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 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 - 03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불안감과 공포는 점점 구체화되고 빈번해졌다. 처음에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귀신이 뒤에 달라붙어서 속삭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신체적 이상이 있는지 살폈고, 일시적인 기력 저하인지도 실험해보았다.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이 두 가지 모두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심리적 원인뿐이다.


 물론, 누군가 실제 귀신이 있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반론할 수 있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 전부 귀신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귀신, 악몽, 환상 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친구였고 이들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나를 공포와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트라우마로 군림했다. 처음엔 완전히 패배해서 삶이 파괴되었지만 15년 정도 아등바등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방법을 개발하고 조금씩 상황이 개선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경우 진짜 귀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딱히 귀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경험상 진짜 귀신이라고 판단할만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이다. 직면한다는 것은 그 심리적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것이다. 보통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고독한 사색가가 되어 그 사건을 기억해내어 분석하려고 한다. 기억을 들여다보고 차분히 분석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무척 좋은 방법이지만 결코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결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흡연자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그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저 그 담배의 맛을 기억해서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면 그는 매우 어이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기억으로 그 맛을 생생하게 떠올린다면 담배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는커녕 담배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렬해질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 즉시 모든 욕구가 가라앉고 평온해진다. 하지만 기억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그런 효과를 낼 수 없다. 이는 기억이 실제 생활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저 욕구가 존재했다는 기억과 그 욕구가 해소되었다는 기억 정도만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욕구를 해소시킨 실체는 기억으로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결코 경험이 될 수 없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억을 통하여 트라우마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고, 불안해질 수 있다. 심하면 발작이 일어나거나 완전히 방어적으로 행동하여 모든 것을 피하고 잠수를 탈 수 있다. 이 때, 기억은 심리적 문제를 불러오기 위한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 것일 뿐, 심리적 경험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를 혼동하면 엉뚱한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가령, 지금과 같이 불안과 공포가 귀신으로 구현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는 귀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고 순식간에 귀신이 생생하게 구현되기 시작한다. 기억과 분석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신적 믿음을 질책한다. 스스로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귀신을 떠올리고 이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귀신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잘못된 감각기관을 질책하고 이 귀신이 환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므로 다시 재발하게 된다. 믿음에 따라 거부된 귀신은 낯선 타인, 범죄자 등으로 본인의 믿음에 부합하는 형태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려면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귀신이 나타나 공포와 불안을 뇌 속에 주입하는 상황에 서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를 바라보는 것이 직면이다.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위하여 귀신의 공포가 극대화하는 상황을 만들어 본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을 끄고 거의 헐벗은 몸으로 덥고 습한 바람을 맞는다. 무더운 습기가 피부를 덮으면서 피부에는 땀이 흐른다. 습기와 땀이 조금씩 맺히면서 불쾌함이 올라오고 온 몸이 질척질척 거리고 답답해진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응결된 수분을 증발시키면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으스스한 한기가 더해진다. 몸은 더위에 힘들어하면서 땀을 흘리지만 으스스한 한기가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렇게 더운데 몸이 으스스한 것은 귀신 때문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뇌리를 덮고 귀신의 존재를 불러온다. 어둠은 귀신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강조하여 두려움을 키운다. 그리고 그 귀신은 다시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켜 마음을 흔든다. 이 때,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일어나는 작용들을 차분히 바라본다. 

 

 우선 차분해야 한다. 일상에서 갑자기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면 거기에 휘둘려 벌벌 떨게 된다. 눅눅하고 음습한 환경과 심리적 요인이 공포와 불안을 불러오고 그 공포와 불안은 귀신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현현한다. 그리고 그 귀신이 다시 공포와 불안을 실체화하고 극대화하여 마음을 핀치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일어날 상황을 떠올려 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면 이를 막을 수 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오면 휘둘리는 마음을 코끝으로 전환한다. 콧구멍에서 들락날락하는 숨을 구체적으로 느낀다. 코끝에 스치는 기류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집중하면 정신적 에너지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코끝의 감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렇게 하면 공포와 불안을 형성하던 에너지가 코끝으로 이동하면서 귀신을 구체화하던 에너지가 약해진다. 귀신이 희미해지면 그로 인한 공포와 불안도 약해지게 된다. 여기에서 집중력을 더욱 강화하고 유지하면 귀신과 공포 그리고 불안을 완전히 잠재우고 온전히 명상에 들어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봉인하게 되므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주도권을 되찾아 차분해지는 정도에서 집중을 멈춘다. 


 마음의 주도권을 찾아왔으면 머릿속에서 활개치고 있는 귀신이나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약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때, ‘본다’라고 하는 행위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이는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다. 


 경험상 주의를 기울이면 심상이 보인다. 가령, 코를 스치는 숨을 ‘본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코를 스치는 숨을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새 숨이 내 코 사이를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머릿속으로 코를 들락날락 거리는 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코에서 느껴지는 실제의 감각과 어우러져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해준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겪어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에 따라 퍼포먼스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상황에 대한 그림 또는 모델이 본능적으로 그려지고 이를 인식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차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그려지는 그림이나 상황 모델을 본다.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 주의를 집중한다. 즉, 으스스한 한기나 피부에 돋은 소름, 귀신의 환상 등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공포나 불안 등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요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악몽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01


 최근 가족 여행으로 대부도에 펜션을 빌려 1박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기대했던 활동들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펜션에 배치된 다양한 놀이 활동에 가족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에 나는 지하에 위치한 방에서 홀로 자기로 했다.


 여행을 오기 전날 잠을 설쳤고, 여행 당일도 많은 활동으로 지쳐 비몽사몽한 상황이므로 어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지하방에 눕자마자 뭔가 낯설었고, 불편했다. 눕자마자 으스스한 느낌이 밀려왔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그리고 앞에 귀신이 나타났다.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의 귀신이 천장에서 내려다보면서 톱니같이 듬성듬성 난 날카로운 이빨을 혀로 핥고 있었다. 입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핏줄기가 흐른다. 입으로 ‘여길 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너무 생생하게 펼쳐지는 상상에 소름이 끼쳤다. 이 상황에서 눈을 뜨면 그 귀신이 ‘드디어 나를 봤구나.’ 라고 말하면서 저주를 내릴 것 같았다. 숨막힐 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귀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이런 환상과 악몽을 다루는데 이골이 나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런 악몽과 환상을 진저리나게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거의 좌절과 절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아득바득 다시 일상성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식의 환상은 나락에 빠졌던 과거가 떠올라서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또, 그 익숙함에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지하방에 나타난 귀신은 그 동안 겪은 환상과 악몽에 비추어 봐도 압도적으로 생생했다. 평소 겪던 것이 조악한 화질이었다면 이번에 겪은 것은 4K급 4D 영상 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귀신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패턴이 항상 겪던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질이 아무리 좋아도 스토리는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은 악몽과 문법이 비슷해서 인과관계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난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눈앞에 보이고,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상황이 일어나는데 아무런 의문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직 생생한 공포만 느껴질 뿐이다. 공포는 착실하게 주입된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같은 모양과 그로테스크한 톱니이빨이 전형적인 공포의 외형을 구성했고 거기에 공포의 아우라가 덧입혀져 귀신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인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자, 바로 눈을 뜨면 귀신이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주입된다. 마치 내가 눈을 뜰까봐 협박하는 것 같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악몽이었다면 잠을 깨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상황을 정리하고 하는 등 귀찮은 과정을 겪으면 되지만 환상이었기 때문에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전개되는 일련의 환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그저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집중한다. 숨의 느낌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점차 머릿속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환상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잠을 청한다.


 사람이 너무 굶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점점 단순해진다. 사람의 정신도 결국,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필요한 정신 활동에 에너지를 쓴다. 이 원리를 응용하면 환상을 금방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즉, 지금처럼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행위로 에너지를 돌리는 것이다. 그 행위로 쏠리는 에너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환상을 구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없어지므로 환상은 힘을 잃고 잦아들다가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물론, 환상을 일으키는 다른 기저 요인이 없을 때 이야기다.


 내 경우 잘 사용하는 방법은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식 명상을 훈련해왔기 때문에 이 감각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데 익숙하고 이 감각이 매우 중립적이어서 번뇌를 털어버리고 다시 수면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즉, 공포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술을 마시거나 매우 자극적인 컨텐츠를 보는 등의 중립적이지 않은 행위는 지금 당장은 공포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지만 욕망이 자극되고 정신이 각성된다. 이는, 지금 당장 수면에 장애를 주고 장기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포와 불안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부정적인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렇게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면서 환상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4K급 화질의 4D로 보던 귀신의 화질이 흑백화면 마냥 조악해지다가 잊혀졌다.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다시 잠을 청하면서 숨에 집중하던 마음을 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공포와 불안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지하에 잠들었다는 점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지하’, ‘지하’, ‘지하’ 라는 메아리가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내가 지금 관 짝에 들어가 지하에 묻혔구나 하는 확신이 굳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딱 맞는 관에 누운 것 마냥 불편하게 조이기 시작하면서 환상이 사실인 것처럼 몸을 구속했다. 다시 찾아온 환상은 환상 그 자체와 더불어 신체 구속이 발생하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었다. 환상이 너무 빠르고 강렬하여 순식간에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환상이 공포를 불러오고 신체적 불편함이 그 공포를 실체화시켰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켰다. 


 기본적으로 불을 키면 환상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지만 이 환상은 그렇지 않았다. 불을 켜니 숙박시설 특유의 몰개성적인 벽지와 삭막한 풍경이 보였다. 낯설고 지루한 공간이다. 생동감을 느낄 수 없는 풍경과 눅눅하고 음습한 느낌은 묘실을 떠오르게 했다. 수천년 동안 단 하나의 변화도 없는 삭막하고 정적인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수천년간 이 낯설고 지루한 공간에서만 살아왔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수만년은 더 이 공간에서 박제된 채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토할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온다. 마음이 무너졌다. 통제가 사라지면서 다시 귀신이 부활했다. 더 생생해진 느낌이었다. 


 호흡을 통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지만 매우 위태위태했다. 이미 무너진 정신의 한 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집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무 리얼한 환상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번뇌를 다루다 보면 이 환상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 욕망, 공포, 불안 등의 기저에는 인식하기 어려운 미세한 환상들이 실제로 작동한다. 이런 환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환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부분 되찾을 수 있다. 이게 불교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튀어나오는 환상이나 번뇌를 인식하고 이를 제거할 때에는 보통 그 기저 원인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작용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내 경우 PC방에 놀러가야지 하는 욕망이 나타나면 대략 6시간 전쯤에 그 번뇌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리고 대략 6시간 후나 PC방에 갈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면 번뇌는 일어나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PC방에 가고자 하는 마음에 쏠린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몰입된 마음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해결된다.


 하지만 번뇌의 원인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령, 배고픔을 생각해보자. 배가 고프면 몸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요구한다. 배고픔은 실제의 허기와 허기로 인한 탐욕,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분노 등을 일으킨다. 정신을 집중한다면 허기로 인한 탐욕과 분노 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허기는 그대로 남는다. 집중력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허기로부터 탐욕과 분노 등이 올라온다.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무너지게 된다. 물론, 고도의 수행을 통해서 확신을 갖추었다면 이를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적절하게 먹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어렵다.


 두 번째 환상을 보면서 이제 어떤 기저 원인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습기로 인한 축축함, 에어컨의 작동으로 인한 한기,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 지하라는 점이 맞물려 번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지친 체력과 수면에 들면서 마음이 무저항 상태로 놓이게 되는 것도 원인으로 보였다. 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극복할 수도 있지만 바로 포기했다. 기저 원인이 없다면 가능하겠지만 이미 계속 작동하는 원인이 있다면 총하나 들고 홀로 백만 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격이고 작은 제방 하나로 홍수를 막겠다고 설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치고 힘든 상황인데다가 다음 날은 또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중요한 급소를 찔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환상은 이미 내 약점을 찔렀다. 그것은 생사관이었다. 개인적으로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불교도가 아니다). 그래서 죽는 과정은 싫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저 죽음이 영원에 가까운 휴식이라면 찰나의 삶 동안은 충만하게 살고 미련 없이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내 삶의 모델이다. 그런데 이 환상은 나를 사후세계에 영원의 시간 동안 유폐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삶의 큰 버팀목 중 하나였나 보다. 사후세계의 영원한 유폐라는 환상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고독과 비애로 내 정신을 무너뜨렸다. 결국, 통제력을 잃고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악몽과 환상에 숙련된 환자로서 재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방을 벗어났다. 방을 벗어나 1층 거실에서 눕자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마음속에 불안감과 공포는 남았지만 더 이상 기저원인이 작동하지 않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머지 꿈도 꾸지 않고 꿀잠을 잤다.

삶이 너무나 힘들게 꼬여가고 있을 때, 매일 밤마다 악몽이 나를 엄습했었다. 검은 개의 악몽이었는데 불길한 검은색이라는 점과 개꿈이라는 점에서 꿈에서도 최악이었지만 깨어났을 때도 인생의 방향이 꼬일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여러모로 밥맛없는 악몽이었다. 원래, 꿈이란 것은 깨어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 기억이 희미해지는 법인데 대부분 악몽이 동일하게 검은 개와 함께 하는 꿈이었고 거의 매일 이 꿈에 시달리다 보니 점점 꿈의 디테일한 부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꿈의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불길한 검은 개가 검은 오라를 내뿜으면서 무섭게 쫒아온다. 공포와 불안, 마비된 이성으로 눈을 감고 도망간다. 공포가 심해 눈을 뜨지 못한다. 검은 개가 쫒아오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땅이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늪에 빠진 것 같이 발이 무겁고, 유사에 빠진 것 같이 나락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며,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도망가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은 항상 검은 개가 나를 덮치면서 끝난다. 


이 악몽은 기분을 너무 우울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악몽을 꾼 날이면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하여 닥치고 쾌락에 몰두하며 뇌를 정지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몽이 3년이나 반복되다 보면 그것을 들여보게 된다. 매번 꿈속에서의 공포와 불안, 절망감을 안고 깨어나자마자 꿈을 관찰하다 보니,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꿈이 완전히 말이 안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개를 본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았는데 개를 볼 수 있었을까? 또, 현재 사막에 있는지 구덩이에 빠졌는지 늪에 빠졌는지 보지도 않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 사실, 꿈이 엉망진창으로 모순되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꿈의 차이점을 통해서 몇가지 영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또, 악몽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문제를 파고들었다. 


현실은 모든 것이 정합적이고 총체적이어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 굴뚝 아래에는 불을 붙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 대부분 옳다. 모든 것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보통 하나를 보면 그 외 나머지도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그러한 정합성과 총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꿈에서의 인식작용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즉, 꿈에서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어떻게 눈을 감고 있는데 개를 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의 고유수용감각과 사물의 모습이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사물이 보이는 것이다. 개가 있고 그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개를 보는 것이 현실의 논리라면 꿈에서는 개와 눈을 감는것이 각각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는 증오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주어지면 증오스러운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된다. 반대로 평소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과 추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주어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추하게 느껴진다. 즉, 꿈에서는 정보가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그 주어진 정보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는 부분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올리버 색스의 신경증 환자들 사례를 보면서, 환상과 환청이 바로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가 모자로 보이는 남자의 정신상태가 그랬다. 눈  앞의 노부인이 아내인 것도 알지만 동시에 모자라고 인식된다. 그냥 모자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내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내인데도 모자인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자를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주어진 정보에 따라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끌려다닌다는 점이었다.


주어지는 것을 단순히 정보라고만 말하는 것 조금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주어지는 이 정보는 어떤 행동의 방향성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상황을 조율하지 않는다. 즉, 아내이고 모자이기 때문에 아내인지 모자인지 분별하거나, 잘 모르겠으면 아무것도 안한다거나, 또는 그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눈앞의 모자를 쓰려고 할 뿐이다. 모자라는 정보는 반드시 그 모자를 당장 써야겠다는 충동을 같이 가져온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빅브라더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진 의문은 이 빅브라더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기듯이 말이다. 하지만 내쉬는 환상과 환청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분석해야만 했고 동시에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즉, 눈앞에 아내를 모자로 보는 순간 그 모자를 써야겠다는 강력한 충동이 따른다. 내쉬가 본 빅브라더도 끊임없이 내쉬로 하여금 암호를 해독하고 이것을 비밀로 유지하게끔 하는 충동이 발생한다. 실제 임상에서도 환상과 환청이 증세로 나타나면 그 사람을 거의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환청은 극단적인 이상행동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아 매우 주의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사력을 다해야만 겨우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 


나의 악몽도 결국, 주어진 정보들의 칵테일이었다. 처음에는 검은 개가 쫓아와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게 그렇게 논리적인 선후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즉, 그저 같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 꿈은 일종의 환상이고 꿈에서 느낀 공포와 불안은 바로 환상을 본 사람들이 느끼는 충동처럼 나를 사로잡는 충동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정보와 그에 따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충동이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꿈이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만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괜찮은 사람도 어느 순간 이상한 판단을 내리거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이켜 생각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경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았다거나 착각했거나 하고 말하면서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지만 명백히 정상인들도 그러한 주어지는 정보와 충동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더 미세하게 들어가게 되면 나는 내가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고 반응하는지 모른다. 그저 주어질 뿐이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어떻게 사과라고 인지하냐고 물어본다면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사과라고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 그저 ‘사과’라는 이름과 맛과 향이 떠오르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사과는 강력한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백설공주처럼 잠들게 된다고 믿는다면 사과를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과를 먹이려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 증명하면 되겠다. 하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람처럼 사과를 모자로 착각한다면 그는 의심없이 사과를 머리에 쓰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을 살피게 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있는지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짱구를 굴리면서 스스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양 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게 여기도록 주어진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유라는 말은 허황되게 느껴지고 주체라는 말은 꿈속의 망상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서 아니면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들에 우리는 끊임없이 꼭두각시의 춤을 추게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한 위험성은 항상 우리 곁에 상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지는 것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자유라는 것이 제한적으로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정보가 주어진다. 컵을 보면 컵이 떠오르고, 컴퓨터를 보면 컴퓨터가 떠오른다. 발 아래에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으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절로 나타나고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 무척 어렵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의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해야하고 피해야 하는지 주어지기 때문에 현실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매순간 그러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취사선택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주의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고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견본이 되어줄 것이다. 이들은 자동차 추돌사고, 대형 인재를 일으키는데, 한 순간의 주의력 부재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까딱 방심하면 옥상과 낭떠러지를 무시하고 밖으로 한걸음 내딛을 것이고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해 탐욕으로 인한 범죄가 만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어지는 것들이 우리의 자유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이 주어지는 것들이 적절하게 작동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보다 안정적인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주어지는 것들을 그저 무시하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어지는 것들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그 자동이라는 것이 우리가 쌓아온 삶의 개인사와 시공간적 상황, 시대정신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일단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앞에 무엇이 나타나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 의식에 주어지는 것에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주어지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어진 것을 대상으로 다시 자동으로 새로운 것이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충동을 참아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주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영원한 연쇄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 충동은 점점 약해지고 그 주어지는 것들은 점점 지혜롭게 변하게 된다. 즉, 생각을 정련하는 셈이다.


주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가장 올바르고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행동을 멈추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정련해야만 한다. 다행히 우리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비극에 빠진 것이 아니고 사물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고 충동을 제어할 수 있다면 충동을 흘려보내고 생각을 지속하여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마주칠 때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검증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지 물어보고 주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환상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환상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을 멀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쉬처럼 잠시 멈춰서 생각을 조금 더 끌어내면 된다. 연인이 또래의 이성이랑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봤다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연인이 바람을 핀다.’일 것이고 당장 연인을 추궁하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생각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생각이 옅어지면서 여러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새롭게 주어지는 생각들은 연인의 친한 친구나 선배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업무상 접대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게 하다 보면 가장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생각이 수렴되고 이를 단계적으로 검증하여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가장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멈추고 그만두면 된다. 비록 우리가 주어지는 것들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조작되지만 우리에게는 주어지는 것들을 참아냄으로써 그 주어지는 것들을 극복하고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생각과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멈추고 싶어서 멈추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만이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살펴 보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여기는 그것은 내가 하고 싶도록 밑도 끝도 없이 주어지는 프로그래밍처럼 느껴진다. 또, 내가 멈추고 싶어서 멈추지만 역시 그것도 내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면 자유는 불가능할 것 같고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제한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것은 충동을 가라앉히고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자유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날 때, 그것을 당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지그시 바라보며 충동은 흘려보내고 생각은 지그시 바라보는 그러한 자유다. 이 자유는 느리고 답답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자유지만, 인간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전체를 통해 얻어낸 최고의 지혜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명의 희롱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설적인 자유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악몽은 결국, 수면무호흡 때문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숨이 부족하니 몸은 내가 뛰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몸이 뛰고 있어야 하는데 몸은 잠자리에 누워있으뿐이고 몸이 무거우니 사막이나 늪에 빠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당시 상황의 암울함과 고민과 겹쳐지면서 검은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만들었고 이 수면무호흡과 악몽은 내 삶의 질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려 정신적 좌절과 불안을 심화시켰고 이는 다시 과식과 잘못된 생활습관을 심화시키면서 수면무호흡이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수년간 동일한 내용의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악몽의 연쇄를 극복하고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도 공포와 불안 좌절에 매몰되는 것을 멈추고 자학적인 충동을 흘려버릴 수 있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끌려다니지도 않고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였다. 조금만 빨리 깨달았으면 악몽의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 노력 끝에 두통과 체증이 사라지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불면증이 갑자기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불면증은 그저 이빨이 아파서, 두통과 체증 때문에, 생활습관이 좋지 않아 생겨났다고 생각했었지만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나니 불면증은 그러한 증세로 인하여 부차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증상이었다.

 

두통과 체증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삶의 질은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세상이 맑고 투명하게 보여 사물 하나하나의 정묘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고 세상은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천상 세계에 사는 것 같은 이러한 느낌은 대략 2주일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다시 일상이 되었다. 물론, 이전에 비하면 너무나 소중하고 벅찬 일상이지만 일상은 일상이다. 어느새 통증 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늘어난 시간을 이용하여 이것저것 하면서 다시 시간이 부족해지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러한 일상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면증이 왔다. 이제껏 불면증의 형태는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었다. 치통을 해결하고 악몽을 퇴치한 이후 불면은 많이 완화되어서 잠에 드는 것은 어려워도 일단 자면 피로를 풀 수 있는 만큼은 잘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일이 있고 약속이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것 때문에 밤을 새고 약속에 나가는 등 피로한 삶이긴 했지만 어찌어찌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불면증은 그렇지 않았다. 잠은 잘 수 있지만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만에 깨어나고 그 다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동안 실천해온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강렬한 고통도 없고, 악몽도 없지만 절대적인 수면 부족은 나를 서서히 말려버리기 시작했다.

 

불면으로 인한 고통은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잠은 오지 않고 그렇다고 생산적이거나 필요한 일을 할 정신적 에너지는 없다더 슬픈 것은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을 즐길 정신적 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그저 서서히 말라붙고 모든 것이 우울해진다서서히 고통과 우울함에 잠식된다. 그리고 잠을 희구하게 된다. 불면의 고통을 제대로 묘사하고 싶지만 그냥 힘들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삶이 힘들다 정도로 밖에 묘사하지 못할 것이다. 겪어보지 않으면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개인적으로 두통과 체증이 더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고통이라도 그 순간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이 가장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자려고 시도할 때마다 찾아오는 다양한 증상은 그 와중에 사람을 더 미치게 했다. 자려고 이불을 덮으면 더워서 몸에서 땀이 나는 끈적끈적한 불쾌한 느낌이 찾아오고, 이불을 벗으면 춥고, 다리에는 하지불안증후군(Restless legs syndrome)이 찾아오고 잡념은 들끓어 올랐다. 이런 증상들은 평소에도 항상 느끼던 증상들이지만 갑자기 유난히 강렬해져서 평정심을 흔들었다. 강렬한 고통도 아니고 마치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으로 인한 짜증은 대상 없는 분노를 유발시키면서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이 모든 지옥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끝났다. 계기는 불면증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은 것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소 리처드 와이즈먼이 글을 가볍게 잘 쓴다고 생각했고 책에 최상의 수면을 위한 모든 것을 개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서 읽어보았는데 그 동안 살면서 수면과 관련된 대부분의 궁금증이 대부분 설명되면서 이해되었고 생각 외로 엄청나게 몰입하여 읽게 되었다. 그런데 직후 바로 불면증이 나았다.

 

나이트 스쿨에서는 최고의 잠을 자는 방법을 소개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 어떤 방법을 실천하기도 전에 그냥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 내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도 정말 나은 건가 싶다. 게다가 불면증만 나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저녁 7시부터 정신없이 졸려오기 시작하더니 새벽 4~5시쯤에 깨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간 바꾸려고 그렇게 노력했고 결국 바꾸지 못했던 25년간의 올빼미 생활이 5일 만에 청산되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드는 보통 사람들의 수면패턴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평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타나던 헛배가 부르거나 정신이 맑지 않다든가 하는 모든 부작용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면 개인사를 쓰고 있는 이유는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파악해보려고 쓰는 것이다. 수면클리닉을 다닌 것도 아니고 나이트 스쿨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을 실천한 것도 아닌데 불가능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해지면서 원인 모를 변화에 선후를 따져보기 위하여 수면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을 상기하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악몽을 해소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낮과 밤이 바뀌고 종종 밤늦도록 잠이 들지 못하는 나날이지만 체증과 두통의 극복이라는 문제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수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속이 뒤집어지고 머리가 아파오면 그 날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저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5~6시간 동안 걷는 것만이 내가 해볼 수 있는 전부였다. 체증과 두통은 항상 새벽 3~4시가 되어야 가라앉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잠을 잘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잠을 자면서 발생하는 통증, 악몽 등의 문제들이 해결된 이후로는 수면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체증이 없고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매우 소중했기 때문에 맑은 정신에 밤에 잠을 못자면 감사한 마음으로 밤새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수면에 관련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 생활을 어렵게 하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수면 습관은 밤 3~5시 사이에 잠들어서 정오에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일찍 일어나기는 하지만 항상 정신적인 불만족감과 집중력 저하가 있고 헛배가 부르며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밤에 일찍 자서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일찍 일어나도 반드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항상 정오에 일어나게끔 알람을 맞췄다. 특이한 것은 정오를 넘어서 일어나면 반드시 체증과 두통이 두 배로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특히, 오후 3~4시에 낮잠을 자거나 그 시간까지 자는 경우가 발생하면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속이 뒤집어지고 오한과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 잠을 과도하게 자면 하루가 고통스럽고 특정 시간대에 자도 큰 통증과 두통이 밀려오는 현상이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서 아무리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삶으로 변화해보려 했지만 결코, 내 몸은 그러한 상황에 맞게 변형되지 않았다. 낮 동안은 깨어 있지만 졸린 상황이니 대부분의 일을 하지 못하고 그냥 커피 마시고 담배 피고 웹서핑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일을 하니 자는 시간은 점점 부족해지고 자기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지만 일은 거의 못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이런 식이니 하루를 쓰는 효율이 극히 나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 때문에 어떻게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는 리듬을 갖추어 보려고 했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겪는 증상들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일의 효율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프리랜서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탐색과 연구, 노력 끝에 올해 초 체증과 두통을 완전히 극복하게 되었다. 참 오랜 기간의 노력이 있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명확하게 말하기는 너무 어렵다. 시도해본 것도 많고 그로 인하여 점진적으로 개선된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문제였고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충분히 개선을 시도한 결과 모든 것이 무르익어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한 시도들은 나의 삶의 중추를 세우기 위한 시도였고 결국 그 중추가 똑바로 서기 시작했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이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중 수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상황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두통과 체증이 사라지면서 일주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삶은 의욕적으로 변했고 변화와 발전에 대한 욕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이 너무 말끔하고 개운하게 느껴진다. 조금만 집중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두통과 체증이 와서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걷다가 쉬다가 하던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마지막 장애가 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불면증이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그 문제보다 간단해 보이던 문제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더 쉽게 느껴졌던 이 문제가 그 전의 문제보다 더 극복하기 힘들고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어떠한 종류의 고통이든 그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

 

충치를 뽑고 나서 극단적인 통증은 사라졌다. 충치를 뽑은 날 자리에 누우면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익숙한 고통이 밀려오지 않는 것을 느껴보았다. 정말, 눈물 날 정도로 좋았다. 그리고 반성했다. 2년 전에 이것이 충치라는 것을 알고 이를 해결했으면 사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소한 방치가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점에서 전율이 일었다. 그렇다 이미 인생은 나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극단적인 고통은 사라졌지만 그 고통이 몸과 마음에 남기고 간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대단하지는 않지만 치명적인 후유증이었는데누운 자세가 조금만 불안정하면 숨이 가빠지면서 긴장도가 올라간다몸의 오른쪽 왼쪽으로 모로 누울 경우에도 긴장도가 올라가고 코가 막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다밤마다 필사적으로 고통없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장하던 버릇이 여전히 남아서 내가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그 자세를 매우 불편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배게 없이 정 자세로 누워서 자는 것이 습관이다. 모로 누워서 잘 수도 없고 그저 정자세로만 자야 한다. 그리고 불면증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불면증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지쳐서 쓰러져 자는 삶의 패턴이 익숙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백수의 삶이 그렇듯이 낮과 밤이 바뀌어도 괜찮았고 이게 불면증인건지 잠자는 시각이 낮으로 결정된 것인지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문제는 체증과 두통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수면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악몽이었다.

 

악몽은 그 전부터 계속 있어왔다. 하지만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점점 악몽은 심해졌고 다양한 악몽을 서라운드로 즐기게 되었다. 가장 자주 꾸는 꿈은 검은 개가 나를 쫓아오고 그 개를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는데 사막에 발이 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꿈이었다. 깨어나서 생각해보면 기분은 더럽고 숨은 가쁘고 무력감이 드는데다가, 하필이면 개가 쫓아오는 것이어서 개꿈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한번 더 나빠지는 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면 무호흡으로 호흡이 막히니 내 몸이 도망가는 상황으로 착각하고 그에 맞추어 검은 개에게 쫓기는 꿈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튼, 이 검은 개는 몇 년간 줄기차게 꿈에서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고 나중에는 점점 발전해서 다양한 상황에서 나의 악몽에 거의 대부분 동반하는 악우가 되었다. 그 외에 과거의 잘못했던 부끄러운 기억들, 군대 재입대, 악몽같은 직장에 다시 나가는 꿈 등... 악몽이 너무 많아져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였다. 그리고 악몽을 겪으면서 사람의 정신구조에 대한 상당히 많은 의문을 품게 되기도 했다. 그 이야기야 여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악몽들은 신체적 고통이 현존하고 있을 때는 그냥 그러한 고통에 수반되는 것에 불과했다. , 부차적인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의 문제가 상당수 완화되면서 이 문제는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비루함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적의가 누적되면서 악몽을 꿀 때는 생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기분은 끔찍했다. 특히, 체증으로 자주 아픈 두통에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악몽들은 넌지시 비추면서 이러한 삶이야말로 나의 몫이라는 듯이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꺾기 위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곤 했다. 처음엔 별것 아닌 악몽이 계속 누적이 되고 빈번해지면서 모든 것이 우울하고 암울한 것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이것저것 책을 읽다가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로버트 웨거너의 자각몽, 꿈속에서 꿈을 깨다를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악몽을 직시하고 이 악몽을 껴안거나 물리치는 행동을 꿈속에서 하도록 자기 암시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고 검은 개를 사냥하기로 결심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깨어있을 때 꿈속에서 자주 보는 검은 개를 떠올리면서 한 대 때리는 상상을 지속하고 자기 전에 검은 개를 때려야겠다가 굳게 마음먹고 자는 것이었다. 모든 악몽 중에서 검은 개가 가장 최악의 악몽이었고 항상 동반하는 악몽이었기 때문에 이 검은 개에 대해서 속으로 많이 별렀었다. 책에서 제시한 제일 좋은 방법은 포용하고 흡수하는 것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시달려서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다. 간만에 목적이 분명하고 의욕도 충만하고 방법도 명확해서인지 3일 만에 검은 개에게 주먹을 날릴 수 있었다. 주먹을 날림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검은 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맛을 강하게 느꼈고 때려서 쫓아냈다는 확신이 섰다. 그 일이 있고나서 지금까지 검은 개의 악몽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당시 제대로 쫓아낸 것 같다.

 

악몽을 쫓으면서 로버트 웨거너의 자각몽, 꿈속에서 꿈을 깨다의 주제인 자각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자각몽을 통한 수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각몽의 경험담도 흥미로웠고 시도해보고 싶지만 그러한 흥미로운 순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긍정적인 긴장감이 충치가 남겨놓았던 두려움을 상쇄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자각몽을 꾸지는 못했지만 자각몽에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잠을 자면, 몸의 자세에서 오는 긴장감, 누울 때마다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와 혈관에서 피가 꿀렁꿀렁 흐르는 감각 등이 자각몽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에 의해서 희미해지면서 나의 잠자리는 조금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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