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무게가 세 자리 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무릎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한 끼 식사로 6~7천원짜리 시장피자를 먹어왔지만 세 자리수를 넘지 않던 내 몸무게는 담배를 끊으면서 늘어난 군것질에 세 자리수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몸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무릎이 나가고, 고혈압이 치솟아 성질머리가 나빠질 것이고, 무거운 몸 때문에 호흡 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건강검진에서도 대사질환 증후군이 있으니 감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해왔다. 이런 모든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몸무게를 대학시절의 몸무게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재로부터 20을 감량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아무나 하나 내 스스로를 잘 아는데 무턱대고 절식하기 시작하면 그 요요증상으로 몸무게가 200을 뚫고 올라갈지 모른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열심히 할 정도로 의지력이 세지 않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운동 후 피자 한판을 먹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기 때문에 운동만으로 살 뺀다는 생각은 이미 접었다. 존 다이어트 같은 책을 열심히 읽어봤는데 이건 뭐 영양사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로 보였다. 인생을 전부 다이어트에 갈아 넣을 각오라면 이런 방법을 실천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다이어트 관련 책들은 무척 많은데 각종 다이어트 방법들을 읽어보니 이 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적절한 적응의 기제가 있다면 사람은 그에 맞는 삶의 형태를 보이는 법이다. , 지금보다 20줄어들은 몸무게로 사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 있고, 그에 맞는 생활습관과 삶의 양태를 구축하면 자연스럽게 살은 빠지고 정신과 육체는 가장 조화로운 형태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살을 빼려면 그러한 상황을 만들고 생활로 고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삶을 모형을 생각해보다가 좀 더 단순한 질문에 도달했다. 그 질문은 , 나는 필요 이상 먹는가?” 였다. 삶의 모형을 구축할 필요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이것이 궁금해졌다.

 

다이어트 방법을 고민하면서 여전히 피자 한판을 한 끼 식사로 먹고 있던 삶에서 어느 순간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개선되어 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화로운 수면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야식이 중단되었다. 종종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해당 문제의 실체가 보이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야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야식을 줄여야 한다고 말할 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야식이 나의 정상적인 3끼니 중 한 끼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면증이나 수면관련 이슈를 경험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잠이 안 올 때는 무언가를 먹어야 그나마 잠을 자기 쉽다. 그래서 나에게 야식은 하루 세끼 먹는 식사로서 당연히 주어진 정당한 식사였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기아에 허덕이게 되고, 잠은 오지 않으며, 정당한 먹을 권리마저 빼앗긴 분노까지 솓구치니 잠을 잘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야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도 아쉬움도 허기도 같이 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야식은 내가 왜 필요 이상으로 먹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야식은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 잠이 와야할 시점에 잠이 오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오고 그 짜증을 벗기 위하여 잠을 자야한다는 핑계로 공격적으로 먹곤 하였다. 한 번 이와 같이 생각이 고정되니 그동안의 온갖 연쇄반응이 보였다. 공부하다가 폭식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폭식하고, 잠이 안와서 폭식하고, 문제가 안 풀려서 폭식하고,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려서 폭식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두통과 체증 외의 모든 고통에는 항상 식탐이 따랐다. 심지어 두통과 체증도 폭식이 너무 심해서 더 심해진 것이다.


그럼 나는 왜 폭식을 했는가?

 

짜증은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 보는 것이 싫어 외면하기 위해서 폭식을 했다. 먹을 때는 그 단맛에 주의가 집중되고 쾌락이 따르니 고통과 고통을 일으킨 상황과 자책감 등을 잠시 잊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고통이 쉽게 사라질리 없으니 당연히 배가 불러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먹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은 쉽게 남용된다. 사소한 짜증이나 귀찮음을 마주치게 되어도 일단 먹었다.

 

고통을 감내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서 자극적인 것으로 정신을 돌리는 행동 패턴을 내 안에서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이 패턴은 나의 삶의 핵심이었다. 괴로운 것을 잊기 위하여 다른 것에 몰두하는 이런 패턴은 지나친 몰입으로 나타났고 가끔은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 패턴을 발견하고 의식하면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감내하고 나아가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내 삶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상승무드를 타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통을 직시하고 피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야식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잠을 자지 못할 때마다 그 순간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낮에 활동할 때는 별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짝 피곤하다. 힘들다. 정도였다. 그래서 불면증의 개선은 단지 귀찮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수면이 개선되고 나니 그동안 받고 있었던 고통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미묘한 스트레스를 거의 먹는 것으로 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고통을 항상 직시하고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수면 난조로 인한 고통은 피로와 인내심 저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하루 종일 영향력을 행사하니 단순히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 따로 고통으로 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고통을 직시한다고 해도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기는 거의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먹는 다는 것을 알았어도 수면의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면 지속적인 고통과 낮아진 인내심의 문제로 먹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동안 수면의 문제를 단순히 잠을 못자게 해서 피곤하게 만든다는 수준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수면을 개선해도 밤에 잠을 못자는 고통이 해결되겠지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면 습관이 개선되어 보니, 그 정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의 삶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질척질척한 진창을 걷는 것과 같다면 이후의 삶은 산뜻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정신은 맑아졌고 하루하루가 상쾌하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좋아지는게 느껴진다. 표정은 산뜻해지고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수면의 질이 개선되기 이전의 삶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스트레스와 고통 짜증이 상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식탐으로 더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으로 다이어트가 되고 있다. 


이전으로 돌아가기 싫다. 하지만 원인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일을 쉬고 있고 다른 스트레스를 놓아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개선된 수면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지만 다시 일을 하고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시간에 쫓긴다면 다시 수면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개선된 수면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개선된 수면을 반석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 동안 수면의 질을 악화시켰던 원인을 찾고 최고의 잠을 잘 수 있는 방법을 몸에 각인해야만 한다. 그래서 다시 수면을 악화시키는 다양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어가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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