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포스팅에서 의식이나 생각이 그 자체의 규칙이 아닌 다른 욕구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욕구가 전환될 때마다 찰나의 의식 끊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파국의 경험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합적인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깨졌고, 의식인지 자아인지 모를 것이 파편화되면서 나 자신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만 존재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파국 당시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크게 바라보고 사유하고 분석할 어떤 무엇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 무협지를 보면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일관된 어떤 사람이 있다는 환상이 깨지면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지만 아쉽게도 현실 속의 나는 오히려 망가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흔히, 망상이란 것은 이렇다. 이것저것 게임도 하고 싶고, 나가서 놀고도 싶고, 친구를 보러 가고 싶기도 한데, 공부는 해야 하고 그런 마음의 갈등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현실을 도피하면서 빠져들다가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빠져나오는 것이 망상이다. 파국을 경험하기 이전에 나의 망상도 이랬다. 많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선이 명확했고, 망상에 잠깐 빠지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파국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 경계가 남아있지 않았고, 망상으로부터 돌아오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망상에서 정신을 차리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내 경우에는 처음부터 정신이 차려져 있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망상은 내가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내 몸을 움직였다. 


 망상은 항상 내가 좋아할 법한 내용들이었지만 항상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지나쳤다. 배가 고프면 폭식을 한다. 잘 체하는 몸이기 때문에 폭식을 하면 항상 그 다음날 발열, 오한, 두통 등의 체증에 시달리지만 먹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머릿속에 그 공포가 떠오르지만 욕구가 이것을 찍어 누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성욕이 생기면 야동을 틀어넣고 성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기계적으로 해소한다. 이것은 이미 성욕해소가 아니라 자기 파괴에 가까운 자해행위였고, 죽을 것 같고 머릿속에서 피곤과 고통을 호소하지만 역시 성욕에 의해 무시된다. 잠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까지 자고 그 잠마저 대부분 야동과 액션영화에 가까운 꿈으로 범벅이어서 쉰다는 느낌은 없었다. 쾌락은 충분히 자기 파괴적이었다. 


 다음날 겪을 부작용이 눈에 선해서 욕구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해도, 그 때마다 욕구가 그 생각을 찍어 누르고 왜곡시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욕구가 절제를 찍어누르는 감각은 다이어트를 하거나 금연을 할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하다. 다이어트를 할 때, 식욕이 올라오면 그 욕구가 마음을 흔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보던 사탄과 비슷해서, 온갖 유혹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욕구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이 같이 끌려나온다. 때론, 욕구 그 자체가 하나의 자아처럼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다. 가령 다음과 같다. 


 다이어트를 할 때, 갑자기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유난히 욕구가 거세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활성화된다. 

절제 : 참아야해!

욕구 : 이번엔 욕구가 유난히 심하네, 이 번 한번만 먹고 다시 절제하자.


절제 : 그러고 먹으면 다음번엔 “이미 다이어트를 망친 것 같으니, 일단 욕구는 채우고 보자.”라는 식으로 할 거면서 절대 먹지 않을거야.

욕구 : 하지만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누릴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


절제 : 한두 번 속는 줄 아나! 나중에 살 빼고 먹을거야!

욕구 : 네가 자꾸 실패한 것은 네 의지력이 약해서지 왜 자꾸 욕구를 탓하는 거야. 평생 욕구 없이 살 것도 아니면서. 욕구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정하면 네 인생도 재미없을 거야. 그러니 같이 공존해야지. 그러니 ... (끝없는 이야기들)

 

 욕구는 절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논박한다. 위의 문답은 보통 “이 번 한번만”에서 무너지기 일쑤다. 하지만 계속 버티면 욕구는 설득하고 인신공격을 한다. 그 다음에도 버티면 욕구는 끊임없이 밑도끝도 없이 절제를 괴롭힌다. 결국, 절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욕구가 승리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절제’가 무너질 때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진다. 그렇게 자존감이 몇 번 무너지면 더 이상 다이어트나 금연을 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 


 내 파국의 경험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욕구가 절제를 논파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나타나서 노골적으로 욕구를 해소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나의 주체감,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감각은 항상 그 반대의 ‘절제’ 속에 있어서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그 무기력함에 회의감, 한심함, 자괴감, 좌절 등을 느끼면서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스스로를 욕하는데서 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심함을 경멸하고 욕하는 것이 상처난 곳의 딱지를 긁듯이 중독되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욕구를 제어하는 방법은 더 큰 쾌락과 공포였다. 노골적이고 지나친 성욕의 범람은 전혀 즐겁지 않고 역겹다. 하지만 안하겠다고 스스로를 아무리 다그쳐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쾌락의 추구로 전환하면 어느 정도 먹힌다. 나는 이를 만화방으로 옮겼다. 집의 모니터 앞에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만화방에서의 욕구가 적절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으로 만화방에 머무는 시간이 20시간이었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만화책과 무협지를 보고 또 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나 성욕과 폭력에 대한 대리욕구인 것은 인터넷이나 야동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떻든 간에 착하고 좋은 뻔한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상적인 가치관이나 긍정적인 가치관을 계속 머리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공포였다. 아무리 욕구가 지나쳐도, 그 모든 것은 해본 것을 극대화하는 수준이었지 결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욕이 강해도, 범죄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상황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덕감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포였다. 낮아진 자존감이 그런 상황을 더 부추겼다. 폭력은 자신 없었고, 범죄로 돌아올 여파가 더 무서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공포가 나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매일 매일 온갖 욕구에 시달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무너졌다. 하던 고시 공부는 실패와 다름없었기에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존감도 무너졌다. 스스로가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느껴졌을 때, 어떤 강사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매년 고시촌에는 자살인지 아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거듭된 실패 속에서 어느 날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하겠다는 의욕도 없다. 그냥 고시원에 하루 종일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반대로 살겠다는 의욕도 없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는다. 그러다가 굶어죽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미쳐간다고 생각하면서 망가졌을 때, 그 망가짐이 심해졌을 때, 이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죽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공포감이 내 절제력과 통제력을 잠시나마 원상복귀 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유일한 시간이었다.

Anki로 문장 암기하기 4 문장 암기를 하면 경험하는 것


 에서 책을 통째로 외운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개인적인 경험담이니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내가 암기했던 문장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전통적으로 언어학에서는 음소(phoneme)를 모국어 화자가 모국어 소리 체계에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기저형(underlying form)이라고 하고, 이음(allophone)을 실제 음성 환경에서 음소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표현형(surface form)이라고 한다."


 언어학 중 음성학 부분에서 발췌한 문장을 조금 수정했다. 명리학 관련 문장은 말로 설명하기 너무 난해할 것 같아서 최근 공부한 언어학에서 발췌했다.


 처음 이 문장을 눈으로 보면서 입으로 반복할 때는 그저 입으로 올바르게 따라가고 있는지만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입으로 반복적으로 씹다 보면 글자는 단어가 된다. 즉,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되어 발음하던 것들이 이어진 단어가 되어 자동으로 매끄럽게 발음된다. 즉, 처음에는 “음,소(pho,neme)”라고 머릿속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제대로 발음했는지 점검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입은 어느새 “음소(phoneme)”라고 매끄럽게 한 덩어리로 발음한다.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읊다 보면 단어는 문장이 된다. 이 단계가 조금 시간이 걸리고 또, 가장 신기했던 부분이다. 생각 없이 문장을 반복해서 읊다 보면 문장을 읽기에 가장 적합한 호흡과 리듬이 튀어나온다. 문장이 가진 다채로운 의미들이 읽는 호흡과 강약에 반영되고 그렇게 읽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문장은 저절로 읽힌다. 단어가 매끄럽게 읽히듯이 문장이 한 덩어리로 매끄럽게 말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문장은 다시 문단으로 확대되면서 한 덩어리로 매끄럽게 말해진다.


 문장을 암기하면서 뭔가 깊은 사색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단어와 단어를 열심히 집중해서 계속 읊어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자는 단어로, 단어는 문장으로, 문장은 문단으로 정렬되면서 생각하는 의미에 따라서 자연스러운 호흡과 리듬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긴 문장이 그리고 여러 개의 문장이 어느 순간 정렬되면서 마치 입으로 한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읊어진다. 


 가령, 위의 문장들을 보면 내가 처음 들어보거나 이제 막 익히기 시작한 단어들이 7개가 등장한다. 음소(phoneme), 소리 체계, 추상적인 기저형(underlying form), 이음(allophone), 음성 환경, 표현형(suface form)들이 그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처음에 읽을 때도 어색하고 이상했다. 하지만 반복하면서 이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말해진다. 그리고 문장이 익숙하게 읽혀질 때는 문장 내에서 이 단어들이 어떤 의도로 배치되고 쓰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음소와 이음이 대비되어 설명되어 있고, 음소가 추상적인 기저형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음을 표현형으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추상적인 기저형과 표현형으로 음소와 이음이 분할된다. 이 모든 과정이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우리 언어생활 전반에 깔려있다는 점도 알게 된다. 또, 우리가 언어를 발화할 때, 잘 의식하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지만(추상적인) 이면의 원칙과 자료(기저형)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음(표현형)이다. 이 문장에 축약된 총제적 의미는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떤 단어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해석은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장을 읽다가 발견된 호흡과 리듬이 이런 의미들을 드러내고 활성화시킨다. 


 이렇게 발견된 문장들은 가볍게 한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그 모든 문장을 매끄럽게 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가끔은 생각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빠른 느낌이다. 가령, 위의 문장을 외웠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바로 문장을 입으로 말하고 넘어간다. 이 때, 머리로 그 문장을 생각할까? 이건 초기 학습과 완숙한 학습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초기 학습에서는 문장의 호흡과 리듬을 처음 발견하고 읽는 것은 상당한 쾌감을 준다. 읽을 때마다 잘 모르는 7개의 단어의 개념들이 머릿속에서 아름답게 정렬되는 느낌이 너무 좋았고 문장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 중요한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머리 한 켠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좋았다. 이 간질간질한 느낌은 조금만 더 하면 무언가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을 준다. 그 감각에는 정신적인 고양이 동반되기 때문에 그 맛을 보려고 해당 문장을 일부러 찾아서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내용과 지식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면서 그런 느낌도 사라진다. 이 때는 머리와 입이 따로 노는 느낌을 받는다. 카드를 보고 입으로는 전체 문장을 빠르게 외우지만 머리는 딴 생각 중이다.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학습이 완숙의 단계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문장 암기를 할 때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모든 문장에서 호흡과 리듬이 발견되고 쾌감을 준다면 공부가 참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장을 곱씹어보고 나서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좋은 문장은 금방 호흡과 리듬을 발견할 수 있고, 너무나 간결하지만 아름답게 정보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런 문장은 몇 번 읊자마자 바로 입에 달라붙어서 그 의미를 훤히 드러낸다. 마침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면 정보가 머릿속에 통합되면서 쾌감과 즐거움도 바로 동반된다. 반면, 나쁜 문장들이 있다. 호흡과 리듬을 알 수 없거나 모호한 문장들이다. 곰곰이 씹어보면 이상하거나 비문이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싶지만 외우려고 읽으면 대략 머리가 멍해지는 문장들이다. 나쁜 문장들은 그 문장 그대로 몸에 익히려고 하면 안된다.


"한문의 품사가 가변적이지만 특정 품사로 자주 사용되는 빈도나 전성이 가능한 품사의 범위는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


 위의 문장은 한문의 품사에 대한 문장이다. 별 문제없는 문장이다. 그런데 외우고 복습을 해보니 계속 오류가 난다. 이유를 열심히 찾아본 결과 "특정 품사로 자주 사용되는 빈도가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라는 표현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외울 때는 별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외웠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빈도를 관습으로 정한다."라는 표현을 어떤 한자가 50%의 확률로 동사, 30%의 확률로 명사, 20%의 확률로 형용사로 쓰이도록 관습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한문의 해석이 확률 게임으로 느껴지고 그것이 납득이 안되면서 해당 기억을 떠올리는데 장애가 생긴 것이었다. 결국, "특정 품사로 자주 사용되는 빈도"라는 말을 "주로 사용되는 품사"로 수정하고 나서야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장이 좋더라도 어떤 통찰과 연결되는 지식이어야만 고양감이나 성취감 그리고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즉, 단순히 영어 단어나 한자를 암기하는 단편적인 지식은 고양감, 성취감, 쾌감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편적 지식이 과거의 풀리지 않던 궁금증이나, 무언가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뒤바뀌게 한다거나 어떤 체계를 형성하는 최후의 조각 같은 것이라면 법열에 가까운 성취감과 고양감을 주기도 한다. 


 성취감과 고양감을 준다고 해서 정말 무슨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첫 공부가 명리학으로 완벽히 백지에서 그것을 그렸기 때문에 고양감과 쾌감을 실컷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외었음에도 여전히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암기와 학습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은 지금이나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몸의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이고 싶은데 그것을 제어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답해진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의 근육이 부들거리면서 떨리고 정신적으로 무척 부산스러워 진다. 이런 경향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면 상황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몸을 비비꼬면서 꿈틀거리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특이한 행동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에게 그런 행위는 자신의 혀를 빠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그냥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물론, 그러고 있을 때는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큰 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거나 누구나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인지하지만 그 외의 일들은 꿈결처럼 조용히 지나간다. 지속적으로 혀를 빠는 습관으로 인하여 혀의 근육이 너무 발달해서 혀로 내 코를 핥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 크고 강력한 혀가 앞니를 밀어버렸고, 앞니가 크게 앞으로 돌출되어 나와서 치과 교정을 해야 했다. 치과 선생님은 혀가 앞니를 밀지 못하게 혀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장치를 입안에 끼워넣었고 결국, 혀를 빠는 행위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혀를 빠는 행위를 대체한 행위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다. 왼손의 엄지손톱 끝을 살짝 다른 손톱으로 잘라서 뾰족한 부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뾰족한 부분으로 피부를 긁는 것이다. 이것은 자해와는 다르다. 자해와는 달리 상처가 나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를 손톱으로 긁으면 그 부위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행위가 혀를 빠는 행위보다 조금 나은 것이 적어도 손톱으로 피부를 긁으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혀를 빠는 행위는 몰입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나마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는 즉시, 이 행위에 1~2시간 씩 몰두하게 되므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앉기만 하면 몸을 비비꼬거나 손톱을 긁으면서 스스로를 잊고 망아의 상태로 몰입해버리니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분석해보면 1시간을 앉아 있을 때 30분은 몸을 비비꼬다가 30분은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무아지경에 있거나 망상에 빠져있는 것으로 실제 공부하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주관적 느낌으로는 책의 제목을 읽고 일단, 앞으로 펼쳐질 재미없는 공부시간을 떠올리면서 이런 재미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리고 펼쳐질 지옥같은 공부시간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다가 앉아있는 자신의 몸이 답답하다고 보내오는 신호에 짜증이 나고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못이겨 정신적으로 퇴행해서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가 될 수 없으니 시험성적을 잘 받고 싶었던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아이디어를 강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발악한 것에 가까웠다. 자세를 바꿔보고 다리를 꼬아보고 하면서 신체를 구속해보기도 하고, 수시로 기지개를 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퇴행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다보니 멍하니 앉아있지는 않게 되었고 반대로 몸의 답답한 감각은 계속 올라와서 조금만 힘들어져도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움직일 때는 정신이 맑아지는데 앉으면 다시 고통을 참다가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냥 앉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앉아서 공부가 되지 않으니 굳이 머리를 굴리는데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공부의 효율이 붙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실험을 하다보니 걸으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명확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체화된 방식은 아래와 같다.


우선책을 1페이지 가량 혹은 챕터 별로 잘게 쪼개서 집중해서 읽는다다 읽는데 2~3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책은 놓고 일어나서 걷는다걸으면서 그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걸으면서 관련 내용을 전부 떠올렸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돌아와서 확인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복습처럼 떠올리고 해당 내용을 확정한 후 책의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우선, 걷기 시작하니까 평소에 앉아서 공부할 때 느껴야 했던 신체의 답답한 느낌이 다 사라지고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신체에 걷는다는 목적과 방법을 부여해서인지 난잡하게 비비꼬이던 몸이 정렬되고 걷는다는 목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몸을 세워서 걷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주의력과 통제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도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주의력과 통제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집중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면 졸음이나 지겨움 같은 장애요소가 나타나지 않아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굉장히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걸음을 걷는 코스 동안 책을 보지 않고 해당 내용을 상기하려고 노력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책을 암기하지 않고 내용만 흝어본 다음에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을 암기한 것이 아니니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책을 달달 외울 수 있게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읽은 내용을 스스로 상상하고 구축하게 된다(물론, 이 때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계속 스스로를 북돋워야 한다.). 한 페이지의 짧은 구간의 이야기가 어떤 구조로 작성되어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당장, 책을 보면서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내가 떠올린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서로 비교하게 된다. , 잔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거하고 서로 안 맞으니까 이게 맞을 것 같아.” 따위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적은 정신에너지를 들여서 해당 내용을 완전히 떠올리게 된다. 원하는 코스를 다 걷기 전까지는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으므로 미심쩍은 부분과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추론을 하면서 코스를 걷게 된다. 그리고 책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읽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아쉽지만 요약이나 축약은 힘들다.).


이 방식이 훈련되기 시작하면서 중학생쯤 되었을 때는 머릿속으로 책의 전개를 쭉 이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돌리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이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는 정말 좋아서 하다보면 책의 내용들이 꿰어지면서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 때 스스로 내가 이것을 공부했고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엇다. 다른 친구들은 교과서를 끊임없이 베끼고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했는데 그렇게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혀를 빨거나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들은 모두 일종의 유아 퇴행현상이었다. 결국,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이런 퇴행은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큰 마이너스 요소였다. 결국,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적인 것은 이러한 퇴행현상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아쉽게도 많은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극복할 방법과 자원이 준비되어 있다면 시도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도 모르고 시도해서 실패할 경우 스스로의 자존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퇴행현상을 극복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내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게 퇴행현상이고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할 것이고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냥 내일 시험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 1차원적으로 아이답게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다. 만일, 그 때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추려서 극복하고 나서 공부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40이 넘는 시점까지도 이 습관인지 기질인지 모를 것들은 여전히 잘 남아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먼저 고치려고 했다면 인생이 헤어날길 없는 미궁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건드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나 다행인지!

 

퇴행현상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걸어다니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몸에 붙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기술을 얻었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은 평생을 줄기차게 써먹은 기술이다. 만일, 계속 앉아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면 평생 교과서를 연습장에 받아쓰면서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숙련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식의 공부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퇴행 덕분에 머리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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