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영어 원어민의 자음 발음이 자음과 모음으로 들리는 이유

 


 무성 모음의 발견은 그 동안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았던 궁금증을 스스로 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궁금증이란 영어 원어민이 자음만 발음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모음 없이 발음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004 분절음과 자음만 발음하기 편에서 한국어 원어민들이 습관적으로 모음 /으/를 붙여 발음하기 때문에 이런 습관을 교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론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내 자신이 한국어 원어민으로서 자음만 발음한다는 영어 원어민의 발음을 듣어 보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들어도 자음과 모음을 붙여서 발음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즉, 영어 원어민이 ‘strong’을 발음하면 내 귀에는 혀를 굴려가면서 /스뜨롱/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ㅅㄸ롱/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한 이유를 고민해보았다. 처음엔 한국어가 음절마다 ‘초성+중성+종성’을 한 단위로 여기는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즉, 한글에서는 모든 소리가 중성에 모음을 집어넣은 소리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에 맞추기 위하여 모음이 없는데도 비슷한 모음을 들은 것처럼 착각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또는 어렸을 때 /ㄱ/의 소리를 ‘그’라고 읽는 식으로 항상 모음 /으/를 붙여서 자음을 읽도록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실제론 없는 모음을 어떤 환상 때문에 들은 것이라면 벌써 1년 이상 자음과 모음을 분리해서 들어보려고 노력한 지금에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귀에는 영어 원어민이 모음과 자음을 붙여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결국, 자음만 발음한다는 것에 납득하지 못했음에도 이론상 타당하니 방법이 없었다. 원어민이 자음만 발음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해야만 했다. 아무리 세뇌해도 한 줄기 솟아나는 의심이 있지만 내 귀가 막귀라서 소리를 잘 분간하지 못한 것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무성 모음이라는 개념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건지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음소 /h/만 소리내고 있는 영어 원어민의 음성이다.

 

 

 

 내 경우에는 위의 소리가 /하/로 들린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일반적으로 내는 /하/와 소리와 분명히 다르다.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하/라고 들린다. 이 부분에서 한국어 원어민이 모든 자음에 모음 /으/를 붙여 발음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라는 추측은 깨진다. /h/의 소리는 /으/가 아니라 /아/를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바로 앞 포스팅에서 무성 모음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h/와 무성 모음  의 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같은 말소리를  음소 /h/와 무성 모음 라고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일까? 이는 하나의 말소리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음소 /h/는 성대를 떨지 말고 살짝 긴장시키면서 숨을 내뿜으면서 나는 소리다. 밖으로 밀려난 숨이 주변의 음성기관과 마찰하면서 /h/ 소리가 난다. 이 때, 핵심은 기류의 마찰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성대에서 밀려난 기류가 목구멍이나 입과 마찰하면서 나는 음을 /h/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 무성 모음 는 구강의 모양과 혀의 위치가 중요하다. 무성 모음 가 음소 /h/와 같은 소리가 나는 이유는 직접 소리를 내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목구멍을 연 상태에서 성대가 떨리지 않는 무성음으로 또 공기를 강하게 내뱉지 않는 무기음으로 소리를 내려고 하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떻게 든 소리를 내려면 숨을 강하게 내뱉어 기류를 마찰시키는 것 말고는 소리를 낼 방법이 없다. 무성음이고 동시에 숨을 강하게 내뱉지 않는 무기음으로 소리를 내려고 하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무성 모음은 필연적으로 유기음이 된다. 하지만 무성 모음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혀의 위치와 입술 모양 등이지 기류가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영어 원어민이 발음한 음소 /h/의 소리가 무성 모음 와 같은 이유는 음소 /h/의 소리를 낼 때, 혀를 쓸 일이 없어서 혀가 자연스럽게 늘어지고 목구멍을 크게 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혀의 위치와 입의 모양은 유성이든 무성이든 모음 /아/의 혀 위치와 입모양과 동일하다.  즉, 음소 /h/ 소리를 낼 때 모음 /아/의 혀 위치와 입술 모양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에 영어 원어민은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고 그 소리가 무성 모음 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 원어민은 무성 모음 에서 들려오는 모음 적인 부분이든 유성 모음 [아]이든 모두 동일한 음소 /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리가 머릿속에서는 /하/로 번역된다.


 중요한건 이 순간 음소 /h/와 무성 모음 는 자음인 동시에 모음이라는 점이다. 그저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자음이던 것이 모음으로 변하고 모음이던 것이 자음으로 변한다. 동일한 소리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로 갈라진 셈이다. 구강이나 혀의 위치 입술의 모양 등으로 인하여 방출되는 공기의 양상은 모음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어떤 조음 위치에서 기류가 폐쇄되거나 마찰되었는가를 통하여 자음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는 음소 /h/만 그런 것일까?


 하나의 말소리가 자음적인 면과 모음적인 면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어 원어민의 자음 발음을 들어 보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가령, 영어의 자음 발음에서 /s, z,  t, d, n, l/는 어째서인지 /스, 즈, 트, 드, 느, 르/로 들린다. 자연스럽게 모음 /으/가 첨가된 것 처럼 들린다. 영어 음소/s, z,  t, d, n, l/는 모두 혀끝을 윗잇몸(치경)에 접근시키거나 붙이는 방식으로 소리가 난다. 이 때, 혀의 위치와 입술 모양 모음 /으/를 낼 때의 모양과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어 원어민은 자동반사적으로 /으/를 덧붙여 듣는 것이다. 그리고 유성 모음과 무성 모음을 구별하지 않으니  발음할 때는 태연히 유성 모음 /으/를 붙여서 발음한다. 하지만 영어 원어민 입장에서는 유성 모음 /으/는 별개의 음이니 한국어 원어민의 발음은 없는 음을 덧붙인 것철럼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s, z,  t, d, n, l/의 발음에서 추가된 모음 /으/는 실제 모음 /으/를 조음할 때의 혀의 위치와 입술 모양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음은 자음에 비해서 그 소리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혀의 움직임이나 입술의 모양의 차이라는 것이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모음은 조금 차이가 나더라도 미묘한 차이점을 무시하고 유사한 모음으로 번역해서 듣게 된다. 따라서 한국어 입장에서는 가장 유사한 모음인 /으/를 덧붙여 듣게 된다.


 결국, 영어 원어민이 자음만 발음할 때, 자음과 모음을 붙여서 들었던 내 귀는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 단지, 영어 원어민이 모음으로 듣지 않는 것을 모음으로 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음성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추측하면, 유성음과 무성음을 강하게 구분하는 영어와 그렇지 않은 한국어, 유기음과 무기음을 강하게 구분하는 한국어와 그렇지 않은 영어로 음성체계가 다르고, 한글의 구조상 무조건 모음이 말소리에 있어야 한다는 한국어 소리에 대한 모델이 이런 차이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음성체계의 차이를 발견하고 나니 그 동안 헷갈렸던 것들이 상당 부분 해소된다. 가령, 어떻게 자음만 발음하는지 명료하게 이해했고, 영어의 비슷한 음들 /s, ʃ/, /z, ʤ/  등 소리는 비슷하지만 조음 위치가 다른 음들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10 영어 자음 발음에서 모음이 들리는 이유.apkg


수정 : 2020-04-04 오전 12:11 Ankilog 문구 다듬기



 

009 무성 모음으로 유성음 경험

 

  이제 무성 모음을 듣고 발음해 볼 차례다. 물론, 무성 모음만 듣고 말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어나 한국어 모두 무성 모음을 음소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무성 모음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성 모음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유성 모음을 보다 제대로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모음과 자음을 구분하지 않고 한 뭉터기로 발음하고 인지하는 습관을 가진 한국어 원어민이 이를 분리해서 들을 수 있는 경험을 유도해볼 수 있다.

 

 아직, 영어 모음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으니 한국어 모음으로 연습한다. 무성 모음 조음을 통해 어디까지나 성대를 쓰는 법을 스스로 자각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므로 딱히 영어 모음으로 연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차례대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한국어 모음 와 이를 무성음화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를 발음한 것이다.

 

IPA(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음화된 음을 표시할 때 아래에 작은 동그라미를 붙여 표시한다. 이러한 표시를 구별기호(diacritic)이라고 부른다.

 

 

 요령은 간단하다. 가령, 한국어로 를 발음하고 그 상태에서 입 모양과 혀의 움직임을 그대로 둔 채, 성대를 떨지 않고 발음한다. 그리고 이어서  를 발음한다.


 성대를 떨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면 목이 쉬었을 때를 떠올리거나 속삭이듯 말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연습해본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성대를 어떻게 쓰는지 느껴본다. 자주 사용하면서 의식적으로 성대를 쓰는 법을 몸에 익힌다.

 

 무성 모음 는 앞서 본 /h/와 소리가 비슷하다. 그래서 음소 /h/를 무성 모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무성 모음 의 소리가 유사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연속으로 발음해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는 두 개의 소리를 이어 붙인 것을 느낄 수 있다. 말소리의 파형도 두 개의 이질적인 파형이 접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음과 모음이 별도로 들리는 감각을 익혀보도록 하자.

 

 듣다 보면 무성 모음의 소리가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성 모음과 연달아 들을 경우 비슷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개별적으로 들을 경우 전부 숨소리 정도로만 들리기도 한다. 음을 잘 들어보면 숨소리와 유성음 특유의 쨍쨍한 소리가 대비되는 것을 느껴볼 수 있다. 유성음이 소리가 더 또렷하고 더 음량이 높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의 다른 모음 /이, 에, 애, 으, 어, 우, 오/ 똑같은 연습을 해본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Ankilog는 소리를 구분하여 듣는 연습을 위하여 만들었으니 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09 무성모음으로 유성음 경험(오디오).apkg

 

수정 : 2020-04-04 한국어에서 무성 모음과 유성 모음은 서로 이음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기존에 음소로 표시한 유무성 모음들을 이음으로 표시함. 또,  발음 수정함(Ankilog도 같이 수정함)


 

008 유성음 박탈 경험

 

 

 음성학을 공부하면서 말소리를 자음이니 모음이니 분석하고 나누게 되었다. 덕분에 이론적으로 자음과 모음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잡힐 듯이 와닿는 그런 개념은 아니었다. 하물며, 유성음과 무성음의 차이라는 것은 더더욱 막연한 이야기였다. 영어를 본능적인 수준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자연스럽게 구분해서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어 원어민으로 살아온 인생이 너무 길어서인지 아무리 들어도 유성음이 무엇이고 무성음이 무엇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억지로 나눈다면 약간 연극적인 톤의 목소리가 유성음 같이 들리긴 했지만 확신하기 어려웠다.


 유성음을 의식적으로 내는 법을 익혀보려고 내 목의 성대 부분에 손을 대고 진동을 느껴보면서 말하는 연습을 해봤지만 일상적인 수준의 음량에서는 진동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진동을 느끼려면 목소리를 최대한 높여야 하는데 그 정도부터는 이미 일상적인 말하기라기 보다는 무슨 연극 연습같아 어색했다. 이 경우 모음은 성대가 떨리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지만 유성 자음은 그렇지 않다. 자음은 워낙 짧게 발음되고 이어서 바로 모음의 진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유성음을 내서 성대가 떨리는건지 모음으로 인한 진동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물론, 모음도 유성음이지만 워낙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라서 익힌다는 개념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또, 영어에서 자음들이 무성음과 유성음으로 구분되는 것과 달리 모음은 전부 유성음이기 때문에 이를 별도로 익힐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이 쉬었다. 목이 쉬면 보통 말을 자제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회복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음성학 공부로 인하여 내 말소리가 제대로 발음되고 있는지 정확한 입모양과 혀위치를 두고 있는지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소와 다른 내 말소리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리고 쉬어버린 내 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말소리가 쉬었는지 아닌지는 누구나 들으면 안다. 그래도 특징들을 한 번 잡아보자. 일단, 목소리에 튜브 공기 빠지는 소리 즉, ‘ㅎ~ㅅ~’ 같은 소리가 마구 섞인다. 또, 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는다. 힘을 줘서 강하게 발음하면 바람소리만 더 커지거나 목에 통증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소리가 명료하지 않다. 이런 말소리는 소리가 작아 듣기도 힘들고 듣더라도 무슨 말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성대가 떨리는 원리는 이렇다. 아래의 그림과 같이 성대가 맞물려 성문이 닫혀있는 상태에서 폐 속의 공기가 성문을 비집고 나오면 그 압력으로 성대가 진동하게 된다. 살짝 닫은 입술 사이로 공기를 밀어내면 입술이 부르르하고 떨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목이 쉬게 되면 아래의 그림처럼 성대가 부어오르고 성대에 작은 결절같은 것이 생긴다. 성대를 떨려면 위의 그림처럼 성대가 잘 맞물려 닫혀야 하는데 결절로 인하여 성문이 벌어지니 공기가 그 사이로 새어나간다. 이것이 작은 구멍으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ㅎ~ㅅ~’ 하는 소리가 말소리에 섞이는 이유다. 게다가 성대가 붓고 무거워져서 평소보다 둔해지기 때문에 말을 하는데 힘은 더 들고 소리는 둔탁해진다. 


 

 이렇게 목이 쉰 상태에서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결절이 있는 상태에서도 성문이 닫힐 수 있도록 성대를 꽉 조여줘야 하고 부어서 두텁고 무거워진 성대를 움직일 수 있도록 숨을 강하게 내뱉어야 한다. 결국, 통증이 발생하고 무리한 움직임으로 성대의 손상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요점은 이것이다. 목이 쉬어버리면 성대를 떨 수 없다. 즉, 성대를 떠는 유성음을 전혀 쓸 수 없다는 말이다. 한창 유성음을 듣고 말하려고 발바둥치던 시기였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체감하는 방법은 그것과 열심히 접촉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그 빈자리를 파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파악하기 미묘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은 이런 방법이 상당히 잘 먹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빈자리를 느끼고 나서야 자연스러웠던 일상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비로소 알게 되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던 유성음을 박탈되면 이 유성음의 사용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어떻게든 유성음과 친해져보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에 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제대로 작동했다. 


 첫 번째는 한국어에서 유성음이 사용되고 있다는 확신과 체감을 얻었다. 한국어에도 유성음이 많다. 대표적으로 모든 모음이 그렇고, ‘ㄴ, ㄹ, ㅁ’ 등의 자음도 유성음이다. 또, ‘ㄱ, ㄷ, ㅈ’ 같은 자음은 상황에 따라서 무성음일 때도 있고 유성음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를 유성음으로 자각하고 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체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구분해서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목이 쉰 상태에서는 이 모든 유성음들 내려고 할 때마다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거나 목이 찢어지는 통증이 오기 때문에 체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유성음 사용빈도만큼 내 말소리가 이상해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유성음을 어디 이론 속의 소리가 아니라 내가 항상 내고 있는 소리 중 하나라는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유성음을 많이 사용하면서 이를 구분해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적으로 의미를 구분하는 음성적 단위인 '음소'의 개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한국어가 유성음을 '음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 원어민은 이 유성음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 물론, 귀가 예민한 사람들은 이를 구분한다. 하지만 나 같은 막귀는 전혀 그렇지 않다. 뇌가 자연스럽게 유성음 여부를 파악할 수 있도록 따로 훈련을 해줘야 한다. 다행히도 목이 쉬어 유성음이 박탈된 경험은 나같은 막귀도 해볼 수 있는 훈련 방법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해주었다.


 두 번째로 어떤 훈련을 해야할지 알 수 있었다. 유성음 박탈 경험은 가장 쉬운 연습방법을 보여주었다. 말을 할 때 유성음이 나와야 하는 상황마다 목이 아프거나 기대하지 않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니 자연스럽게 성대의 움직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평소처럼 소리를 내려고 하다보니 목의 성문이 열리면서 공기가 자연스럽게 유통되는 느낌과 성문을 닫고 소리를 내는 느낌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행위들이었지만 의식적으로 이게 성문을 닫는 것이고 이게 성대를 떠는 것이구나 하는 자각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훈련은 목이 쉬어야만 가능한 훈련이다.  득음할 것도 아닌데 매번 목이 쉬게 만드는 훈련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한 연습으로 보였다.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관찰을 통해 이것저것 체감하다가 불현듯 알게 되었다. 목이 쉬어서 유성음을 내지 못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모음이 발음되고 있었다. 통증 때문에 목구멍을 열심히 열고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여하간 성대의 떨림없이 모음 비스무레한 것이 발음되고 있었다. 성대가 떨리지 않는 모음이니 무성 모음이었다. 목이 쉬었을 때, 한 번 감각을 잡았더니 무성 모음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낮추겠다고 마음 먹거나 목이 쉬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흉내내면 자연스럽게 무성 모음이 나왔다. 그 감각을 최대한 살리면서 유성 모음과 무성 모음을 번갈아가면서 연습하니 성대의 움직임과 들리는 소리가 조금씩 어우러지면서 유성음과 무성음이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만들어내는 모음은 유성음이고 무성 모음은 매우 예외적이다. 그러다 보니 이 방법은 안 쓰는 말소리를 끌어들여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연습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조음기관을 다시 훈련시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훈련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성 모음과 유성 모음은 확연히 구별된다. 그렇다는 것은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해서 듣기도 힘들어하고 구별해서 소리를 내기도 힘들어하는 나같은 한국어 원어민이 유성음과 무성음을 대조하면서 듣고 말하기를 처음 익히기에 가장 알맞은 연습이 바로 이 유성 모음과 무성 모음을 번갈아가면서 발음하고 듣는 연습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몇몇 학자들은 음소 /h/를 무성 모음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자음을 모음이라고 말하는 지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성학을 공부할 수록 음소 /h/가 무성 모음이라는 점이 납득이 되었고 한국어와 영어 음성체계가 가지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음소 /h/가 다른 음에 섞이면 그 말소리는 유기음이 된다. 그리고 그 유기음은 항상 무성음이다. 음소 /h/가 유성음을 철저히 배제하는 듯한 느낌이다. 또, 영어와 한국어의 음성체계는 유성 여부에 따라서 음소를 나누는가 아니면 유기 여부에 따라서 음소를 나누는가로 서로 다른 기준을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영어에서 음소 /h/는 퇴조하고 사라져가는 소리다. 방언에 따라서는 전혀 발음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이를 종합하면 한국어는 음소 /h/를 주요한 기준으로 선택하면서 음성체계에서 유성 여부는 기준으로 잡지 않았고, 영어는 유성 여부를 주요한 기준으로 선택하면서 음소 /h/를 버리는 것 같다는 인상이다.


 사실, 이런 개인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한국어 원어민이 영어의 음성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유기음과 유성음을 정확히 구분하고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유성음을 구별하여 듣고 말하는 연습으로 무성 모음을 익혀서 유성음과 대조하면서 익히는 것이 효과적이고 동시에 앞으로 제시할 유기음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음소 /h/를 자음 중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경험담이므로 Ankilog는 없음


 


007 음소 /h/와 유기음 소개


 다른 음성학 책들과 달리,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h/를 먼저 다루는 첫 번째 이유는 이 소리가 유기음을 만드는 만드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호흡을 내쉬면서 말한다. 그래서 성대는 말소리를 결정하는 첫 번째 위치가 된다. 성대에서 한 번 만들어진 소리를 혀와 입, 코 등을 이용하여 다양하게 가공한 것이 우리의 실제 말소리다. 따라서 성대에서 1차적으로 가공된 말소리가 모든 말소리의 기초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성대에서 만들어진 소리가 모든 말소리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모든 말소리를 유성음과 무성음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성대에는 유성음과 무성음 말고 다른 구별 기준이 있다. 바로 유기음과 무기음이다. 유기음이란 한국어의 음소 /ㅍ/, /ㅌ/, /ㅋ/들을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발음해보자. 공기가 거세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유기음이란 말은 공기의 기류 소리, 거센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유기음을 느껴보고 싶으면 손바닥을 입술 바로 앞에 두고 발음해보자. /ㅂ/, /ㅍ/를 연달아 발음해 본다. /ㅂ/, /ㅍ/가 손바닥에 부딪치는 숨이 더 많은 것을 느껴볼 수 있다. /ㄷ/, /ㅌ/ 또는 /ㄱ/, /ㅋ/를 발음할 때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방법은 입술 앞에 작은 종이 조각을 대고 발음해보는 것이다. 무기음을 발음할 때는 살짝 떨리기만 하던 종이 조각이 유기음을 발음할 때 뒤로 튕기는 것을 볼 수 있다.


 /ㅍ/, /ㅌ/, /ㅋ/를 국제음성기호로 표시하면 /pʰ/, /tʰ/, /kʰ/가 된다. 여기에 위첨자로 붙은 h는 바로 앞에서 살펴본 음소 /h/를 의미한다. 즉, /p/를 발음하면서 /h/를 추가한 말소리가 바로 /pʰ/다. 국제 음성기호로 나타낸 모든 유기음들은 모두 h가 위첨자로 붙어서 나타난다. 결국, 유기음은 /h/가 첨가된 말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기음을 발음하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h/는 성대에서 조음된다고 했는데 왜 성대에서 별다르게 조음되는 느낌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다. /h/는 엄밀하게는 성대에서 음이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성대에서부터 날숨이 배출되는 통로를 좁혀 숨이 일반적인 날숨보다 빠르게 나가게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다른 음과 섞여서 발음할 때에는 실제 조음되는 위치가 성대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한국어에서 /ㅍ/, /ㅌ/, /ㅋ/는 음소이므로 국제음성기호로 /pʰ/, /tʰ/, /kʰ/로 표시했다.)


다음은 한국어 음소 /ㅍ/, /ㅌ/, /ㅋ/와 영어 음소 /p/, /t/, /k/가 어떻게 다른지 서로 비교한 그림이다.

 

 

 


 앞에서 005 음소 이음 음성체계 포스팅에서 제시했던 그림을 조금 확장하여 유기음의 개념을 첨가했다. 한국어는 /ㄱ//ㅋ/, /ㄷ//ㅌ/, /ㅂ//ㅍ/무기음과 유기음으로 구분되어 서로 별개의 음소가 된다. 반면, 영어는 [p][]는 음소 /p/의 이음으로 같은 음소다. 마찬가지로 [t][tʰ]/t/의 이음으로 같은 음소이고, [k][kʰ]/k/의 이음으로 같은 음소다. (영어에서 , tʰ, kʰ는 이음들이므로 [], [tʰ], [kʰ]로 표시했다.)

 

 눈치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국어는 유기음인지 무기음인지에 따라서 음소들을 구분하고 있다. 반면, 유성음인지 무성음인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반면, 영어는 유성음인지 무성음인지에 따라서 음소를 구분하고 있지만 유기음인지 무기음인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 부분이 한국어와 영어의 음성체계에서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어 원어민과 영어 원어민은 서로의 말소리를 들으면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어 원어민은 한국어 원어민이 자신들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유성음과 무성음을 섞어서 쓰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성대의 진동 여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음소로 인식하기 때문에, 유성 여부는 무시하고 유기여부에 따라서 음소를 구분하는 한국어의 음성체계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은 한국어 원어민 입장에서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이한 음성체계 때문에  '박'씨를 'Park'으로 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한국어 원어민이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영어는 유기음을 다른 용도로 상당히 중요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유기음인지 무기음인지로 음소를 구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유기음과 무기음을 구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실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훨씬 연속적인 언어다. 긴 문장을 거의 쉼없이 연속해서 말한다. 이 때, 단어와 단어 사이의 구별이나 강세 여부를 자연스럽게 나타내기 위하여 중간중간 유기음을 사용한다. 유기음이 들려오면 영어 원어민은 자연스럽게 강세이거나 새로운 단어의 시작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한국어 원어민에게는 없는 감각이고 앞으로 익혀야 할 감각이다.

 

 이번엔 유기음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이 유기음이 한국어와 영어에서 완전히 다르게 사용되고 있어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언어 감각을 얻는 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어와 영어 자음들을 학습할 때, 이들을 비교하면서 명확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우선 간략하게나마 개념을 미리 소개했다. 추후, 개별 음소들을 실제로 살펴보면서 하나하나 귀와 입으로 익혀보도록 하자.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영어음성학__007 _h_와 유기음.apkg


수정 : 2020-02-02 오전 12:02 Ankilog 파일 내의 문구를 다듬고 설명을 보충함


 

 

006 음소 /h/와 성대


 이제 실제 음소들을 다뤄보자.

   

 첫 번째로 다룰 음소는 /h/다. /h/는 한국어의 음소 /ㅎ/과 동일하므로 한국어 원어민이라면 이 음소를 말하고 듣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음소 /h/는 그저 목구멍으로 숨을 조금 내쉬면 나는 간단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한국어 원어민은 /h/ 소리를 쉽고 간단하게 낼 수 있으므로 스스로 소리를 내면서 소리가 나는 원리를 체감하고 이를 음성학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또, 앞으로 계속 부딪히게 될 성대라는 조음기관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h/ 소리내기

음소 /h/ 다음과 같이 나는 소리다.

 


 많이 들어본 소리다. 한 겨울 창문에 김을 서리게 하려고 숨을 내 뿜었을 때 나던 소리다. 아니, 그냥 숨소리다.

 한국어 원어민은 /ㅎ/을 발음할 수 있으므로 동일한 /h/ 소리도 아무런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실제로 내는 소리와 음성학에서 말하는 /h/ 말소리를 내는 방법을 비교해보자.

    

음소 /h/ 소리를 내는 방법

 

  목의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고 성문을 살짝 연 상태에서 공기를 밖으로 적당하게 밀어내면 공기가 성문과 마찰하면서 /h/ 소리가 난다.

 

 음소 /h/를 소리 내면서 느낌을 관찰해보자. 숨을 조금 강하게 내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목이 긴장되고 목구멍 깊은 곳에서 소리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성대의 좁은 틈인 성문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를 구차하게 말로 설명하고 있으니 괜히 머리만 아프고 쓸데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외국어의 음소들을 발음하기 위해서 조음기관을 써서 의식적으로 소리를 내는 법을 익히는 과정에 있다. 즉, 자연스럽게 내던 소리를 의식적으로 익히는 과정을 시작한 것이다.

 음소 /h/는 좋은 시작점이다. 정말 간단한 말소리이고 우리가 쉽게 낼 수 있으며 한국어와 영어 음성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인 성대를 이해하기 좋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2. 성대와 성문

 

 폐에서 출발한 공기의 흐름을 처음 조절하는 곳이 바로 이  성대다. 성대는 목의 후두에 있다

성대에는 두 개의 얇은 판막이 아래와 같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데 그 사이의 좁은 틈을 성문이라고 한다.

 


 그림 실력이 너무 나빠서 성대를 단순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그래서 부족한 내용은 말로 보충하겠다. 성대는 그 조음기관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면서도 동시에 판막을 움직이는 인대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대는 위의 그림처럼 열리고 닫히는 운동을 하지만 소리를 낼 때 성대가 끊임없이 개폐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입술을 생각하면 된다. 입술처럼 공기를 막다가 토해내고, 공기가 나가는 통로를 넓게 하거나 좁게 한다. 또, 작은 틈으로 공기를 내보내 입술을 부르르 떨기도 한다. 

 성대도 목에 있는 입술처럼 움직인다. 특정 소리를 내기 위해서 폐에서 나가는 공기의 통로를 좁히거나 넓히고 공기를 막다가 토해낸다. 또 성대를 살짝 닫고 그 사이로 공기를 밀어내어 성대를 부르르 떨게 한다.


 

 3. 유성음과 무성음


 음성학에서는 성대로 내는 목소리를 보통 2가지로 분류한다. 유성음(voiced sound)무성음(voiceless sound)이다.

 유성음(voiced sound)이란 성대가 떨리는 음성을 말한다. /아, 이, 우, 에, 오/ 같은 모음들이 대표적인 유성음이다. 성대의 위치에 손을 대고 모음을 말해보면 떨림을 느낄 수 있다. 진동이 잘 안느껴지면 고음으로 소리를 내본다. 음이 높을 수록 떨림이 커진다.

 유성음을 낼 때에는 성대를 살짝 닫고 좁은 틈으로 공기를 밀어내어 성대가 공기의 마찰로 진동하게 한다. 이 진동이 바로 유성음의 진동이다. 

 성대가 떨리는 것을 체감해보고 싶으면 입술을 이용하면 된다. 입술을 위아래로 살짝 닫고 공기를 내보내면 입술이 부르르하고 떨린다. 유성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성대에서 벌어진다. 

 무성음(voiceless)은 성대의 떨림이 없는 음성으로 유성음이 아닌 음성이다.

 모든 말소리는 유성음 아니면 무성음이다. 그리고 이번에 익히고 있는 음소 /h/도 성대의 진동이 없는 무성음이다.

 

4. 조음 방법

 음성학은 말소리를 내는 방법에 따라서 말소리를 분류한다. 이를 조음방법에 따라 분류한다고 하는데 보통 폐쇄음, 마찰음, 파찰음, 비음으로 분류한다. 

 마찰음은 조음기관을 이용하여 공기가 이동하는 통로를 좁혀서 공기가 주변 통로랑 마찰을 일으키게 하는 소리다. /h/는 기본적으로 성문의 좁은 틈으로 공기가 마찰된다.

 

5. /h/ 음소의 음성학적 명명

 음소 /h/를 부르는 음성학적 명칭무성성문마찰음이다. 

 음성학에서는 말소리가 나는 조음 원리에 따라서 이름을 붙인다. 조음 원리는 유성음인지 무성음인지, 조음이 이루어지는 위치가 어디인지, 조음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h/무성음이고, 성대의 성문에서 조음되며, 성문의 좁은 틈으로 공기를 마찰시켜 말소리를 만드므로 무성성문마찰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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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앞으로 Anki 파일은 내용과 음성을 분리해서 올릴 계획입니다. 소리를 들으면서 학습할 때에는 이어폰을 연결하거나 소리를 들을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Ankilog 파일: 006 음소 _h_와 성대.apkg


수정 : 2019-12-15 오후 09:40  Anki 파일 내의 문구를 다듬음

005 음소, 이음, 음성체계

 

 영어 음성학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지 멋들어져 보이는 발음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다. 영어의 음성체계를 머릿속에 설치하여 자연스럽게 언어로써 영어를 습득하고 싶어서다. 그렇다면 그 음성체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는 아마 사람 수만큼 다양한 말소리가 있을 것이다. 어떤 말소리들은 서로 비슷하고 어떤 말소리들은 서로 다르다. 언어는 이 무수한 말소리들을 분류하는데 서로 같은 소리와 다른 소리로 구분하는데 특히 소리에 따라서 의미를 구분할 수 있는지 여부를 중점적으로 따진다.

 

 가령, 우리에게 'ㅍ'과 'ㅂ'은 서로 다른 말소리다. 왜냐하면 '풀''불'로 초성 하나만 다르게 써도 의미가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어 원어민인 우리에게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어에서 'ㅍ'은 'ㅂ'과 동일한 말소리다. 물론, 소리가 조금 다르게 난다는 점을 영어 원어민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그냥 'ㅂ'발음할 때 숨소리가 섞여 조금 거칠게 발음된 것'ㅍ'일 뿐이다. 숨소리가 섞이는 이유야 강세에 따라 힘을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말을 시작하면서 숨을 크게 내쉬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영어 원어민은 이 두개의 말소리를 서로 같은 음인 'p'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풀''불'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영어 원어민은 이 두 단어 모두 'pul'로 동일한 단어처럼 생각한다. 또, 같은 이유로 대한민국 여권에 씨는 Park으로 표기 되고 씨는 Paik으로 표기 된다.

 

 음소는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말소리의 단위를 말한다. 위의 예에서 우리에게 'ㅍ'과 'ㅂ'은 각각 서로 다른 하나의 음소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에게 'ㅍ'과 'ㅂ'은 별개의 음소가 아니라 하나의 음소에 속한 살짝 다르게 변형된 말소리일뿐이다. 이를 이음(異音)이라고 한다. 이음은 동일한 음소에 속하므로 이음들 끼리는 바꿔 사용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영어는 'ㅍ'에 해당하는 [] 'ㅂ'에 해당하는 [p]를 모두 /p/의 이음으로 본다. 그리고 음성체계는 수많은 말소리들과 이음이 음소로 분류되어 만들어진 체계를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언어권별로 음소와 이음의 음성체계는 조금씩 다르다. 

(이제부터 음소를 표기할 때는 빗금으로 감싸서 /ㅍ/, /ㅂ/, /p/와 같이 적는다. 그리고 이음은 [], [p]와 같이 대괄호로 감싸서 표기한다.)

 

 그럼 이제 음소와 이음으로 구성된 음성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음소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실제 언어로써 작동하고 있는 말소리를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미닫이/라고 말하려고 할 경우 머릿속으로는 /미닫이/로 말하고 있고 스스로 /미닫이/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개음화 때문에 [미다지]로 말소리가 나간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미닫이/로 찍힌다. 즉, 듣는 사람은 실제로 [미다지]로 들었어도 머릿속에선 /미닫이/로 자동 전환되어 언어로 이해된다. 즉,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은 소리가 머릿속에서 적절한 음소로 전환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는 한국인이 한국어의 이음을 인식하기 쉽지 않아 이해하기 쉽도록 구개음화 현상으로 예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음들도 자신이 속한 음소로 전환되어 머릿속에서 언어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음성체계가 서로 다르면 이음들이 서로 다른 음소로 전환되기 때문에 모국어와 음성체계가 많이 다른 외국어를 배울 때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가령, 이음 [l], [r]은 한국어에서는 음소 /ㄹ/에 속하는 이음들이지만 영어에서는 각각 별개의 음소 /l//r/이다. 따라서 영어 원어민은 leaderreader를 구분하여 발음하고 이해하지만 한국어 원어민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거나 문맥에 따라 추측해야 한다.

 

 또, 영어와 한국어의 음성 시스템이 서로 복잡하게 꼬인 경우도 있다. 한국어의 /ㅂ/[p], [b] 등을 이음으로 가지고 []는 이음으로 가지지 않는다. 반면 영어는 /p/, /b/가 별도의 음소로 구분되고 [] /p/의 이음으로 들어간다. 다음 그림과 같은 경우다.

 

 

 이렇게 소리들을 음소로 전환하는 음성체계가 서로 매우 다르면 또박또박 천천히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각자의 모국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음소로 전환되어 버리기 때문에 적절하게 음성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우선 음성체계를 맞추어 서로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05 음소, 이음, 음성체계.apkg


수정 : 2019-12-02 오전 2:25 문구를 다듬고 이음의 설명 부분 조금 보충함. Anki 파일의 이음 부분도 수정함

수정 : 2019-12-10 오후 2:30 발음기호 수정 [pʰ]으로 교체 Anki 부분은 수정사항 없음

004 분절음과 자음만 발음하기


 말소리는 자음모음으로 나누어진다. 모음은 “이, 에, 애, 으, 어, 아, 우, 오, …” 등을 말하고 자음은 모음이 아닌, “ㄱ, ㄴ, …” 등을 말한다. 말소리의 최소 단위는 이렇게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분절음(segment)라고 한다. 그래서 발음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차근차근 연습하려면 이 분절된 자음과 모음을 각각 개별적으로 소리 내는 법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항상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발음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음은 개별적으로 발음되지만 자음은 반드시 모음과 합쳐서 소리를 내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음만 소리 내보라고 하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소리내기 방식에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

 

 이 때문에 영어를 습득함에 있어 상당한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가령, "strong"이라는 단어를 한국어 원어민은 "스트롱"이라고 발음한다.

 

한국말 "스트롱" 발음이다. 

 

영어  "strong"이다.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한국말의 "스트롱"은 각 글자가 또박또박 끊어지면서 세 글자가 비슷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영어의 "strong"은 소리가 부드럽게 연결되면서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이는 한국어의 "스트롱"은 3음절로 발음되었고 영어의 "strong"은 1음절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스트롱"이라고 발음한다. 또, 영어 원어민이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어도 "스트롱"으로 들린다.

 

 반대로 영어 원어민에게 한국인이 말하는 "스트롱"은 "sɯtɯlong"이라고 들린다. 여기서 “ɯ”는 한국어의 “”에 해당하는 음성기호다. 영어 원어민에게 우리의 "스트롱""strong"이 아닌 “sɯtɯlong”이라는 완전히 다른 단어다. 실제로 구글 번역기에 "스트롱"이라고 쓰면 이에 해당하는 영문 표기는 “seuteulong”으로 나온다.

 

 위에 제시된 소리를 음파의 파형으로 보면 이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래에는 영어 "strong"과 한국말 "스트롱"을 발음한 파형을 나타낸 그림이다. 각 파형에서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아래에 해당 글자를 적어 놓았다.

 

한국말 "스트롱"의 말소리 파형

 

 

 

 

 

 

영어 "strong"의 말소리 파형

 

 

 

 

 

 

 말소리 파형을 보면 모음이 올 때마다 진폭이 커지면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진폭이 클 수록 소리가 커진다. 따라서 실제로 말소리에서 가장 크게 들리고 현저하게 들리는 음이 바로 모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자음에 비해서 모음의 소리가 크므로 다른 자음들은 모음에 얹혀지는 모양새다. 그래서 보통 모음으로 진폭이 크게 부풀어 오른 구간을 구분된 음절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영어의 "strong"은 크게 부푼 파형이 하나밖에 없다. 반면, 한국어의 파형은 크게 부푼 파형이 3곳이 있다. 즉, 영어는 1음절인데 한국어는 3음절로 발음한 것이다.

 

또, 한국말 "스트롱"은 중간 중간 모음 ‘으(ɯ)’에 해당하는 음이 끼어들고 있지만 영어는 ‘으(ɯ)’ 없이 자음들이 바로 붙어서 발음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 원어민이 영어의 마디마디에 모음을 넣어서 이렇게 음절을 늘리는 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듣는 영어 원어민의 느낌은 아마도 일본어 원어민이 한국어의 “~습니다.”를 “~스므니다.”로 한 음절을 늘려 발음하는 것을 듣는 한국어 원어민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자음만 발음하는 것은 개별 자음을 익히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음성/음운론적으로도 음절이나 언어 구조 등 많은 부분과 연결된다. 따라서 처음에 이 부분을 무시하고 넘어가면 한국어 습관에 의하여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가장 처음에 이 주제를 꺼내들었다. 앞으로 개별 자음의 연습을 하면서 자음만 소리 내는 법도 같이 익혀보도록 하자.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04 분절음과 자음만 발음하기.apkg

 내 음성학 공부는 그냥 언어학 교과서에서 음성학 부분을 통째로 외운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언어에서 사용되는 음성의 특성에 집중되어 있지 어떤 언어를 습득하는데 필요한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제 영어를 본격적으로 익히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영어 습득을 위한 음성학 과정을 따로 찾아봐야만 했다. 그리고 넘쳐나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공부할 방향과 커리큘럼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찾아보니 학자들이나 교육기관에서 영어 습득을 위한 음성학 공부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커리큘럼은 상향식과 하향식이 있다. 상향식은 영어의 개별 음성의 발음부터 시작해서 음절, 강세, 억양 등으로 점차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반대로 하향식은 억양으로 유려하게 말을 시작하고 그 다음 개별 음성과 발음을 습득하는 방향으로 학습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리고 최근에는 하향식 방법이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방식인 상향식 커리큘럼은 전통적인 방식이다. 발음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잡아서 연습하고 그것을 조금씩 늘려간다. 그렇게 발음과 음절, 강세, 억양 등을 단계적으로 습득해 나간다. 이 방법은 매우 세세하게 언어를 차분하게 배울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다.


 두 번째 방식인 하향식 커리큘럼은 우선 언어와 친숙해지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문화권 내의 친구들과 어떻게든 말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일상생활에서 함께 해당 언어를 사용하여 빠르게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상향식과 하향식은 모두 장단점이 있다.


 상향식은 잘 준비되어 있고 검증되어 있다. 게다가 이론적으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훈련을 제대로 받으면 언어에 대한 재능과 상관없이 교육의 성과가 어느 정도 보장된다. 반면, 언어의 이론적 습득이 지루할 수 있고, 실제 언어를 사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교육받는 사람이 성실하고 인내심도 많아야 한다.


 하향식은 빠르고 경제적이다. 발음을 습득하긴 어렵지만 억양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리고 억양을 따라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가 억양 언어이기 때문에 억양으로 의문, 감탄, 조롱, 경멸, 분노 등의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이러한 감정 위주의 의사소통을 기반으로 언어 특유의 리듬을 익힐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의사소통의 시작에 방점을 둠으로써 단순히 학교나 교육기관에서의 언어 습득에서 벗어나 원어민들과의 의사소통을 서툴게나마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쓸 일이 많아지고 살아있는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외향적이고 재능이 있다면 빠르게 습득이 가능하지만 내성적이거나 언어의 재능이 약한 사람은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은 단기로 체류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상향식과 하향식 방법의 장단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단점을 살펴본 결과 Ankilog로 전개할 음성학 공부는 세 가지 이유로 상향식 방식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내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하는 하향식 방식은 비사교적이고 다른 사람과 영어로 말할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다. 게다가 재능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많은 영어에 노출되더라도 그저 간단한 말 몇 마디 배우고 그 말로 전부 의사소통하게 될 뿐 보다 나은 스피커가 되지는 못한다. 이 점은 내 모국어인 한국어 실력을 보면 매우 명확해진다. 음성학 공부를 하고 나서야 한국어 발음이 좋아진 나 같은 사람에게 하향식 방법은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 같지 않다. 


 두 번째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다. 많은 한국인이 영어를 매우 잘한다. 단지, 말하고 들을 수 없을 뿐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발음을 익히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수험용으로 공부한 영어들이 쓸모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기존에 눈으로 손으로 익혀놓은 단어들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고 쉬운 문장은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한국인 성인들은 간단히 발음만 익혀도 자신감이 붙어 급속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상향식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향식 방법이 Anki로 접근하기 쉽다. 영어 음성학 공부는 개별음-음절-강세-억양을 익히는 것인데, 개별음, 음절, 강세는 수월하게 카드화하기 좋다. 하지만 억양을 카드화하기는 조금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Anki는 지루한 기초 개념 학습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Anki로 공부할 때는 상향식 방식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본 Ankilog는 개별음-음절-강세-억양 순으로 기초개념부터 차근차근히 상향식으로 학습해나가려고 한다.  Anki의 강점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정을 꾸준히 묵묵히 외우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nki로는 지루한 개념 학습과 훈련의 과정을 짜투리 시간에, 이동 중에, 화장실에서, 틈틈이 소화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외로 영어 사용자 친구를 사귀거나 미드나 영화를 보면 된다. 그러면 어느 새 영어 실력이 크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영어 발음을 어떻게 익혀야 할까? 라고 인터넷에 질문하면 IPA가 나타난다. IPA는 국제음성기호(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인데 소리를 표시하기 위한 알파벳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붙어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IPA가 처음 생긴 이유가 재미있다. 영어를 글로 옮겼을 때의 알파벳과 발음이 크게 달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음성 기호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영어의 역사에서 이 문제는 매번 지적된다. 영어 사용자가 여러 지역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언어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방언이 발달했고, 외래어들이 그대로 영어 단어로 유입되어 변천되면서 철자는 그대로 남고 발음이 변형되거나 발음은 남고 철자가 변형된다. 단어의 철자와 발음을 통합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중간 중간 있었지만 대세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또 다른 변형된 철자와 발음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일부 언어학자들은 영어가 표의문자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알파벳을 말소리 그대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이 영어권 사람들을 위하여 출판한 문법책들을 보면 철자(spell)를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온다. 하물며 오랫동안 출판 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봐도 철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틀린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래서 영어 사용자들도 자신들의 언어가 너무 복잡하고 이상하다고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가 생각난다. 영어 단어는 철자(spell)만 보고 발음할 수 없어서 발음 기호를 따로 봐야 했다. 쓰는 법과 읽는 법이 달랐다. 어쩌면 그냥 외우면 될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이 불일치가 너무 불편하고 짜증났다. 이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친구들 중에는 영어 읽는 법을 자기 식으로 바꿔서 읽는 친구도 있었다. 어차피 시험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는 좋은 성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영어 듣기 시험이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영어 공부를 손 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발음과 알파벳의 불일치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은 글을 쓸 일이 없다면 입말 위주로 편한 단어를 써서 의사소통을 한다. 철자는 따로 공부해야 하니까, 역시 쓰기 편한 단어들 위주로 쓴다. 이들이 철자를 공부할 필요를 느끼는 경우는 그야말로 제대로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하려고 할 때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권의 문맹률도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다. 영어 발음은 입으로 한두 번 굴려보지만 그것보다는 철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조금 영어공부 했다고 하는 이들은 철자를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어권 사람들은 입말을 위주로 익히고 한국인들은 글 위주로 익히는 것이다. 간혹 유튜브를 볼 때, 영어권 사람들이 한국 수능 문제를 풀면서 어려워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도 자신들이 쓰는 영어에서 잘 안 쓰는 단어들 위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난이도를 높이기 위하여 난해한 글 위주로 익히는 한국의 교육 문화가 이상할 것이다.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시험 성적을 위한 언어 공부라는 변종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발음과 철자의 불일치는 나 같이 이런 사소한 불일치를 거슬려 하는 사람에겐 큰 장애였다. 분명히, 표음문자라고 들었는데 왜 소리와 철자가 일관되지 않을까? 한글처럼 비슷해야 하지 않은가? 등으로 생각하면서 궁금해 했다. 그리고 매번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발음과 철자 사이에 내재된 원리를 찾기에 바빠 정작 영어 공부는 등한시했다.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근본적으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험을 위해서 숙련시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20년 가까이 지나서 그 때의 의문을 풀게 되었다. 원어민들도 영어를 쓰면서 이런 불편함을 겪고 있고 철자를 발음하는 무슨 규칙이 있지 않고 그저, 복잡하게 섞여버린 잡탕이라는 점을 깨달아서 불편함이 사라진 것이다. 


 IPA와 관련된 영어 역사를 살펴보면서 영어 훈련의 방향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우선 이해하기 어려운 철자(spell)를 제거하고 모든 단어를 음성기호로 바꿔서 훈련하면 철저히 입으로 하는 영어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생각해보면 매번 글로 쓰여진 영어 위주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발음을 제쳐두고 눈으로 알파벳 영단어를 보게 된다. 발음이 같아도 글자가 다르니 그냥 별 생각 없이 단어를 구별한다. 리듬과 액센트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의미단위로 분절되어 있는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말소리는 이어져 있고 변형된다. 이를 전부 음성기호로 표시하면 의미단위가 아니라 소리단위로 영어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이에 익숙해질 수 있다. 게다가 이럴 경우 원어민들조차 질색하는 철자에서 오는 혼란을 겪을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에 학습 효율도 높아지게 된다. 


 일단, 괜찮은 생각으로 보였다. 어떤 언어든지 입말이 언어의 주를 이루고 글은 입말을 다듬고 형식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치상 입말 위주로 공부하는 방식이 옳고 제대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미 문법과 철자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입말만 트여도 기존의 수험식 영어 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던 지식들도 입으로 능숙하게 옮길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나를 고무시켰다. 어쩌면 무척 재미있는 결과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아이디어에 고양되어 IPA의 도표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괴한 전문용어의 향연과 이해할 수 없는 도표 그리고 이상한 기호들이었다. 이해해보려고 끙끙대면서 읽어보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만 확신하게 만들어주는 도표였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Anki로 문장 암기하기 5 문장 암기로 알게된 암기 과정


 문장 암기를 하면서 어떻게 카드를 만들고 암기할지 고민한 과정의 전반부를 이야기해보자. 


1. 처음 책을 그대로 외우다.


 정말 하나도 모르는 분야의 책을 공부하기 위해서 문장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지, 실제로는 책을 거의 통째로 외우는 것이었다.


 처음엔 책에서 문장을 그대로 베꼈다. 이런 식의 암기도 처음이었고 책의 내용도 전혀 몰라 책을 맹목적으로 외우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글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것이 더 어려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책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오히려 쉬웠다. 또, 글을 외우다 보면 알아서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내용을 명료하게 꿰뚫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이런 경험 때문에 책을 주의깊게 보지 않고 통째로 외워서 파악할려고 하는 버릇까지 생겨버렸다. 



2. 정보를 농축한다.


 하지만 조금씩 이런 식의 공부에 익숙해지면서,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깊게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효율적이고 깊은 공부일까? 당시의 생각은 간단했다. 정보가 농축된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문장1 : 멕시코의 수도는 멕시코 시티다.

 문장2 : 멕시코 시티의 면적은 1,400이다.

 문장3 : 멕시코 시티의 인구는 대략 900만 정도다.


 위에 나열된 3개의 문장은 서로 연관된 정보다. 개별 카드로 만들어 공부하면 다음과 같이 각 문장별로 2개의 카드를 만들어 6개의 카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문장1을 노트1로, 문장2를 노트2로, 문장3을 노트3으로 하여 빈칸 만들기(Cloze Deletion)로 노트별로 2개씩 카드를 만들어 보았다.


 노트1 : {{c1::멕시코의 수도}}는 {{c2::멕시코 시티}}다.

 노트2 : {{c1::멕시코 시티의 면적}}은 {{c2::1,400}}이다.

 노트3 : {{c1::멕시코 시티의 인구}}는 대략 {{c2::900만}} 정도다.

*{{c1::text}}은 내부의 text를 빈칸으로 만든 카드1이라는 의미

 

 하지만 이를 다음과 같이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


문장 : 멕시코의 수도는 면적 1,400에 인구 900만 정도의 멕시코 시티다.

노트 : {{c1::멕시코의 수도}}는 면적 {{c2::1,400}}에 인구 {{c3::900만}} 정도의 {{c4::멕시코 시티}}다.


  이제, 동일한 정보를 공부함에 있어서 글자 수가 줄어들었고, 노트는 3개에서 1개로 줄어들었으며, 카드는 6개에서 4개로 줄어들었다. 확실히 효율적인 것 같다. 


 이렇게 문장을 농축하면 효율성 말고도 2가지 이익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첫 번째 이익은 지식이 총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효과다. 연관된 정보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리면 경험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지식은 그저 1개의 지식일 뿐이지만 총체적인 지식은 하나의 지식 덩어리가 된다. 더 많은 정보들이 지식에 결합할수록 그 지식은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두 번째 이익은 지식의 정보량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문장 속에 포함된 다양한 지식들의 관계는 명시적으로 적시된 내용 말고도 암묵적인 내용들을 암시한다. 가령, 위의 경우에는 인구밀도를 계산해볼 수 있다. 



3. 문장을 다듬다.


 나름 흡족하게 카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공부를 하다보면 계속 부족한 점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아래와 같은 문장을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不은 동사나 형용사 앞에서 부정하고 … 그러므로 不 다음에 오는 단어는 동사로 풀이해서 이를 부정한다.


 위 문장은 처음 외울 때 별 문제없었다. 입에 인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자연스럽게 글을 읊을 수 있도록 만들어놨는데 다음 날 복습을 하려니, 머릿속이 헝클어지면서 혼란이 일어난다. 왜 그럴까? 한참을 들여다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앞에서 不(아닐 불)자가 동사나 형용사 앞에 온다고 말하고서는 뒤에서는 不(아닐 불) 뒤에 동사가 온다고 적혀있었다. 앞 문장에는 포함된 형용사가 다음 문장에서 빠지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자가 오타를 낸 것인지, 오타라면 앞의 형용사가 오타인 것인지 아니면 형용사가 빠진 것이 오타인지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도 고민된다. 이러니 머리가 복잡하고 기억이 헝클어진 것이다. 결국, 책을 한참 들여다보고 형용사를 뺀 것이 오타로 판단하여 형용사를 추가해서 문장을 만들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문제없이 명쾌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뇌의 시스템들은 가솨적(plastic)으로 경험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

 

 위의 문장은 “가소적(plastic)”이라는 단어가 오타가 발생했다. “가소적”이라는 말을 잘못 쓴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가솨적”이라고 썼는지 구별하지 못한다면, 이 문장은 매번 복습할 때마다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오타들은 상대적으로 찾기도 쉽고 구별하기도 쉽다. 악질적인 경우는 자연스럽지 않은 어색한 문장이나 말이 되는 것 같은 비문들이다. 가령, 다음의 문장은 아무리 봐도 어색한 문장이다. 


겹친 분포를 보이는 음들은 음성적 환경에 의해서 음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므로 대체 틀의 빈칸에 어떤 음이 들어갈지 예측할 수 없다.


 위의 문장은 아직도 외울 때마다 허둥대는 문장이다. 왜 이리 입에 달라붙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영어 번역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최근 번역기 사용이 늘어나면서 무언가 잘못된 부분을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하고 불쾌한 문장들이 늘어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타, 비문, 이상한 문장, 내부적으로 무언가 납득이 되지 않는 글들을 외우게 되면 공부의 효율이 급속히 떨어진다. 처음 공부할 때도 입에 잘 달라붙지 않고, 의미도 혼란스럽다. 입으로 반복하면서 적정한 리듬과 의미를 찾아도 그 당시에만 외워질 뿐, 다시 복습을 하면 처음 외울 때 새겼던 의미들이 불분명하고 다시 기억해내기 힘들다. 지식이 어려워서는 아니다. 분명히, 글을 처음 외울 때는 납득했다. 글을 입 안에 굴려보면서 적절한 리듬과 의미를 발견하고 납득하면서 글을 외웠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그 납득이 사라져 버리고 다시 의문에 생긴다. 무슨 일일까?


 이런 글이나 문장을 복습하면 글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없어도, 그 대강의 내용은 머릿속을 맴돈다.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 점은 명확하다. 하지만 몇 가지 키워드만 간간이 떠오른다. 혀끝에서 말이 맴돌지만 설명할 수 없다. 이건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그런데 문장을 다듬고 오타를 고치면 신통하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입에서 해당 글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고 내용들은 조화롭게 배치된다.


 경험이 쌓이면서 외워야할 문장을 다듬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오타를 없애고, 비문을 미리 제거한다. 입으로 읊어보면서 어색한 문장인지 확인한다. 문장 내부적으로 상호 모순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분명히 공부하기 한층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고, 외울 문장과 글을 추리면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문장과 글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많은 것들이 명쾌해진다.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매순간 카드를 복습할 때마다 문장을 수정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수정할 필요가 없어지고, 깔끔하게 정리된다.



4. 내용을 정리하다.


 아쉽게도 문장만 정리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내용도 중요하다. 외우려는 글 내용들이 서로 중복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처럼 문장 내에서 정보가 잘 안 맞거나 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이미 기존에 외운 카드들과 새로운 카드의 내용이 겹쳐지면 혼선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눈앞의 카드를 처음 외울 때는 잘 외워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복습하려고 하면 잘 외웠던 문구가 갑자기 혼선되거나 먹통이 되어버린다. 문장과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내용은 대충 기억나지만 비슷한 여러 구절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혼동되거나 혹은, 내용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내용은 대충 기억나지만 비슷한 여러 구절이 동시에 떠오르는 경우는 비슷한 내용을 문장만 다르게 외운 경우다. 아래는 불교에서 “금생의 행복”의 조건을 나열한 두 문장이다. 


문장 1 :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금생의 행복을 얻게 된다.

문장 2 : 보시, 지계, 학문, 기술이 금생의 행복의 조건이 된다.


 위의 두 문장은 동일하게 “금생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미묘하게 다르다. 앞의 문장에는 “학문”이 빠져 있다. 그래서 매번 이 문장을 외울 때마다 “학문” 때문에 혼동이 온다. 즉, 첫 번째 문장을 잘 외우고 나서도 무언가 빠졌다는 느낌을 계속 받거나, 두 번째 문장을 잘 외우고 미심쩍은 기분이 남게 된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두 문장이 믹스되어서 이상한 문장으로 떠올리기도 한다. 즉, “보시, 지계, 기술이 금생의 행복의 조건이 된다.”로 외우고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게 뭐였지 하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식이다. 


 내용이 상충되는 경우는 더 큰 혼동이 온다. 다음은 문단 나누기를 설명하는 글이다. 


문장 1 : 문단은 보통 3줄이 지나면 가독성을 위하여 나눠줘야 한다. 

문장 2 : 문단은 글자 수가 아니라 장면과 의미단위에 따라서 나눠줘야 한다. 동일한 이야기는 한 문단으로 다른 이야기는 다른 문단으로 나눈다.


 글쓰기를 설명하는 서로 다른 두 책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하나는 가독성을 중시해서 문단을 대략 3번째 줄에서 나누라고 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의미 단위, 이야기 단위에 따라서 문단을 나누고, 분량은 상관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문장을 외울 때는 보통 처음부터 막힌다. 이미 문장 1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문장 2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문장 2를 외우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다음번 복습에서는 어김없이 충돌이 일어나면서 혼란이 발생한다. 


 중복된 문장은 교통정리를 해줘야 수월하게 공부를 할 수 있다. 가령, 비슷한 내용들이 미묘하게 다른 경우 통합해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고 다른 문장을 삭제하는 편이 좋다. 그러면 문장도 정리되고 외워야할 카드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서로 상충되는 내용의 카드는 고민이 필요하다. 본인에게 확신이 있다면 그 확신에 부합되는 카드를 외우면 된다. 확신이 없다면 절충안을 만들어 본다. 가령, 위의 예시된 문장에서 이렇게 바꿔본다. “문단은 의미단위에 따라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가독성을 위해서라면 되도록 짧게 써라.” 정도로 절충해볼 수 있다. 마지막은 서로 다른 의견들 앞에 그 맥락이나 작성자를 적어주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학문에서는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이 경우 여러 다양한 관점을 의미하는 상충된 문장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외우면 보다 풍부한 공부를 할 수 있다. 이 때는, 서로 대비되는 문장을 함께 나열해서 아래와 같이 하나의 글을 만들어 외운다. 


A라는 책은 문단을 글자 수가 아니라 장면과 의미단위에 따라서 나누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B라는 책은 문단은 보통 3줄이 지나면 가독성을 위하여 나누라고 이야기한다.


 A라는 책과 B라는 책이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의 문장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문장을 만들어 암기하면 서로 내용이 대조되는 효과가 일어나 오히려 기억히 선명해진다. 


 앞서, 문장 다듬기에서 말했듯이,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처음 공부할 때 기존에 공부한 내용과 중복되는지 상충되는지 여부를 파악하면 좋겠지만, 보통은 처음 공부할 때 그런 내용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이나 글을 외우고 곱씹으면서 머리에 정착되는 과정이 진행되어야 비로소 이런 내용의 중복이나 상충을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공부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카드를 수정하고 정리해야 한다.



5. 빈 공간


 앞서, 문장을 다듬고 내용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글이나 문장 형태로 머릿속에 집어넣게 되면서 지식을 머리에 주입할 때,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감이 오기 시작한다. 보다 나은 학습을 위하여 이런 부분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비록 개인적인 경험들을 정리해봤다. 


 우선, 공부는 시간이 걸린다. 옛말에 “보는 즉시 깨닫는다.”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보고 다 아는 천재들에 대한 묘사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보는 즉시 알고 깨닫는 사람은 천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 같은 일반인은 배우고 익혀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Anki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이야기다. 그저 일상에서 보거나 들은 내용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경우가 있다. 무척 뜬금없는 경험인데, 지하철에서 졸다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갑자기 알아진다. 곰곰이 그런 내용들을 추적해보면 보통 2년 전에 발생한 일이 갑자기 정리되어 나타난다. 2년 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2년 전에 했던 누군가의 행동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뜬금없이 깨달아지는 생생함과 명료함을 경험해보면서, 직관적으로 그 지식이 이제 나에게 안착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2년 만에 깨닫는 경험을 자주 접하다 보니 지식의 숙성 기간을 2년이라고 생각했었다. 즉, 어떤 내용을 보고 접했을 때, 별 다른 사항이 없으면 2년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거나 혹은 영원히 묻혀버린다.  하지만 Anki로 카드를 외우니 그 과정이 훨씬 빨라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스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 2년이라면 입으로 문장을 곱씹어 보면서 외우면 그 과정이 짧으면 1~2일에 길면 2~3주 내로 압축적으로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했다. 


 열심히 외워서 머릿속에 들어간 지식들은 숙성된다. 그렇다 숙성이다. 즉,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어떤 일들이 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음은 내가 정말 잘 외우고 있는 카드다. LaTeX에서 문서 클래스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문서 클래스 proc은 article 클래스에 기반한 프로시딩용 문서 클래스다. 


 위 문장은 참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른다. 프로시딩이 무엇인지 모르고, article 클래스에 기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읽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수월하게 기억에서 꺼낼 수 있다. 그래서 외울 때마다 신기하기 그지없다. 보통은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심도 안생기고 몰라도 문제가 없어서 여전히 그 내용을 찾아보지 않는다. 아마도 끝까지 찾아보지 않을 것 같다. 


 이상한 문장으로 구성된 카드, 내용이 중복되거나 상충되는 카드에서 발생한 문제는 대부분 이해와 관련이 있다. 이상한 문장은 그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점이 문제이므로 내용을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문장을 정리하면 해결된다. 내용의 중복은 중복된 부분을 이해하고 수정하면 되며, 내용의 상충은 절충하거나 대비되는 의견을 나란히 제시하여 이해하면 해결된다. 즉,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문장을 정리하고 내용을 구분하여 정리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처음엔 지식의 숙성은 머릿속에 들어간 지식이 이해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위의 문장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임에도 일단 외운 것들이 온전히 유지되는 것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이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위와 같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잘 외워지는 카드의 내용을 나는 ‘빈 공간’에 들어간 지식이라고 부른다. 이런 지식들의 공통점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내 머릿속에는 이 카드에 실린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없었다. 오직, 문장이 이상하지 않은지 정도만 판단할 뿐이다. 그래서 다른 머릿속의 지식에 의해서 검증되지 않고, 섞이지도 않는다. 즉, 복잡한 머릿속에서 온전히 빈 땅에 정착한 지식인 셈이다. 


 명리학을 처음 공부할 때의 상황이 떠오른다. 어떤 책이 좋은 것인지 몰라서 대형서점에 가서 괜찮아 보이는 책 하나를 골라 다짜고짜 외웠다. 처음 외웠을 때는 관련 지식이 하나도 없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책에 적혀진 말들을 금과옥조처럼 외우고 새기고 또 새겼다.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지식으로 인한 성취감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그 책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중복된 내용과 상충된 내용이 하나둘씩 발견되었다. 기를 쓰고 문장을 수정하고 내용을 정리하면서 공부를 계속했지만 저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 신명나게 외웠던 내용들은 매번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혼란스럽고 신뢰할 수 없다는 인상을 주면서 지금은 혼란스러운 일련의 지식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완전히 새로운 지식은 이해할 수없어도 일단 암기하면 머릿속에서 그대로 유지된다. 왜 그럴까? 머릿속에 들어간 지식은 신경적 상호작용을 통해 기존 지식 체계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지식이라면 기존의 지식체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그저 지식이 더해질 뿐이다. 하지만 기존 지식체계와 관련이 있다면 새로운 지식은 융화되거나 분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 외운 지식이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변형되기 시작한다. 좀 더 익숙한 문장으로 변화되고, 내용들도 섞인다. 이 과정은 합리적인 이해를 낳거나 정확한 정답을 담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삶의 흐름과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지식이 통합되거나 분류될 뿐이다. 이 과정은 기존 지식체계에 새로운 지식이 끼어들어 자라나는 과정에 가깝다. 새롭게 심어진 지식은 많이 사용되면 자라나면서 주위의 지식을 통합할 것이다. 반면,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다른 지식에 통합되어 변형될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 지식이 없는 완전히 빈 공간에 터를 잡은 새로운 지식은 일단 심어지면 주위의 다른 지식으로부터 변형되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서 별 문제 없이 유지된다.



6. 의미와 형식


 내용적인 측면 위주로 이야기했지만 문장도 고려해야 한다. Anki를 이용하여 많은 것을 외우면서, 지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추상적인 무형의 정보가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지식은 사진, 영상, 소리 등을 매개로 언어로 나타낼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느끼는 지식이 된다. 물론, 언어 이외의 정보 형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반드시 다른 정보 형태가 언어와 연합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이번엔 글과 문장을 외우면서 겪게 되는 것들을 이야기해보자.


 열심히 외운 문장이나 내용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 체계 속에서 변형된다. 앞서, 지식 공간에 새로운 지식이 삽입되었을 때 의미들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해당 지식의 의미가 변형되는 현상을 이미 이야기했다. 이번에 이야기할 것은 의미(내용)와 언어(글이나 문장)의 상호 관계에 의하여 기억이 변형되는 경우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의미(내용)와 언어(글이나 문장)가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를 겪는지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경우 1 : 의미(내용)가 중심이 되어 언어(글이나 문장)가 변형된다. 

경우 2 : 언어(글이나 문장)가 중심이 되어 의미(내용)가 변형된다.


 의미(내용)가 중심이 되어 언어(글이나 문장)가 변형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다. 


문장 1 : student는 학생이라고 풀이한다. 

문장 2 : student는 학생이라고 해석한다.


 외국어 관련 책에서는 외국어를 “풀이한다”, “해석한다”, “번역하다” 같은 문구들이 자주 등장한다. 의미는 차이가 없다. 어느 것으로 외워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풀이한다”와 “해석한다”가 계속 헷갈렸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문장의 자체 내용을 떠올리지 못하고 복습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이 단어의 혼용에 단련이 되어서 서로 헷갈려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해당 카드를 만날 때마다 살짝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마 위와 같은 사례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미가 동일한 사소한 단어 차이이므로 무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완전히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를 든 이유가 있다. 우리 머릿속에서 문장과 의미가 얼마나 상호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지 설명하고 싶어서다. 글과 문장이 의미를 전달하므로 너무 당연한 말이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의미가 동일하다면 말이나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사례도 “풀이한다”와 “해석한다”를 철저하게 구분지어 외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지금은 마음을 비우고 있다. 이 사례가 너무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살펴보자. 


戌에 대한 설명

사기-율서: 言萬物盡滅

연해자평: 滅也 萬物滅盡


 위의 문장은 역학에서 12지지 중 戌(술)토에 대한 설명이다. 위의 문장은 사기-율서에서 발췌했고 아래 문장은 연해자평에서 발췌했다. 의미는 동일하다. 사기-율서는 말미에 盡滅(진멸 - 없어짐)로 끝났고, 연해자평은 말미에 滅盡(멸진 - 없어짐)으로 끝냈다. 의미의 차이 없이 그저 한자의 순서만 다르다. 내 머릿속은 “戌(술)토-없어짐-滅盡 또는 盡滅” 로 구조화되어서 3년째 외우고 있어도 매번 혼동이 일어난다. 의미가 동일하니 아무리 구별하여 머릿속에 넣어도 서로 혼용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사례를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아무리 문장을 정확하게 외워도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동일하거나 비슷한 의미의 다른 단어로 대체되고 우리는 이를 파악하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낯선 단어를 사용했다면 자주 쓰는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바뀐다. 실제로 오랜 기간이 지나 문장을 다시 복습하려 할 때, 낯선 단어들이 완전히 익숙한 단어들로 대체되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내용들이 지식 공간에서 변형되듯이 문장들도 자신의 고유한 언어습관에 따라서 변형되어 버린 것이다.


 언어(글이나 문장)가 중심이 되어 의미(내용)가 변형되는 경우는 한문을 공부하면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음이 동일하지만 뜻이 다른 한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다. 


千字文 112 해구상욕 집열원량(骸垢想浴 執熱願凉)


 위의 구절을 외울 때마다 浴(목욕할 욕)은 매번 欲(하고자할 욕)으로 잘못 쓴다. 다행히, 떠올려 보고 틀렸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지만 매번 欲(하고자할 욕)으로 한 번 쓰고, 그 다음에 틀렸다는 것을 자각하고 浴(목욕할 욕)으로 고쳐 쓴다. 두 글자가 음이 같고 모양도 나름 유사하기 때문에 혼동이 발생한다. 실제로 한자는 음이 같은 글자들이 동일한 글자처럼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非(아닐 비)와 匪(도둑 비), 維(벼리 유)와 惟(생각할 유), 而(말 이을 이)와 以(써 이) 등이 그런 사례다. 옛날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글이나 문장을 외우기 위해 입 속에서 열심히 음미하다 보면 적절해 보이는 리듬과 호흡이 생기고 의미도 유려하게 연결되어 총체적인 지식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 리듬과 호흡은 정해진 것은 아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혹은 앞서 복습한 카드의 호흡이 그대로 남아서 매번 새롭게 읽히기도 한다. 완전히 같은 글이 새롭게 읽힐 때마다 문장의 의미는 새로워진다.


 매번 새로워지는 문장의 맛 때문에 이를 사색의 수단으로도 잘 사용했다. 잠이 안 오는 날이면 집 앞의 놀이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굴할 때까지 입으로 문장을 외우면서 새로운 리듬과 호흡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새로운 의미는 반드시 새로운 호흡과 리듬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들을 돌이켜 보면 의미와 형식이 서로 얼마나 분리 불가능하고 긴밀한지 절절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7. 신나게 공부하다.


 앞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엔, 책을 그대로 외웠다. 외우기가 쉽지는 않지만 내용에 대한 이해도 잘 되고 독서도 깊이 있게 이루어지면서 재미있게 했다. 그러다가 공부의 효율을 높이려고 정보를 농축해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보다 효율적이고, 더 생생한 지식을 얻으며 암묵적으로 내포된 지식들까지 한꺼번에 공부하려고 욕심을 부린 것이다.


 이런 밑바탕에서 실제로 공부해보니 공부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자주 복습에 실패하게 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나는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이다. 


 문장은 외우기 쉬운 문장과 외우기 어려운 문장이 있다. 외우기 어려운 문장은 글 내부의 정합성이 망가진 문장, 비문, 오타 등의 문장이다. 일단 외웠다 하더라도 다시 복습을 할 때도 문제가 많다. 


 내용도 문제다. 중복된 내용들은 혼동을 주고, 상충되는 내용들은 기억을 되새기는데 큰 장애가 된다. 


 이런 저런 사례를 겪으면서 지식이라는 것이 머릿속의 지식체계에 섞여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숙성 시간이 필요하고 적절한 문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 간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언어와 지식은 거의 한 몸을 이루고 있어 의미가 동일한 단어들은 서로 대체되고 동일한 음을 가진 글자들도 서로 대체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폭주 기관차처럼 미친 듯이 책을 외우면서 얻었던 경험을 정리한 것이다. 정말 즐겁게 공부했고, 얻는 바가 많았었다. 하지만 점점 공부하는 카드가 늘어나면서 어느 순간 이런 식의 공부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장 암기의 비효율성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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