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음성학을 통해서 발음을 공부하고 이를 통하여 간단하게 성과를 본 바를 이야기했다. 처음 음성학을 공부하고 발음을 연습할 때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발음을 교정하고 IPA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수준이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웠지만 Anki는 그런 점에서 강점이 있다. 조금씩 조금씩 진도를 나가도 충분히 숙련되고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까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서 어찌 공부를 했다. 


 원래의 조급한 성격이라면 공부를 하면서 바로바로 블로그에 올렸겠지만 이 경우에 확신이 없었다. 발음과 언어가 어떤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매우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Anki를 통해서 다른 공부를 할 때, 입으로 하는 말이 지식에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 매번 느꼈기 때문이다. 입으로 문장을 곱씹을 때마다 그 지식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같고 의미를 재발견하니 입이 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그렇게 소리내어 낭독하는 공부를 중요시 여겼나 싶었다. 또, 입으로 하는 말은 입으로 하는 행위므로 당연히 말하고 발음하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춤을 잘 추고 싶으면 몸을 움직여 춤을 춰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손을 써서 그림을 연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익히고 싶다면 입을 열심히 써서 언어를 익혀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포함하여 발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어를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발음이 안 좋아도 한국어를 익혔고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런데 굳이 발음을 연습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스스로 실행해 보면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생소한 분야에 생소한 연습 과정 때문에 언어학자들의 글처럼 매우 지루하고 힘든 공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각오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모르고 살던 분야라서 그럴까? 얻는 바가 굉장히 많았다. 


 우선, 한국어 발음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 치아 교정 때문인지 발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자주 쓰는 발음인 ""를 ""로 발음했다. 발음 연습을 위해서 혀를 놀리고 입술을 오므리는 등 입 운동을 하면서 각종 음성기호를 발음해본다. 그리고 그 발음이 내 한국어 발음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발전하라는 영어 발음이 아니라 우선 내 자신의 한국어 발음이 개선되었다. 안 좋은 습관을 많이 고칠 수 있었고 좀 더 또박또박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끝에서는 ""를 ""로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발음이 교정된 것이다.


 그 다음은 어린 시절의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 있는 표현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 골기퍼야!”

 “가 골기퍼야!”


 “”와 “”가 서로 다른 두 문장이다. 그런데 글로 써놓으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 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이게 항상 궁금했다. 누군가 “가”라고 말하면 그것이 “가”라고 말한 것인지 “가”라고 말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고 문맥과 행동에 따라서 의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신도 이를 구별해서 말할 수 없었기에 결국 “가”라는 말은 피하고 “가”로 바꿔서 말했다.


 그런데 한국인의 음성 습관을 연구한 결과에서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 “”를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를 구별해서 발음할 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히는 한국에서 “”와 “”가 서로 융합되어 “”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가”를 알아듣지 못하니 “가”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실제 발음은 이렇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라고 말할 때는 실제 발음은 “가”다. 그리고 기존의 “가”는 보통 “가”로 바꿔서 말하게 되었다. “” 발음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 묵혀두었던 오랜 궁금증이 해결되었고 나아가서 이제는 어색하게나마 “가”라고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일본어의 특이성을 배워 일본인의 발음이 왜 그런지도 알게 되었고 한글의 우수성도 새삼 절감하게 되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들리지 않던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말을 알아듣는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가 입술과 혀를 이렇게 써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아는 느낌에 가깝다. 즉, 상대의 소리 내는 방식을 나도 어느새 비슷하게 따라하고 아 이 소리구나 하고 알게 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말을 입으로 따라할 수 있다는 점은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조금 세게 다문 입술, 강렬한 강세와 미묘한 강세, 절도 있게 움직이는 혀와 흐느적거리면서 움직여 발음을 뭉개는 혀 등은 매우 미묘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이런 발화의 경험은 매우 기본적인 감정 상태를 공유하게 해준다. 그런 소리를 낼 때의 심리 상태가 그 소리를 따라하는 내 자신에게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미묘한 부분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영어를 들으면 아는 단어일 경우 바로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소리가 내 자신의 발화 경험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제야 영어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이제 영어를 들어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못 알아듣지만 예전만큼 막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단어를 알면 바로 알아듣겠구나 하는 것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 길이 제대로된 길인 것 같다.


 이제껏 진행한 음성학 공부는 일반 언어학의 관점에서 전개된 음성학이어서 간략하고 추상적이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학문이라서 영어를 많이 사례로 올리고 있지만 그래도 영어를 익히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들을 전개하는 음성학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발음을 시작으로 입말을 구축하고 이어서 문법으로 다듬는 공부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다양한 예제와 사례, 숙달을 위한 훈련 과제 등을 활용하여 지금까지의 맛보기식 간단한 연습이 아니라 숙련된 영어 사용을 위한 훈련을 해보려고 한다. 다음부턴 Ankilog로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 



 음성학 공부는 별 기대 없이 시작했다. 국제음성기호(IPA)를 읽어보겠다는 의도로 책을 펼쳐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전문적이고 어려워서 Anki로 외웠다. 그리고 일단, 외우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존에 외운 것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 다음 공부가 쉬워지고, 투자한 시간과 정신력이 아까워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시작한 김에 끝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라 개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외국의 발음을 연습할 때 부딪치는 문제는 그 발음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소리로는 듣는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튜브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 영상을 찾아보면 좋은 예시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공’하고 발음하면 영어 원어민은 ‘콩’하고 따라한다. 그 차이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언어를 배울 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에게 당연한 소리의 차이를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소리를 따라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영어로 ‘they’를 발음하면 우리는 ‘데이’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데이’라고 발하면 영어 원어민은 ‘tey'로 듣고 우리의 발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 소리체계가 다르면 서로 소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모국어 함정이라고 한다. 상대의 소리를 나의 소리체계로 번역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저 원어민의 발음을 듣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면 나아진다고 생각할까? 일부 발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처럼 소리에 둔감하고 원래 발음까지 어눌한 사람은 듣고 따라하기로는 전혀 발전이 없다. 오히려 모국어 함정에 빠져서 왜곡된 발음이 그대로 굳어버리게 된다. 모국어가 없다면 아기처럼 해당 언어를 빠르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모국어가 이미 정착되었다면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국어 함정을 피해서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내지 못하는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음성학은 말소리를 설명할 때, 우리가 소리를 낼 때 사용하는 혀나 입술 등의 기관의 움직임으로 설명한다. 성대를 떠는가? 혀의 위치는 어디인가? 입술은 어떤 모양을 하는가? 코로 공기가 흘러가는가? 파열인가 마찰인가? 숨소리가 많은가? 등으로 소리를 묘사한다. 그리고 음성 연습은 전부 혀와 입술 그리고 성대 등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연습을 하면 일단 소리를 낼 수 있다.


 연습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they의 /ðeɪ/ 발음을 들으면 우리말의 /데이/로 들었다. 지금은 /ðeɪ/로 들린다. 어떻게 들리는 걸까?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발음하라는 말을 따라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 /ð/를 발음할 때, 혀를 윗니에 살짝 대고 소리를 내보내라고 해도 그냥 /ㄷ/이랑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ð/와 함께 /d/와 /t/의 발음을 같이 연습하다 보면 조금씩 차이가 몸에 새겨진다. 세 음이 모두 성대 입과 혀가 다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의 차이에 따라서 어떻게 음이 달라지는지 구분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서로서로의 음이 구별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음이 들려온다. /ðeɪ/가 /데이/로 들리지 않고 /ðeɪ/ 그 자체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개별 음의 연습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다른 음과 비교를 통해서 그 음의 차이를 인지해야 소리가 명확해진다. 


 개인적인 가설은 이렇다. 우리가 발성기관을 다르게 써서 다른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귀에는 똑같아 보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뇌는 현재 발성기관의 움직임과 소리를 동시에 비교하게 된다. /ð/, /d/, /t/를 각자의 발성 방식에 따라서 발음한다. 그러면 처음엔 우리 귀에는 /ㄷ/으로 들린다. 하지만 각각의 발성방식은 다르다. 따라서 이 소리를 듣는 뇌의 입장에서는 발성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따라서 소리를 구별하려든다. 성대가 진동되는지 여부에 따른 차이나 숨소리를 섞었을 때의 차이 등을 면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된 소리에 대한 신경 배선이 이루어지면 그 때부터는 /ð/, /d/, /t/, /ㄷ/를 구별하여 듣고 발음할 수 있게 된다. 즉, 서로의 소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별함으로써 음성이 체계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되면서 비로소 상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영어 듣기가 상당히 편해졌다. 내 발음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들을 때 생기는 이질감이 상당부분 사라졌다. 이제 음성 기호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장착이 되어서 해당 소리를 그대로 머릿속으로 옮겨주는 느낌이다. 이렇게 장착이 되고 나니 예전에 얼마나 힘들게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영어 단어를 들을 때, 정확한 소리를 듣지 못하니 영어를 한글로 전환해서 문맥에 따라 비교하고 그에 맞는 단어를 찾아 영어로 다시 쓰는 과정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러니 영어 듣기가 그리 힘들었고 미드를 보다가 모르는 단어 하나가 나오면 그대로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확한 음성 기호가 어느 정도 장착 되니 자연스럽게 말소리를 듣는 게 조금씩 가능해졌다.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경험은 꽤나 신세계였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이상한 도표와 기호들로 범벅되어 읽기조차 어려웠다. 위키류를 검색해보아도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한글로 적힌 전문용어라고 쉽진 않았다. 첫 느낌은 난데없이 양자역학 수식을 푸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잠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이런 공부가 필요할까?


 수십 년간 쌓여온 영어가 필요하다는 결핍감, 영어에 대해서 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기대감, 어차피 할 일은 없고 영어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사정 등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필요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자료 찾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학을 접하게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학이 아니라 언어학 중 음성학 파트였다. 일단, 언어학 개론서를 하나 집어서 음성학 부분만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읽었다는 것은 외웠다는 뜻이다. 언어학의 난이도는 너무 매우 지나치게 높아서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 수준이다. 전문용어도 어렵지만 언어현상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어의 언어 현상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와 닿지 않는다. 반면, 우리말의 언어 현상을 글로 읽고 이해하려는 것도 힘들었다. 입에서 잘 튀어나오는 말을 구태여 분석까지 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학 관련 책을 읽고 있으면 자꾸 튕겨 나간다. 집중력이 유지되지 않고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Anki에 넣어서 싹 외워버렸다. 보통은 이해를 하고 외우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인연 맺기 힘든 학문은 부득이한 경우 외워서 이해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 오히려 빠르다. 


 그렇게 하나를 외워서 기초를 닦았지만 뭔가 미진했다. 그래서 다른 책을 외웠는데, 앞서 외운 책과 내용이 다르다. 그 다음 책도 앞의 두 책과 내용이 서로 달랐다. 대혼란이었다. 상당 시간 동안 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책들을 봐야만 했다. 덕분에 음성학 공부를 어렵게 하는 몇 가지 난관을 알게 되었다.


 우선, 유럽과 미국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유럽에서 영어의 소리를 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학자들은 국제음성기호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음성기호를 따로 만들었다. 이를 미국음성기호(APA : American phonetic Alphabet)라고 한다. 국제음성기호와 미국음성기호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 음성학을 펼쳐 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호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국제음성기호가 대세로 사용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음성기호가 사용되고 그 외에 국내 사전의 발음기호 같은 다른 기호들도 같이 사용되고 있어서 초학자들은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음성기호의 한계다. 음성기호는 모든 소리를 표시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써도 말소리가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음성을 기호 몇 개로 표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성기호는 입술과 혀의 위치, 성대를 울리는지 여부, 얼마나 길게 소리를 내는지, 소리를 내는 방식 등으로 말소리를 정의한다. 


 가령 영어의 /t/에 해당하는 음은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를 파열시키는 소리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마다 /t/ 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알아듣는데 전혀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발음을 하라고 하면 /t/가 아닌 /ㅌ/이 된다. 분명히 소리도 비슷하고 서로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지만 한국인은 /t/ 발음을 외국인의 버터 발음으로 느끼고 외국인은 한국인의 /ㅌ/을 한국 특유의 영어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로 이질적으로 느낀다. 왜 그럴까? 이는 한국의 /ㅌ/ 음은 윗잇몸에서 이빨에 가까운 아래쪽에 혀를 대고, 영어의 /t/ 음은 그보다 조금 위에 혀를 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t/ 소리는 좀 더 혀를 굴리는 소리가 되고 한국어의 /ㅌ/은 좀 더 혀를 곧게 뻗는 소리가 된다.


 영미권에서 번역된 음성학 책들은 주로 자신들의 영어 음성을 위주로 기술되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어를 베이스로 영어를 익힐 때의 발성 차이를 연구한 경우에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찾아낸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영어권에서 소개한 음성학 관련 책들이나 이를 참고한 책을 읽으면 오히려 굉장히 한국적인 발음을 익히게 된다. 다른 언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이해하려는 모국어 함정으로 인하여 영어의 발음을 한국어 발음으로 이해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발음을 익히려면 한국어의 발음 방식과 영어의 발음 방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해주는 책을 찾아야 한다.


 그 외에도 범람하고 있는 음성과 발음 관련 교재들이 너무 많다.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로 나뉘어서 발음을 가르치기도 하고 최근에는 변형 훈민정음을 이용한 발음연습까지 나와서 무얼 읽고 따라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는 이것저것 참고하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오은진 교수의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의 1장을 중심 텍스트로 삼았다. 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국내 국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과 미국의 언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 등에서 음성학 파트를 전부 외우고 비교해서 선택한 것이다. 책들이 전개하는 서로 조금씩 다른 이론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기에 유튜브 등에서 실제 발음하는 시청각 자료들을 보고, 내 스스로 서로 다른 책들의 방식에 따라 발음 연습을 하면서 비교하여 판단했다. 그 결과  『외국어 음성 체계』 1장의 내용이 내 발음이 왜 이모양이고, 저 외국인은 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지를 매우 명쾌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책을 영어 음성학 공부의 기준으로 선택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면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은 음성학 관련 다른 연구를 하는 책이다. 발음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매우 재미없다. 이 책의 1장은 기존의 음성학에 관련된 논의들을 축약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정말 좋지만 정말 재미없고 읽기 힘들다. 짧은 경험상 언어학자가 쓴 글에서 재미있는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쓸 수 없다는 보편원칙을 설정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없게 쓰는 것 같다. 그런 언어학 관련 책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외국어 음성 체계』는 재미없다. 거의 실험보고서에 가깝고, 1장도 정말 축약에 축약을 거듭한 내용이라서 전혀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도서관에 갈 때마다 눈에 띄여서 읽어보고 덮기를 수십번은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읽기를 포기하고 Anki에 집어넣어 외워버렸다. 외울 때는 주로 중요한 문장 위주로 정리해서 외우는데 어찌나 축약을 잘 하셨는지 거의 토씨하나 빼지 않고 다 외워야 했다. 비록, 이 책과 인연이 닿아서 1장만 외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 책의 1장을 음성학 교재로 추천하고 있지만 읽기가 녹록치 않다는 점을 다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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