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나는 이공계인데 수학 성적이 가장 나쁘다. 솔직히 수학으로만은 전교1등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공부했지만 실제 성적은 평균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 대한 완벽하게 잘못된 접근이고 동시에 나 개인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수학에 대한 접근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당시에는 본고사라고 해서 각 대학별로 수능 외의 시험을 각 대학별로 주관식 서술형으로 보던 때라서 문제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게다가 해당 문제를 풀어낸 과정에 대하여 일일이 서술하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어야만 답안을 정확하게 작성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풀면서 논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도 고민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가 없어지고 수능과 본고사로 시험방식이 대체됨에 따라서 국어와 영어,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되었다.

 

수능이 나온 배경의 한 축에는 주입식 위주의 교육에서 단순히 암기하여 맞추는 학력고사가 아니라 창의적 교육을 하고 암기보다는 합리적인 추론과 창의적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식의 시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수능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러한 수능의 장점에 대해서 엄청나게 홍보하면서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의 시험을 엄청나게 비판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러한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훨씬 유리했고 암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언론의 홍보에 따라서 주입식 교육을 증오하고 암기를 격렬하게 배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는 수준에서 멈췄으면 이익만 보고 끝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누구도 가지 않는 한발을 더 나아가버리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국사나 세계사의 역사 과목이나 생물, 지리 같은 과목들은 필연적으로 암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암기하는 것이 공부의 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야기를 만들고 생생하게 함으로써 이런 단순 암기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만 공부는 결국 암기의 형태로 마무리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학은 나에게 결코 암기의 대상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요인 때문인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시계문제를 풀면서 직접 시계를 관찰하고 증명하고 풀어낸 것으로 인하여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심상도 같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 나에게 수학은 지혜의 학문이었다. 사물을 관찰하거나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서 이를 기반으로 증명하는 것이 내가 수학에 가진 심상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과 사물에 대한 관찰이지 암기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에게 수학은 단순하고 기계적 반복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나의 이런 심상은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일인데, 이미 다년간의 신비주의 연구 경험을 통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몸에 붙으면서 수학에서 암기라는 행위를 축출하는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해당 문제를 풀었던 경험을 다 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푸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푼다는 식의 유형을 외우지 말고 해당 문제를 최대한 다각도로 살펴보고 진지하게 고찰한 후 해당 개념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구축해 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지혜의 단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활용하기 시작한 심상을 이용해서 개념의 정의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차근차근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실제로 정신과 뇌를 훈련하고 개발한다고 생각했다. 더 어려운 문제를 풀면 풀수록 집중력과 뇌가 개발된다는 식의 심상을 구축했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정말 탐욕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심상에는 해당 문제를 전혀 외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같이 프로그램 되었다.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겠지만, 이 실험은 정말 처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열정적으로 수학만 공부했고, 하나의 문제를 3일 밤낮을 붙잡고 고민해서 풀기도 했지만 대학입시에서 가장 성적이 안 좋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능과 본고사 모두 최악의 결과를 받았다. 슬프지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국어였다. 아마도 거기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신비주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스스로 골몰하던 문제에 대한 가장 밀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책은 G. 폴리아의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학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문제 유형을 외우고 이를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기와 문제유형에 대한 학습을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론인 셈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현재까지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이 개발되지 않았고 나중에 개발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을 내가 해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전환해서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이 무협지에서 수련하듯이 정신과 뇌를 단련하는 개념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통해서 해당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고 근원적인 개념부터 구축해서 정신을 과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는 것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에 천착한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해서 시험을 잘 보겠다.”하는 오기도 같이 작동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많이 어리석은 행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망각이 되었다. 나중에는 똑같은 수학문제를 3분 안에 다시 봐도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냥 문제 풀이를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학문제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해당 문제를 기본적인 개념으로 축소하는 것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기본 개념만 강화된 것이고 문제 유형을 외울 생각이 없으니 그 문제 유형이라는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런 지식은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그런 문제의 유형이나 해법을 외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다 보니 그 쪽으로의 무의식적인 거부도 작동해서 사고의 틀도 왜곡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망각의 영향 때문에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간단하게 풀다가도 5분 후에 보면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푼다. 그런데 이번에는 3일 밤낮을 집중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러니 매일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서 수학문제가 쉽게 풀리기도하고 어렵게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간단한 문제도 못풀기 일쑤였다. 그리고 망각하는 것이 무의식적 억압으로 작동한 것인지 어떤 문제를 쉽게 풀게 되면 그 문제를 다시 풀 때 그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문제 풀이를 많이 할수록 수학성적이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 문제풀이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생각이 억압으로 작동하면서 자승자박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두 번째 모험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슬프지만 객관적으로는 부작용말고는 없다.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공부법이라니 이런 희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되지는 않는다.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시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얻고 스스로 발전했겠는가를 따지는 기회비용을 들이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난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호기심과 열정을 꺾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기심과 열정을 꺾었으면 당연히 게임과 친구, 만화책 등에 몰두했지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가 아깝다는 식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 연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성공은 모두 나만의 유일한 경험이 되어주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되어주어서 내가 스스로의 비루한 삶이라도 온전히 그 삶의 주인이 되게 해주었다.




나의 독서 경험은 크게 3단계로 발전되어온 것 같다. 우선은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것이고 그 다음은 쾌락의 독서로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시기였다. 마지막은 최근인데 지식을 흡수하고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하는 독서다. 앞에서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시기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서유기로 시작되었고 각종 위인전과 동화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독서는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약간 부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책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놀았고, 책보다 재미있는 것을 열심히 찾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워낙 친구들이 안 놀아줘서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하지만 두 번째 단계인 쾌락의 독서로 넘어갔을 때에는 친구보다 책이 더 중요했다. 사실, 이것을 독서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본 것은 무협지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지만 무협지를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책 이야기는 빼고 무협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무협지를 스스로 찾아서 본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겨울에 무협지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친구 아들이 영웅문이라는 무협지를 본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두껍고 깨알 같은 글로 쓰여진 소설책을 읽는 친구 아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아들도 그런 책을 봤으면 하는 마음에 권유했다(무협지를 권유한 것에 대해서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책이나 다 읽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끌려야 독서는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까지 읽었던 책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면 각종 그림책에서 출발해서 서유기에서 폭발했고 계림문고에서 나온 문고판 150권 정도를 읽다가 먼 나라 이웃나라에 푹 빠져서 읽다가 메르헨 시리즈의 동화와 조금 더 성숙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에이브 시리즈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무협지라는 장르는 처음 접해보는 장르였다. 책은 두껍고, 글자는 작아서 보는 것도 부담되었고 겉표지도 이상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어서 거부감이 더 심했다. 하지만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중심부위의 표피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직접 책을 빌려와서 손에 쥐어주면서 읽어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해서 별다른 생각없이 페이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세계가 펼쳐졌다. 어머니는 총 3부의 영웅문 중에서 11권만 빌려왔는데 첫 페이지를 열고 2시간 만에 숨도 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저녁 9시쯤에 2권을 빌리기 위해서 어머니의 친구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친구 분이 많이 당황스러워 하셨다.

 

아마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본 쾌락 중에서 가장 강렬한 쾌감을 맛 본 것이 무협지 영웅문을 읽었을 때 얻었던 쾌감이었던 것 같다. 쾌감이라는 측면만 본다면 불가능해 보였던 대학입시를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깊은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충족감과 쾌감, 갑자기 많은 액수의 공돈이 생겼을 때의 쾌감도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하고 강렬하면서도 그 여운마저 사랑스러운 쾌감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몰입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이만큼 몰입된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영웅문에 대한 몰입 경험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책을 펼칠 때는 그냥 읽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읽고 있다는 의식적 행위가 점점 희미해지고 글의 내용이 점점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림의 고수들이 저마다 보여주는 재주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주인공의 심상이 손에 잡힐 것 같이 느껴지면서 주인공이 웃을 때는 내 마음도 웃고, 주인공이 울 때는 내 가슴도 찢어진다. 각각의 인물들은 스스로 실체화되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한다. 드높은 무학의 이치가 알 듯 말 듯 내 마음 속에 스치면서 아쉬움을 낳고 상황의 공교로움과 무학의 이치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거대한 세계가 흐르는 법칙의 조각을 살짝 내비치고 삶의 무상함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사무치게 느껴지면 마음을 격동하게 한다. 마음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과 그 필연성에 울고 웃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응원하면서 어느새 대단원의 끝이 다가왔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나의 호흡과 아픈 팔과 뻣뻣한 목 등 육체가 느껴지고 현실에 돌아오면서 이 현실의 지루함과 하찮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현실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격동과 감동을 다시 맛보고 싶은 나머지 마치,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다시 허겁지겁 영웅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이것은 마약 같은 쾌감이었고 책을 덮고 있으면 그 금단증세도 빨리 왔다. 그래서 영웅문을 읽고 또 읽었고 총 318권의 책을 대략 300번은 읽은 것 같다. 당연히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다시 맛보진 못했다. 그러니 다시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엄청난 집착으로 영웅문의 작가 김용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었다.

 

추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나와서 유행했지만, 솔직히 독서의 몰입 경험에 비하면 솔직히 너무 약했다. 어린 마음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열심히 분석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분석결과와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글과 그림, 영상이라는 매체의 차이 때문이다. 히로인의 외모를 설명할 때, 글은 몇 가지 특징만으로 그녀를 묘사할 뿐 그녀의 외모와 매력이 묘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바를 그대로 공감시킨다. 하지만 영상 매체나 그림은 그녀의 외모를 보여주고 그녀의 매력에 공감하길 바란다. 당연히 좋고 싫음이 발생한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림체를 고르면서 보는 이유도 그림에 공감해야만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쓴 글은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그 본질적인 경험이 이전된다. 나는 글의 묘사를 읽으면서 글쓴이의 심정에 공감하면서 그 심정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히로인을 맘속에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화자의 주요한 감정에 반응하면서 글의 의도를 느끼면서 글에서 보여주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여백을 자신만의 심상으로 가득 채운다. 반면, 영화나 만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은 심상을 전부 제시하고 있어 주인공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고, 고증이 안 맞고, 연기가 엉망이고 등등을 따지면서 보기 때문에 시청자는 오히려 해당 내용을 즐기기 위해서 통과해야할 것들이 많다.

 

, 글로 잘 쓰여진 것은 몰입하기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쉽고, 그 풍부함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더 크다. 물론, 디테일한 사실이나 복잡한 내용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물론, 독서는 훈련되어야 한다. 그 훈련이라는 것은 책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글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고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준비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요약하고 축약하고 그런 훈련은 공부의 기술이지 독서의 기술은 아니다.

 

한 번 마약을 맛본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약을 찾게 된다. 마찬가지로 몰입독서의 쾌감을 제대로 맛 본 사람은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재미있는 책을 열심히 찾게 된다. 내가 그랬다. 이전까지는 그저 심심할 때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읽는 것이 책이었다면 이젠 눈에 불을 켜고 광적인 집착으로 재미있는 책을 찾게 되었다. 이 경험은 정말 중요한데, 이후로 모든 책을 볼 때마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보물일지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심리 때문에 책을 볼 때마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을 것 같고, 정말 훌륭한 생각이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확인하는 기대심리로 책을 읽게 되었다. 


영웅문은 대단한 작품이고 김용은 신필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협지를 보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영웅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독서 경험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이 영웅문에 대한 이야기로 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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