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 속에서 원인이 이것일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급작스러운 개선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내가 밤의 시간과 수면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어떤 모델의 변화였다.

 

원래의 모델은 이렇다.


일단, 밤의 시간에 대한 나의 모델은 아래와 같다.  


밤의 시간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으로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 없이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활동은 밤에 이루어지고 낮의 활동은 그저 부과된 의무 같은 것으로 짐에 불과하다. 내 삶의 핵심은 밤에 이루어지므로 낮에는 대충 활동하고 밤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다. 


수면이란 것은 그저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꺼지는 것이고 수면은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나에게 수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잔다. 하지만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신체의 자연스러운 적응으로 더 깊이 푹 잠들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할수록 수면의 질이 높아져 이득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평생의 수면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나에게 이러한 모델이 작동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게다가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등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이 모델은 그 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수면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하나둘 삶의 방향성과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덕분에 혼란스럽던 문제들이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수면의 문제가 실체를 드러냈고 위의 모델은 결국 하나씩 깨지고 있었다.

 

밤의 시간이 나의 시간이라는 생각은 직장이나 학생들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프리랜서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제는 깨어있는 시간이 전부 소중하고 나의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서 주위에 함부로 간섭해 올 사람도 없고 주위가 시끄러우면 귀마개를 하면 되니 더 이상 밤에만 자유를 누릴 이유는 없게 되었다.

 

두통과 체증이라는 숙원이 해결되면서 삶의 스트레스가 내 스스로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지니 짜증도 줄었다. 나의 패턴상, 고통과 짜증은 그것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몰두하게 하는데, 금연으로 식탐이 생긴 것 말고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대한 욕구 자체는 줄어들고 있었다. 자극적인 게시판 글이나 정치적 논쟁을 보는 것, 영화나 드라마를 밤새 시청하는 것과 헐벗은 사람들을 보는 단순하고 말초적인 욕구가 가라앉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밤의 시간에는 공부를 하거나, 강의를 듣고 운동을 하는 미치도록 건전한 일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조건이 무르익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때, 최후의 조각을 맞춰준 것이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서평을 다시 쓰겠지만 경험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던 내용이 무척 많아서 정말 쉽고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자주 낮잠을 자서 공부에 큰 효과를 보았던 나의 경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도 있고, 고등학교 때 잠을 자지 않고 버텼을 때 느꼈던 수면 부족의 파괴적 위험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덕분에 잠을 안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를 안고 사는 것인지 납득해버렸다. 이 납득으로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 완전히 깨졌다.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해서 불면증을 치료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잠을 못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 잠을 못자는 것이 지옥이었다. 단지 그 원인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불면증에 괴로워할 때는 꿀잠을 애타게 원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기존의 모델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각성 상태로 있을 수 없을 때야 잠을 시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으면서 그 동안 내 속에 있던 중2 시절 읽은 3시간 수면법의 논리가 처음으로 깨지고 수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명확하게 확립되면서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현재의 개선된 수면상태는 일시적이다. 수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깨졌지만 현재의 낮아진 스트레스와 고통이 개선된 수면상태의 한 축이기도 하다. 이는 지병의 개선도 있지만 현재 일을 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을 하면 당연히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시 밀려올 것이고 그러한 고통에 대한 회피와 일을 한 자신에 대한 보삼심리로 다시 밤의 시간을 열심히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다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잠을 자지 않고 놀려고 할 것이다. 또한, 일을 많이 벌리는 본인의 성격상 밤에 일하는 것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면증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불면증이 단지 귀찮고 그 순간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면이 개선된 지금은 개선된 수면 상태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경험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잠을 못자는 삶은 삶아지고 있는 개구리의 처지와 같은 지옥이었다. 마냥 지속되는 고통과 피로, 인내심 저하로 삶이 비틀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어도 이를 인지하기도 어렵고 저항하기 어려운 그런 지옥이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항상 여유로운 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마 다시 수면이 박탈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어야 마음이 놓이리라. 그리고 그 시작은 나의 수면 습관을 개선하게 해줬던 최후의 조각인 리처드 와이즈먼나이트 스쿨을 씹어 먹는 것으로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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