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에 영미권의 문법책을 보면서 신기한 것을 보게 되었다. 영미권의 문법책은 우선 철자를 제대로 쓰는 법, 잘 틀리는 스펠링부터 지적하고 흔한 실수들, 주어와 술어를 일치시키기 등등 소소한 팁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말을 만들고 조립하는 내용들이 많지 않다. 반대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듬어서 좀 더 품격 있는 영어를 쓸 수 있게 할까 하는 내용들 위주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한국어를 하는데 문법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알고 익힌다. 그렇지만 말이나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전달되고 격조있게 보이려고 한다. 그 때, 문법이 필요하다. 문법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언어들을 좀 더 정련된 방식으로 조직하여 목적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입말이 있어야 문법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언어 공부는 먼저 언어를 몸에 붙이고 그 다음에 문법을 익히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렇다면 입말은 어떻게 완성해야 할까? 듣고 따라하면 된다. 그렇게 반복연습을 하고 어느 정도 이상 공부량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입말은 완성된다.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영어로 꿈을 꾸게 되면 언어가 장착된 것이다.”라는 말이다. 실제로 친척 중에 이런 현상을 겪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상해 보이는 영어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그것을 외국인이 잘 받아줘서 놀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입말의 완성에는 큰 난관이 있다. 그건 음성체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언어에서 사용되는 말소리는 실제 소리와 다르다. 가령, 개가 짖는 것을 보면, 나라와 상관없이 개들은 비슷하게 짖는다. 하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말소리는 다르다. 우리는 ‘멍멍’, 독일은 ‘바우바우’, 러시아는 ‘가우가우’, 일본은 ‘왕왕’처럼 다르게 표시하고 다르게 발음한다. 이는 언어에서 사용되는 소리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저 흉내만 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들 마다 저마다의 음성체계에 따라서 소리를 유사해 보이는 말소리로 옮긴다. 


 그러면 음성체계가 다를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존에게 ‘배트맨’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했을 때, 존은 한 참을 듣다가 내가 배트맨이 박쥐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하고 나서야 알았다는 듯이 'bat man'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말한 ‘배트맨’을 ‘bat man’이 아니라 ‘pet men’으로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박쥐 인간이 아니라 애완동물을 다루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성학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영어 원어민에게 우리의 ‘ㅂ’ 발음은 ‘p’에 가깝다. 그래서 여권을 보면 박씨는 ‘Park’씨이고, 백씨는 ‘Paik’이다. 우리 귀에는 ‘b’가 ‘ㅂ’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영어 원어민들은 목의 성대를 울리는지 아닌지를 민감하게 인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ㅂ’를 'p'로 받아들인다. 내가 ‘배트맨’에서 목의 성대를 울리면서 ‘ㅂ’을 발음했다면 존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또, ‘배트맨’을 ‘pet men’으로 알아들었을 때 존은 ‘애’를 전부 ‘e’로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우리 언어의 변화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애’와 ‘에’의 발음이 우리에게 있었지만 현재는 전부 ‘에’로 융합되고 있다. 즉, ‘애’와 ‘에’를 구별하여 인식하거나 발음하지 못하고 전부 ‘에’로 발음한다. 그래서 이제는 ‘네가’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니가’라고 말하게 된다. ‘네가’와 ‘내가’가 말소리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배트맨’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실제 한국어 발음은 ‘베트멘’이라고 한 셈이다. 


 존과 나는 같은 언어를 말한다고 했지만 실은 전혀 다르게 듣고 있었다. 음성 체계가 다르니 의사소통이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이런 느낌이다. 내가 ‘배트맨’이라고 발음하는 것은 키보드에서 한글로 ‘배트맨’이라고 적는 것과 같다. 상대는 한글 자판이 아니라 영어자판만 있어서 영어 알파벳 'qoxmaos'로 알아듣게 된다. 당연히, 상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영어를 하고 있지만 상대는 그것을 들을 때마다 어색해하고 어이없어하며 의문스러워 하니 내 자신이 영어를 제대로 한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더 슬픈 것은 우리는 이러한 말소리 차이에 대해서 알기도 어렵고 극복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언어의 말소리는 일종의 대표소리라서 비슷하게 들리는 음들을 하나의 언어음으로 묶어서 생각한다. 따라서 모국어가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를 특정 말소리로 뭉뚱그려서 인식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려고 하면 영어의 소리를 한글에 맞춰 인식하기 때문에 영어의 말소리들이 이상해진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존이 말하는 ‘bat man’을 정확하게 흉내내보지만 나오는 말은 ‘배트맨’이 된다. 이를 모국어 함정이라고 하는데, 모국어의 음성체계 때문에 외국어의 음성체계가 왜곡되어버리는 현상이다. 따라서 절대음감 같이 소리를 미세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음성체계의 왜곡으로 인하여 제대로 외국어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말소리를 정확하게 익히는 것이 중요한가? 모국어 발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사람들도 안 좋은 발음의 모국어를 이용하여 사는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굳이 외국인인 한국인이 정확한 발음을 지켜야할까? 당연히 중요하다.


 일단, 언어의 본질인 의사소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정확한 말소리는 중요하다. 기껏 영어를 배워놓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손해인가? 하지만 그럼 점 외에도 제2외국어로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정확한 말소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들을 수 있고 정확하게 상대의 언어경험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다 함은 정확하게 입과 혀를 움직이고 성대를 진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겪어봐야 그 미묘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군대 생활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아무리 이야기해도 어떤 이는 관심이 없고 어떤 이는 군대를 동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이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은 눈만 마주치고 대략 ‘군대’라는 말만 해도 어느새 공감 모드가 되어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발화하는 것도 같은 경험이다. 왜 ‘파티(party)’가 ‘파뤼’로 발음되는지에 대해서 언어학에서 방언이 어떻고 지역이 어떻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실제 ‘파티’를 제대로 발음하다보면 왜 ‘파뤼’라고 발음하는지 느낌이 온다. '파티'라고 발음하면 마지막까지 각 잡고 긴장하며 발음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파뤼'라고 발음하면 긴장을 풀고 즐기는 마음이 되면서 개방되는 느낌, 캐주얼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을 받고 경험이 쌓이면 언제 '파티'라고 말하고 언제 '파뤼'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온다.


 발음 연습을 하다보면 정확한 발음과 그 발음의 미묘한 변형, 강세, 억양 등이 결합되어 언어의 맛이 살아나고, 입에 착 달라붙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화 경험이 쌓이면 상대의 말이 단순히 사전에서 찾은 대응하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서 상대의 말을 경험하듯 공감하게 해주는 공통의 언어가 된다. 단순히 상대가 내뱉은 단어 ‘I love you.’를 ‘나 사랑해 너’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데이트 자리에서 서로의 감정이 오가는 모든 상황을 ‘I love you’로 공감한다.


 결국, 영어를 공부하려면 우선, 입말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정확한 발음과 음성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음성체계가 구축되면 이제 스스로 발음하듯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때부터는 영어를 정확히 듣고 발화할 수 있어 유튜브나 미드를 이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거나 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발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토대가 없다면 매순간 자막을 보면서 단어를 확인하고 그 단어를 한글화된 발음으로 다시 뭉뚱그려서 익혀야 한다. 언어 경험이 축적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미 찾기와 해석의 조합을 연습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매번 머리를 싸매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피곤한 일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도 언어 경험의 미묘한 내용들은 전부 놓치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꽤 명백해 보인다.



 최근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글쓰기가 너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생각 가는대로 쓰던 편이었는데, Anki로 문장 암기를 하면서부터, 또, 블로그를 쓰면서부터 조금씩 글에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숨겨진 재능이 확 개화해서 글쓰기 수준이 올라간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어설프게 눈만 뜬 수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글을 보는 눈은 높아졌지만 글쓰는 솜씨는 전혀 그렇지 않은 상항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니 글을 쓰다가 제 글 보기가 힘들어 놓아버리는 나날입니다.


 글쓰기에 눈을 뜬 덕분에 이제는 글을 보면서 '문장이 유려하다.'라느니 '글이 짜임새 있다.'라든지 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늦깍이에 문학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문장을 외워서 입으로 굴려보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요. 문학에 재능이 부족한 저같은 사람이 문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은 결국 암송이라는 깨달음도 얻고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한 점도 매우 좋지만 글쓰기가 안되어 블로그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Anki로 문장 암기하기에서 겪은 최악의 부작용입니다.


 벌써, 2주 이상 새로운 포스팅을 못올리고 있습니다. 글쓰기 진행이 잘 안되어 글쓰기 관련 책을 읽고 외우고 있습니다만 언제쯤 나아질지 잘 알 수가 없네요. 이제 문장을 쓰는 법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개요를 짜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려워서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수준으로 글을 쓴다는 경지는 까마득해 보입니다. 글쓰기 연습이 끝나기고 포스팅 한다면 1~2년 후에 포스팅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게다가 건강상의 문제나 일이 바빠지면서 시간 내기가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면 점점 늘어지고 흐지부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목적이 제 삶을 정리하고 나아가는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포스팅이 늘어질수록 그 동안 구축했던 규칙과 목표가 희미해지면서 삶의 활기가 떨어집니다. 덕분에 매일 블로그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어떻게든 글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튀어나온 글입니다. 강박감이 글쓰기에 대한 공포증을 가까스로 극복한 경우입니다.


 이런 식이면 계속 포스팅이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나열하는 글쓰기는 중단하고 공부한 결과를 정리하는 Ankilog 위주로 포스팅을 하려고 합니다. Ankilog는 짧게 주요한 내용을 나열하는 방식이므로 글쓰기의 영향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글쓰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글쓰기 관련 포스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Anki 문장 암기하기 9 - 문장 형해화 현상


단순 암기를 통해 글과 문장으로 곱씹어 외우는 방식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목하게 된 현상이 있는데, 문장 형태로 흡수된 지식이 어느 순간 부터 그 문장을 떠올리기 힘들어지는 현상이다.  즉, 문장의 형태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문장 형해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문장 형해화 현상을 통하여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결정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문장 암기는 처음에는 문장을 정확히 암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문장의 리듬과 호흡이 정리되면서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지식은 문장 형태로 하나의 지식 흐름을 만들어낸다. 즉, 명사들이 동사와 서술어로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辛(매울 신)은 얼굴에 죄목을 새기는 날카로운 도구의 모양으로 죄수나 노예 또는 고통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의미가 확대되어 '맵다, 쓰다' 등의 뜻으로 사용됨


 처음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잘 외워지고 그 의미가 점점 선명해진다. 입으로 문장을 외울 때마다 ‘송곳’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송곳을 이용한 다양한 상황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문장을 입으로 외워도 아무런 감흥이 없게 된다. 그저 문장을 제대로 외우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넘어간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익숙하게 외운 문장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내용은 명확하게 떠오르지만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송곳과 송곳이 사용되는 다양한 상황만 떠오르고 문장은 실종되어 버린다.


 문장이 형해화되는 이유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들이 기존의 지식들과 서로 섞이기 때문이다. 단순 지식과 다르게 문장은 문장 내 개별 지식들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는 형식이다. 문장을 외울 때는 이러한 개별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문장에서의 관계 맺기와 동일한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된다. 즉, 신경들이 상호 연결되고 활성화된다. 신경들이 긴밀하게 연계될 수록 기억은 명확해지고 입체적이며 살아있게 되므로, 문장 암기로 외운 지식은 머릿속에 효율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덕분에  앵무새처럼 문장을 외우면서 의미를 되새기면 그에 상응하여 신경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결이 강화된다. 하지만 이 모든 작용은 우선 우리가 외운 문장이라는 형태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처음에는 문장을 문장 전체로 뭉뚱그려 외운다. 문장은 문장의 주제를 형성하는 틀 역할을 한다. 문장을 반복하여 되새기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지식들이 의식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문장의 주제를 머릿속에서 의미화했지만, 그 다음엔 문장 속의 개별 지식과 주제와의 관계로 초점이 이동한다. 전체는 부분으로 쪼개지고 우리는 전체라는 맥락 속에서 해당 부분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주제를 이러한 부분들의 총합으로 인식하게 된다. 지식의 초점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지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존재일반에 염오하게 되고, 존재일반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그래서 해탈하게 되고, 해탈하게 되면 태어남은 다했다는 해탈의 지혜가 생긴다.


 위 문장은 초기 불교에서 해탈에 도달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나타낸 문장이다. 처음에 이 문장을 외울 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무상’, ‘무아’ 등의 단어는 특히 명확한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러한 단어들은 이 문장 내에서 추론할 수 있는 의미만을 가졌다. 공부가 이어지면서, 위의 단어들을 서술하는 다른 문장들을 외웠고 덕분에 의미가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처음에 위의 문장은 “해탈의 과정”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단어들을 위치시켰다. 무상이니 무아니 하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해탈 과정에서 무상과 무아를 보아야 한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공부를 진행하여 무상, 무아 등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게 되면 왜 해탈하려면 무상과 무아를 봐야 하는지 납득하게 된다. 상황이 변한다. 해탈 과정의 부속으로만 파악했던 무상과 무아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무상과 무아의 개념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 문장의 주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이 문장은 해체된다. 무상과 무아의 개념을 알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맥락도 무상이나 무아에 대한 지식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문장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운 의미나 함의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구태여 힘들게 기억을 유지하지 않게 된다. 또, 무상이나 무아에 대한 개념으로 문장의 맥락 흡수되면서 머릿속에서 무상이나 무아의 개념이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이는 문장 암기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모방을 통한 학습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가령, 그림을 베껴그리면서 익힐 때는 처음에는 그대로 따라하면서 최대한 모사한다.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전체의 구도와 부분의 구도가 이해되기 시작하고 무슨 도구를 쓰며 어떻게 손을 움직여야 하는지 체감하게 된다. 베끼기는 그림 그 자체가 그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를 통찰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을 익히고 나면 이제 더 이상 그림을 베낄 이유가 사라진다. 익숙해진 기술과 구도 등을 통해 이를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글쓰기, 프로그래밍, 음악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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