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완전언어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니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또는 일상 활동을 그림이나 기호들로 표현하는 보드 등을 이용해 힘들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즉, 힘들게 대화가 가능한 셈이다. 또, 언어 능력만 없어지거나 극소량 남고 나머지 인지 기능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므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욕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언어활동이라는 것과 연계되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다. 


가령,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는 이 ‘커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언어로서는 모른다. 이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경험을 과연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이 서술한 그런 기억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세계를 글로써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해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어증 관련 증상을 확인해보니 물건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명칭실어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어증 환자에게 명칭실어증이 동반된다. ‘커피’라는 단어를 언어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완전언어상실증과 같지는 않겠지만 약간이나마 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은 체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칭을 몰라서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1996년에 이메일에 사용되는 @ 표시를 처음 봤다. 당시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삐삐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오직, 일부 PC통신 유저들만 이메일을 사용해봤던 시기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관련 도서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 @ 표시를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기호 하나 모르는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점점 @ 표시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이나 각종 유인물에 @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다가 문장의 중간에 @ 표시가 나타나면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고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고약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기호가 기억되지도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책만 덮으면 언제 그런 기호를 봤냐는 듯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양도 기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 바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 기호에 ‘골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이 기호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책을 읽을 때 장애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름 즉, 명칭을 알 수 없는 기호를 접하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텍스트 흐름이 끊긴다.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만나면 머릿속에 블랙홀이 열리면서 그 동안의 읽었던 모든 맥락과 지식이 빨려들어가고 오직 순수한 뇌만 남는 것 같았다(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상태를 마냥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훈련되면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호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 기호의 명칭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뿐 뒤돌아서면 그런 기호가 있었는지도 거의 바로 까먹는다. 이름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첫 번째 지식은 바로 이름을 아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생각의 흐름에 끼어들 때 우리는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앞의 사물을 정신에 정위치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한 순간 자신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라캉이 언급한 바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누빔점이 없어 끊임없이 맥락을 바꿔가면서 논리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 모르게 순식간에 몽골초원으로 이동시킨다면 그는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주위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삶의 맥락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남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맥락을 어찌어찌 복구하거나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명칭실어증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기억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어증에 걸렸을 때 갑자기 찾아올 혼란과 당혹감 같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느끼던 와중 별안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자꾸 뜬금없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해서 시작한 고찰이었는데, 솔직히 여기에 어떤 마법같은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의식이 신비로운 정답을 알려준다는 식의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고 명칭실어증으로 인한 답답함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왜 내가 그 사례를 계속 다시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본 경험을 내 무의식이 완전언어상실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가졌던 그 막막함과 고역감은 결국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답답함처럼 갑자기 언어적 맥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란 것이 명칭실어증을 유추하면서 가졌던 그런 류의 답답함과 당혹감을 한껏 늘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내가 완전언어상실증 비슷한 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손상이 진행된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정도 비슷한 경험일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전개하다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경험을 완전언어상실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개인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 고찰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포스팅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꽤 오묘하고 그 질문에 무언가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나름 내보려고 노력했다. 제시된 의문점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고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조각 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사람은 우선 아는 것을 총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문제점을 뭉뚱그려서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은 해답을 자동으로 찾게 되었다. 굉장히 익숙한 대답이 한 가지 떠올랐다.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가 작동되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순간 익숙했던 드라마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원점에서 다시 이것을 보게 된 것이라는 대답이다. 아무래도 낯설게 하기가 익숙한 장면에서의 관객의 공감을 막고 이를 비틀어 원점에서 다시 그 장면을 보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유도하는 것에 가까우니 내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느낌을 느낀 것도 이와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경험상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들어간 연극들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로서의 기승전결을 체감하기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레토릭과 설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최면처럼 공감하는 것을 막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공감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러한 장면을 뒤틀어 그 장면을 낯설게 하게 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시청하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익숙해진 것은 당연하고 자막을 제거하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것도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개개인의 연기나 개별 장면에는 더 몰입하였고 더 공감하였다. 즉, 공감이 억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가 들어간 연극은 어떤 공감과 감동의 기승전결은 없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매우 충실하게 살아 있다. 즉, 현재 보고 있는 극 속의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지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미국 드라마 시청 경험은 그러한 맥락을 찾기 어려웠다. 만일, 전체적인 스토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시청하는 도중에 갑자기 길을 잃고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먹먹해지는 상항에 처했을 것이다. 


의문점에 대한 해답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떠오른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답이 턱 막혔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환자들이 병동에서 웃고 있는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왜 그러나 파고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 상실증 사례에 등장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거짓과 위선을 파악하는 것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들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즉, 인간 거짓말 탐지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람들의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 등을 관찰해서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이런 모습은 라이 투 미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마술사들이 쇼에서 관객이 숨긴 보물을 찾기 위하여 숨긴 사람들의 미세한 신체반응을 유도하고 그를 통하여 물건을 찾는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례를 읽으면서 실어증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익힌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갔다. 올리버 색스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식으로 적었기에 그 사소한 단서가 내 머릿속으로는 앞서 언급한 인간 거짓말 탐지기나 마술사들이 활용하는 단서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단서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미묘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실어증 환자들은 거짓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언어적으로 대화와 의사소통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들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면서 거짓말 여부를 탐색한다. 즉, 의사소통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해서 거짓말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 마술사들은 그 사람과 신체를 맞대고 통제되지 않는 미세한 신체의 긴장을 통해서 이 관객이 보물을 숨긴 곳을 향할 때마다 맘속의 긴장이 신체에 미세하게 반영되는 것을 캐치하고 이를 이용하여 숨긴 물건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철저하게 계산되고 세팅된 상황이다. 즉, 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 뿐, 언어를 모르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하고 대화하는 실어증 환자의 그것하고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보고 나서야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에 언급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