 나머지 인지 기능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므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욕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언어활동이라는 것과 연계되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다. 


가령,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는 이 ‘커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언어로서는 모른다. 이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경험을 과연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이 서술한 그런 기억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세계를 글로써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해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어증 관련 증상을 확인해보니 물건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명칭실어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어증 환자에게 명칭실어증이 동반된다. ‘커피’라는 단어를 언어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완전언어상실증과 같지는 않겠지만 약간이나마 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은 체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칭을 몰라서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1996년에 이메일에 사용되는 @ 표시를 처음 봤다. 당시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삐삐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오직, 일부 PC통신 유저들만 이메일을 사용해봤던 시기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관련 도서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 @ 표시를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기호 하나 모르는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점점 @ 표시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이나 각종 유인물에 @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다가 문장의 중간에 @ 표시가 나타나면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고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고약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기호가 기억되지도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책만 덮으면 언제 그런 기호를 봤냐는 듯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양도 기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 바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 기호에 ‘골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이 기호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책을 읽을 때 장애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름 즉, 명칭을 알 수 없는 기호를 접하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텍스트 흐름이 끊긴다.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만나면 머릿속에 블랙홀이 열리면서 그 동안의 읽었던 모든 맥락과 지식이 빨려들어가고 오직 순수한 뇌만 남는 것 같았다(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상태를 마냥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훈련되면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호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 기호의 명칭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뿐 뒤돌아서면 그런 기호가 있었는지도 거의 바로 까먹는다. 이름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첫 번째 지식은 바로 이름을 아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생각의 흐름에 끼어들 때 우리는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앞의 사물을 정신에 정위치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한 순간 자신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라캉이 언급한 바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누빔점이 없어 끊임없이 맥락을 바꿔가면서 논리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 모르게 순식간에 몽골초원으로 이동시킨다면 그는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주위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삶의 맥락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남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맥락을 어찌어찌 복구하거나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명칭실어증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기억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어증에 걸렸을 때 갑자기 찾아올 혼란과 당혹감 같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느끼던 와중 별안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자꾸 뜬금없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해서 시작한 고찰이었는데, 솔직히 여기에 어떤 마법같은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의식이 신비로운 정답을 알려준다는 식의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고 명칭실어증으로 인한 답답함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왜 내가 그 사례를 계속 다시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본 경험을 내 무의식이 완전언어상실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가졌던 그 막막함과 고역감은 결국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답답함처럼 갑자기 언어적 맥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란 것이 명칭실어증을 유추하면서 가졌던 그런 류의 답답함과 당혹감을 한껏 늘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내가 완전언어상실증 비슷한 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손상이 진행된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정도 비슷한 경험일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전개하다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경험을 완전언어상실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개인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 고찰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포스팅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꽤 오묘하고 그 질문에 무언가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나름 내보려고 노력했다. 제시된 의문점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고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조각 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사람은 우선 아는 것을 총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문제점을 뭉뚱그려서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은 해답을 자동으로 찾게 되었다. 굉장히 익숙한 대답이 한 가지 떠올랐다.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가 작동되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순간 익숙했던 드라마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원점에서 다시 이것을 보게 된 것이라는 대답이다. 아무래도 낯설게 하기가 익숙한 장면에서의 관객의 공감을 막고 이를 비틀어 원점에서 다시 그 장면을 보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유도하는 것에 가까우니 내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느낌을 느낀 것도 이와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경험상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들어간 연극들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로서의 기승전결을 체감하기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레토릭과 설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최면처럼 공감하는 것을 막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공감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러한 장면을 뒤틀어 그 장면을 낯설게 하게 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시청하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익숙해진 것은 당연하고 자막을 제거하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것도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개개인의 연기나 개별 장면에는 더 몰입하였고 더 공감하였다. 즉, 공감이 억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가 들어간 연극은 어떤 공감과 감동의 기승전결은 없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매우 충실하게 살아 있다. 즉, 현재 보고 있는 극 속의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지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미국 드라마 시청 경험은 그러한 맥락을 찾기 어려웠다. 만일, 전체적인 스토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시청하는 도중에 갑자기 길을 잃고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먹먹해지는 상항에 처했을 것이다. 


의문점에 대한 해답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떠오른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답이 턱 막혔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환자들이 병동에서 웃고 있는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왜 그러나 파고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 상실증 사례에 등장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거짓과 위선을 파악하는 것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들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즉, 인간 거짓말 탐지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람들의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 등을 관찰해서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이런 모습은 라이 투 미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마술사들이 쇼에서 관객이 숨긴 보물을 찾기 위하여 숨긴 사람들의 미세한 신체반응을 유도하고 그를 통하여 물건을 찾는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례를 읽으면서 실어증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익힌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갔다. 올리버 색스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식으로 적었기에 그 사소한 단서가 내 머릿속으로는 앞서 언급한 인간 거짓말 탐지기나 마술사들이 활용하는 단서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단서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미묘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실어증 환자들은 거짓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언어적으로 대화와 의사소통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들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면서 거짓말 여부를 탐색한다. 즉, 의사소통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해서 거짓말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 마술사들은 그 사람과 신체를 맞대고 통제되지 않는 미세한 신체의 긴장을 통해서 이 관객이 보물을 숨긴 곳을 향할 때마다 맘속의 긴장이 신체에 미세하게 반영되는 것을 캐치하고 이를 이용하여 숨긴 물건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철저하게 계산되고 세팅된 상황이다. 즉, 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 뿐, 언어를 모르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하고 대화하는 실어증 환자의 그것하고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보고 나서야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에 언급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는 각종 단서를 이용하여 병의 정체를 찾고 이를 치료하는 형식의 의학 추리 드라마다. 처음 이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인 하우스의 캐릭터가 너무 재미있어서 거진 2년 정도 밤마다 이 드라마를 끊임없이 반복 시청하곤 했다. 너무 많이 봐서일까 자막을 보면서 시청했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영어가 조금씩 들리는 듯 했다.


영어가 들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는 메디컬 추리 드라마였기 때문에 주로 질병과 그 질병의 원인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영어 단어는 대부분 의학적인 전문 용어였고 그 외의 그리 많지 않은 일상적인 대화나 농담들은 매우 쉬운 영어가 사용되었다. 어차피 전문 의학용어의 학술적인 의미는 영어를 잘 모르는 나 뿐만 아니라 영어를 잘 아는 사람들도 비전문가로서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따라서 꼭 알아야할 이미지에 대해서는 드라마가 바이러스가 퍼지고 근육이 부러지는 등의 영상으로 표현해주므로 그냥 유추하는 수준으로 드라마를 보는데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드라마를 수십번 반복하여 시청하면서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각인되었고 그 캐릭터들이 일상적으로 대충 어떻게 말하는지 대충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 슬슬 영어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 이상하진 않았다. 


영절하식 영어 공부에 영감을 받고 아무런 자막 스크립트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해본 적이 있는데 그 답답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아무리 아름답고 장엄해도 미남미녀의 외모와 표정이 멋지고 섹시해도 솔직히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고, 그저 딴나라 일이었다. 그것을 보는 것은 상상 외의 고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도할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답답한 상태에 처하는 괴로움 속에 정신력이 완전 방전되고 탈진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제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다시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힐링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너무 많이 본 드라마에서도 더 많이 본 에피소드였고 그 스토리와 캐릭터가 이미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니 이는 마치 지금까지 노래 가사를 보면서 불렀는데 이제 노래를 완전히 외운 것 같아 이번에는 가사를 보지 않고 불러봐야지 하는 정도로 쉽게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자막 없이 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되었다. 


우선,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에서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봤을 때 느꼈던 지나친 고역은 많이 경감되었다. 엄청나게 집중해서 보니 그래도 스토리의 흐름을 어찌어찌 가까스로 따라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건 내가 좋아해서 그렇게 반복적으로 보던 그 드라마가 아니었다. 자막 없이 보니 안보이던 것이 자꾸 드러나기 시작했다. 배우의 대사와 그에 따른 몸짓, 떨리는 눈가와 확장된 동공 등 온갖 미묘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스토리상에 잘 짜여진 부속품처럼 여겨지던 조연과 엑스트라들이 갑자기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많은 디테일들에 집중하게 되니 뭔가 그 상황의 정서에 푹빠지는 느낌도 강하고 공감은 크게 되는 것 같은데 오히려 영어는 거의 들리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은 산산조각 나서 하나의 스토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즉, 드라마를 시청한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난 독립된 영상클립을 본 것 같은 느낌이고 하나의 이야기로서 기승전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기존의 스토리 라인에 억지로 집어넣어 생각했지만 자연스럽게 기승전결을 타지 못한 것이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했고 그 상황과 배우에 대한 공감이 재미있었지만 결국, 드라마 본연의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또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그만두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얻게 되었다.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익숙했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리고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더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조각 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이 의문점들은 결국 마지막 의문점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의문점이 떠오르면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키로 뜬금없이 같이 떠올랐던 것이 그동안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잊고 있었던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였다.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신경과적 증세를 겪는 환자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각각의 증세를 겪는 환자들에 대하여 무척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특이한 증세를 겪는 사람들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쳐들었기 때문인지 그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이 오히려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읽는 보람도 기쁨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만 읽자니 책이 술술 잘 넘어갔고, 각 증세별 이야기 단락도 길지 않아서 어찌어찌 전부 읽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별로 바쁘지 않은 상황에서 기괴하고 특이한 증세에 대한 가벼운 흥미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있다. 읽었을 때는 별다른 감동도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읽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이 반추되는 책들 말이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신경과적 증세라는 것이 인간 존엄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하는 비극적 아우라를 가진다. 이 책에서 그런 느낌으로 환자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머릿속에 그런 사람들의 비극적 카테고리를 만들어 몽땅 집어넣고 그냥 슬퍼하고 나와 분리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모든 신경과적 증세가 비극이 아닌양 지독하리 건조하게 담담하게 기술해 버렸고 그래서인지 비극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은 환자들은 외면되지 않고 내 일상생활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일면을 자꾸 내비친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과 가벼운 흥미로 스치듯 읽고 넘어갈 것 같았던 이 책은 삶의 구비 구비에서 갑자기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소개된 환자들의 사례가 지혜의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처음엔 단순 열거식으로 환자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는데 실은 환자의 사례가 모두 그 자체로 완전하고 고유한 케이스로 깊은 인상을 주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모두 인간 존재에 대한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포스팅도 책의 대통령의 연설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언어상실증 환자 사례가 머릿속에서 스스로 확장되더니 다른 고민들과 결합하여 인식의 큰 전환을 가져다 주었고 특히, 영어 공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고 싶어 포스팅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는 왼쪽 관자엽의 장애로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수용성 언어장애나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언어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린다니 일견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하다. 

 

지능이 높은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는 그가 언어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는데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니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말을 하지 못하는데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의사소통하기 때문이다.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과 말투, 목소리의 고저, 억양 등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어상실증 환자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각종 단서들을 이용하여 원활하게 대화를 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로는 그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언어상실증을 확진하기 위해서 각종 단서들을 누출하지 않게끔 누가 봐도 매우 이상한 태도로 말을 걸거나 인공적인 기계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 외의 정보를 제거하거나 이상하게 뒤틀어 버리면 언어상실증 환자는 전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역설적이게도 정상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소통을 한다. 이들이 비록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으로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대통령이 아무리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대통령의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와 이상한 신체동작 등만 보게 되니, 이는 마치 희극 배우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누구나 아는 거짓말을 공들여 하는 느낌을 주니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웃음이 터진 것이다. 


처음 이 사례를 읽었을 때는 언어상실증 환자들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하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례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사례 자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음에도 이러한 사례를 알고 있으니필요한 순간마다 이 사례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라 다른 고민이나 이야기들과 어우러져 결국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게 되었다. 이후, 미국 현지의 드라마를 자막없이 시청하면서 생긴 언어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 사례로부터 작지만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도움은 대충 이런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언어상실증이어도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의 단서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얼굴 표정 읽기, 최면이나 관념운동 등에서 미세한 신체 반응 등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누설되는 비밀을 확인할 수 있고 상대의 거짓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약기가 있는데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그런 능력이 무척 발전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실은 이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반대의 이야기인가? 


첫 번째, 지능이 뛰어난 완전실어증 환자들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은 즉,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을 함에 있어 언어는 거의 필요없다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장애인 취급을 받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액면 그대로 언어가 일상생활에서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완전히 필요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두 번째는 언어가 오히려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를 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무척 감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어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주의깊게 보는 일상적인 단서들은 보지 못한다. 즉, 언어를 듣는 사람은 그 언어의 상대는 보지 않고 언어에 집중한다. 만일, 상대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해도 언어의 감동적인 내용들이 머릿속에 재생이 되고 있다면 사소한 단서들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흔히, 뻔한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에 귀가 솔깃해서 누가 봐도 뻔한 사기꾼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언어에 농락당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부분은 오히려 조금 다르게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즉, 언어가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어는 많이 과대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오히려 의사소통의 본질이라는 측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가령, 영어 공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실은 공통의 경험이 없고, 그로 인하여 서로 말을 할 공통의 화제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처음 영업에 나선 자동차 세일즈맨을 생각해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자동차를 사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맥락에 따라서 말하려고 한다. 맥락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통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당연히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영업 사원은 맥락없이 갑자기 차를 사라고 들이대어야 하니 심적인 부담감이 엄청난 것이다. 당연히, 차를 사야하는 맥락을 가진 사람들을 찾을 것이고 우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영업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업사원은 절박하게 실적 압박을 받았을 때, 겨우 먹고 살기위해서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들이대어야 한다는 식의 스스로의 맥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이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해외 여행가서 급박해지면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맥락에서 언어는 사실 조금 부차적이다. 이러한 맥락이 있고 그 다음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왜 영업을 잘 하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어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해외에 나가서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꽤 명백하다. 그들은 맥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외국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언어보다 한단계 앞서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맥락을 만드는 법과 그러한 맥락에 참가하는 법을 아는 것이 먼저인 셈이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인간이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또한, 언어의 실체에 대하여 살짝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현지 드라마를 무자막으로 시청한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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