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자연은 아름답고 그 속의 다양한 동식물들은 아무런 말이 없어도 우리를 매혹시키고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언어를 모르면 보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처음에는 언어를 백지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니 어떤 언어적인 기능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고 또 다시 좌절되기 때문에 답답함과 좌절감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설정한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져서 ‘모든 것이 언어다’식의 얼버무리기 식의 결론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자연관찰에 몰입하게 되면서 그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선, 언어가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스스로의 가설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유사한 상황에 처해 보면 된다. 즉, 내가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인을 관찰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관찰이지만 동시에 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평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해답은 금방 튀어나왔다. 전혀 괴롭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모르는 외국어도 그 의미를 몰라서 괴롭지는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음성이 어우러져서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계속 시선을 주는 것으로 인한 무례가 아니라면 사람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웅얼거리면서 말하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니라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말은 모르는 외국어임에도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또렷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입고있는 옷과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은 그들이 일시적인 관광객인지 국내에 거주중인 것인지 알게 해주고, 표정과 목소리의 톤, 몸짓은 그들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려준다. 잠깐의 관찰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외국인을 관찰할 경우 모르는 언어가 개입하고 있지만 전혀 고통스럽지고 괴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척 흥미진진하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기능이 작동하고 다시 좌절하면서 고통을 겪는다는 가설은 폐기해야할 것 같다.


새로운 해답을 찾아 생각이 표류하다가 고통에 초점을 맞춰보게 되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 생기는 그 고통에 대해서는 앞서 포스팅한 미드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 대하여 고찰함 2에서 명칭실어증과 개인적인 경험을 버무려서 명칭을 모르는 것에 대한 고통과 답답함을 언급했다. 이 경우 소설이나 텍스트 등 언어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향유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기호 하나 때문에 무지의 벽에 부딪히고 답답해지면서 읽고 있던 맥락보다 지금 현재 눈앞의 기호 하나를 모른다는 맥락에 매몰되어서 전체 맥락이 단절되고 갑자기 글에 대한 흥미도 급격하게 사라지는 그러한 고통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고통과 답답함은 마치 자신의 위치와 맥락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생기는 당혹감 또는 갑작스러운 급격한 시공간적 변화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감과 매우 닮아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 되면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이 전부 동일하다. 앞서 명칭실어증에서 모르는 기호에 마주쳤을 때는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라면 자고 있는 사이에 본인도 모르게 대한민국에서 몽고로 옮겨진 사람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현실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과 언어적 맥락의 상실이라는 것에 천착한 나머지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겪는 고통도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언어적 맥락이 꼬일 때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이 꼬일 때도 비슷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드라마와 자연 관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자연 관찰은 언어 없이 가능한데, 드라마는 힘든 것일까?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대조하는 질문을 하니 갑자기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딱따구리를 발견했을 때, 딱따구리의 맥락은 무척 뜬금 없었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없었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날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그 외에 별도의 맥락이 주어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딱따구리는 날아와서 나무를 두들기다가 날아갔다. 딱따구리의 생태, 종의 종류, 서식지 등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딱따구리의 의사를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고통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몰입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과 드라마 시청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연 관찰은 일종의 현실이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수많은 엉뚱하고 알 수 없는 맥락들이 섞여있다.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마주치고 또 그것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경험세계라는 맥락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현실적 경험세계라는 맥락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내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금 신기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어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드라마의 맥락은 어떠한가? 우리는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의 동시에 관찰하고 그 사람만의 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엿보면서 관음증을 즐긴다. 1초전에는 뉴욕 맨하탄의 커피샵에서 노닥거리는 연인들을 보다가 그 다음 1초 후에는 사하라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제정신인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드라마가 실은 언어적 질서를 통하여 구축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결국 글이다. 하얀 노트 위에 글로 작성된 것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영상을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 배우들의 대사로 연결된 한편의 문학인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와 배경의 사실성 등은 그 문학을 더욱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집중해서 드마라를 보게 되면, 현실적 맥락에 충실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는 자연스레 관찰이 이루어지고 고통스럽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면이 확 바뀐다. 또,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도시에서 시골로 바다에서 사막으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관찰하는 사람은 갑자기 변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내용은 계속 전개되고 있다. 현실적 맥락은 이미 꼬였다. 물론, 용을 써서 바로 이전 맥락을 놓아버리고 다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한두 번은 어찌 노력해서 적응해도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피곤해지고 집중력은 떨어지게 된다. 결국, 길을 잃고 답답함과 고통에 매몰되고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맥락이 꼬이는 이유는 그 현실적 맥락의 전환을 언어적 맥락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에 대한 순수한 자연관찰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언어적인 산물이었고 그 사이에 있는 배우와 소품으로 이루어진 영상들도 현실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잘 통제된 언어적 배치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어증 체험과 영어에 대한 호기심은 당분간 사그라들었다. 막연하게 괴물같은 언어 기능을 상정하는 식의 얼버무리기식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론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론으로는 옳고 그름을 검증하기도 어렵고 무언가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어렵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고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서 딱따구리 같은 것을 보았다. 딱따구리를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또, 그것이 아무리 산 아래에 있는 집이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가는 길을 멈추고 그 딱따구리가 날아올라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것을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딱따구리의 출현은 갑작스러웠고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새로운 것과 조우하는 신선한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딱따구리 관찰은 정말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 딱따구리가 신기해서 보는 행위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물며 디지털이 아닌 맨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경험도 너무 오래간만이었다. 덕분에 어렸을 적 아날로그 시절 추억으로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던 각종 자연관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산이나 들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널려 있었다. 잠자리, 메뚜기, 물고기, 하늘소, 개구리, 뱀 등 신기한 곤충이나 생물을 잡으러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이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히 보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물론,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죽치고 앉아서 관찰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이면 자연스레 질릴 때까지 눈앞의 곤충이나 생물의 동작 하나하나에 흠뻑 몰두했었다. 어떠한 언어도 발화되지 않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순간이 충실하고 충만했다.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인기 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처럼 짜릿하고 흥분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좋아 죽는 그런 것들도 시골의 산과 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신기한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매력이 반감되었다. 꽃잎 위에서 사냥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면 그 사마귀가 숨죽이고 있는 모양에 따라 같이 숨죽이고 앉아서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손가락만한 말벌이 주는 위압감에 도망가 보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수많은 생명들 속에서 매우 충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충만한 경험에서 언어는 없었다. 언어 없이 매우 충만했고 모든 것과 교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에서 언어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언어는 경험에 몰두하는데 방해였기에 말을 줄이고 그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기 위해서 더 집중했었다. 이제 자연관찰에서 언어 기능의 개입은 없다고 전제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언어 기능이 개입하지 않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떠오른다. 만일 앞서 내린 결론에서처럼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당연히 뛰어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뛰어난 운동선수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언어적인 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언어적인 것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그것을 말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작품 위에 얹어질 뿐이지 그 알맹이가 될 수 없다. 또, 좌뇌와 우뇌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언어적 기능은 좌뇌의 일부에서만 작동할 따름이다. 이제 생각이 다시 반전되었다.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제 앞서 내렸던 얼버무리기식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가 대두된다. 어째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자연관찰과 달리 고통스러울까? 아마도 문제 설정을 다시 해야할 것 같다.

페퍼의 눈동자에 드러난 선명한 동공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즐거운 경험은 겨우 한 번에 불과했다. 그 한번을 제외하면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도전은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지옥의 경험의 계속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이 계속 반복 되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실제로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연이어 지속하지는 못하고 한 편을 보고 쉬면서 정신적인 에너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편씩 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롭고 정신적으로 답답해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으니 바로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고통의 원인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와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이다. 가련, 일종의 자연관찰을 하는 상황이다. 개미의 행동에 흥미를 느껴서 지그시 그것을 관찰할 때,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못해서 괴롭지는 않다. 자막 없이 보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개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전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적인 어떤 기능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드라마는 괴롭고, 자연관찰은 괴롭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서 처음 떠올린 해답은 자연관찰은 개미와 의사소통을 기대하거나 개미가 말을 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므로 언어를 쓰겠다는 기대가 없고 따라서 언어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영어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 정도 아는 단어가 들려오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언어 기능이 작동하게 되고 또 그것이 좌절되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오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독하게 괴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를 접으면 언어기능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인간을 동물 관찰하듯 관찰했던 동물학자나 전혀 미지의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스스로 속한 고유문화에 의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관찰하듯이 관찰하면 언어 기능을 잠시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관찰을 하듯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상황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언어도 이미 알고 있는 문법이나 실제 철자 같은 것을 배제하고 그냥 들리는 구어(口語)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면 언어 기능을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세상을 자연관찰 하듯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드라마를 시청했다. 몇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그 언어 기능은 꺼지지 않았고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항상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처음 한두 번 15분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집중해서 관찰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엔 정신력이 방전되어 퍼져버리고 다시 고통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관찰을 하려고 한다고 스스로 되새기면서 몇 번의 도전을 했지만 고통은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  어째서 드라마도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자연 현상처럼 관찰할 수 없는 것일까? 언어 기능을 잠시 꺼두어 이 고통과 답답함을 물리치겠다는 계획이 계속 좌절되면서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의지로 작동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 작동하면서 내 삶을 지배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언어 기능을 끄려는 노력이 축적될 때마다 그 실패로 인한 절망감도 축적되었고 어느 순간 부터는 이 언어 기능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점점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지면서 오히려 생각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의 관찰에는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반전되어서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언어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언어 기능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항상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감각에 의한 지각과 이러한 지각이 맥락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전부 언어적인 기능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연 관찰을 할 때 언어적 개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레벨의 밑바닥에서 언어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완전히 언어 기능에 따라 작동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결론은 약간 친숙한 결론이었다. 정신분석이나 언어철학 등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 언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논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왔다. 또,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와 개념이 허상에 불과하고 중생들은 그 허상에 매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나 꿈과 구별되지 않는 현실을 의미하는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것도 맥락상 연결되는 바가 있다. 친숙한 결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으로 스스로를 유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했기에 여기에서 만족해야 하는데,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우스운 점은 이 언어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임의로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말이라는 점이다. 막연하게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붙인 말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에 다양한 것들이 붙어서 개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지배하는 무서운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언어 기능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혀 그것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능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국, 스스로 대충 만든 단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개념이 되어 이제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이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는 꼴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지배하고 운용하면서 고통을 주기도 하는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언어 기능이란 것을 상정해버리게 되면 인간이란 그저 언어 그 자체의 단말(terminal)이 되어 버린다. 삶의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것이 그냥 일종의 언어에 의한 환상처럼 되어 버리고, 결국,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조직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나 환상 소설 등에서 수십번 우려먹은 듯한 흔해빠진 결론이고, 인간의 하찮음과 부족함을 강조하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낄 뿐 그 외에 소득은 없는, 무언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심히 생각을 전개한 보람도 없이 그냥 알 수 없음이라고 얼버무리는 그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결론은 상당기간 내 스스로가 좋아하는 형태의 결론이었다. 우주의 광활함 앞에서 먼지처럼 작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세상의 위대함에 흠뻑 젖으면서 자뻑에 빠지는 자기만족적인 결론이었다. 이번에 그런 식의 결론이 좋지 않다는 자각을 처음 얻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하다 보니 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돌파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완전언어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니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또는 일상 활동을 그림이나 기호들로 표현하는 보드 등을 이용해 힘들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즉, 힘들게 대화가 가능한 셈이다. 또, 언어 능력만 없어지거나 극소량 남고 나머지 인지 기능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므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욕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언어활동이라는 것과 연계되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다. 


가령,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는 이 ‘커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언어로서는 모른다. 이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경험을 과연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이 서술한 그런 기억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세계를 글로써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해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어증 관련 증상을 확인해보니 물건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명칭실어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어증 환자에게 명칭실어증이 동반된다. ‘커피’라는 단어를 언어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완전언어상실증과 같지는 않겠지만 약간이나마 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은 체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칭을 몰라서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1996년에 이메일에 사용되는 @ 표시를 처음 봤다. 당시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삐삐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오직, 일부 PC통신 유저들만 이메일을 사용해봤던 시기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관련 도서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 @ 표시를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기호 하나 모르는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점점 @ 표시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이나 각종 유인물에 @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다가 문장의 중간에 @ 표시가 나타나면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고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고약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기호가 기억되지도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책만 덮으면 언제 그런 기호를 봤냐는 듯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양도 기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 바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 기호에 ‘골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이 기호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책을 읽을 때 장애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름 즉, 명칭을 알 수 없는 기호를 접하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텍스트 흐름이 끊긴다.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만나면 머릿속에 블랙홀이 열리면서 그 동안의 읽었던 모든 맥락과 지식이 빨려들어가고 오직 순수한 뇌만 남는 것 같았다(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상태를 마냥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훈련되면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호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 기호의 명칭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뿐 뒤돌아서면 그런 기호가 있었는지도 거의 바로 까먹는다. 이름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첫 번째 지식은 바로 이름을 아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생각의 흐름에 끼어들 때 우리는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앞의 사물을 정신에 정위치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한 순간 자신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라캉이 언급한 바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누빔점이 없어 끊임없이 맥락을 바꿔가면서 논리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 모르게 순식간에 몽골초원으로 이동시킨다면 그는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주위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삶의 맥락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남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맥락을 어찌어찌 복구하거나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명칭실어증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기억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어증에 걸렸을 때 갑자기 찾아올 혼란과 당혹감 같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느끼던 와중 별안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자꾸 뜬금없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해서 시작한 고찰이었는데, 솔직히 여기에 어떤 마법같은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의식이 신비로운 정답을 알려준다는 식의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고 명칭실어증으로 인한 답답함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왜 내가 그 사례를 계속 다시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본 경험을 내 무의식이 완전언어상실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가졌던 그 막막함과 고역감은 결국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답답함처럼 갑자기 언어적 맥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란 것이 명칭실어증을 유추하면서 가졌던 그런 류의 답답함과 당혹감을 한껏 늘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내가 완전언어상실증 비슷한 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손상이 진행된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정도 비슷한 경험일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전개하다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경험을 완전언어상실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개인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 고찰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포스팅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꽤 오묘하고 그 질문에 무언가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나름 내보려고 노력했다. 제시된 의문점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고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조각 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사람은 우선 아는 것을 총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문제점을 뭉뚱그려서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은 해답을 자동으로 찾게 되었다. 굉장히 익숙한 대답이 한 가지 떠올랐다.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가 작동되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순간 익숙했던 드라마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원점에서 다시 이것을 보게 된 것이라는 대답이다. 아무래도 낯설게 하기가 익숙한 장면에서의 관객의 공감을 막고 이를 비틀어 원점에서 다시 그 장면을 보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유도하는 것에 가까우니 내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느낌을 느낀 것도 이와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경험상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들어간 연극들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로서의 기승전결을 체감하기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레토릭과 설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최면처럼 공감하는 것을 막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공감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러한 장면을 뒤틀어 그 장면을 낯설게 하게 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시청하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익숙해진 것은 당연하고 자막을 제거하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것도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개개인의 연기나 개별 장면에는 더 몰입하였고 더 공감하였다. 즉, 공감이 억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가 들어간 연극은 어떤 공감과 감동의 기승전결은 없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매우 충실하게 살아 있다. 즉, 현재 보고 있는 극 속의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지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미국 드라마 시청 경험은 그러한 맥락을 찾기 어려웠다. 만일, 전체적인 스토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시청하는 도중에 갑자기 길을 잃고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먹먹해지는 상항에 처했을 것이다. 


의문점에 대한 해답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떠오른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답이 턱 막혔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환자들이 병동에서 웃고 있는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왜 그러나 파고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 상실증 사례에 등장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거짓과 위선을 파악하는 것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들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즉, 인간 거짓말 탐지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람들의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 등을 관찰해서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이런 모습은 라이 투 미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마술사들이 쇼에서 관객이 숨긴 보물을 찾기 위하여 숨긴 사람들의 미세한 신체반응을 유도하고 그를 통하여 물건을 찾는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례를 읽으면서 실어증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익힌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갔다. 올리버 색스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식으로 적었기에 그 사소한 단서가 내 머릿속으로는 앞서 언급한 인간 거짓말 탐지기나 마술사들이 활용하는 단서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단서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미묘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실어증 환자들은 거짓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언어적으로 대화와 의사소통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들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면서 거짓말 여부를 탐색한다. 즉, 의사소통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해서 거짓말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 마술사들은 그 사람과 신체를 맞대고 통제되지 않는 미세한 신체의 긴장을 통해서 이 관객이 보물을 숨긴 곳을 향할 때마다 맘속의 긴장이 신체에 미세하게 반영되는 것을 캐치하고 이를 이용하여 숨긴 물건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철저하게 계산되고 세팅된 상황이다. 즉, 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 뿐, 언어를 모르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하고 대화하는 실어증 환자의 그것하고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보고 나서야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에 언급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신경과적 증세를 겪는 환자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각각의 증세를 겪는 환자들에 대하여 무척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특이한 증세를 겪는 사람들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쳐들었기 때문인지 그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이 오히려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읽는 보람도 기쁨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만 읽자니 책이 술술 잘 넘어갔고, 각 증세별 이야기 단락도 길지 않아서 어찌어찌 전부 읽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별로 바쁘지 않은 상황에서 기괴하고 특이한 증세에 대한 가벼운 흥미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있다. 읽었을 때는 별다른 감동도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읽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이 반추되는 책들 말이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신경과적 증세라는 것이 인간 존엄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하는 비극적 아우라를 가진다. 이 책에서 그런 느낌으로 환자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머릿속에 그런 사람들의 비극적 카테고리를 만들어 몽땅 집어넣고 그냥 슬퍼하고 나와 분리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모든 신경과적 증세가 비극이 아닌양 지독하리 건조하게 담담하게 기술해 버렸고 그래서인지 비극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은 환자들은 외면되지 않고 내 일상생활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일면을 자꾸 내비친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과 가벼운 흥미로 스치듯 읽고 넘어갈 것 같았던 이 책은 삶의 구비 구비에서 갑자기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소개된 환자들의 사례가 지혜의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처음엔 단순 열거식으로 환자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는데 실은 환자의 사례가 모두 그 자체로 완전하고 고유한 케이스로 깊은 인상을 주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모두 인간 존재에 대한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포스팅도 책의 대통령의 연설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언어상실증 환자 사례가 머릿속에서 스스로 확장되더니 다른 고민들과 결합하여 인식의 큰 전환을 가져다 주었고 특히, 영어 공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고 싶어 포스팅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는 왼쪽 관자엽의 장애로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수용성 언어장애나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언어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린다니 일견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하다. 

 

지능이 높은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는 그가 언어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는데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니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말을 하지 못하는데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의사소통하기 때문이다.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과 말투, 목소리의 고저, 억양 등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어상실증 환자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각종 단서들을 이용하여 원활하게 대화를 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로는 그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언어상실증을 확진하기 위해서 각종 단서들을 누출하지 않게끔 누가 봐도 매우 이상한 태도로 말을 걸거나 인공적인 기계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 외의 정보를 제거하거나 이상하게 뒤틀어 버리면 언어상실증 환자는 전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역설적이게도 정상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소통을 한다. 이들이 비록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으로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대통령이 아무리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대통령의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와 이상한 신체동작 등만 보게 되니, 이는 마치 희극 배우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누구나 아는 거짓말을 공들여 하는 느낌을 주니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웃음이 터진 것이다. 


처음 이 사례를 읽었을 때는 언어상실증 환자들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하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례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사례 자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음에도 이러한 사례를 알고 있으니필요한 순간마다 이 사례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라 다른 고민이나 이야기들과 어우러져 결국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게 되었다. 이후, 미국 현지의 드라마를 자막없이 시청하면서 생긴 언어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 사례로부터 작지만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도움은 대충 이런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언어상실증이어도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의 단서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얼굴 표정 읽기, 최면이나 관념운동 등에서 미세한 신체 반응 등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누설되는 비밀을 확인할 수 있고 상대의 거짓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약기가 있는데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그런 능력이 무척 발전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실은 이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반대의 이야기인가? 


첫 번째, 지능이 뛰어난 완전실어증 환자들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은 즉,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을 함에 있어 언어는 거의 필요없다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장애인 취급을 받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액면 그대로 언어가 일상생활에서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완전히 필요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두 번째는 언어가 오히려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를 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무척 감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어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주의깊게 보는 일상적인 단서들은 보지 못한다. 즉, 언어를 듣는 사람은 그 언어의 상대는 보지 않고 언어에 집중한다. 만일, 상대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해도 언어의 감동적인 내용들이 머릿속에 재생이 되고 있다면 사소한 단서들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흔히, 뻔한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에 귀가 솔깃해서 누가 봐도 뻔한 사기꾼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언어에 농락당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부분은 오히려 조금 다르게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즉, 언어가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어는 많이 과대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오히려 의사소통의 본질이라는 측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가령, 영어 공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실은 공통의 경험이 없고, 그로 인하여 서로 말을 할 공통의 화제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처음 영업에 나선 자동차 세일즈맨을 생각해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자동차를 사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맥락에 따라서 말하려고 한다. 맥락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통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당연히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영업 사원은 맥락없이 갑자기 차를 사라고 들이대어야 하니 심적인 부담감이 엄청난 것이다. 당연히, 차를 사야하는 맥락을 가진 사람들을 찾을 것이고 우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영업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업사원은 절박하게 실적 압박을 받았을 때, 겨우 먹고 살기위해서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들이대어야 한다는 식의 스스로의 맥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이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해외 여행가서 급박해지면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맥락에서 언어는 사실 조금 부차적이다. 이러한 맥락이 있고 그 다음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왜 영업을 잘 하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어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해외에 나가서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꽤 명백하다. 그들은 맥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외국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언어보다 한단계 앞서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맥락을 만드는 법과 그러한 맥락에 참가하는 법을 아는 것이 먼저인 셈이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인간이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또한, 언어의 실체에 대하여 살짝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현지 드라마를 무자막으로 시청한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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