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서(六書) 개요> Ankilog


한자는 문자를 만드는 방법, 구성법, 활용 원리에 따라 크게 상형자(象形字), 지사자(指事字), 회의자(會意字), 형성자(形聲字), 전주자(轉注字), 가차자(假借字)의 여섯 종류로 나누는데 이 분류법을 육서(六書)라고 한다.

 

육서는 상형자(象形字)와 지사자(指事字)로 기본적인 글자를 만들고 이 만들어진 글자를 조합하여 회의자(會意字)와 형성자(形聲字)를 만든다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필요에 따라 새로이 응용하는 과정에서 그 응용 방법에 따라서 전주자(轉注字)와 가차자(假借字)로 구분한다. 

  

육서(六書)는 완벽하고 철저한 분류법은 아니다. 어떤 글자는 상형자와 지사자에 동시에 해당하기도 하고, 어떤 글자는 회의자와 형성자에 모두 해당하기도 하는 등 모든 한자를 육서(六書)에 따라서 명확하게 배타적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육서(六書)를 설문해자(說文解字) 이후 오랜 기간 인정해왔고, 갑골문의 해석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원리가 실제 한자가 만들어지고 응용되는 근본 원리로 작동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육서(六書)를 간단하게 알아두면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어 한자 공부에 조금 더 깊이와 즐거움을 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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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각종 신문이나 교과서에서 한문을 많이 사용했고 좋아하는 무협지도 한문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한문은 어느 정도 친숙함이 있었다. 당시에 사자성어를 배우는 것이 유행이기도 해서 나름 조금 배운 바는 있지만 천자문도 떼지 않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문을 알고 있음으로 인하여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글로 되어 단어들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한자어인 경우도 많았기에 그런 단어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얻는 소소한 이득이었다.

 

한글 전용과 영어교육이 대두되면서 한자는 수업시간에도 크게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한문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냥, 교양수준으로 몇 마디 알 뿐이고 그 글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직접 쓰지는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자와 한문에 대한 관심이 생긴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군대에서 손자병법을 읽었을 때였다.

 

손자병법의 원문을 읽어보니 한자 원문과 이를 한글로 해석한 부분을 비교해보니 분량이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원문이 10글자라면 한글은 대략 20~30 글자로 늘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한문에 대해서 갖게 된 인상이 무척 효율적인 정보체계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서 느끼게 된 것은 한문이라는 것이 생각을 간단한 글자로 압축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그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고 정보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는 단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문은 글의 맥락과 학문적 맥락을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므로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는 자양분도 되지만 터무니없는 해석으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아니라면 한문으로 된 고전을 전부 읽어낼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되었다.

 

그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인생을 공부하면서 배우고 발전하는 삶으로 스스로 규정하게 되면서 한문 공부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첫 번째는 한자어를 기반으로 한 동양철학이 노년에 어울리기 좋은 벗이라는 점이다. 음풍농월을 즐기면서 선인의 깊은 지혜를 음미해보는 것도 나름 매력적인 삶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점도 한몫 했다.

 

두 번째는 위에서 언급한 언어체계로써의 한자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체계에 따라서 사유의 형태가 고정된다는 점은 꽤 널리 받아들여진 학설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살아있는 표의문자 체계를 머릿속에 장착할 경우 어떤 가능성이 열릴지 무척 호기심이 생긴다.

- 축약된 표현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들면 더 생각과 글이 더 간결하고 빨라질 수 있을까?

- 선인들이 말하는 문리가 트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 동양적 사유방식의 원형과 행태를 이해할 수 있을까?

- 과연 한자어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국어의 깊이도 깊어질까?

 

세 번째는 Anki가 있다는 점이다. 원래 외우는 것을 학을 뗄 만큼 싫어하기에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어떤 하나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응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량으로 외워서 많은 정보량으로 통찰을 제공해주는 방식의 공부도 있다. 화학이나 생물학 같은 과목이 그렇다. 그리고 한문도 그렇다. 이런 공부들은 배경지식이 쌓이면서 단순히 응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쥐는 것과는 조금 다른 깊은 통찰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평소에는 이런 공부를 싫어했지만 외울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 오히려 큰 생각없이 열심히 외우다 보면 통할 것이고 외우면 외울수록 점점 공부의 효율이 올라갈 것이므로 오히려 매우 쉬운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또, 한자가 정보를 매우 압축하는 문자 체계인 만큼 많은 내용을 외우기에 적합하다는 것도 그런 판단에 한몫 했다.

 

그래서 한자의 육서 체계부터 시작해서 부수 한자, 천자문과 사서삼경으로 천천히 한구절씩 읽고 해석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까지 공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나아가보려고 한다.

 

중고등학교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는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에 의미있는 일 따위는 없고 그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만사에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는 아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며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으로 확고한 회의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대학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의심하고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의심한다니 멋있지 않은가? 이미 갖고 있던 회의주의적 성향을 정말 멋진 쿨함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지 않은가. 국가를 의심하고, 사회를 의심하고, 경제를 의심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라고 들었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뭘 알겠는가. 이미 사람들이 의심한 내용들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 철학자도 있었고, 프로이트와 다윈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화를 밑바닥에서 무너뜨린 사람도 있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이나 유전자학은 인간을 거의 기계나 컴퓨터처럼 다루고 있었다. 읽다 보니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기엔 너무 불완전해서 탐욕으로 매번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최악의 정치 형태인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좌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모두 원숭이의 발정 정도로 치부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서 아름답고 진정한 사랑, 정치적 선동, 선행, 혁명, 자아의 실현, 신뢰 따위를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누군가 이런 것을 들이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권유할 때만 작동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A씨는 너무 훌륭한 것 같아. 그분은 누구랑 진정한 사랑을 했고,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라서 믿을 수 있어, 그 분이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어 너도 여기에 기부도 하고 활동도 같이하자.”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응 그렇구나, 미안 최근 바빠서정도로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어서 설득을 시도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범우주론적 회의적인 경향을 스스로에게 포장한다.

 

그래,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니? 사춘기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을 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발정난 원숭이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존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겉멋이 잔뜩 든 염세주의 똘아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거나 토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의 주제는 A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토론으로 바뀌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 상할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미 그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잔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설득 당할 가능성이 더 높게 된다.

 

나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보통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피하고 엉뚱한 일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었으니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혹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이 우울해지고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빛바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뱉었던 회의주의자적인 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느꼈으면서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힘이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도 그렇다. 필사적으로 부정해 오다가 어느 순간 그 부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나타난다. 어느 유난히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몰아닥치는 상념 속에서 갑자기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이솝 우화의 여우가 어차피 저 포도는 시고 맛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상처 받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그런 인간들이 말하는 가치와 의미는 결국 허상이고 망상이거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꾸며댄 것들에 불과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거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운 바에 따라서 세상에 믿고 따를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빈민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하기 위한 가식의 수단으로 보였고, 열정과 혁명은 발정난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취한 사람들의 과대망상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보였다. 종교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로 보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고, 돈 많은 부자는 그 돈에 대한 집착으로 전전긍긍하는 궁색하고 인색한 노인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가치한 일들로 증명하면 점차 삶이 더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그런 생각을 깊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고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의미가 문제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진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두 무의미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정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스스로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설정해도 된다. 그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비록,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전 지역으로 가서 탱크 앞에 뛰어드는 것도 멋있겠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이미 그 의미에 충실하다.

 

모든 의미를 부정하니 이제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찾아보니 이번에는 앞에서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세상하고 마주친 느낌이었다. 선행은 기분이 좋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열정은 진정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고 그저 일종의 구애행동으로만 남았어도 그렇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으로도 해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모한 사람들, 이상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만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앉아서 속으로는 온갖 욕망이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평가만 하고 있는 나보다는 나았다. 나도 그렇게 의미를 만들고 살아 움직여서 실패도 성공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하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나 대단한 선배와 어르신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처음으로 스스로 발견한 역설이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이때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역설이다.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남보다 늦게 가는 것 같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러면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혹시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상한 명예와 자격지심으로 엉뚱한 옷을 입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려도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나는 부와 명예를 밝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와 명예에 매우 높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기꺼이 누릴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막 살기 시작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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