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20대 중반의 1년 정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로부터 지금까지 대략 20년간 내 삶의 방향은 이 책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선배의 펌프질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자마자 총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괴델 에셔 바흐는 당시 읽었던 다른 어떤 종류의 책으로부터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구성으로 방대한 분야를 통합한 책이다. 바흐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패러독스를 거쳐 에셔의 그림과, 현대 수학이 마주친 혁명적인 변화 그리고 불교의 선문답을 어우러지게 하면서 알고리즘과 생물학까지 통섭하고 있는 미친 책이다. 언급한 모든 분야에서 수박 겉핥기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핵심을 전문적으로 간결하게 짚어나가고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난이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각의 내용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선배와 같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정말 독서를 많이 했고 박학한 교양과 깊은 지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문과였기 때문에 수학, 논리학, 컴퓨터 부분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바흐의 음악 이론은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에셔의 그림들과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고 몇 번 접해본 그리스의 패러독스, 불교의 선문답 위주로 책을 읽고 해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모임은 간단하게 한 번 읽는 수준으로 흐지부지 끝났지만 개인적으로 그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나름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서사와 지식 위주의 독서를 했다면 이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 경험은 간결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와 조각조각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조화로운 가운데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강렬한 열망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괴델 에셔 바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그렇다 변주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음악, 논리학, 생물학, 수학, 패러독스, 인공지능, 그림, 불교의 선문답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심도 있게 펼쳐지지만 그 핵심에 어떤 비슷한 무엇인가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징적으로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은 인간의 지성이 극대화 되는 부분이고 동시에 인간 지성의 한계가 노출되는 무한히 순환하는 어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잘 모르니 계속 이렇게 감상적으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사와 현대 수학 그리고 논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패러독스와 선불교의 선문답을 읽어보고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도 읽어보게 되었다. 덕분에 어떤 환상적인 비전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한세계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이었다.

       

칸토어의 무한 증명, 또, 튜링머신으로 그것을 증명한 튜링, 그들이 증명한 것은 오직 극도의 추상적인 사유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 상상과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하게 초월한 영역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려보기도 힘든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 말하고 있는 양자의 행동도 계산하고 증명은 가능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저 계산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기괴한 세계다. 마지막으로, 괴델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참인 명제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 무슨 말인가? 증명되지 않은 참인 명제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지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시절에 제시된 패러독스를 통해서 다시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선불교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분야에서는 혁명적인 발전과 동시에 어떤 지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지성 자체가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을 알게되는 지성, 진리의 극한에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해버린 지성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 상태,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는 상태를 다시 어떤 절대적인 일관된 이성으로 뛰어넘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으로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가능성과 다양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거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책을 통해서 결국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이 통찰하였고 덕분에 그 지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무한하고 항상 옳다는 식의 계몽주의적인 맹목적인 믿음을 거둘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 제한이 있고 부족한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때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본인도 인지심리학자로서 인간 정신의 구조나 지성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의 곳곳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통찰을 조금씩 읽어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접근을 20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지속하게 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를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추상적인 느낌만 있는 수준이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꼭 알아야 할 어떤 진리가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얻었고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관련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덕분에 꽤 오랜 기간 방황하기는 했지만 좋든 나쁘든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되었다. 

     

덧붙이면 괴델 에셔 바흐』에서 선불교를 인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저자가 지성의 한계를  지성의 미혹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불교의 지혜를 선문답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해석이 되었고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불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서유기를 통해서이다. 천방지축 날뛰는 손오공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는 이야기와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삼장법사가 천축으로 향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가장 멋진 판타지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손오공이 좋았지, 답답하고 무능해 보이는 삼장법사가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삼장법사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았을 때에는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관광을 하면서 사찰을 가보기도 하고 신자들로부터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잘 와닿지 않았다. 그냥 구도자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일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복을 위하여 치성을 드리고 기도를 올리는 무속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 다음으로 불교를 접한 것은 무협지에서였다. 소림사로 대표되는 무술의 고향 이미지는 젊은 남자에게 어필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불교도 무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협지의 세계에서 이단적인 존재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협지에 깨달음이라는 요소를 가장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작가인 백상이었다. 당시, 그의 글의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이 전혀 노력도 안하고 빈둥빈둥 살고 있고 찌질하고 전혀 존중받기 어려운 이라고 해도 깨달음을 거치면서 이 모든 것을 한번에 뒤집는 다는 점이다. 그의 무협에서 깨달음은 불교적 깨달음이기도 했고, 도가적 곡선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힘이 바로 구현되는 권능에 가까운 힘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어떤 근원적인 지혜를 동시에 획득한 느낌을 준다. 비유하자면 구석기 시대의 부족전쟁에 꼬맹이가 갑자기 양자역학을 깨닫고 최첨단 핵미사일을 투하하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차원이 달라지는 셈이다.

 

무협지로 봤을 때는 그냥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즐기기만 했을 테지만 마침 그 때 영화 매트릭스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 하면서 나타났다. 주인공 네오가 죽었다 부활하면서 매트릭스 내부의 세상을 코드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이를 마음껏 변화시켜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권능을 구사하는 장면이 바로 그 백상 무협에서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장면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매트릭스 상영 후에 많은 비평가들이 이를 기독교적 삼위일체와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읽었지만 나는 이를 백상의 무협에서 읽은 불교적인 깨달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무협지에 자주 나타나는 불교의 경전이 금강경이다. 소림의 4대 금강, 금강불괴, 나한금강기공 등, 금강이라는 말은 그 근원을 금강경에 두고 있고, 무슨 깊은 깨달음이 어쩌구 하면 대부분 금강경이 주된 핵심 깨달음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사실, 이것은 금강경이 대한민국 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적 토양이 금강경에 대한 찬사를 많이 들을 수밖에 없는 토양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호기심이 생겨서 민족사에서 나온 금강경을 사서 읽어보았다. 정말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름 문해력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관련 설명서나 주해서 역사서 등을 흝어 보면 불립문자(不立文字)이므로 말로 전할 수 없고, 오직 깨우쳐야만 알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책을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정도가 심해지기만 했다.

 

가령, 이런 경구가 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곧 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가는가? 서로 모순된 말들을 배치해서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창의력을 발휘하고 불교에 관련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여 위의 경구를 말이 되게끔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불교를 진심으로 믿고 이 경전에 보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나처럼 그냥 지나가면서 무슨 내용인가 한 번 슬쩍 보기만 하려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동문서답으로 가득한 소리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모순된 경구가 딱 한 구절 나와서 그 부분만 풀면 어떤 전체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경전의 대부분이 이런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략의 느낌도 받기 어려웠고 솔직히, 경전이 스스로 독해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독해를 포기했다.

 

그 후에는 다른 경전을 찾아서 읽어봤지만 반야류와 금강류의 경전은 알아듣기 어려웠고 쉬운 경전은 어린이 동화책 같은 우화에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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