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완전언어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니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또는 일상 활동을 그림이나 기호들로 표현하는 보드 등을 이용해 힘들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즉, 힘들게 대화가 가능한 셈이다. 또, 언어 능력만 없어지거나 극소량 남고 나머지 인지 기능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므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욕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언어활동이라는 것과 연계되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다. 


가령,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는 이 ‘커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언어로서는 모른다. 이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경험을 과연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이 서술한 그런 기억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세계를 글로써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해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어증 관련 증상을 확인해보니 물건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명칭실어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어증 환자에게 명칭실어증이 동반된다. ‘커피’라는 단어를 언어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완전언어상실증과 같지는 않겠지만 약간이나마 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은 체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칭을 몰라서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1996년에 이메일에 사용되는 @ 표시를 처음 봤다. 당시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삐삐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오직, 일부 PC통신 유저들만 이메일을 사용해봤던 시기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관련 도서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 @ 표시를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기호 하나 모르는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점점 @ 표시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이나 각종 유인물에 @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다가 문장의 중간에 @ 표시가 나타나면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고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고약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기호가 기억되지도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책만 덮으면 언제 그런 기호를 봤냐는 듯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양도 기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 바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 기호에 ‘골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이 기호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책을 읽을 때 장애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름 즉, 명칭을 알 수 없는 기호를 접하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텍스트 흐름이 끊긴다.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만나면 머릿속에 블랙홀이 열리면서 그 동안의 읽었던 모든 맥락과 지식이 빨려들어가고 오직 순수한 뇌만 남는 것 같았다(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상태를 마냥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훈련되면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호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 기호의 명칭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뿐 뒤돌아서면 그런 기호가 있었는지도 거의 바로 까먹는다. 이름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첫 번째 지식은 바로 이름을 아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생각의 흐름에 끼어들 때 우리는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앞의 사물을 정신에 정위치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한 순간 자신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라캉이 언급한 바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누빔점이 없어 끊임없이 맥락을 바꿔가면서 논리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 모르게 순식간에 몽골초원으로 이동시킨다면 그는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주위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삶의 맥락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남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맥락을 어찌어찌 복구하거나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명칭실어증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기억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어증에 걸렸을 때 갑자기 찾아올 혼란과 당혹감 같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느끼던 와중 별안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자꾸 뜬금없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해서 시작한 고찰이었는데, 솔직히 여기에 어떤 마법같은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의식이 신비로운 정답을 알려준다는 식의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고 명칭실어증으로 인한 답답함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왜 내가 그 사례를 계속 다시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본 경험을 내 무의식이 완전언어상실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가졌던 그 막막함과 고역감은 결국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답답함처럼 갑자기 언어적 맥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란 것이 명칭실어증을 유추하면서 가졌던 그런 류의 답답함과 당혹감을 한껏 늘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내가 완전언어상실증 비슷한 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손상이 진행된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정도 비슷한 경험일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전개하다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경험을 완전언어상실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개인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 고찰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공계인데 수학 성적이 가장 나쁘다. 솔직히 수학으로만은 전교1등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공부했지만 실제 성적은 평균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 대한 완벽하게 잘못된 접근이고 동시에 나 개인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수학에 대한 접근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당시에는 본고사라고 해서 각 대학별로 수능 외의 시험을 각 대학별로 주관식 서술형으로 보던 때라서 문제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게다가 해당 문제를 풀어낸 과정에 대하여 일일이 서술하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어야만 답안을 정확하게 작성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풀면서 논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도 고민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가 없어지고 수능과 본고사로 시험방식이 대체됨에 따라서 국어와 영어,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되었다.

 

수능이 나온 배경의 한 축에는 주입식 위주의 교육에서 단순히 암기하여 맞추는 학력고사가 아니라 창의적 교육을 하고 암기보다는 합리적인 추론과 창의적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식의 시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수능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러한 수능의 장점에 대해서 엄청나게 홍보하면서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의 시험을 엄청나게 비판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러한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훨씬 유리했고 암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언론의 홍보에 따라서 주입식 교육을 증오하고 암기를 격렬하게 배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는 수준에서 멈췄으면 이익만 보고 끝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누구도 가지 않는 한발을 더 나아가버리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국사나 세계사의 역사 과목이나 생물, 지리 같은 과목들은 필연적으로 암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암기하는 것이 공부의 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야기를 만들고 생생하게 함으로써 이런 단순 암기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만 공부는 결국 암기의 형태로 마무리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학은 나에게 결코 암기의 대상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요인 때문인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시계문제를 풀면서 직접 시계를 관찰하고 증명하고 풀어낸 것으로 인하여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심상도 같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 나에게 수학은 지혜의 학문이었다. 사물을 관찰하거나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서 이를 기반으로 증명하는 것이 내가 수학에 가진 심상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과 사물에 대한 관찰이지 암기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에게 수학은 단순하고 기계적 반복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나의 이런 심상은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일인데, 이미 다년간의 신비주의 연구 경험을 통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몸에 붙으면서 수학에서 암기라는 행위를 축출하는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해당 문제를 풀었던 경험을 다 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푸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푼다는 식의 유형을 외우지 말고 해당 문제를 최대한 다각도로 살펴보고 진지하게 고찰한 후 해당 개념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구축해 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지혜의 단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활용하기 시작한 심상을 이용해서 개념의 정의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차근차근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실제로 정신과 뇌를 훈련하고 개발한다고 생각했다. 더 어려운 문제를 풀면 풀수록 집중력과 뇌가 개발된다는 식의 심상을 구축했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정말 탐욕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심상에는 해당 문제를 전혀 외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같이 프로그램 되었다.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겠지만, 이 실험은 정말 처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열정적으로 수학만 공부했고, 하나의 문제를 3일 밤낮을 붙잡고 고민해서 풀기도 했지만 대학입시에서 가장 성적이 안 좋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능과 본고사 모두 최악의 결과를 받았다. 슬프지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국어였다. 아마도 거기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신비주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스스로 골몰하던 문제에 대한 가장 밀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책은 G. 폴리아의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학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문제 유형을 외우고 이를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기와 문제유형에 대한 학습을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론인 셈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현재까지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이 개발되지 않았고 나중에 개발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을 내가 해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전환해서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이 무협지에서 수련하듯이 정신과 뇌를 단련하는 개념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통해서 해당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고 근원적인 개념부터 구축해서 정신을 과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는 것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에 천착한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해서 시험을 잘 보겠다.”하는 오기도 같이 작동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많이 어리석은 행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망각이 되었다. 나중에는 똑같은 수학문제를 3분 안에 다시 봐도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냥 문제 풀이를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학문제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해당 문제를 기본적인 개념으로 축소하는 것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기본 개념만 강화된 것이고 문제 유형을 외울 생각이 없으니 그 문제 유형이라는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런 지식은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그런 문제의 유형이나 해법을 외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다 보니 그 쪽으로의 무의식적인 거부도 작동해서 사고의 틀도 왜곡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망각의 영향 때문에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간단하게 풀다가도 5분 후에 보면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푼다. 그런데 이번에는 3일 밤낮을 집중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러니 매일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서 수학문제가 쉽게 풀리기도하고 어렵게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간단한 문제도 못풀기 일쑤였다. 그리고 망각하는 것이 무의식적 억압으로 작동한 것인지 어떤 문제를 쉽게 풀게 되면 그 문제를 다시 풀 때 그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문제 풀이를 많이 할수록 수학성적이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 문제풀이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생각이 억압으로 작동하면서 자승자박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두 번째 모험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슬프지만 객관적으로는 부작용말고는 없다.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공부법이라니 이런 희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되지는 않는다.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시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얻고 스스로 발전했겠는가를 따지는 기회비용을 들이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난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호기심과 열정을 꺾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기심과 열정을 꺾었으면 당연히 게임과 친구, 만화책 등에 몰두했지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가 아깝다는 식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 연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성공은 모두 나만의 유일한 경험이 되어주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되어주어서 내가 스스로의 비루한 삶이라도 온전히 그 삶의 주인이 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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