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각종 신문이나 교과서에서 한문을 많이 사용했고 좋아하는 무협지도 한문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한문은 어느 정도 친숙함이 있었다. 당시에 사자성어를 배우는 것이 유행이기도 해서 나름 조금 배운 바는 있지만 천자문도 떼지 않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문을 알고 있음으로 인하여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글로 되어 단어들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한자어인 경우도 많았기에 그런 단어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얻는 소소한 이득이었다.

 

한글 전용과 영어교육이 대두되면서 한자는 수업시간에도 크게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한문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냥, 교양수준으로 몇 마디 알 뿐이고 그 글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직접 쓰지는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자와 한문에 대한 관심이 생긴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군대에서 손자병법을 읽었을 때였다.

 

손자병법의 원문을 읽어보니 한자 원문과 이를 한글로 해석한 부분을 비교해보니 분량이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원문이 10글자라면 한글은 대략 20~30 글자로 늘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한문에 대해서 갖게 된 인상이 무척 효율적인 정보체계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서 느끼게 된 것은 한문이라는 것이 생각을 간단한 글자로 압축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그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고 정보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는 단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문은 글의 맥락과 학문적 맥락을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므로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는 자양분도 되지만 터무니없는 해석으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아니라면 한문으로 된 고전을 전부 읽어낼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되었다.

 

그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인생을 공부하면서 배우고 발전하는 삶으로 스스로 규정하게 되면서 한문 공부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첫 번째는 한자어를 기반으로 한 동양철학이 노년에 어울리기 좋은 벗이라는 점이다. 음풍농월을 즐기면서 선인의 깊은 지혜를 음미해보는 것도 나름 매력적인 삶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점도 한몫 했다.

 

두 번째는 위에서 언급한 언어체계로써의 한자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체계에 따라서 사유의 형태가 고정된다는 점은 꽤 널리 받아들여진 학설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살아있는 표의문자 체계를 머릿속에 장착할 경우 어떤 가능성이 열릴지 무척 호기심이 생긴다.

- 축약된 표현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들면 더 생각과 글이 더 간결하고 빨라질 수 있을까?

- 선인들이 말하는 문리가 트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 동양적 사유방식의 원형과 행태를 이해할 수 있을까?

- 과연 한자어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국어의 깊이도 깊어질까?

 

세 번째는 Anki가 있다는 점이다. 원래 외우는 것을 학을 뗄 만큼 싫어하기에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어떤 하나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응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량으로 외워서 많은 정보량으로 통찰을 제공해주는 방식의 공부도 있다. 화학이나 생물학 같은 과목이 그렇다. 그리고 한문도 그렇다. 이런 공부들은 배경지식이 쌓이면서 단순히 응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쥐는 것과는 조금 다른 깊은 통찰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평소에는 이런 공부를 싫어했지만 외울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 오히려 큰 생각없이 열심히 외우다 보면 통할 것이고 외우면 외울수록 점점 공부의 효율이 올라갈 것이므로 오히려 매우 쉬운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또, 한자가 정보를 매우 압축하는 문자 체계인 만큼 많은 내용을 외우기에 적합하다는 것도 그런 판단에 한몫 했다.

 

그래서 한자의 육서 체계부터 시작해서 부수 한자, 천자문과 사서삼경으로 천천히 한구절씩 읽고 해석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까지 공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나아가보려고 한다.

 

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달았다고 바로 암기 과목을 잘하게 될 리는 없다. 물론, 깨달음의 추동력이 있으므로 어찌어찌 잘하게 될 수는 있다. 한 순간 꽂혀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자생적으로 발생하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면서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획득한 아이디어를 실현해보려는 강력한 욕구도 같이 발생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노력해볼 수 있는 힘이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시험공부에 맞춰서 책을 암기하는 방법이지 책을 읽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활자중독이다.

 

1970~80년대에 아이들이 놀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컴퓨터 게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나면서 아이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었지만 너무 비쌌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공을 차고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고, 싸우고, 팽이치기, 딱지치기, 땅따먹기 등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논다. 솔직히, 단순한 컴퓨터 게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하지만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만 즐겁게 놀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잘 없었다.

 

친구가 많으려면 대범하고 활달하고 영민하고 등등 온갖 좋은 미사여구를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적당히 친구가 있으려면 말을 잘 듣고 눈치가 좋아야 한다. 이런 친구들은 친구가 많은 친구 옆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들은 보통 다른 아이들 기준으로 찌질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찌질한 아이였다. 겁이 많고 행동이 굼뜬데, 욕망은 많아서 남의 말도 잘 안 듣는 그런 아이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모범적인 아이도 아니었고, 싸움을 잘하고 아이들을 리드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눈치 빠르게 구는 아이도 아니었다. 겁이 많아서 모험과 같은 일에 끼어들지도 않고 친구들과의 싸움에도 끼어들지는 않으면서 욕심은 많아서 베풀지도 않았다. 그러니 날 끼워서 놀아주던 아이들도 나의 부족한 눈치와 굼뜬 행동에 답답해 하면서 다른 친구들과 놀게 되고 자연스럽게 나는 소외되었다.

 

아이들에게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40도가 넘는 고열에 쓰러져서 사경을 헤맨 적도 있고 뼈가 부러진 적도 있으며, 형들에게 맞는 공포의 순간도 있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혼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러한 모든 고통보다는 무료한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은 시간이 정말 느리게 지나간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정말 크게 느껴진다. 그나마도 무료함이 느껴지면 시간의 흐름은 거의 멈춰버린다. 그것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항상 말하는 얌전히 있어!”라는 말은 지옥의 주문처럼 들렸다. 얌전히 있으라니 난 11초도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 활동이 재미있어야 하고 흥미로워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에 어떤 활동이 재미있고 흥미로우려면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친구는 무한한 즐거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친구는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지옥을 탈출할 대체재가 있어야 했다.

 

내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그런 대체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면 허겁지겁 물을 목으로 넘기게 되듯이 언제든지 새로운 즐거움에 몸을 던질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리고 서유기를 만났다. 유치원 아이들이 보는 착하고 단순하고 악한 그런 캐릭터가 아닌 굉장히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물들이 모여서 천축까지 먼 거리를 여행하는 서유기는 꼬맹이의 상상력을 완전히 잡아먹어 버렸다. 신비한 도술과 요괴의 세계, 다양한 캐릭터, 사고뭉치 손오공에 대한 애정은 상상력을 완전히 폭발시켰다. 그 때부터 책은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친구가 없어서 무료하게 되면, 책장으로 가서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그리고 보물을 찾게 되면 그 날은 하루 종일 무료한 지옥에서 해방되어 완전 흥미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재미있는 책을 좋아했지, 어려운 책이나 재미없는 교과서를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상황이 계속되다보면 무엇이든 상상할 꺼리가 필요해진다. 서유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10번 이상 읽으면 지루해지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 다르게 변주가 이루어진 작품을 찾게 된다. 서유기는 각종 환상기담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고, 그러다가 환상기담의 패턴에 식상해지게 되면 조금 더 사실적인 모험담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느 순간 각종 전기물을 읽다가 서부 세계로 넘어가서 총질에 열광하고 사실적인 것에 질리면 메르헨으로 넘어가는 등 끊임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이야기의 주변부에 등장하는 각종 사물과 철학이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고 나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져갔다.

 

찌질한 나와 달리, 많은 친구들이 책에서 시험문제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영리했기 때문에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었다. 바로,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히 더 큰 즐거움을 추구했고, 덕분에 우리 같은 아이들은 그런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고립되어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험공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아이디어가 너무 소중했다. 내가 힘들게 얻은 나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하라고 주입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내고 얻은 나의 것이었다. 완전히 자발적인 그리고 내 스스로에서 연유한 그것, 그것은 바로 처음으로 획득한 내 스스로에서 말미암은 것인 자유(自由)였다.

 

교훈 : 아이들도 스스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공부가 뭔가요?

 

공부가 굉장히 중요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머니가 극성이셨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전방위적으로 받아 왔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라고 압박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공부를 하라고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안한다. 그런 아이들도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공부를 하라고 해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 강아지를 교육시킬 때, 강아지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바로 즉시 혼을 내야한다. 그렇지 않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혼을 내면 강아지는 자신이 왜 혼을 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일이 벌어진 즉시 혼이 나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혼을 내는구나 하고 감을 잡을 수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강아지는 무슨 일로 혼을 내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런 경향은 더 심할 것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혼을 내더라도 아이가 잘못이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해야 혼나고 나서 행동을 바꾸고, 혼난 것에 대해서 건강하게 소화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당연히 아이는 그냥 내가 미워서 혼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시험을 봐서 성적을 매기고 성적에 따라서 체벌도 가해지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시험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당시 내가 알기론 시험이란 학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그 들은 것을 적는 것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알고 있는 것을 작성하고 나오면 되지 무슨 공부를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물론, 시험은 완전히 망했다. 하지만 그런 망한다는 것도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냥 시험을 보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그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일 무렵, 시험을 대하는 나의 해맑은 태도가 친척들 사이에 퍼졌다. 시험 당일에 통학길에 사촌형을 만났는데 사촌형이 나의 유난히 밝은 얼굴에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봤고, 나는 시험이 있어서 일찍 끝나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사촌형은 살짝 흠칫했던 것 같은데, 다시 물어보길 시험 보는데 부담은 없냐고 물어봤고, 나는 정말 순진무구한 얼굴로 왜 부담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험결과와 함께 나의 순진무구함이 자신감이 아니라 개념없음으로 확증되었고 친척들은 이때의 내 태도를 지금까지 이야기 하고 있다.

 

너무 성적이 안 좋으니, 어머니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혼내고는 과제를 내주었다. 교과서의 앞에 3페이지를 외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외운다.’, ‘암기와 같은 말들을 처음 들어봤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그 뜻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3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전부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3페이지를 토씨하나 빼지 않고 전부 암송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중간 중간에 아직도 다 못했느냐고 물어봤지만, 그럴 때마다 야속했다. 잔뜩 혼이 나서 위축된 상태에서 과제를 받았기 때문에 얼어있었고, 처음 해보는 암송이어서 그 막막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3페이지나 암송하는 것이 너무 버거워서 속으로 엄마가 이걸 진짜로 하라는 의미는 아닐 거야.”라고 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눈치를 보며 있었다. 머릿속에 3페이지 분량의 정보를 집어넣는다는 행동이 불가능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2~30분에 한 번씩 아직 안 끝났냐고 물어보니 독촉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왠지 억울했고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교과서를 외우기 시작했다.

 

암송을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토씨가 자꾸 틀리게 된다. ~, ~, ~이 따위가 자꾸 헷갈리게 된다. , 머릿속에서 해당 문장을 새롭게 조합해버리기 때문에 문장의 내용은 같아도 문장 자체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처음 시도해보는 암송에 3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토씨가 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의 암송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속 언제쯤 끝나냐고 물어보다가 잠이 들었다(당시 어머니는 체력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아무리 암송을 해도 토씨가 틀리는 상황에 절망하면서 끊임없이 외웠다.

 

집안에 적막함이 돌고 밖에서는 즐겁게 노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가운데, 땅거미가 지면서 책을 암송하고 있던 나는 서러움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는 잠들었고 나는 기약없는 암송을 하면서 끊임없이 토씨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머니가 깨어났다. 나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다 외웠다고 이야기했고, 어머니 앞에서 암송을 했다. 중간에 토씨가 틀렸다. 나는 얼굴이 시뻘개졌고, 울면서 다시 외운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완전히 억울한 상태였을 것이다.

 

결국, 암송하는 것은 끝났고 난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이미 친구들은 다 들어가서 재미있게 놀 상대가 없었다. 잠깐 혼나고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책만 외워서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리고 과제가 끝났다고 이야기하면서 나를 내보내던 어머니의 표정이 머리에 깊이 남았다.

 

그 이후 나의 시험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어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 산수는 계속 시키고 공부를 했다. 하지만 다른 과목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성적을 받아와도 국어하고 산수만 어느 정도 받아오면 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다 같이 수업을 듣는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내용들을 친구들은 어떻게 맞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처음 생겼다. 특히, 체육 같은 과목은 수업은 없고 운동만 했는데 어떻게 친구들은 체육 시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첫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책에 나오잖아.”

 

충격이었다. 교과서는 선생님이 교과서를 피라고 할 때만 펼쳐서 보는 것 인줄 알았지 거기에 있는 내용이 시험에 나온다는 사실은 그 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시험공부를 하려면 책을 펼쳐서 해당 내용을 봐야 한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험문제를 맞추기 위해서 책을 암기한다는 개념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시험이라는 목적이 분명해지자 책을 암기하는 이유와 방법도 명확해졌다. 물론, 이로 인하여 시험이 아니면 책을 암기하지 않게 되었지만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책을 암기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대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이해한다. 아마도 어머니가 외우라고 했던 것은 시험공부 하듯이 암기하고 어머니가 책을 보면서 물어본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혼자서 전문을 암송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어머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공부를 한다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포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암기보다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숙련이 필요한 과목이고 나중에 하기 어려운 산수는 계속 시켰지만 그 외의 과목에 대해서는 공부하라고 전혀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훈 : 때론, 공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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