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포스팅에서 의식이나 생각이 그 자체의 규칙이 아닌 다른 욕구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욕구가 전환될 때마다 찰나의 의식 끊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파국의 경험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합적인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깨졌고, 의식인지 자아인지 모를 것이 파편화되면서 나 자신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만 존재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파국 당시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크게 바라보고 사유하고 분석할 어떤 무엇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 무협지를 보면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일관된 어떤 사람이 있다는 환상이 깨지면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지만 아쉽게도 현실 속의 나는 오히려 망가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흔히, 망상이란 것은 이렇다. 이것저것 게임도 하고 싶고, 나가서 놀고도 싶고, 친구를 보러 가고 싶기도 한데, 공부는 해야 하고 그런 마음의 갈등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현실을 도피하면서 빠져들다가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빠져나오는 것이 망상이다. 파국을 경험하기 이전에 나의 망상도 이랬다. 많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선이 명확했고, 망상에 잠깐 빠지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파국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 경계가 남아있지 않았고, 망상으로부터 돌아오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망상에서 정신을 차리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내 경우에는 처음부터 정신이 차려져 있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망상은 내가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내 몸을 움직였다. 


 망상은 항상 내가 좋아할 법한 내용들이었지만 항상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지나쳤다. 배가 고프면 폭식을 한다. 잘 체하는 몸이기 때문에 폭식을 하면 항상 그 다음날 발열, 오한, 두통 등의 체증에 시달리지만 먹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머릿속에 그 공포가 떠오르지만 욕구가 이것을 찍어 누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성욕이 생기면 야동을 틀어넣고 성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기계적으로 해소한다. 이것은 이미 성욕해소가 아니라 자기 파괴에 가까운 자해행위였고, 죽을 것 같고 머릿속에서 피곤과 고통을 호소하지만 역시 성욕에 의해 무시된다. 잠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까지 자고 그 잠마저 대부분 야동과 액션영화에 가까운 꿈으로 범벅이어서 쉰다는 느낌은 없었다. 쾌락은 충분히 자기 파괴적이었다. 


 다음날 겪을 부작용이 눈에 선해서 욕구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해도, 그 때마다 욕구가 그 생각을 찍어 누르고 왜곡시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욕구가 절제를 찍어누르는 감각은 다이어트를 하거나 금연을 할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하다. 다이어트를 할 때, 식욕이 올라오면 그 욕구가 마음을 흔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보던 사탄과 비슷해서, 온갖 유혹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욕구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이 같이 끌려나온다. 때론, 욕구 그 자체가 하나의 자아처럼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다. 가령 다음과 같다. 


 다이어트를 할 때, 갑자기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유난히 욕구가 거세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활성화된다. 

절제 : 참아야해!

욕구 : 이번엔 욕구가 유난히 심하네, 이 번 한번만 먹고 다시 절제하자.


절제 : 그러고 먹으면 다음번엔 “이미 다이어트를 망친 것 같으니, 일단 욕구는 채우고 보자.”라는 식으로 할 거면서 절대 먹지 않을거야.

욕구 : 하지만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누릴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


절제 : 한두 번 속는 줄 아나! 나중에 살 빼고 먹을거야!

욕구 : 네가 자꾸 실패한 것은 네 의지력이 약해서지 왜 자꾸 욕구를 탓하는 거야. 평생 욕구 없이 살 것도 아니면서. 욕구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정하면 네 인생도 재미없을 거야. 그러니 같이 공존해야지. 그러니 ... (끝없는 이야기들)

 

 욕구는 절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논박한다. 위의 문답은 보통 “이 번 한번만”에서 무너지기 일쑤다. 하지만 계속 버티면 욕구는 설득하고 인신공격을 한다. 그 다음에도 버티면 욕구는 끊임없이 밑도끝도 없이 절제를 괴롭힌다. 결국, 절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욕구가 승리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절제’가 무너질 때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진다. 그렇게 자존감이 몇 번 무너지면 더 이상 다이어트나 금연을 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 


 내 파국의 경험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욕구가 절제를 논파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나타나서 노골적으로 욕구를 해소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나의 주체감,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감각은 항상 그 반대의 ‘절제’ 속에 있어서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그 무기력함에 회의감, 한심함, 자괴감, 좌절 등을 느끼면서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스스로를 욕하는데서 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심함을 경멸하고 욕하는 것이 상처난 곳의 딱지를 긁듯이 중독되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욕구를 제어하는 방법은 더 큰 쾌락과 공포였다. 노골적이고 지나친 성욕의 범람은 전혀 즐겁지 않고 역겹다. 하지만 안하겠다고 스스로를 아무리 다그쳐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쾌락의 추구로 전환하면 어느 정도 먹힌다. 나는 이를 만화방으로 옮겼다. 집의 모니터 앞에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만화방에서의 욕구가 적절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으로 만화방에 머무는 시간이 20시간이었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만화책과 무협지를 보고 또 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나 성욕과 폭력에 대한 대리욕구인 것은 인터넷이나 야동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떻든 간에 착하고 좋은 뻔한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상적인 가치관이나 긍정적인 가치관을 계속 머리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공포였다. 아무리 욕구가 지나쳐도, 그 모든 것은 해본 것을 극대화하는 수준이었지 결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욕이 강해도, 범죄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상황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덕감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포였다. 낮아진 자존감이 그런 상황을 더 부추겼다. 폭력은 자신 없었고, 범죄로 돌아올 여파가 더 무서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공포가 나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매일 매일 온갖 욕구에 시달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무너졌다. 하던 고시 공부는 실패와 다름없었기에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존감도 무너졌다. 스스로가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느껴졌을 때, 어떤 강사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매년 고시촌에는 자살인지 아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거듭된 실패 속에서 어느 날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하겠다는 의욕도 없다. 그냥 고시원에 하루 종일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반대로 살겠다는 의욕도 없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는다. 그러다가 굶어죽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미쳐간다고 생각하면서 망가졌을 때, 그 망가짐이 심해졌을 때, 이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죽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공포감이 내 절제력과 통제력을 잠시나마 원상복귀 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유일한 시간이었다.

중고등학교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는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에 의미있는 일 따위는 없고 그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만사에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는 아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며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으로 확고한 회의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대학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의심하고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의심한다니 멋있지 않은가? 이미 갖고 있던 회의주의적 성향을 정말 멋진 쿨함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지 않은가. 국가를 의심하고, 사회를 의심하고, 경제를 의심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라고 들었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뭘 알겠는가. 이미 사람들이 의심한 내용들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 철학자도 있었고, 프로이트와 다윈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화를 밑바닥에서 무너뜨린 사람도 있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이나 유전자학은 인간을 거의 기계나 컴퓨터처럼 다루고 있었다. 읽다 보니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기엔 너무 불완전해서 탐욕으로 매번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최악의 정치 형태인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좌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모두 원숭이의 발정 정도로 치부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서 아름답고 진정한 사랑, 정치적 선동, 선행, 혁명, 자아의 실현, 신뢰 따위를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누군가 이런 것을 들이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권유할 때만 작동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A씨는 너무 훌륭한 것 같아. 그분은 누구랑 진정한 사랑을 했고,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라서 믿을 수 있어, 그 분이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어 너도 여기에 기부도 하고 활동도 같이하자.”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응 그렇구나, 미안 최근 바빠서정도로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어서 설득을 시도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범우주론적 회의적인 경향을 스스로에게 포장한다.

 

그래,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니? 사춘기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을 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발정난 원숭이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존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겉멋이 잔뜩 든 염세주의 똘아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거나 토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의 주제는 A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토론으로 바뀌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 상할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미 그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잔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설득 당할 가능성이 더 높게 된다.

 

나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보통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피하고 엉뚱한 일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었으니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혹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이 우울해지고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빛바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뱉었던 회의주의자적인 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느꼈으면서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힘이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도 그렇다. 필사적으로 부정해 오다가 어느 순간 그 부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나타난다. 어느 유난히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몰아닥치는 상념 속에서 갑자기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이솝 우화의 여우가 어차피 저 포도는 시고 맛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상처 받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그런 인간들이 말하는 가치와 의미는 결국 허상이고 망상이거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꾸며댄 것들에 불과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거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운 바에 따라서 세상에 믿고 따를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빈민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하기 위한 가식의 수단으로 보였고, 열정과 혁명은 발정난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취한 사람들의 과대망상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보였다. 종교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로 보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고, 돈 많은 부자는 그 돈에 대한 집착으로 전전긍긍하는 궁색하고 인색한 노인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가치한 일들로 증명하면 점차 삶이 더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그런 생각을 깊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고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의미가 문제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진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두 무의미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정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스스로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설정해도 된다. 그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비록,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전 지역으로 가서 탱크 앞에 뛰어드는 것도 멋있겠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이미 그 의미에 충실하다.

 

모든 의미를 부정하니 이제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찾아보니 이번에는 앞에서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세상하고 마주친 느낌이었다. 선행은 기분이 좋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열정은 진정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고 그저 일종의 구애행동으로만 남았어도 그렇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으로도 해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모한 사람들, 이상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만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앉아서 속으로는 온갖 욕망이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평가만 하고 있는 나보다는 나았다. 나도 그렇게 의미를 만들고 살아 움직여서 실패도 성공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하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나 대단한 선배와 어르신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처음으로 스스로 발견한 역설이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이때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역설이다.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남보다 늦게 가는 것 같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러면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혹시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상한 명예와 자격지심으로 엉뚱한 옷을 입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려도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나는 부와 명예를 밝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와 명예에 매우 높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기꺼이 누릴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막 살기 시작했다. ㅜㅜ

처음 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을 쓰게 된 것은 사주팔자 때문이었다.

 

머리는 좋지만 학업 성적이 좋지는 않다.

 

이 말이 맞나 안맞나 생각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사주에서 말한 내용이 틀리지 않았지만 주위 환경과 스스로의 성격이 결합되어서 그것을 뒤틀었고 결국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 같다.

 

사주에서 말한 대로 머리는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역마가 있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하고 산만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자기 본위로 살고 인내심도 없고 흥미도 빨리빨리 바뀌며 치밀하지 못하고 항상 즉흥적이라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점은 공부를 잘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항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부해보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몸과 마음은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정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이어트나 금연을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신체에서 오는 신호와 무의식적 욕구에 얼마나 휘둘리는지 말이다. 그렇게 휘둘리다 보면 다이어트나 금연을 포기하게 된다. 시도할 때마다 좌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자존감을 깎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시도해보지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은 비비꼬이고 정신은 가출한다. 시간은 낭비되고 고통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공부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러니 사주에서 한 예측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공부에서 말하는 등수나 성적을 스스로에 대한 지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윗사람들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았고 완전히 혼자서 놀았다. 당연히, 스스로를 차분히 발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외부의 사건이나 평가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넓은 시야가 없었기 때문에 선입견도 없었다. 스스로 어떤 운명일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지 않을 수 있었고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무협지에 빠져서 꿈속에서 살다가 신비주의나 기공류도 연구하고 못하는 수학에 열을 올리면서 공부할수록 성적이 나빠지는 신기한 공부법도 시도하는 등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는 엄청나게 시간낭비를 했지만 스스로에겐 충실하게 모험을 시도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황된 연구와 모험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곳에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얻은 것들도 그런 것들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경험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생에 유리한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것이긴 하다.

 

두 번째로는 탐욕이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먹는 것도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씹으면서 느낄 수 있는 깊은 풍미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바로 달고 짠 것을 먹고 싶다. 탐욕이 슬픈 것은 결과를 즉각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탐욕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은 뛰어들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탐욕하는 것, 내 이성이 아닌 몸과 무의식이 탐욕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이것은 상당히 쓸만한 무기가 된다. 허황되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험을 어찌어찌 마무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심상을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유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탐욕은 정말 쓸만한 무기가 되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의 조합으로 다음과 같은 심상을 구축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어렵게 쓰고다양한 방식으로 쓸수록 많이 발전할 것이다

 

이 심상에서 발전의 부분이 매우 명확해야 한다. 당시의 나에게 이 발전의 부분은 무협지적 상상력과 만화책 그리고 기공류 따위의 논증이 결합되어 현실적이고 명백한 사실처럼 느꼈다. 그래서 실제로 해당 기관을 쓸수록 발전하는 느낌을 정말로 받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었기에 뇌를 10년 정도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과용하면 천재가 되거나 초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죽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그렇게 믿어도 별다르게 부작용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용례는 이렇다.

 

-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면 나의 뇌가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 창의적이고 복잡한 행위를 수행할수록 뇌의 가능성과 퍼포먼스가 올라간다.

 

초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기대와 이런 기대를 실천해도 현실적으로 부작용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어리석음과 탐욕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조형한 심상이다. 덕분에 무조건 이득을 보는 행위라는 생각으로 수학에 골몰할 수 있었다. 물론, 수학 공부는 할수록 성적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험 전날 밤새고 괴로워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상당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신적 피로감을 일종의 성과로 판단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물론, 비현실적인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흘러갔으면 그냥 자기 발전에 매몰된 바보로 끝났을 것으로 거의 확신한다.

 

내가 구체적이고 눈앞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초능에 가까운 능력에 대한 욕심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해도 현실적 욕망 앞에서는 그냥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심상 덕분에 전혀 하지 않았을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잘한 것은 아니다. , 대단한 끈기와 뚝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혹에도 무척 약하기 때문에 심상의 작동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험전날이나 정말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꼭 공부해야 할 순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시절을 거치면서 내 속에 삶에서 실패할지 모른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포가 자리 잡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지향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머니가 어느 날 당시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걸면서 나의 탐욕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공포와 욕망이 일으킨 추동력 앞에서 현실적인 모든 소소한 욕망은 힘을 잃었고 덕분에 나는 재수시절 기적 같은 경험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주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저 추론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맞았을 법한 그 예측은 현실의 무한한 변화를 완전히 추정해내진 못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갔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주가 추정해낸 나의 특성도 내가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나의 탐욕과 어리석음도 극복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을 간 것이 아니다. 우연과 우연이 마주쳤고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 책들과 각종 사건이 내 인생의 방향을 뒤틀었다. 나는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뒤튼 것이 아니다. 그냥 뒤틀어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얻은 결과를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또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우리에게는 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은 딴짓의 운명, 즉물적인 탐욕, 나쁘지 않은 머리,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대한 욕구, 어리석음, 인간적인 찌질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바둥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발바둥치면서 내린 결론은 차라리 뛰어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나를 부정하고 탐욕을 부정하는데 시간을 쏟느니 탐욕을 이용해서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찌질하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그 찌질함을 책을 읽는 기회로 바꾸는 것이 낫다. 허황된 것을 부정할 수 있다면 좋지만 항상 머리 한켠에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뛰어들어서 졸업하고 나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졸업이 된다. 어리석은 짓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 보이기도 한다. 탐욕을 이용하다 보면 갑자기 탐욕이 그냥 욕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찌질함을 기회로 이용하다 보면 그 찌질함이 사실은 개성이 되기도 한다.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함은 창의성과 추동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보려고 용을 써보다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보길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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