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의 뜬금없는 결론을 상기해보자.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조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전개해보자. 조금 긴 과정일 것 같다.


우선은 자막과 영상의 대응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앞서, 어려운 전문용어 자막과 영상의 매치로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스스로 여기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냐면 마치 이런 것과 같은 느낌이다.


친구랑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제 길을 가다가 피젯스피너를 주웠어.” 

그런데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 그럼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피젯스피너가 뭐야?”, 

그러자 친구가 피젯스피너를 꺼내서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거야.”

그렇게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대화는 간단하게 축약하면 이런 상황이다. 대화 도중에 모르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고 해당 단어에 대한 일련의 파악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그 궁금증을 실물을 보면서 해소했다. 물론,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실물을 본 순간 그냥 해소가 된다. 이 경우에는 단지 “피젯스피너”는 이것(실물)이라는 일련의 등치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만일, 친구가 그 “피젯스피너” 실물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 이것을 설명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령, “돌리는 거야.”, “이렇게 꼭지가 3방향으로 나있는 것도 있고, 장난감이야.” 원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할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나온다. 말로 전해진 어떤 사물의 외양이나 용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 답답함을 가져온다. 마치 앞에서 “피젯스피너”라는 모르는 단어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설명은 다시 새로운 답답함을 가져온다. 하지만 실물을 보았을 때, 그 모든 궁금증이 가라앉고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것을 직접 받아 면밀히 파악해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실물을 보고 그 단어에 매칭시키고 넘어갈 것인가로 선택하게 된다. 공이 완전히 나에게로 넘어왔다. 더 이상의 설명은 그저 실물에 부차적인 것이 될 뿐이다. 


위의 대화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단어나 낯선 단어를 마주볼 때 반드시 그것의 내용을 채워야한다는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체성을 갖추어야만 납득이 된다. 즉, 말로 설명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설명이 반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게 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진다. 이것은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언어는 그 대응물이 있어야만 내 속에서 작동하는데 대응물이 없으니 언어가 작동하지 않고 대화는 멈추며 대화를 잇기 위해 그 대응물을 찾는 것이다. 


이제, 자막과 영상의 대응을 통해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여기는 과정이 무엇인지 감잡을 수 있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봤을 때 자막에서 제시한 몇가지 키워드 '황색', '균', '감염'이라는 키워드와 영상이 일치했다. 따라서 나는 그 노란 기류를 '황색포도상구균'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고, 그것이 퍼지는 것을 '감염(infection)'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다. 그렇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의 대사가 영상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에 자막은 영상을 가리킨 것이 되었고 더 이상의 의문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영상이 자막을 충실히 구현했고 동시에 그 영상의 진위나 정확성을 따지고 파악할만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바로 자막과 영상이 동일하다는 매칭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전문지식과 식견이 있었다면 영상을 비판적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 언어가 대응물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대응물을 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개시된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굳이 대응물을 찾는 과정이 발생하지 않는 말들은 이미 대응물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대응물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열심히 써온 내용들이 실은 누구나 아는 “언어와 의미가 어떻게 대응되는가?” 하는 질문을 찾았고 그 대답의 일부를 찾은 상황인 것이다. 즉, 현재까지는 의미 모를 단어를 마주쳤을 때 반드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찾는 과정이 자동적으로 부지불식간에 개시되고 기존에 의미를 모른다면 새로운 의미가 그대로 수용되지만 기존에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비판적으로 수용된다는 점을 파악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언어가 의미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중고등학교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는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에 의미있는 일 따위는 없고 그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만사에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는 아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며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으로 확고한 회의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대학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의심하고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의심한다니 멋있지 않은가? 이미 갖고 있던 회의주의적 성향을 정말 멋진 쿨함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지 않은가. 국가를 의심하고, 사회를 의심하고, 경제를 의심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라고 들었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뭘 알겠는가. 이미 사람들이 의심한 내용들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 철학자도 있었고, 프로이트와 다윈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화를 밑바닥에서 무너뜨린 사람도 있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이나 유전자학은 인간을 거의 기계나 컴퓨터처럼 다루고 있었다. 읽다 보니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기엔 너무 불완전해서 탐욕으로 매번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최악의 정치 형태인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좌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모두 원숭이의 발정 정도로 치부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서 아름답고 진정한 사랑, 정치적 선동, 선행, 혁명, 자아의 실현, 신뢰 따위를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누군가 이런 것을 들이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권유할 때만 작동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A씨는 너무 훌륭한 것 같아. 그분은 누구랑 진정한 사랑을 했고,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라서 믿을 수 있어, 그 분이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어 너도 여기에 기부도 하고 활동도 같이하자.”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응 그렇구나, 미안 최근 바빠서정도로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어서 설득을 시도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범우주론적 회의적인 경향을 스스로에게 포장한다.

 

그래,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니? 사춘기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을 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발정난 원숭이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존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겉멋이 잔뜩 든 염세주의 똘아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거나 토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의 주제는 A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토론으로 바뀌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 상할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미 그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잔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설득 당할 가능성이 더 높게 된다.

 

나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보통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피하고 엉뚱한 일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었으니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혹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이 우울해지고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빛바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뱉었던 회의주의자적인 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느꼈으면서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힘이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도 그렇다. 필사적으로 부정해 오다가 어느 순간 그 부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나타난다. 어느 유난히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몰아닥치는 상념 속에서 갑자기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이솝 우화의 여우가 어차피 저 포도는 시고 맛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상처 받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그런 인간들이 말하는 가치와 의미는 결국 허상이고 망상이거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꾸며댄 것들에 불과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거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운 바에 따라서 세상에 믿고 따를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빈민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하기 위한 가식의 수단으로 보였고, 열정과 혁명은 발정난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취한 사람들의 과대망상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보였다. 종교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로 보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고, 돈 많은 부자는 그 돈에 대한 집착으로 전전긍긍하는 궁색하고 인색한 노인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가치한 일들로 증명하면 점차 삶이 더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그런 생각을 깊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고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의미가 문제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진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두 무의미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정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스스로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설정해도 된다. 그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비록,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전 지역으로 가서 탱크 앞에 뛰어드는 것도 멋있겠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이미 그 의미에 충실하다.

 

모든 의미를 부정하니 이제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찾아보니 이번에는 앞에서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세상하고 마주친 느낌이었다. 선행은 기분이 좋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열정은 진정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고 그저 일종의 구애행동으로만 남았어도 그렇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으로도 해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모한 사람들, 이상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만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앉아서 속으로는 온갖 욕망이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평가만 하고 있는 나보다는 나았다. 나도 그렇게 의미를 만들고 살아 움직여서 실패도 성공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하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나 대단한 선배와 어르신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처음으로 스스로 발견한 역설이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이때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역설이다.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남보다 늦게 가는 것 같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러면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혹시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상한 명예와 자격지심으로 엉뚱한 옷을 입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려도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나는 부와 명예를 밝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와 명예에 매우 높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기꺼이 누릴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막 살기 시작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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