넒은 교정 때문인지 아니면 젊음에 대한 동경때문인지 대학교에 광인들이 잘 모이는 것 같다. 광인들은 광인이라는 것이 테가 난다. 어떤 광인은 짧은 치마를 입고 4발로 뛰기도 하고 어떤 광인은 하의 실종으로 나무 밑에 앉아서 속없이 즐거운 미소만 흘리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마주칠 수 없었던 광인들을 보는 기분은 마치 포르노처럼 인간성의 치부가 여과 없이 마구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거나 혹은 밤새 놀다가 가끔씩 밖에서 밤을 새야할 때면 없는 돈에 여관이나 모텔에서 자기는 어렵고 24시간 만화방을 찾아가 만화책을 뒤적이면서 잠들곤 했다. 만화방에 앉아 있으면 나이 드신 아저씨들이 종종 나타나 만화를 얼굴 앞에 세워놓고 말을 한다. 연극투의 선명한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분노하고 애처롭게 울길래 처음에는 만화책의 대사를 따라하는 줄 알았다. 만화책을 보다가 호통치는 목소리에 깜짝깜짝 놀라서 보면 그 아저씨다. 길게 살펴보아도 만화책의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말은 너무 많다. 혼잣말이다. 그 아저씨는 밤새 호통을 치면서 내 잠을 깨우곤 했다. 

            

대학에는 정말 다양한 군상들이 돌아다녔다. 방언 터지듯 선교하는 선교사와 도를 설파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그리스를 주제로 언쟁했고, 학교에서 거주하면서 노숙자 같이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수다를 쏟아부어 도망가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차비를 구걸하는 분도 있었다. 간혹 식사 후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일면식도 없이 다가와 왕년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길고 긴 질곡 같은 삶에 대해 푸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응수도 하고 귀를 기울여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존해오는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가게 되었다. 먼 거리에서 그 사람이 보이면 빙 둘러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동기, 선후배, 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징후가 보인다. 고교시절 전국 1등을 했다는 후배는 별 다른 이유 없이 방바닥에서 숨만 쉬면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종적이 끊긴 사람이 있고, 차이고 와서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질까 싶은 폐인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나타난다. 악의에 가득 차 비방에 비방을 하느라 정신줄을 놓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고 누가 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호의와 선의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대놓고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얼핏 얼핏 교정을 돌아다니는 광인들과 닮아가는 것이다. 결국, 어찌해보지 못하고 관계가 멀어지거나 도망가게 된다.

                 

감당할 수 있는 정상인 사람들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후배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성적인 후배는 사람들을 일정한 거리 위에 두려고 한다. 그 거리보다 멀어지면 친절하게 다가가 상냥하게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끌어당긴다. 하지만 그 거리보다 가까워지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해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그 후배의 주위에는 친절에 반해 사랑을 느끼고 쫓아다니는 다수의 남자들과 밀어내기와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는 호의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남자친구로 구성된 인간관계를 보여주기만 한다. 그 친구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항상 동일한 상황이 구현되고 이루어진다. 어떤 후배는 애정을 무척 갈구했지만 애정이 입바른 소리로 구박하거나 사실을 바로잡는 것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본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애정을 의심하고 시험해보면서 결국, 상대가 애정을 접으면 그제서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안도하는 것이 보인다. 어떤 친구는 자신을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자신이 비련과 연결 지었다. 가끔은 슬픔을 원해서 일부러 망가질 것이 뻔한 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패턴을 바꿔보기 위하여 이야기도 해보고 토론도 해보고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을 같이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 때뿐이다. 알콜 중독자들이 항상 입으로는 술을 끊어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하지만 정작 술 앞에서는 마셔야할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 결국 술을 마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입으로는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탓하지만 누가 봐도 불구덩이인 곳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그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패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패턴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패턴 위에서 모두 맹목적이었다. 그나마 자기 파괴적인 패턴이 아니고 스스로의 패턴이 주위 환경과 잘 조화되면 정상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턴이 정착되지 못해서 주위 환경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거나 자기 파괴적인 패턴으로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그 속의 유일한 대죄인처럼 살고 있었다. 처음 대학에서 마주쳤던 광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더 이상 광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정상인이란 자신의 좋은 패턴과 좋은 환경이 어우러진 운좋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패턴과 환경이 어긋날 때 사람들은 광인처럼 행동한다. 스스로에게 칩거해 들어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기 위안에 몰두한다. 결코 패턴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저 운이 좋은 광인과 운이 나쁜 광인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는 어떤 광인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을 쓰게 된 것은 사주팔자 때문이었다.

 

머리는 좋지만 학업 성적이 좋지는 않다.

 

이 말이 맞나 안맞나 생각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사주에서 말한 내용이 틀리지 않았지만 주위 환경과 스스로의 성격이 결합되어서 그것을 뒤틀었고 결국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 같다.

 

사주에서 말한 대로 머리는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역마가 있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하고 산만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자기 본위로 살고 인내심도 없고 흥미도 빨리빨리 바뀌며 치밀하지 못하고 항상 즉흥적이라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점은 공부를 잘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항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부해보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몸과 마음은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정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이어트나 금연을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신체에서 오는 신호와 무의식적 욕구에 얼마나 휘둘리는지 말이다. 그렇게 휘둘리다 보면 다이어트나 금연을 포기하게 된다. 시도할 때마다 좌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자존감을 깎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시도해보지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은 비비꼬이고 정신은 가출한다. 시간은 낭비되고 고통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공부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러니 사주에서 한 예측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공부에서 말하는 등수나 성적을 스스로에 대한 지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윗사람들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았고 완전히 혼자서 놀았다. 당연히, 스스로를 차분히 발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외부의 사건이나 평가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넓은 시야가 없었기 때문에 선입견도 없었다. 스스로 어떤 운명일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지 않을 수 있었고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무협지에 빠져서 꿈속에서 살다가 신비주의나 기공류도 연구하고 못하는 수학에 열을 올리면서 공부할수록 성적이 나빠지는 신기한 공부법도 시도하는 등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는 엄청나게 시간낭비를 했지만 스스로에겐 충실하게 모험을 시도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황된 연구와 모험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곳에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얻은 것들도 그런 것들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경험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생에 유리한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것이긴 하다.

 

두 번째로는 탐욕이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먹는 것도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씹으면서 느낄 수 있는 깊은 풍미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바로 달고 짠 것을 먹고 싶다. 탐욕이 슬픈 것은 결과를 즉각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탐욕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은 뛰어들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탐욕하는 것, 내 이성이 아닌 몸과 무의식이 탐욕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이것은 상당히 쓸만한 무기가 된다. 허황되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험을 어찌어찌 마무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심상을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유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탐욕은 정말 쓸만한 무기가 되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의 조합으로 다음과 같은 심상을 구축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어렵게 쓰고다양한 방식으로 쓸수록 많이 발전할 것이다

 

이 심상에서 발전의 부분이 매우 명확해야 한다. 당시의 나에게 이 발전의 부분은 무협지적 상상력과 만화책 그리고 기공류 따위의 논증이 결합되어 현실적이고 명백한 사실처럼 느꼈다. 그래서 실제로 해당 기관을 쓸수록 발전하는 느낌을 정말로 받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었기에 뇌를 10년 정도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과용하면 천재가 되거나 초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죽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그렇게 믿어도 별다르게 부작용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용례는 이렇다.

 

-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면 나의 뇌가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 창의적이고 복잡한 행위를 수행할수록 뇌의 가능성과 퍼포먼스가 올라간다.

 

초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기대와 이런 기대를 실천해도 현실적으로 부작용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어리석음과 탐욕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조형한 심상이다. 덕분에 무조건 이득을 보는 행위라는 생각으로 수학에 골몰할 수 있었다. 물론, 수학 공부는 할수록 성적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험 전날 밤새고 괴로워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상당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신적 피로감을 일종의 성과로 판단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물론, 비현실적인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흘러갔으면 그냥 자기 발전에 매몰된 바보로 끝났을 것으로 거의 확신한다.

 

내가 구체적이고 눈앞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초능에 가까운 능력에 대한 욕심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해도 현실적 욕망 앞에서는 그냥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심상 덕분에 전혀 하지 않았을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잘한 것은 아니다. , 대단한 끈기와 뚝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혹에도 무척 약하기 때문에 심상의 작동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험전날이나 정말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꼭 공부해야 할 순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시절을 거치면서 내 속에 삶에서 실패할지 모른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포가 자리 잡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지향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머니가 어느 날 당시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걸면서 나의 탐욕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공포와 욕망이 일으킨 추동력 앞에서 현실적인 모든 소소한 욕망은 힘을 잃었고 덕분에 나는 재수시절 기적 같은 경험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주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저 추론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맞았을 법한 그 예측은 현실의 무한한 변화를 완전히 추정해내진 못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갔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주가 추정해낸 나의 특성도 내가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나의 탐욕과 어리석음도 극복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을 간 것이 아니다. 우연과 우연이 마주쳤고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 책들과 각종 사건이 내 인생의 방향을 뒤틀었다. 나는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뒤튼 것이 아니다. 그냥 뒤틀어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얻은 결과를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또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우리에게는 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은 딴짓의 운명, 즉물적인 탐욕, 나쁘지 않은 머리,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대한 욕구, 어리석음, 인간적인 찌질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바둥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발바둥치면서 내린 결론은 차라리 뛰어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나를 부정하고 탐욕을 부정하는데 시간을 쏟느니 탐욕을 이용해서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찌질하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그 찌질함을 책을 읽는 기회로 바꾸는 것이 낫다. 허황된 것을 부정할 수 있다면 좋지만 항상 머리 한켠에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뛰어들어서 졸업하고 나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졸업이 된다. 어리석은 짓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 보이기도 한다. 탐욕을 이용하다 보면 갑자기 탐욕이 그냥 욕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찌질함을 기회로 이용하다 보면 그 찌질함이 사실은 개성이 되기도 한다.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함은 창의성과 추동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보려고 용을 써보다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보길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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