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ki의 기본(Basic) 노트는 앞면에 질문이 있고, 뒷면에 답이 있는 간단한 질의/응답 형식이다. 당연히 다음과 같이 질문과 답을 만들어야 한다. 

         

질문 : 미국의 수도는?
: 워싱턴
      
질문 : 탄소의 화학기호는?
: C


보면 알겠지만 질의/응답 형식은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간단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 질의/응답 형식을 사용하다 보니 몇 가지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font에서 세리프(serif) 그룹을 설명한 내용의 일부이다. 

       

세리프(serif)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세리프 폰트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하다.


여기에서 몇 개의 질문과 답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가능한 만큼 만들어보자.

         

질문 :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용어는?

: 세리프(serif)

     

질문 : 세리프(serif)라는 용어가 원래 지칭하는 뜻은?

: 가는 장식 선

     

질문 : 세리프(serif)는 어떤 font들의 그룹인가?

: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

     

질문 :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들의 일반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는?

: 세리프(serif)

    

질문 : 폰트들의 일반 그룹 중에서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한 폰트들의 일반 그룹은?

: 세리프(serif)

     

질문 : 세리프(serif)는 어떤 느낌을 주는가?

: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

    

질문 : 세리프(serif)가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는?

: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어서

     

질문 : 세리프(serif)가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어서 어떤 느낌을 주는가?

: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


저 짧은 3개의 문장만으로 8개의 질의/응답 카드가 만들어진다. 저 짧은 3개의 문장을 공부하기 위해서 8가지의 문항을 생각해야 하는 부담과 그 문항을 일일이 작성해야 하는 부담이 발생한다. 물론, 이런 부담은 나중에 조금씩 여러 가지 요령이 생기면서 어느 정도 편해지기는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맥락이다. 

          

위의 3개의 문장은 하나로 어우러져서 일정한 지식체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질문과 답 형식으로 되어있는 간단한 카드는 그렇게 어우러져서 만들어지는 통합적인 지혜나 지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암기를 진행하다 보면 가끔 어떤 문항들은 너무나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하고 맥락 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맥락을 보충하기 위해서 카드를 만들다 보면 지나치게 카드가 많아지고 질문도 번잡해지게 된다.

        

이 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전체 문장을 통으로 암기하는 것이다. 8개의 카드를 볼 필요 없이 전체 문장을 통으로 외우면 지식의 손실도 없고 오히려 축약하여 농축된 지식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문장을 살펴보면 전체 문장은 3개의 문장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3개의 카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질문 :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

[                                          ]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세리프 폰트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하다.

    

: 세리프(serif)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질문 :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

세리프(serif)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                                                      ]

세리프 폰트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하다.

     

: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질문 :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

세리프(serif)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                                       ].

      

: 세리프 폰트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하다.


이런 식의 문제를 전통적으로 “완성형” 문제라고 한다. 즉, 빈 칸을 완성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형태의 질문 형식이다. 원래는 특정 맥락에 들어갈 단어를 맞추는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지만 나의 경우는 아예 문장을 외우기 위하여 문장을 빈칸으로 묶어버렸다. 따라서 원하는 사람은 주요한 단어만을 빈칸으로 만드는 완성형 문제를 만들 수 있다. 

    

질문 :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

[          ]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세리프 폰트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하다.

     

세리프(serif)


질문 :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

세리프(serif)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세리프 폰트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에 적합하다.

     

장식용 가시와 고리


질문 :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

세리프(serif)는 ‘가는 장식 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font로 오면서 문자 끝부분에 장식용 가시와 고리 모양이 있는 font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세리프 폰트는 [                      ]을 주기에 적합하다.

     

고상하고 고전적인 느낌


주요 단어를 빈칸으로 만드는 방식으로는 수많은 카드를 수월하게 만들 수 있다. 위의 경우에도 더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단어의 수만큼 빈칸을 만들어 카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 빈칸을 만들어 카드를 만들 때에는 정말 많은 카드를 만들곤 했다. 위와 같은 3개의 문장이라면 거의 15개 정도의 카드를 만들어서 반복에 반복을 했었다. 하지만 카드가 너무 많아지는 문제가 있고, 문제가 너무 쉬어서 문장을 읽지도 않고 답을 떠올린 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학습을 한다기 보다는 순발력 게임을 하는 느낌을 받고 문장 단위로 완성형 카드를 만들게 되었다

     

여튼 문장 단위로 완성형 카드를 만들게 되면 지식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농축되고 카드의 수는 줄일 수 있게 되어 상당히 효율적이 된다. 게다가 머리 아프게 문제를 만들기 위하여 끙끙댈 이유가 없게 된다. 그저 심금을 울리거나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글을 만나면 해당 문장을 통으로 Anki에 옮겨 빈칸을 만들고 완성형으로 카드를 만들어 문장을 통째로 외우면 되기 때문이다. 이 완성형 카드 만들기를 깨닫고 카드 만들기가 너무 쉬어지자 개인적인 공부에 효율이 더 붙기 시작했다.

        

물론, 이 완성형 카드를 이용한 학습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오랜 기간 하다 보니 몇 가지 장단점을 체감할 수 있었고 여러가지 깨닫는 바도 많게 되었지만 조금 다른 주제와 연계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Anki를 처음 사용할 때에는 기본적인 노트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Anki는 한국인에게 그다지 친절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2015년부터 Anki를 쓰면서 Anki 사용법을 열심히 검색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가 볼만한 한국어 자료는 많지 않았다. 물론, 매뉴얼도 있고 YouTube에 튜토리얼 동영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어 알아먹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냥 포기하고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그 때는 암기를 해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었기에 아주 간단한 사용법만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사용법이라 함은 카드의 앞면과 뒷면을 이용하는 기본(Basic) 노트를 이용하여 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Anki 홈페이지에서 제공한 매뉴얼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한국어라고 해도 잘 읽지 않는 지루한 매뉴얼이 가뜩이나 영어로 작성되어 있는데다가 앞부분은 학습이론을 개괄하고 있어서 읽다가 포기해버렸다. 지금이야Anki가 어떤 구성으로 되어있는지 상당 부분 알고 있어서 해당 목차를 찾고 키워드 검색을 해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읽을 수 있지만 처음 Anki에 접했을 때는 그런 사항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매뉴얼에서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읽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Anki에 대한 YouTube 동영상이 많았기 때문에 꾹 참고 10분 정도 보다보면 영어를 알아들을 순 없어도 가장 간단한 기본(Basic) 노트를 어떻게 쓰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본(Basic) 노트는 어린 시절 사용하던 영단어 암기용 카드를 그대로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것이라서 바로 이해하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기본(Basic) 노트를 사용해 다음과 같은 카드를 만들어보자. 

     

앞면질문 : 대한민국의 수도는?

뒷면답 : 서울


앞면의 질문을 보고 답을 떠올린 다음 뒷면을 보고 생각한 답이 맞았는지 확인하면 되는 간단한 카드다. 이런 카드만 만드는 것이 기본(Basic) 노트다. 

     

그럼 기본(Basic) 노트를 이용하여 카드를 만들어 보자. 

     

Anki를 처음 실행했을 때 나오는 메인 화면은 아래와 같다. 이 메인 화면에서 화면 상단의 가운데에 있는 [추가]를 클릭한다.




카드를 하나하나 만들어서 추가할 수 있는 추가창이 나타나면 아래와 같이 앞면(Front)에는 질문 “대한민국의 수도는?”을 작성하고 뒷면(Back)에는 답 “서울”을 작성한다.




위의 사진에서 유형 부분이 Basic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는 지금의 노트 유형이 Basic이라는 뜻인데 즉, 카드의 앞면과 뒷면으로만 카드를 만드는 기본(Basic) 노트는 의미이다.

     

[추가] 버튼을 클릭하면 기본 카드뭉치(deck)에 카드가 추가된다. 다시 카드를 추가할 수 있는 화면이 나타나지만 그냥 [닫기]를 클릭하여 카드를 추가를 그만두고 앞서 작성한 카드를 열어보자.

     

새 카드가 1개 있는 것으로 변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기본이라는 카드 뭉치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이 해당 카드 뭉치의 학습 현황과 함께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버튼이 나온다.




공부 시작 버튼을 클릭하면 다음과 같이 카드의 앞면에 질문이 나타나고 [답 보기] 버튼을 클릭하면 수평선으로 분할된 화면의 아래에 답이 나타난다.



속으로 생각했던 답이 맞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난이도를 평가하면 한 장의 카드에 대한 학습이 마무리 된다. 

     

사실, 이 사용법 하나만 알고 있으면 모든 Anki의 기본적인 사용법은 다 아는 것이다. 이 다음부터의 사용법은 카드를 적은 노력으로 많이 만들거나 기교를 부려 예쁘게 하거나 하는 내용들이다. 필요한 내용들이지만 결국, 카드의 앞면과 뒷면으로 공부를 한다는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도 처음엔 이 기본(Basic) 노트만 사용할 줄 알았지만 그 기본(Basic) 노트만으로도 원하는 모든 종류의 카드들을 마음껏 만들어서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물론, 후에 다른 기능들을 보면서 그 기능들을 알면 참 편하게 카드를 만들겠구나 싶었지만 그 편한 정도가 대단하진 않고 몰라도 사용함에는 큰 불편은 없었다.


Anki는 Desktop용은 Anki 홈페이지(https://apps.ankiweb.net/)에 가면 다운받을 수 있다. 안드로이드 폰은 플레이스토어(playstore)에서 Anki를 검색하면 되고, 아이폰도 애플의 앱스토어에 있다. 이 중 아이폰용 Anki만 한화로 3만원 가량으로 유료다. 


개발자의 말에 따르면 Anki 자체가 SuperMemo라는 암기용 유료 프로그램을 상당부분 벤치마킹한 것이다. 간격반복(spaced-repetition)이나 능동적 회상(active recall)이라든가 하는 개념을 대부분 SuperMemo에서 끌어다 쓰고 있다. Anki 관련 매뉴얼을 찾다보면 조금 깊은 주제나 내용들은 이 SuperMemo 홈페이지의 문건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아서 여전히 Anki가 SuperMemo를 기준으로 기능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Anki가 공짜 버전의 SuperMemo는 아니다. 학습 이론이나 필요한 기능들에 대해서 Anki는 SuperMemo와 일치하지만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면 간격반복 알고리즘이나 재학습 전략 등에서 SuperMemo와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는 Anki가 SuperMemo의 어느 버전 이상의 변화를 맘에 들어하지 않고 그 중간에 분기되어 나가 변주(variation)하기 시작한 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처음부터 오픈소스로 개발된 앱이므로 데스크탑 버전은 무료다. 하지만 개발자도 개발비가 필요하므로 아이폰 용 Anki로 개발비를 충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단. 그럼 왜 안드로이드용 Anki인 AnkiDroid가 무료인 것일까? 그 이유는 AnkiDroid도 다른 개발자들이 오픈소스로 다시 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Anki의 데스크탑 버전과 아이폰용 버전은 개발자가 동일하고 AnkiDroid는 다른 개발자 그룹에서 Anki를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Anki는 2018-12-15일 현재까지 2.1.6까지 개발되었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2.0.47을 사용하고 있다. 몇 가지 이유로 다음 버전으로 넘어가지 않고 있는데, 일단 정말 고급 사용자가 아니라면 사용하는데 큰 차이가 없고 아직 추가 기능(add-on) 등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nki 2.0 User Manual을 번역한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2.1 User Manual이 나와서 조금 억울했지만 일견하여 살펴보니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사용하는 방식이나 알고리즘 모두 2.0과 동일하고 2.0에서 사용하던 카드들이 그대로 호환된다. 2.1 매뉴얼은 2.0 매뉴얼에서 토씨하나 바뀌지 않은 거의 그대로이다. 다만, 미디어나 LaTex 등을 사용함에 있어 많은 개선이 있었고 매뉴얼도 이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부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상세하게 살핀 것은 아니므로 더 많은 것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파악한 것은 그렇다. 


두 번째는 아직 Anki 2.1에 잘 맞는 추가 기능(add-on)이 충분히 정착되지 않고 실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 기능(add-on)은 Anki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사용하는 추가 기능도 있기 때문에 이런 기능들이 안정적으로 개발되고 앱에서 정착될 때까지 잠시 버전업을 미뤄두고 있다. 특히, 사용하던 Python 버전이 바뀌었고 그에 따른 충돌과 버그를 제거하고 있다는 릴리즈 노트가 자주 나오고 있어서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은 관망할 생각이다.


Anki 홈페이지에는 최신의 2.1.6 버전도 다운로드할 수 있지만 2.1로 넘어오기 전의 2.0.52 버전도 다운로드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적절하게 판단하여 이를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어차피 큰 내용에 변화는 없기 때문에 첫 사용자라면 최신 버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고, Anki의 추가 기능을 사용하고 싶은 것이라면 구 버전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Anki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2015년 말쯤이었다. 

    

오래전 어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 망각곡선에 따라 공부를 하면 정말 효율적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공부할 지식의 스케줄 관리가 얼마나 복잡해질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쯤에이 되어서는 IT가 발달된 지금이라면 컴퓨터를 사용하여 그런 복잡한 관리를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망각곡선을 활용한 공부 앱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보았지만 쓸만한 걸 찾지 못했다. 그 다음은 예전에 영어단어를 종이카드에 적어서 외우던 것을 떠올랐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의 앱이 없을리 없다고 생각하고 앱이나 프로그램 등을 종종 찾아보았지만 역시 찾지 못하다가 드디어 2015년에 Anki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Anki의 개발 내역을  확인해보니 2010년쯤 Anki는 이미 나왔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인연이 아니었는지 찾지 못했다.

   

2015년에는 새로운 행위라는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스스로 만든 한계나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시작한 개인적인 프로젝트였다. 거창한 목표는 아니었고 그저 별거 아닌 일임에도 어째서인지 평생 피해다니고, 싫어하고,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믿고 그 관련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하던 것들을 마주쳐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간단한 목표를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한계를 넘어보련느 의도에 계획한 행동이었다. 가령, 훌라후프는 초등학교에 한 번 돌려봤지만 실패하고 그 뒤로는 "나는 훌라후프를 돌리지 못한다."라고 결론이 난 상태로 평생을 살아왔다. 초등학교 시절 건성으로 10분 정도 시도하고 만들어진 스스로의 한계였다. 이런 한계는 그저 일주일에 2~3시간 정도 투자해서 어느 정도 훌라후프를 돌릴 수 있게 되면 간단히 해소되는 문제였다. 실제로 시도해보니 어린 시절과는 달리 너무나 수월하게 훌라후프를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내적인 자신감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그 뒤로는 운동 중에서는 턱걸이와 윗몸일으키기를 못한다고 생각했고 하기 싫은 운동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턱걸이 1번 하기와 윗몸일으키기를 매일 50번씩 하기에 도전했다. 이 간단한 도전 역시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 동안 스스로에게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혹은 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마주치면서 하나씩 날려버릴 때마다 오랫동안 어딘가 꽉 막혀있던 것들을 해소한 듯한 시원한 느낌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새로운 행위의 범위를 확장시켜서 암기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평생 암기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왔다. 처음에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심해져서 대학 때는 암기라는 행위 자체를 할 수 없는 식으로 발전했고, 어떤 과목이든 암기가 필요한 과목을 공부할 때마다 토할 것 같은 구역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암기관련 과목은 항상 학점을 D로 깔았다.

    

아무리 새로운 행위를 시도한다고 해도 암기라는 정신적인 중노동을 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크고, 나이 들어서 갑자기 한두가지 상식을 암기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하는 회의감이 강해서 선뜻 시도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가 어떤 변화의 시기였던 것인지  갑자기 어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 다시 떠오르면서 암기할 지식을 카드식으로 어빙하우스의 망각곡선 공식을 활용하여 관리할 수 있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고 이번에는 바로 Anki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랜 기간 틈틈이 찾았던 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또, 당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챙김'이라는 정신 작용이 올바른 앎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유지하고 그 기억에 맞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속한다는 점에서 '암기'하는 정신 작용과 일부분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암기하고 암기한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기억을 유지하고 그래서 암기한 것을 활용하여 항상 올바르게 쓰라는 말로 해석하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얼추 맞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암기라는 것을 해본지 20년 가까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실험이 필요했다. 이런 저런 호기심과  새로운 시도라는 명분이 겹쳐지면서 고리타분한 노동으로써 암기가 아니라 프로그램은 과연 효과적일까? 또, 암기라는 것이 불교식 "마음챙김"과 비슷한 것일까? 하는 호기심과 연구 주제로 대체되면서 거부감이 사라진 것이다. 

      

새로운 행위의 시도라는 측면에 맞춰서 원소 주기율표 암기하기로 했다. 화학이라는 과목은 외워야 할 것들이 무척 많았다. 당시, 과학에 대한 나의 정의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하나로 꿰뚫는 아름다운 공식을 만들고 일반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학은 물리와 달리 무언가 체계적이지 않고 책을 달달 외워야 하는 아름답지 못한 과목처럼 느꼈다. 그래서 화학은 싫은 과목이었고 화학과 많은 관련이 있는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화학 쪽을 외면해왔었다. 화학에 대한 그런 선입견은 주기율표로 대표되는 각종 물성들을 암기해야 하는 화학이 너무 싫다는, 즉, 암기하는 행위에 대한 약간은 편집증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기율표를 외운다는 것은 암기에 대한 편집증적인 거부감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화학에 대한 묵은 선입견과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당시 Anki 사용법을 몰라서 간단하게 Basic 카드의 앞면과 뒷면으로만 다음과 같이 카드를 만들어서 주기율표를 외우기 시작했다. 




엉성한 솜씨로 카드를 힘들게 하나하나 만들었지만 사용은 굉장히 쉬웠다. 지하철이나 화장실에서 짬짬이 카드를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외우다 보니 주기율표는 일주일 내에 외울 수 있었다. 주기율표를 외운 경험은 그야말로 신선하고 혁명적이었다.

     

일단, 큰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것은 아마 암기할 분량을 카드 단위로 분할해서 암기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이나 직업에 부담이 가지 않는 수준에서 또, 스스로의 암기 능력을 벗어난 수준으로 암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암기하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지식을 통째로 암기하려고 노력해야만 했었다. 만일, 중학교 시절에 주기율표를 암기하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주기율표를 더듬거리면서 전체를 암기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거의 하루 종일 암기를 해야 했을테고 암기를 하다가 중간에 친구들과 놀러가거나 새로운 일을 하는 상황이 되면 암기했던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놓치고 지나가면 다시 전체 암기를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Anki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냥 시간 되는 대로 카드를 하나씩 넘기다 보면 그 자리에서 전부 외우는 것에 비해선 조금 늦긴 하지만 착실하고 확실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암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간만에 해보는 암기라는 행위가 무척 낯설고 신기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암기를 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이 외우고 암기하는 정신 작용이 일반적인 정신작용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어쩌면 불교식 "마음챙김" 효과를 떠올리면서 암기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척 강력한 집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암기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보고 읽는 정신적인 행위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짜투리 시간에 카드 한 장을 암기하거나 복습할 때마다 매순간 자동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집중에는 확실하게 에너지가 소모된다. Anki로 암기를 시작하면서 정신적인 에너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암기를 할 때마다 고갈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밤마다 생각이 많아서 불면증이 있었는데, 암기로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되면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이렇게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암기를 하다 보니 점점 암기할 수 있는 카드의 양이 늘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하루에 카드 한장을 외우는 수준으로 시작했다. 잊어먹을까봐 카드 한장을 거의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 반복하면서 기억에 새길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카드는 보통 4~50장 정도 외울 수 있게 되었고, 복습은 거의 하루종일 반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카드가 50장을 넘어가면 거의 중노동 수준으로 정신이 지쳐버린다. 확실히 정신의 근육이 효율적으로 단련이 되는 것이다. 

     

또, 암기를 하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집중력을 사용하게 된다. 머리에 기억을 주입하고 그 기억을 다시 꺼내는 행위는 모두 매우 집중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기를 하기 위해서 카드를 보면 자동적으로 집중력이 형성된다. 그리고 암기 능력이 발전하면서 집중력의 유지가 쉬어졌다. 덕분에 평소에는 산만했던 정신들이 암기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잘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것을 느껴볼 수 있었다. 집중력이 좋아지니 업무의 효율도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삶의 무게도 조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머릿속에 지식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니 머리가 해당 지식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인지 저절로 지식을 다른 지식과 연계시킨다. 과거에 익혔던 지식과 흘려들었던 여러 정보들, 과거의 사건들이 연계되면서 단순히 암기하려고 했던 내용들이 구슬이 꿰어지듯이 새로운 지혜로 엮이게 된다. 그러나 보니 과거에 몰랐던 일들이 갑자기 알아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수치로 제시되면서 스스로 암기하고 공부한 양을 확인할 수 있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유형의 성취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매일매일 Anki의 과제는 그날 하루의 과제였고, 그 과제를 끝낼 때마다 하루가 결코 아무것도 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최소한 공부한 Anki의 기록만큼은 발전한 것이다. 공부해야할 카드의 숫자가 하나하나 줄 때마다 미약하지만 성취감이 있었고, 대략 30분이면 모든 공부를 할 수 있었으므로 부담도 없었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지식들이 정착되어서 확실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주기율표를 아는 나와 주기율표를 모르는 나는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손으로 사물을 보고 만질 때마다 이것이 어떤 원소인 것인지, 원소들이 어떻게 엮이면 이런 질감이나 경도를 가지는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과거에 억지로 공부했던 화학도 같이 살아나서 이것저것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려준다. 원소들이 결합하고 분리하는 것이 마치 사람들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과 비슷했다. 일관되지 못하고 잘 정리되지 못한 화학의 억지스러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주기율표가 머릿속에 정착되고 암기를 시작하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구체적인 현상으로부터 가장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으로 이를 설명하기 윟서 시도된 수많은 지혜들의 노고로 보이기 시작했다. 허무하게 무언가 재미있는 글이나 게임을 찾아서 웹 서핑을 하던 때는 가져보지 못한 충만감이었고 새로운 변화는 스스로가 좋아지게 되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주었다. 

     

또, 정신적인 에너지가 늘어나고, 집중력이 개선되며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한 만족감으로 성취감이 강화되니 자존감이 강화되었고, 과거에는 전문서적이나 전공서적 등은 피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책들을 볼 때마다 어서 빨리 전부 지식으로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이제 삶은 너무나 즐겁고 재미나게 되었다. 

     

Anki로 암기하는 새로운 시도는 이렇게 혁명적인 변화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 없이 공부를 통해서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있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공부하고 싶은 내용은 너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문제이다.  마치, PC방에 디아블로2가 처음 나왔을 때 하루가 멀다하고 PC방에서 살면서 게임 삼매경에 빠졌듯이 이제는 공부에 빠지고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렇게 살고 싶다고 시도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아마 이것이 2015년에 얻은 최고의 성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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