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ki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2015년 말쯤이었다. 

    

오래전 어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 망각곡선에 따라 공부를 하면 정말 효율적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공부할 지식의 스케줄 관리가 얼마나 복잡해질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쯤에이 되어서는 IT가 발달된 지금이라면 컴퓨터를 사용하여 그런 복잡한 관리를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망각곡선을 활용한 공부 앱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보았지만 쓸만한 걸 찾지 못했다. 그 다음은 예전에 영어단어를 종이카드에 적어서 외우던 것을 떠올랐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의 앱이 없을리 없다고 생각하고 앱이나 프로그램 등을 종종 찾아보았지만 역시 찾지 못하다가 드디어 2015년에 Anki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Anki의 개발 내역을  확인해보니 2010년쯤 Anki는 이미 나왔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인연이 아니었는지 찾지 못했다.

   

2015년에는 새로운 행위라는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스스로 만든 한계나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시작한 개인적인 프로젝트였다. 거창한 목표는 아니었고 그저 별거 아닌 일임에도 어째서인지 평생 피해다니고, 싫어하고,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믿고 그 관련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하던 것들을 마주쳐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간단한 목표를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한계를 넘어보련느 의도에 계획한 행동이었다. 가령, 훌라후프는 초등학교에 한 번 돌려봤지만 실패하고 그 뒤로는 "나는 훌라후프를 돌리지 못한다."라고 결론이 난 상태로 평생을 살아왔다. 초등학교 시절 건성으로 10분 정도 시도하고 만들어진 스스로의 한계였다. 이런 한계는 그저 일주일에 2~3시간 정도 투자해서 어느 정도 훌라후프를 돌릴 수 있게 되면 간단히 해소되는 문제였다. 실제로 시도해보니 어린 시절과는 달리 너무나 수월하게 훌라후프를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내적인 자신감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그 뒤로는 운동 중에서는 턱걸이와 윗몸일으키기를 못한다고 생각했고 하기 싫은 운동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턱걸이 1번 하기와 윗몸일으키기를 매일 50번씩 하기에 도전했다. 이 간단한 도전 역시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 동안 스스로에게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혹은 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마주치면서 하나씩 날려버릴 때마다 오랫동안 어딘가 꽉 막혀있던 것들을 해소한 듯한 시원한 느낌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새로운 행위의 범위를 확장시켜서 암기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평생 암기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왔다. 처음에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심해져서 대학 때는 암기라는 행위 자체를 할 수 없는 식으로 발전했고, 어떤 과목이든 암기가 필요한 과목을 공부할 때마다 토할 것 같은 구역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암기관련 과목은 항상 학점을 D로 깔았다.

    

아무리 새로운 행위를 시도한다고 해도 암기라는 정신적인 중노동을 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크고, 나이 들어서 갑자기 한두가지 상식을 암기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하는 회의감이 강해서 선뜻 시도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가 어떤 변화의 시기였던 것인지  갑자기 어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 다시 떠오르면서 암기할 지식을 카드식으로 어빙하우스의 망각곡선 공식을 활용하여 관리할 수 있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고 이번에는 바로 Anki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랜 기간 틈틈이 찾았던 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또, 당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챙김'이라는 정신 작용이 올바른 앎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유지하고 그 기억에 맞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속한다는 점에서 '암기'하는 정신 작용과 일부분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암기하고 암기한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기억을 유지하고 그래서 암기한 것을 활용하여 항상 올바르게 쓰라는 말로 해석하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얼추 맞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암기라는 것을 해본지 20년 가까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실험이 필요했다. 이런 저런 호기심과  새로운 시도라는 명분이 겹쳐지면서 고리타분한 노동으로써 암기가 아니라 프로그램은 과연 효과적일까? 또, 암기라는 것이 불교식 "마음챙김"과 비슷한 것일까? 하는 호기심과 연구 주제로 대체되면서 거부감이 사라진 것이다. 

      

새로운 행위의 시도라는 측면에 맞춰서 원소 주기율표 암기하기로 했다. 화학이라는 과목은 외워야 할 것들이 무척 많았다. 당시, 과학에 대한 나의 정의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하나로 꿰뚫는 아름다운 공식을 만들고 일반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학은 물리와 달리 무언가 체계적이지 않고 책을 달달 외워야 하는 아름답지 못한 과목처럼 느꼈다. 그래서 화학은 싫은 과목이었고 화학과 많은 관련이 있는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화학 쪽을 외면해왔었다. 화학에 대한 그런 선입견은 주기율표로 대표되는 각종 물성들을 암기해야 하는 화학이 너무 싫다는, 즉, 암기하는 행위에 대한 약간은 편집증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기율표를 외운다는 것은 암기에 대한 편집증적인 거부감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화학에 대한 묵은 선입견과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당시 Anki 사용법을 몰라서 간단하게 Basic 카드의 앞면과 뒷면으로만 다음과 같이 카드를 만들어서 주기율표를 외우기 시작했다. 




엉성한 솜씨로 카드를 힘들게 하나하나 만들었지만 사용은 굉장히 쉬웠다. 지하철이나 화장실에서 짬짬이 카드를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외우다 보니 주기율표는 일주일 내에 외울 수 있었다. 주기율표를 외운 경험은 그야말로 신선하고 혁명적이었다.

     

일단, 큰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것은 아마 암기할 분량을 카드 단위로 분할해서 암기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이나 직업에 부담이 가지 않는 수준에서 또, 스스로의 암기 능력을 벗어난 수준으로 암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암기하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지식을 통째로 암기하려고 노력해야만 했었다. 만일, 중학교 시절에 주기율표를 암기하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주기율표를 더듬거리면서 전체를 암기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거의 하루 종일 암기를 해야 했을테고 암기를 하다가 중간에 친구들과 놀러가거나 새로운 일을 하는 상황이 되면 암기했던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놓치고 지나가면 다시 전체 암기를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Anki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냥 시간 되는 대로 카드를 하나씩 넘기다 보면 그 자리에서 전부 외우는 것에 비해선 조금 늦긴 하지만 착실하고 확실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암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간만에 해보는 암기라는 행위가 무척 낯설고 신기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암기를 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이 외우고 암기하는 정신 작용이 일반적인 정신작용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어쩌면 불교식 "마음챙김" 효과를 떠올리면서 암기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척 강력한 집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암기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보고 읽는 정신적인 행위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짜투리 시간에 카드 한 장을 암기하거나 복습할 때마다 매순간 자동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집중에는 확실하게 에너지가 소모된다. Anki로 암기를 시작하면서 정신적인 에너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암기를 할 때마다 고갈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밤마다 생각이 많아서 불면증이 있었는데, 암기로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되면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이렇게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암기를 하다 보니 점점 암기할 수 있는 카드의 양이 늘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하루에 카드 한장을 외우는 수준으로 시작했다. 잊어먹을까봐 카드 한장을 거의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 반복하면서 기억에 새길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카드는 보통 4~50장 정도 외울 수 있게 되었고, 복습은 거의 하루종일 반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카드가 50장을 넘어가면 거의 중노동 수준으로 정신이 지쳐버린다. 확실히 정신의 근육이 효율적으로 단련이 되는 것이다. 

     

또, 암기를 하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집중력을 사용하게 된다. 머리에 기억을 주입하고 그 기억을 다시 꺼내는 행위는 모두 매우 집중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기를 하기 위해서 카드를 보면 자동적으로 집중력이 형성된다. 그리고 암기 능력이 발전하면서 집중력의 유지가 쉬어졌다. 덕분에 평소에는 산만했던 정신들이 암기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잘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것을 느껴볼 수 있었다. 집중력이 좋아지니 업무의 효율도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삶의 무게도 조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머릿속에 지식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니 머리가 해당 지식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인지 저절로 지식을 다른 지식과 연계시킨다. 과거에 익혔던 지식과 흘려들었던 여러 정보들, 과거의 사건들이 연계되면서 단순히 암기하려고 했던 내용들이 구슬이 꿰어지듯이 새로운 지혜로 엮이게 된다. 그러나 보니 과거에 몰랐던 일들이 갑자기 알아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수치로 제시되면서 스스로 암기하고 공부한 양을 확인할 수 있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유형의 성취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매일매일 Anki의 과제는 그날 하루의 과제였고, 그 과제를 끝낼 때마다 하루가 결코 아무것도 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최소한 공부한 Anki의 기록만큼은 발전한 것이다. 공부해야할 카드의 숫자가 하나하나 줄 때마다 미약하지만 성취감이 있었고, 대략 30분이면 모든 공부를 할 수 있었으므로 부담도 없었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지식들이 정착되어서 확실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주기율표를 아는 나와 주기율표를 모르는 나는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손으로 사물을 보고 만질 때마다 이것이 어떤 원소인 것인지, 원소들이 어떻게 엮이면 이런 질감이나 경도를 가지는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과거에 억지로 공부했던 화학도 같이 살아나서 이것저것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려준다. 원소들이 결합하고 분리하는 것이 마치 사람들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과 비슷했다. 일관되지 못하고 잘 정리되지 못한 화학의 억지스러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주기율표가 머릿속에 정착되고 암기를 시작하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구체적인 현상으로부터 가장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으로 이를 설명하기 윟서 시도된 수많은 지혜들의 노고로 보이기 시작했다. 허무하게 무언가 재미있는 글이나 게임을 찾아서 웹 서핑을 하던 때는 가져보지 못한 충만감이었고 새로운 변화는 스스로가 좋아지게 되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주었다. 

     

또, 정신적인 에너지가 늘어나고, 집중력이 개선되며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한 만족감으로 성취감이 강화되니 자존감이 강화되었고, 과거에는 전문서적이나 전공서적 등은 피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책들을 볼 때마다 어서 빨리 전부 지식으로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이제 삶은 너무나 즐겁고 재미나게 되었다. 

     

Anki로 암기하는 새로운 시도는 이렇게 혁명적인 변화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 없이 공부를 통해서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있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공부하고 싶은 내용은 너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문제이다.  마치, PC방에 디아블로2가 처음 나왔을 때 하루가 멀다하고 PC방에서 살면서 게임 삼매경에 빠졌듯이 이제는 공부에 빠지고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렇게 살고 싶다고 시도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아마 이것이 2015년에 얻은 최고의 성과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질병과 고통으로 삶이 밑바닥을 쳤을 때,

 

자신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고 행동은 제어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자존감이 밑바닥을 쳤을 때,

 

평생 이루지 못하던 것, 회피하던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평생 해보지 못한 턱걸이를 성공했을 때, 기뻤다.

 

훌라후프를 10분 이상 돌리고 나니 성취감이 들었다.

 

화학 주기율표를 외웠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렇다. 화학 주기율표를 외웠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10년 내에 가장 맑았다.

 

머리로 외우느니 몸으로 숙련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나이 40대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더듬더듬 따라하면서 외우는 것이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집중하기에 좋았다.

 

이후, 많은 기억술 계열도 살펴보았지만 단순히 정보를 빨리 외우는 것보다는

 

좋은 것을 외우고 그 뜻을 살피면서 내 인생에 밑바닥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에 집어넣다 보면

 

단순히 학교 공부에서 시험을 잘보기 위해서 공부하던 때에는 얻을 수 없었던

 

스스로가 커지고 발전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또, 그저 독서가 좋아서 책을 한번 흝어보고 그저 공감되는 내용에 공감하고 넘어가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실감이 있었다.

 

또한, 책을 읽고 요약하고 주요한 내용을 정리해서 암기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머리에 외우는 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 근육이 강해지면서 점점 암기가 수월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운동에 스쿼트가 있다면, 정신을 단련하는데는 정신을 집중하고 암기하는 것이 최고인 듯 싶다.

 

흥미로운 것들, 갈구하는 것들을 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자.

 

그리고 읽고 정리하고 암기하자. 머리는 맑아지고 정신은 튼튼해지고 영혼은 살찔 것이며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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