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좋아하는 매체가 책이고 활자 중독이다 보니 원래 영화를 챙겨보지는 않는다. 영화관에 대한 로망도 없고, 대중문화에도 시큰둥한 편이다. 그렇지만, 보헤미안 랩소디 포스터와 마주한 순간 바로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퀸은 내 기억 속에 참 아련한 밴드다. 팜플렛을 보니 91년에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죽었다. 아마도 그 때 나는 중3이었던 것 같다. 퀸이라는 밴드를 아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많지 않다기 보다는 반에 딱 한 명의 열성팬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지만 키 크고 잘생긴 친구였고 조금 많이 까칠했었다. 그리고 그 까칠함의 근원에는 퀸이 있었다. 반 친구들에게는 퀸이라는 밴드는 그 친구가 너무나 좋아하는 이상한 밴드로 알려졌다. 당시에는 동성애자, AIDS 등으로 대변되는 프레디 머큐리였기 때문에 그 시절에 중학교 남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반 친구들은 퀸의 열성팬인 그 친구가 너무나 기이하게 느껴졌고 조금 힘 좀 쓴다는 친구들은 종종 프레디 머큐리를 비하하며 그 열성팬 친구에게 시비를 걸곤 했다. 평소 조용하던 그 열성팬 친구는 그 때마다 히스테릭한 까칠함으로 응수하면서 퀸의 좋은 점에 대해서 한바탕 역설했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였다. 반에 단 하나 있는 취향 독특한 친구가 좋아하는 독특한 밴드였을 뿐이다. 가뜩이나 음악과 집안 전체가 거리가 먼 나로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고 그저 반에서 투닥거리는 일상의 풍경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그것이 달라졌다. 

      

평소처럼 아침에 안 떠지는 눈 비비고 일어나 어슬렁 학급에 도착했을 때, 교실은 평소에는 없었던 고요함과 어떤 웅성거림이 전해져왔다. 열성팬 친구가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조용히 물어보니 그 날 프레디 머큐리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친구의 슬픔은 진짜였다. 너무나 진한 슬픔에 압도되어서일까? 혹은 그에 대한 경의일까? 평소에 자주 놀리던 친구들도 그 날은 조용히 애도할 수 있도록 그를 내버려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간혹, 질문이 오가면서 조용히 웅성대곤 했고, 간혹 혀를 차면서 "그깟 밴드가 뭐라고."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 친구는 그 날 하루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애도를 했고, 그 사건은 조용히 잊혀졌다. 

      

사건은 잊혀졌지만 나에게 그 날은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 때는 팬이라는 것이 생소한 때였다. 당장 92년만 되었어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와서 팬덤을 형성하고 뉴키즈온더블록 내한 공연에서 시민이 죽는 일이 생기면서 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지만 91년까지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그러한 애정과 숭배와 애도는 그 때까지 전혀 볼 수 없는 신기한 일이었다. 

     

나에게 음악은 그리고 노래는 평생의 계륵 같은 것이다. 노래는 조금만 불러도 목이 쉬고 음악은 들어도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며 빠져드는 사람을 볼 때면 그 고양감이 그 내지르는 호쾌함이 너무나 부러웠다. 한 번은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을 때, 음악을 가까이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다. 그래서 레코드 가게를 둘러 봤을 때 보았던 것이 퀸의 테이프였다. 당장 그 퀸을 숭배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아마도 음악에 몰입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 것이 그 날 그 친구의 진지한 애도를 목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주구장창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4~5시간씩 고등학교 2년과 재수 시절을 퀸과 함께 했다. 듣고 또 들었다. 멜로디는 익숙해지고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 가사를 대충 뭉개면서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더 이상 공감도 되지 않았고 어떤 몰입도 없었다. 그냥 가끔 신나고 가끔 흥얼거릴 뿐이었다. 그 친구가 하듯 동경하게 되지 않았고 몰입되지 않았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서 퀸도 그렇게 잊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를 봤을 때, 한번 지중으로 들어간 지하수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시 용출하듯, 오랫동안 잊었던 기억과 정서가 용출되는 것이 느껴졌다. 칙칙하고 어둡고 절망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젊고 풋풋했던 시절의 자신과 가볍게 인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22년 만에 퀸은 여전히 익숙하고 또 너무나 새로웠다. 영화는 22년 전의 내가 이해할 수 없었고 공감할 수 없었던 것들을 풀어주었다. 그저 해외의 전설적인 유명 밴드로만 알려져 있었던 그들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주었고, 그들이 왜 그렇게 음악을 만들었는지, 왜 그렇게 의미없는 대사를 마구 집어넣었는지 가르쳐 주었다. 퀸이 음반사 사장과 협상하던 장면에서 음반사 사장의 의문은 오랜 기간 내 속에 있었던 질문이었다. 나는 내 속에 그런 질문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퀸은 자신들이 왜 그런 음악을 만들었는지 답을 했고 덕분에 22년간 쌓인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함을 맛보게 되었다. 

       

영화는 뻔했지만 즐겁고 감동적이었다. 지금은 빛바랜, 젊은 시절 내내 화두였던 존재에 대한 희구, 자유에 대한 열망, 치열한 삶에 대한 동경 등 이런 것들을 원했던 이유들을 마주치며 다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젊은 시절의 오래된 질문과 화해했을 때는 뻔한 스토리임에도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왔을 때, 문득 그런 것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오래된 과제가 종결되었음을 갑작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제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을 종일토록 진지하게 애도했던 그 친구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음악을 듣는 것도 하는 것도 관심이 없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은 충분히 애도할 만한 가치가 있었고 지금이라면 나도 그를 애도할 것이라는 것을 이젠 납득했다. 그리고 내가 퀸을 들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지만 결국, 그 친구가 애도한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는 것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드라마가 결국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서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가 실은 실어증 체험이나 언어적인 훈련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큰 기대 없이 영화나 드라마를 쪼개어 가면서 보게 되었다. 즉, 장면 전환으로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끊고 다시 정리하고 보는 식이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여 보니 언어가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소한 손동작이나 표정 등 영상으로 제공되는 모든 것이었다. 이건 언어가 없기 때문에 보인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자막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수십번 반복하면서 본 드라마도 자막 없이 보게 되면 전혀 새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자막으로 인한 경우가 많았다. 


자막이 있으면 눈은 끊임없이 자막과 영상을 오가게 된다. 눈으로 영상을 보면서 귀로 대사와 음악을 들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눈으로 영상과 자막을 보고 귀로 음악을 듣는 식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눈은 매우 바쁘게 자막과 영상을 오가게 된다. 앞서 언급한 현실 관찰처럼 눈은 사물을 따라가면서 관찰한다. 눈은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움직이고 오가는지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본능적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대사가 있을 때 마다 눈은 자막을 향한다. 드라마가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대사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모든 장면이 대사에 맞춰 구성되어 대사와 영상은 그 순간 최대의 시너지를 내게끔 되어 있지만 자막으로 보는 사람은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영상을 미묘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상당량의 영상을 보지 못하고 넘어가게 된다. 또, 대사가 길면 어떻게 될까? 그 대사를 전부 빠르게 읽어야 한다.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맥락에 따라 파악까지 해야 한다. 당연히 대사가 길어지면 눈은 거의 자막으로 넘어가 있고 빠르게 대사를 읽고 영상으로 눈이 돌아와도 영상에 의식이 집중되지 않는다. 눈은 영상을 보고 있어도 머리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없는 것이다. 결국, 자막과 함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은 본인은 제대로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용의 상당부분이 누락된 채로 그것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정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자막이 대사와 싱크가 안 맞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중에는 자막의 존재 자체를 잊을 정도로 편안하게 시청하게 된다. 나아가 어느 순간부터 배우들이 한국말로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느끼거나 영어를 바로바로 알아듣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즉, 정리하자면 자막이 있으면 외국어의 어색함도 없고 어떤 문화적인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도 못하며 상당부분의 영상이 누락됨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드라마 속에 현전하고 있어 시청자가 느껴야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미국과 대한민국은 의사소통하는 법부터 문화적인 코드까지 전부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상당부분의 중요한 영상이 누락되거나 영상을 보는데 방해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니 입모양도 한국어와 다르고 억양 발성도 전부 다르다. 또, 결정적으로 모르는 단어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그 언어적 의미가 소통된다면 당연히 전체의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따른 다른 이질적인 요소까지 전부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여겨야 할까?


반대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는 이 모든 이질성이 극대화되어 튀어나온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제시되는 상황과 배우의 표정 손짓 등 사소한 디테일을 통하여 그것을 해석하게 되는데 공감되는 것도 있고 이질적인 것도 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 중 하나를 찾아낸 것이 페퍼의 눈동자였다. 드라마에서 시공간 널뛰기 없이 어느 정도 연속적인 시선 처리와 제한적인 시공간의 상황을 보여줄 경우에는 많은 디테일한 의미들이 영상을 통해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제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직접 보는 경험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저런 미국 드라마에 대한 시도가 없었다면 한국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과 대사와 표정이 너무 일체화되어 있어서 느끼는 것이라곤 그저 배우가 연기를 잘 하네 못 하네 정도에 불과하다. 무언가 새로 발견할만한 문화나 행동양식이 없고 그저 모든 것이 친숙하고 그저 공감하고 말고 하는 것만 있다. 아마 이것이 미국 드라마를 원어민이 볼 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반면 모르는 외국어의 드라마는 이 모든 것이 이질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외국 드라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면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사가 나오기 전에 그 대사가 나올 맥락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 표정 등에 의해서 공감이 발생하고 그렇게 생긴 공감을 언어가 규정하고 전개시킨다. 그래서 상황과 대사가 엉뚱하게 어우러져 오해를 낳기도 하고, 그 모든 상황과 표정을 통하여 그 말의 무게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산전수전 다 뚫고 만나러 가서 절박한 표정으로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시청자들은 그 캐릭터가 겪은 수많은 간난신고를 통해 그 마음의 진실성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좋아한다.”라는 대사와 함께 마무리된다. 이제 시청자에게 그 “좋아한다.”라는 대사는 그 캐릭터가 수많은 간난신고를 뚫고 행동하게 된 원인이자 그 결과가 된다. 즉, “그 캐릭터가 상대를 그렇게 좋아했다.”라고 짤막하지만 무거운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과 맥락이 언어와 연결되면서 그 언어가 실체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로 종결되면서 그 디테일한 부분은 그 감상과 무게를 대사에 더하고 누락된다. 


하지만 자막으로 통해서 보게 되면 장면장면에서의 맥락 설정이 완전 반대가 된다. 원래 드라마의 구조는 각종 상황과 캐릭터의 표현을 통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이 대사를 통하여 규정되고 전개되고 마무리된다. 하지만 자막을 읽는 경우에는 먼저 자막을 읽고 언어적 맥락이 먼저 파악된 다음에야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대사가 짧고 영상이 주된 액션영화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사가 많고 상황이 주로 언어적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나 말이 많은 영화 장르일 경우에는 자막을 파악하고 해당 자막에 맞춰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아무래도 언어적 맥락 파악이 우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막으로 미국 드라마를 보게 되면 그 공감의 상당부분이 퇴색된다. 자막으로 보는 것 때문에 영상의 중요 부분이 누락되고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을 경우 발견했을 가장 사소한 디테일들, 몸짓이나 손동작 등이 누락되고 그만큼 공감되는 정도가 낮아지게 된다. 원작자가 100의 공감을 전달하려고 했다면 자막을 보는 시청자는 대략 80정도 공감하는 것 같다. 세세한 디테일은 사라졌지만 그 이야기의 골간은 분명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재미있다. 하지만 만일, 자막 없이 본 드라마를 자막과 함께 다시 보게 될 경우에는 그 헛헛한 느낌과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배우들은 극중 상황에 따른 특유의 문화와 행동양식 등을 충분히 녹이려고 노력하지만 자막으로 보는 경우에는 이미 자막에 맞춰서 모든 영상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자막에서 제시해주는 언어적 맥락을 지탱해주는 영상이나 내용은 수용되지만 그와 상관없는 세세한 디테일들은 완전히 누락된다. 따라서 배우가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어지간해서는 판단하기 어렵고 배우들이 전달해주는 생동감도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자막으로 통해서 언어적 맥락이 머릿속에서 전개되고 대사를 맞추기 때문에 짧은 대사는 잠깐이지만 서로 공존한다. 또, 나와 같이 거의 드라마를 외우다시피 했던 경우에는 실은 외운 것은 자막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막을 외웠기 때문에 자막의 첫마디만 봐도 다음 자막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전개될 정도가 되면 영어를 한국어처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즉, 상대방이 다음에 할 말이 “고맙다”라는 것을 알고 머릿속에는 “고맙다”라는 말이 이미 준비된다. 그리고 배우가 “thanks”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말이 머릿속에서는 바로 준비된 “고맙다”라는 대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결국, 영어가 들린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완벽한 오류였던 셈이다. 


자막을 통해 영상과 소리를 통해 제시되는 모든 이질성이 사라지고, 영상과 상황에 따른 전개로 대사가 연결되지 않고, 대사를 먼저 확인하고 그에 따라 영상을 취사편집하게 되는데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 거의 드라마 대사를 외우다시피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거은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0002_웹의 구조와 HTML의 역할



간략한 웹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웹페이지 관련 파일들을 보유하고 있는 웹서버는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로 웹브라우저의 요청에 따라 파일을 제공한다.


웹브라우저는 웹서버에 HTML 페이지를 요청하고 요청에 대한 응답을 받아 화면에 보여준다.


이러한 웹의 구조하에서 HTML의 역할은 웹페이지의 구조와 내용을 브라우저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Anki로 공부하시려면 아래의 파일을 다운받아 공부하시면 됩니다.


Anki 학습 파일 : 0002_웹의 구조와 HTML의 역할.apkg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중에 '쿵푸'라는 영화가 있었다. 


지금은 검색을 해보아도 그 영화가 맞는지 긴가민가 하고 있어 제대로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인상깊은 영화였다.


간단하게 기억나는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할아버지가 있는데 이 할아버지는 태극권의 초고수이다. 


이 할아버지는 자식들이랑 같이 미국으로 이민왔지만 문화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서 소외감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서 끊임없이 힘들어하고 갈등한다. 


힘들 때마다 이 할아버지는 태극권을 수련한다.


태극권을 수련하는 동안 이 할아버지는 평화로워졌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영화를 보던 내내 그 할아버지가 무척 부러웠다. 


평생을 공부해서 쌓아올린 태극권은 이 할아버지에게는 즐거움이요 낙이고, 


힘들 때는 자신을 잊고 위로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급할 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 기술이고, 


마지막으로는 태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밥벌이 수단이 되기도 했다.


결국, 태극권의 고수로서 해당 커뮤니티에서 존경도 받게 된다.


평생을 스스로 노력하고 쌓아올린 결과를 스스로 존중할 수 있고 뿌듯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스스로 쌓아올린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라는 말은 중국어로 말하면 쿵푸다.


현실에서는 쿵푸를 익혀서 하늘과 땅을 가를 수 없을지라도 이 영화의 할아버지처럼 평생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스스로 살아갈 삶의 수단으로써 쿵푸를 익힌다면 하늘과 땅을 가르지 않더라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살짝 늦은 듯 하지만 나도 이러한 공부를 쌓아올려 보고 싶다. 


조금 늦더라도 하나하나 축적하면서 스스로 익힌 것을 돌아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해보고,


그걸로 삶이 다할 때까지 공부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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