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을 정보로 인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연한 이야기라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인간이 오감으로 주위의 사물들과 교감한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인간은 그 오감으로부터 주입되는 정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자취하던 방의 위층이 옥상이었고 그 옥상에는 세탁을 할 수 있도록 세탁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세탁기를 돌렸는데 그럴 때마다 세탁기는 일정한 주기로 쿵쿵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그 쿵쿵 소리는 낮게 그리고 힘있게 울리면서 내 방과 공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규칙적인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발생하는 불규칙한 소음이라면 어지간히 큰 소리 아니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규칙적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규칙적인 주기를 머리가 자동으로 인식하고 그 주기에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쿵 소리를 마음속으로 따라하면서 다음 쿵 소리가 규칙적인 주기를 준수하는지 계속 신경쓴다. 그래서 쿵 소리가 들린 후 다음 쿵 소리까지 긴장이 발생하고 계속 쿵 소리를 따라간다. 쿵 소리에 신경쓰느라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보도를 걸을 때 바닥에 깔린 규칙적인 타일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그 타일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그 규칙성이 준수되는지 신경쓰면서 그 타일 위에 걷는 내 발도 규칙성을 갖추면서 걷게 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약간 강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세탁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활동이 강제로 정지되고 그 소리에 몰두하게 된다. 공부는 당연히 못하고, 글을 쓰거나 게시판을 둘러보는 등의 활동도 모두 하기 힘들어진다. 이 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크게 음악을 틀거나 매우 쉽게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을 시청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회피하거나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종속된다.


사람은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눈앞에 절벽이 있는데 아무 걱정 없이 그 정보를 무시하고 절벽 밖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눈앞의 절벽을 인식하는한 그 절벽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절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절벽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지 거기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 절벽 밖으로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할 의도 없이 태연하게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생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뛰어내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정보에 반응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방식들은 매우 다를지라도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절벽이 있기에 절벽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온갖 태도가 나온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그 핵심에는 반드시 절벽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절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이 그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정보 종속성”이라고 지칭한다. 왜냐하면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마음은 정보가 제공되면 반드시 그 정보와 함께 일어나서 그것에 얽혀 전개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정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감으로 지각된 사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면에서 올라온 마음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 종속성은 당연한 것들로 나타난다.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고, 맛있는 것을 보면 침이 꿀떡 넘어가면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나면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모두 그저 그것과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똥을 만나면 역하고, 향기로운 향에는 이끌리듯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이 과정을 의식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노력해보자. 노력해서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마다 눈이 썩는 것 같고, 맛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역겹고, 헤어진 옛 연인을 볼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다시 처음부터 사귀듯 하게끔 노력으로 할 수 있는가? 보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게 된다면 진화의 과정에서 일찍 탈락했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생각해보면 그 과정의 지독함과 지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평생 그냥 참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맛있는 것을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이 역겹게 느끼게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그만둔 순간부터 즉시 식습관은 원상복귀한다. 만일, 식습관을 제어해서 맛있는 것을 맛없고 역겹게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이어트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식증이라는 병적인 상태로 몰아넣을 정도의 압력이 필요하고 거식증에 걸린 순간부터는 삶이 다이어트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당연히 쉽게 되지 않는다. 


정보에 반응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은 인간의 생명체로서의 기능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또한, 경험이라는 사건을 통과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저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마약을 찾거나 마약을 찾아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에 중독되면 그 자극적인 경험은 그 때부터 끊임없는 갈증과 갈구를 낳고 일상생활 내내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경험이 없었다면 마약은 그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중독된다.”라고 하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경험된 방식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똑같은 상황,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는 좋아할 수 있고 누구는 싫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보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미 내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맛있다고 확립된 음식을 맛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이미 싫어하고 구역질 나는 똥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입맛대로 정보에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통해서 실제 그것을 체득하게 되고 해당 정보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델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을 쉽게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것일 뿐, 먹어보지 않은 것이라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일단 맛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렇게 부정할 수 없다. 마약에 중독되기 전이라면 삶을 건전하게 꾸려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회피할 수 있지만, 마약에 중독된 후라면 회피가 불가능하고 그저 감내해야만 한다.


마약이나 낭떠러지와 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보 종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은 그러한 정보 종속성의 향연이다.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상대는 그 호의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상호성의 법칙, 스스로 한 행동의 일관성을 스스로 깰 수 없게 되는 일관성의 법칙, 군중심리나 외모 그리고 권위 등에 종속되는 인간의 행동 같은 것도 정보 종속성으로 설명이 된다. 여기서 제시된 모든 법칙은 이미 법칙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 개인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정보 종속성이라는 개념은 꽤나 유용하다. 왜냐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잘못된 해법을 피해서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구역질나는 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똥을 피해 다른 길을 가거나 똥이 그 길목에 놓이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평소 좋아하던 맛있는 빵집이나 음식점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빵이나 음식을 먹고 자제력 없는 자신을 탓했다. 이건 마치 똥을 보고 구역질 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똑같다. 음식점이나 빵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식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자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열심히 외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다시 불행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좋아하는 음식점과 빵집이라는 정보가 나타나면 거기에 그냥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 종속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똥을 피해서 가듯이, 맛있는 음식점이나 빵집을 피해서 다녀야 한다. 정보에 노출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곳을 피해 다니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음식점이나 빵집을 보면서 식욕이 돌았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똥을 향기롭게 느끼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비하를 초래하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보다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상황을 전부 피할 수 없다. 항상 사건은 일어나고 세상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학원을 빼먹고 PC방으로 놀러가는 아들을 보고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동일한 상황에서 계속 화가 치민다. 무섭게 호통치면서 질타하는 상사에게 두려움이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그 상사가 입만 열어도 끔찍하고 두려워진다. 장시간의 노동 끝에 막걸리 한 잔에서 즐거움을 찾는 습관이 있다면 노동 후에 항상 막걸리가 그리워진다. 트라우마가 되었든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 되었든 한 번 결정된 것은 변하지 않고 반복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어서 피해갈 수가 없다. 정보 종속성은 이런 상황에도 도움이 된다.


정보 종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저절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의도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화나는 상황에 처하면 화가 나게 되고, 즐거운 상황에 처하면 즐거운 기분이 된다. 어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날아갈 듯이 행복했는데 다음날 삶의 목표가 없어졌다는 공허감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오늘 신기했던 장난감은 내일 바로 싫증나고 오늘 첨단 유행을 달렸던 옷들은 다음 시즌 유행에 뒤쳐진 퇴물이 된다. 이 모든 변덕에는 “나 자신”이 없다. 내가 화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에 저절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한다. 내가 너무 유행을 좇고 있거나 탐욕스럽거나, 소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려고 자신의 탐욕을 꾸짖고 소심함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보 종속성은 그런 자책이 똥의 냄새가 향기롭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애시당초 잘못된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연관관계를 만들지 않게 되면 많은 감정들이 날아간다. 죄책감, 자책감, 한심함, 스스로에 대한 경멸, 자랑, 자만 등이 모두 그저 반응하는 것에 스스로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따라붙는 2차적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 속에서 원인이 이것일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급작스러운 개선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내가 밤의 시간과 수면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어떤 모델의 변화였다.

 

원래의 모델은 이렇다.


일단, 밤의 시간에 대한 나의 모델은 아래와 같다.  


밤의 시간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으로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 없이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활동은 밤에 이루어지고 낮의 활동은 그저 부과된 의무 같은 것으로 짐에 불과하다. 내 삶의 핵심은 밤에 이루어지므로 낮에는 대충 활동하고 밤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다. 


수면이란 것은 그저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꺼지는 것이고 수면은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나에게 수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잔다. 하지만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신체의 자연스러운 적응으로 더 깊이 푹 잠들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할수록 수면의 질이 높아져 이득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평생의 수면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나에게 이러한 모델이 작동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게다가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등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이 모델은 그 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수면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하나둘 삶의 방향성과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덕분에 혼란스럽던 문제들이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수면의 문제가 실체를 드러냈고 위의 모델은 결국 하나씩 깨지고 있었다.

 

밤의 시간이 나의 시간이라는 생각은 직장이나 학생들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프리랜서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제는 깨어있는 시간이 전부 소중하고 나의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서 주위에 함부로 간섭해 올 사람도 없고 주위가 시끄러우면 귀마개를 하면 되니 더 이상 밤에만 자유를 누릴 이유는 없게 되었다.

 

두통과 체증이라는 숙원이 해결되면서 삶의 스트레스가 내 스스로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지니 짜증도 줄었다. 나의 패턴상, 고통과 짜증은 그것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몰두하게 하는데, 금연으로 식탐이 생긴 것 말고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대한 욕구 자체는 줄어들고 있었다. 자극적인 게시판 글이나 정치적 논쟁을 보는 것, 영화나 드라마를 밤새 시청하는 것과 헐벗은 사람들을 보는 단순하고 말초적인 욕구가 가라앉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밤의 시간에는 공부를 하거나, 강의를 듣고 운동을 하는 미치도록 건전한 일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조건이 무르익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때, 최후의 조각을 맞춰준 것이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서평을 다시 쓰겠지만 경험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던 내용이 무척 많아서 정말 쉽고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자주 낮잠을 자서 공부에 큰 효과를 보았던 나의 경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도 있고, 고등학교 때 잠을 자지 않고 버텼을 때 느꼈던 수면 부족의 파괴적 위험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덕분에 잠을 안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를 안고 사는 것인지 납득해버렸다. 이 납득으로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 완전히 깨졌다.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해서 불면증을 치료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잠을 못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 잠을 못자는 것이 지옥이었다. 단지 그 원인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불면증에 괴로워할 때는 꿀잠을 애타게 원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기존의 모델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각성 상태로 있을 수 없을 때야 잠을 시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으면서 그 동안 내 속에 있던 중2 시절 읽은 3시간 수면법의 논리가 처음으로 깨지고 수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명확하게 확립되면서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현재의 개선된 수면상태는 일시적이다. 수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깨졌지만 현재의 낮아진 스트레스와 고통이 개선된 수면상태의 한 축이기도 하다. 이는 지병의 개선도 있지만 현재 일을 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을 하면 당연히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시 밀려올 것이고 그러한 고통에 대한 회피와 일을 한 자신에 대한 보삼심리로 다시 밤의 시간을 열심히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다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잠을 자지 않고 놀려고 할 것이다. 또한, 일을 많이 벌리는 본인의 성격상 밤에 일하는 것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면증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불면증이 단지 귀찮고 그 순간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면이 개선된 지금은 개선된 수면 상태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경험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잠을 못자는 삶은 삶아지고 있는 개구리의 처지와 같은 지옥이었다. 마냥 지속되는 고통과 피로, 인내심 저하로 삶이 비틀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어도 이를 인지하기도 어렵고 저항하기 어려운 그런 지옥이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항상 여유로운 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마 다시 수면이 박탈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어야 마음이 놓이리라. 그리고 그 시작은 나의 수면 습관을 개선하게 해줬던 최후의 조각인 리처드 와이즈먼나이트 스쿨을 씹어 먹는 것으로 해보려고 한다


몸무게가 세 자리 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무릎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한 끼 식사로 6~7천원짜리 시장피자를 먹어왔지만 세 자리수를 넘지 않던 내 몸무게는 담배를 끊으면서 늘어난 군것질에 세 자리수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몸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무릎이 나가고, 고혈압이 치솟아 성질머리가 나빠질 것이고, 무거운 몸 때문에 호흡 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건강검진에서도 대사질환 증후군이 있으니 감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해왔다. 이런 모든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몸무게를 대학시절의 몸무게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재로부터 20을 감량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아무나 하나 내 스스로를 잘 아는데 무턱대고 절식하기 시작하면 그 요요증상으로 몸무게가 200을 뚫고 올라갈지 모른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열심히 할 정도로 의지력이 세지 않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운동 후 피자 한판을 먹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기 때문에 운동만으로 살 뺀다는 생각은 이미 접었다. 존 다이어트 같은 책을 열심히 읽어봤는데 이건 뭐 영양사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로 보였다. 인생을 전부 다이어트에 갈아 넣을 각오라면 이런 방법을 실천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다이어트 관련 책들은 무척 많은데 각종 다이어트 방법들을 읽어보니 이 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적절한 적응의 기제가 있다면 사람은 그에 맞는 삶의 형태를 보이는 법이다. , 지금보다 20줄어들은 몸무게로 사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 있고, 그에 맞는 생활습관과 삶의 양태를 구축하면 자연스럽게 살은 빠지고 정신과 육체는 가장 조화로운 형태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살을 빼려면 그러한 상황을 만들고 생활로 고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삶을 모형을 생각해보다가 좀 더 단순한 질문에 도달했다. 그 질문은 , 나는 필요 이상 먹는가?” 였다. 삶의 모형을 구축할 필요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이것이 궁금해졌다.

 

다이어트 방법을 고민하면서 여전히 피자 한판을 한 끼 식사로 먹고 있던 삶에서 어느 순간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개선되어 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화로운 수면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야식이 중단되었다. 종종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해당 문제의 실체가 보이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야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야식을 줄여야 한다고 말할 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야식이 나의 정상적인 3끼니 중 한 끼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면증이나 수면관련 이슈를 경험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잠이 안 올 때는 무언가를 먹어야 그나마 잠을 자기 쉽다. 그래서 나에게 야식은 하루 세끼 먹는 식사로서 당연히 주어진 정당한 식사였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기아에 허덕이게 되고, 잠은 오지 않으며, 정당한 먹을 권리마저 빼앗긴 분노까지 솓구치니 잠을 잘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야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도 아쉬움도 허기도 같이 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야식은 내가 왜 필요 이상으로 먹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야식은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 잠이 와야할 시점에 잠이 오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오고 그 짜증을 벗기 위하여 잠을 자야한다는 핑계로 공격적으로 먹곤 하였다. 한 번 이와 같이 생각이 고정되니 그동안의 온갖 연쇄반응이 보였다. 공부하다가 폭식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폭식하고, 잠이 안와서 폭식하고, 문제가 안 풀려서 폭식하고,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려서 폭식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두통과 체증 외의 모든 고통에는 항상 식탐이 따랐다. 심지어 두통과 체증도 폭식이 너무 심해서 더 심해진 것이다.


그럼 나는 왜 폭식을 했는가?

 

짜증은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 보는 것이 싫어 외면하기 위해서 폭식을 했다. 먹을 때는 그 단맛에 주의가 집중되고 쾌락이 따르니 고통과 고통을 일으킨 상황과 자책감 등을 잠시 잊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고통이 쉽게 사라질리 없으니 당연히 배가 불러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먹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은 쉽게 남용된다. 사소한 짜증이나 귀찮음을 마주치게 되어도 일단 먹었다.

 

고통을 감내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서 자극적인 것으로 정신을 돌리는 행동 패턴을 내 안에서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이 패턴은 나의 삶의 핵심이었다. 괴로운 것을 잊기 위하여 다른 것에 몰두하는 이런 패턴은 지나친 몰입으로 나타났고 가끔은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 패턴을 발견하고 의식하면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감내하고 나아가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내 삶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상승무드를 타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통을 직시하고 피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야식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잠을 자지 못할 때마다 그 순간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낮에 활동할 때는 별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짝 피곤하다. 힘들다. 정도였다. 그래서 불면증의 개선은 단지 귀찮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수면이 개선되고 나니 그동안 받고 있었던 고통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미묘한 스트레스를 거의 먹는 것으로 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고통을 항상 직시하고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수면 난조로 인한 고통은 피로와 인내심 저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하루 종일 영향력을 행사하니 단순히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 따로 고통으로 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고통을 직시한다고 해도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기는 거의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먹는 다는 것을 알았어도 수면의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면 지속적인 고통과 낮아진 인내심의 문제로 먹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동안 수면의 문제를 단순히 잠을 못자게 해서 피곤하게 만든다는 수준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수면을 개선해도 밤에 잠을 못자는 고통이 해결되겠지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면 습관이 개선되어 보니, 그 정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의 삶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질척질척한 진창을 걷는 것과 같다면 이후의 삶은 산뜻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정신은 맑아졌고 하루하루가 상쾌하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좋아지는게 느껴진다. 표정은 산뜻해지고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수면의 질이 개선되기 이전의 삶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스트레스와 고통 짜증이 상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식탐으로 더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으로 다이어트가 되고 있다. 


이전으로 돌아가기 싫다. 하지만 원인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일을 쉬고 있고 다른 스트레스를 놓아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개선된 수면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지만 다시 일을 하고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시간에 쫓긴다면 다시 수면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개선된 수면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개선된 수면을 반석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 동안 수면의 질을 악화시켰던 원인을 찾고 최고의 잠을 잘 수 있는 방법을 몸에 각인해야만 한다. 그래서 다시 수면을 악화시키는 다양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어가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