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이하 영절하) 공부 방법을 듣고 나서 호기심에 무작정 미드를 녹음해서 귀에다 때려 박아보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영어 전반에서 기량이 향상되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구장창 듣는 미드도 여전히 잘 알아듣지 못했다. 몇 개월이 지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배경음만 점점 친숙해질 뿐이었다. 필시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 늘 그렇듯 효과가 없어 보이니 더 이상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그렇게 공부를 접었다. 




 몇 년 후에 도서관에서 “English RE-start” 시리즈를 봤다. 책이 예뻤고 무슨 의도로 책을 만들었는지 명확해보여서 읽어봤다. 적절한 수준의 쉬운 영어로 주변을 묘사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그림과 같이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어가 개입되지 않고 직관적인 그림을 보면서 영어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려나간 것이 흥미로웠지만 그 뿐이었다. 영어 공부에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하면서 계속 관련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책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학습하는 앱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앱이 나의 호기심을 다시 자극했다. 






 “English RE-start”는 한 페이지를 4컷으로 분할하여 간단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English RE-start” 학습 앱은 분할된 컷을 한 화면으로 해서 그림과 함께 텍스트를 보여주면서 원어민이 천천히 텍스트를 읽어준다. 그리고 다음 컷으로 이동한다. 이 간단한 구성이 내게 아이디어를 주었다. 즉, 영절하식 공부 방법을 이 앱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영절하 식 공부방법을 “English RE-start”의 한 컷 별로 구현하는 것이다. 한 컷에 들어간 텍스트는 몇 마디 되지 않으니 반복해서 듣기 편하다. 그러니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 짧은 문구를 반복해서 듣느다. 또, 원어민의 목소리를 바로 따라서 읽으면 흔히 말하는 섀도잉이 된다. 내가 정확하게 들었는지 여부는 짧은 그 문장을 듣자마자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문장을 외우지 않아도 짧은 문장이기 때문에 바로바로 따라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는 훌륭해 보였다.


 “English RE-start”의 Basic에서 advanced까지 시간이 되는대로 순차적으로 반복했다. 운동을 하거나 이동시간에 간단히 읊조리면서 반복했다. 그리고 2~3개월 정도 지나자 성과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미드를 자막 없이 온전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막 없이 본 미드는 정말 재미있었다.  


 대단한 성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성과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 드라마 하나만 가능했다. 이미 수십번 반복해서 보았기 때문에 모든 단어와 내용을 완전히 꿰고 있는 에피소드만 자막 없이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처음 보는 미드는 자막 없이는 보지 못하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멘붕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이전에는 수십 번을 봐도 자막 없이는 감상에 불가능했다. 명백한 발전이고 성취였다. 


 일단, 성취가 생기니 욕심도 같이 생긴다. 성장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고 부족한 점을 찾아봤다. 그 결과 2가지가 문제였다. 


 첫 번째는 듣기가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단어를 전혀 듣지 못한다. 자막 없이 볼 수 있었던 미드는 모든 단어와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그게 실제로 아는 단어라 할지라도 소리로는 알아듣지 못하고 힘겹게 유지하던 정신이 무너져버렸다. 한국말이라면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대충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이를 추론해볼 수 있는데, 영어에서는 아예 단어의 소리를 알 수 없으니 이게 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맥락이었다. “English RE-start”는 그저 매우 단순한 이야기와 쉬운 말만 사용하고 있어서 사회적 의사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즉, 관용어나 농담, 반어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서 문장에 반영될 때는 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문법을 몰라서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저것 뒤져본 결과, 영어권의 문화와 전통들에 무지하고 관용적인 표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도 조금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언어 형식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매일 “English RE-start”의 원어민이 발음한 것을 듣고, 따라하며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입으로 영어 문장을 말하는 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입이 영어 구조에 익숙해지면서 수십번 반복해서 봐도 어색하던 미드가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수십 년간 문법을 공부하고 좋은 점수를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영어 형식이 입으로 반복숙달하면서 바로 익숙해진 것이다.


 영어를 못해도 20년은 공부했지만 전혀 늘지 않고 그저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요령만 생겼을 뿐이다. 그런데 입으로 연습한지 2~3개월 만에 눈에 보일 정도로 실력 성장이 있었다. 이렇게 되니 무엇을 해야할지 매우 명백해졌다. 필요한 것은 영어 공부가 아니라 영어 훈련이었다. 나아갈 길이 보이니 조금 신났다. 도서관과 서점을 뒤지면서 어떻게 영어 훈련을 하면 좋을지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영절하식 공부방법에는 더 이상 호기심이 생기지 않게되었다. 나에겐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영어 훈련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nglish RE-start”에서 짧은 컷 단위로 공부해본 마지막 시도에서조차도 영절하식 훈련방법 보다는 입으로 반복한 것에서 더 큰 효과를 봤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97IMF 이후 영어의 중요성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다. TOEIC 시험 점수는 사람의 가치를 재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가 되었고, 영어학원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면서 영어가 비즈니스 환경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면서 사람들은 실제로 영어를 잘 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문법과 시험 위주의 공부에 대한 대안을 사람들이 모색하고 있었을 때 나온 것이 영절하(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였다. 군대에서 진중 문고로 보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의 핵심은 쓸데없는 문법공부는 배격하고 원어민처럼 되면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책을 읽었을 때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바로 완독했을 정도로 글쓴이의 주장은 신선했고 접근하기 쉽게 잘 구성되었으며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쓰여진 책이었다. 읽자마자 바로 영절하식 영어공부 방법을 요약해서 노트화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영절하에서 제시된 영어 공부 방법은 기존의 영어 공부법을 폐기하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혁명적인 방법처럼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영어 공부를 단순히 좋은 시험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원어민처럼 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했고 그 실행방법도 단순하고 명확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영절하식 영어공부를 시도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 개인의 입장에서 이 공부 방법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영절하식 공부를 통하여 영어실력이 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내 스스로 적용하면서 많은 혼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절하는 공부방법을 단계별로 나눠놨는데 그 단계를 뛰어넘는 기준이나 공부해야할 공부량 등이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으로 읽었을 때에는 쉬워보였지만 막상 실천해보면 막막하고 어리둥절한 경우가 많았고 같은 내용의 자료를 계속 들어야 하므로 무척 지루하게 느끼기도 했다. 

 

가령 영절하에서 제시한 1단계가 카세트 테이프 한 개를 그 테이프에 있는 모든 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인데, 해보면 소리가 다 들린다는 기준이 애매하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스크립트를 보면 안된다. 그러니 계속 속으로 소리가 다 들린 것인지 아닌지 의심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그리고 같은 테이프를 매일 들으니 정말 지루하다. , 이를 무의식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지침도 있어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해석하는지 점검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언어를 알아듣는 것인지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독해하듯 해석하는지 잘 구분도 안 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데 스스로 발전하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이 공부법의 가장 어려운 점인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 느껴지면 계속할 수 있는데, 이를 측정할 수 있는 점수도 없고 어떤 책의 진도가 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쉽게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여튼 영절하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이 공부의 어려움을 토로했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난 것으로 안다.

 

세상을 삐딱하게 사는 나같은 사람은 영절하를 읽고 그 방법에 동의하면서도 제 입맛대로 그것을 변형해서 스스로 편한 것만 받아들인다. 당시 아무리 세상에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말해도 별로 체감하지도 못했고, 솔직히 한국어로 되어 있는 정보도 소화하기 벅찼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니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딱히 여행 가고 싶은 욕구도 없어서 영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영어 공부에 목숨 걸 생각도 없고 영절하식으로 최선을 다해 영어공부를 할 생각이 있을리 없었다. 그런데 영절하의 논리에는 그대로 설득되어서 영어 공부에 대한 모든 방법을 영절하의 논리를 이용하여 잘못된 공부 방법으로 규정했다. 반공부주의라고나 할까, 문제집이나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신념만 강하게 형성되었기에 기존의 영어 공부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영절하식 공부를 할 여건도 의욕도 없으니 그냥 영어공부를 전혀 안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미국 드라마 열풍과 함께 좋아하는 미드에 꽂혀서 밤을 새다시피 하는 나날이 지속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미드는 많고 현실은 개떡 같으니 매일매일 미드 삼매경이었다. 미드에 빠져서 현실을 잊고 사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 핑계를 댔던 것이 영어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 미드를 보면서 그냥 미드만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니 영절하식 영어공부를 시도한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영절하의 공부방법을 따라해본 것이다. 그러면서 영절하식 영어공부의 지루함을 재미있는 미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물론, 미드를 보다가 다시 자막을 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이 들면 자막을 꺼보고 그러다가 결국, 발음에 주의하면서 듣는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그냥 자막 키고 봤다. 공부가 되었을 리가 없다.

 

스스로 영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뭔가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미드를 통째로 녹음해서 돌아다니면서 이어폰으로 듣기 시작했다. 계속 듣다 보니 점점 잘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 단어는 3년 동안 절대로 들리지 않았고 컨디션에 따라서 잘 들리고 안 들리고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안 들리는 단어는 전혀 안들리는데 그런 단어를 추적해서 영영 사전을 찾고 그것을 낭독하라고 되어 있었는데 결국, 못 찾고 끝났다. 스크립트나 자막을 찾아봤으면 그 단어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러면 지는 것 같았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생활이 바빠지면서 조용히 영절하식 공부는 접게 되었다. 


거진 3년간 열심히 녹음한 미드를 들었는데 영어 실력이 늘었을까? 그 부분은 조금 미묘하다 영어 문장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느낌적 느낌은 있다. 하지만 열심히 녹음하여 들은 미드를 자막없이 보기는 어려웠다. 정말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그냥 BGM식으로 움직이거나 여유로울 때만 똑같은 미드를 계속 들었던 것이지만 3년이나 똑같은 미드를 들었다면 영어 전반이 발전하진 않더라도 그 미드 정도만이라도 잘 들렸으면 성취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