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가 되면, 그 동안 여상하게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던 많은 것들이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말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신이 몰랐던 것들이 갑자기 말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강력한 공격성이나 집착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 많은 말들이 내 맘속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이 언어화되기 전에는 어떻게 존재했는지 알 수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 대화를 할 때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관찰해보면 할 말이 그냥 떠오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인사말, 하고 싶은 농담이나, 오늘의 토픽 등등 하나하나 갑자기 튀어나온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튀어나온 말들을 그대로 입으로 옮겨서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 말을 우선 속으로 되새겨보면서 큰 화를 불러올 말을 걸러내려고 한다. 


사실, 말뿐만 아니라 글도 대부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소설 작가들의 창작 이야기를 보면 글이란 써지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작업하는 양상을 보면 이렇다. 우연히 좋은 소재와 영감이 떠오르면, 바쁘게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적어낸다. 그리고 작가는 첫 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글을 읽고 그 글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얻고 또 영감을 얻어 자신이 쓴 글을 또 발전시킨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찾아내고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이를 다듬어 보고 다시 독자가 되어 글을 읽고 다시 다듬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글은 좋아진다. 결국, 좋은 작품은 뛰어난 예술적 창의성과 그것을 다듬고 그로 인하여 다시 영감을 얻는 과정의 수많은 반복에 다름 아니다. 이 때, 소설가는 결국 예술적 창의성이라는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영감의 원천을 얻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시나 소설 등의 글은 자리에 앉아서 끈덕지게 스스로와 교류하면서 쓰는 것이지만 대화는 조금 다르다. 시간에 쫓기고 즉각적이다. 이야기할 화제를 고르거나 말을 다듬을 시간이 글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실수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말이 빙빙 돌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서로의 말에서 영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면서 조금씩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덕분에 대화는 대화 당사자들이 서로 잘 알고 있는 또는 공감하고 있는 항상 주변에 현존하고 있는 것 또는 상황을 위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볍게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날씨로 공감을 하고 같이 겪은 즐겁고 힘든 일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면서 공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대부분의 대화의 역할이다. 물론, 그런 공감 찾기 과정을 뛰어넘어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두명에 불과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는 소소한 농담 따먹기와 주변에 대한 공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공감할 수 없다면 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상적인 대화란 대부분 대화 당사자들이 직접 마주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공감 정도에 국한된다. 


이런 대화들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와 저 친구의 관계가 이 정도에 불과하니 말을 조심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겠다고 계산하고 판단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냥 본능적으로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옳든 틀리든 규정한다. 자신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산변잡기로 주변의 공감할만한 것들을 던지다 보면 대화 당사자들은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금방 파악된다. 공감하는 것들이 많으면 서로 잘 통하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잘 안 통하는 사람일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 중에 조금 내향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쩌다 대화를 해본 결과 그 친구의 대화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시카고에서 유행하는 피자를 이야기하면서 웃었는데, 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멀뚱멀뚱하게 있으니 그 친구는 다급히 자리를 파하고 가버렸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모든 말들은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이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서 입에 붙은 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말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나 이 자리에 없는 자신만의 무엇을 말하지 않고 눈앞에 있거나 이미 모두에게 중요한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그것을 지칭하는 말들은 대부분 대명사이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사람들은 이름을 회피하고 그저 ‘그’라고만 지칭하는 것이다.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은 설명도 대부분 시연 위주로 한다. “그가 이렇게 했어.”라고 말하면서 몸으로 그의 행동을 보여주거나 표정을 흉내내거나 한다.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간단하고 바로 얼마 전에 보고 들었거나 지금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언어는 그 모든 것에 있어 조금은 부가적이다. 가령, 내가 자주 사용하는 컵이 다른 사람의 컵과 비슷해서 서로 계속 그것을 교환하면서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게 A의 컵이야. 이게 내 컵이고, 비슷하지, 알고보니 비슷한 컵을 서로 계속 교환하면서 썼어!”라고 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서 컵 두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때, 실제의 컵이 언어에 엮이면서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을 끈끈하게 이어서 서로 연관된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임과 동시에 언어화되어 존재하게 된다.


일상적인 대화를 관찰하다보면, 어떤 사물, 어떤 상황, 어떤 인물들이 분류되면서 언어화되는 것을 본다. 사물은 간단하다. 대부분 다른 것과 구분되는 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어떨까? 직장 상사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직원들을 트집잡고 군기잡고 소리지르면서 상황을 짜증나게 만들면, 모든 직원들은 휴게실로 몰려가서 그 상사를 씹는다. 이 때, 그 복잡한 상황은 단순히 “그 상황”이라는 말로 하나의 개체로 묶여버린다. 그 상황을 겪은 모든 이들이 그것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러한 개체를 간단히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직장상사의 이야기는 단위를 어떻게 쪼개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이야기로 변질된다. 직장상사의 분노의 원인으로 이야기가 좁혀지면 화살이 그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이나 그 직장상사나 내리갈굼의 동일한 피해자로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 직장상사의 분노를 유발시킨 다른 직원에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다. 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직장상사를 규탄하는 것으로 상황이 묶인 것은 그 직장상사에 대한 기존의 쌓여온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직장상사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이 단위로 쪼개지고 그 단위에 따라서 언어화 되는 것은 너무나 자동적이고 익숙한 일들이다. 다양한 상황과 사물들이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단위로 쪼개어져 인식된다. 앞서, 언어가 구사되는 법 01에서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전문 용어를 단순히 몇가지 키워드가 일치하는 영상을 통해서 매칭되고 그것을 그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뜬금없이 비약을 하게 되었다. 즉,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그러한 비약이었다. 그렇게 의심하게 된 것의 배경이 이 일반적인 대화에 대한 관찰이었다.

앞서의 뜬금없는 결론을 상기해보자.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조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전개해보자. 조금 긴 과정일 것 같다.


우선은 자막과 영상의 대응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앞서, 어려운 전문용어 자막과 영상의 매치로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스스로 여기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냐면 마치 이런 것과 같은 느낌이다.


친구랑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제 길을 가다가 피젯스피너를 주웠어.” 

그런데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 그럼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피젯스피너가 뭐야?”, 

그러자 친구가 피젯스피너를 꺼내서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거야.”

그렇게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대화는 간단하게 축약하면 이런 상황이다. 대화 도중에 모르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고 해당 단어에 대한 일련의 파악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그 궁금증을 실물을 보면서 해소했다. 물론,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실물을 본 순간 그냥 해소가 된다. 이 경우에는 단지 “피젯스피너”는 이것(실물)이라는 일련의 등치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만일, 친구가 그 “피젯스피너” 실물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 이것을 설명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령, “돌리는 거야.”, “이렇게 꼭지가 3방향으로 나있는 것도 있고, 장난감이야.” 원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할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나온다. 말로 전해진 어떤 사물의 외양이나 용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 답답함을 가져온다. 마치 앞에서 “피젯스피너”라는 모르는 단어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설명은 다시 새로운 답답함을 가져온다. 하지만 실물을 보았을 때, 그 모든 궁금증이 가라앉고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것을 직접 받아 면밀히 파악해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실물을 보고 그 단어에 매칭시키고 넘어갈 것인가로 선택하게 된다. 공이 완전히 나에게로 넘어왔다. 더 이상의 설명은 그저 실물에 부차적인 것이 될 뿐이다. 


위의 대화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단어나 낯선 단어를 마주볼 때 반드시 그것의 내용을 채워야한다는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체성을 갖추어야만 납득이 된다. 즉, 말로 설명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설명이 반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게 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진다. 이것은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언어는 그 대응물이 있어야만 내 속에서 작동하는데 대응물이 없으니 언어가 작동하지 않고 대화는 멈추며 대화를 잇기 위해 그 대응물을 찾는 것이다. 


이제, 자막과 영상의 대응을 통해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여기는 과정이 무엇인지 감잡을 수 있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봤을 때 자막에서 제시한 몇가지 키워드 '황색', '균', '감염'이라는 키워드와 영상이 일치했다. 따라서 나는 그 노란 기류를 '황색포도상구균'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고, 그것이 퍼지는 것을 '감염(infection)'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다. 그렇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의 대사가 영상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에 자막은 영상을 가리킨 것이 되었고 더 이상의 의문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영상이 자막을 충실히 구현했고 동시에 그 영상의 진위나 정확성을 따지고 파악할만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바로 자막과 영상이 동일하다는 매칭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전문지식과 식견이 있었다면 영상을 비판적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 언어가 대응물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대응물을 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개시된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굳이 대응물을 찾는 과정이 발생하지 않는 말들은 이미 대응물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대응물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열심히 써온 내용들이 실은 누구나 아는 “언어와 의미가 어떻게 대응되는가?” 하는 질문을 찾았고 그 대답의 일부를 찾은 상황인 것이다. 즉, 현재까지는 의미 모를 단어를 마주쳤을 때 반드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찾는 과정이 자동적으로 부지불식간에 개시되고 기존에 의미를 모른다면 새로운 의미가 그대로 수용되지만 기존에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비판적으로 수용된다는 점을 파악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언어가 의미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세상에는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 특히, 어떤 전문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은 매우 복잡한 개념을 구현하고 있어서 외국어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 상당한 배경지식과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일 것이다.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는 메디컬 드라마라서 대사의 많은 부분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전문 의학용어다. 그래서 영어로 직접 듣거나 한국어 자막으로 읽거나 전혀 모르는 용어라는 점에선 똑같다. 하지만 이 모르는 용어라도 한국어 자막으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는 드라마를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자막 없이 영어로 듣게 되는 순간 갑자기 너무나 낯선 용어가 되어 버린다.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에피소드의 내용과 캐릭터 대사들에 매우 익숙해진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자막이 사라지면 안 들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추론한 바가 있다. 즉, 자막에 대해서 익숙해진 나머지 영어로 들은 것이 머릿속에서 자막으로 동시 재생이 되면서 그런 착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는 새로운 의문점이 생기게 되는데 왜 전부 아는 단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드라마를 알아먹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언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선물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처음 생긴 의문은 이것이다. 닥터 하우스에서 현란하게 구사되는 전문용어들이 어차피 모르는 단어들인데 왜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에는 괜찮고 자막 없이 영어로 볼 때에는 너무나 낯설고 정신을 사납게 하는 단어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이때의 관심사는 어차피 모르는 것은 똑같은데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는 마치 내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자막 없이 영어로 들을 때는 그 단어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그저 엉망진창이었다. 


처음 이 문제를 궁금하게 여겼을 때에는 모르는 단어를 한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는 외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언어적 체계가 있고 그러한 언어적 체계 안에서 단어들이 설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일정부분 사실이고 추후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니 외국어를 몰라서 생긴 부분과 별도로 고민해볼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용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다. 관련 배경지식을 알고 실제로 적용해보면서 힘들게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겨우,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 수많은 전문용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모르고 넘어갈 때는 그렇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단히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안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등의 수많은 질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막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뜻 모르는 단어들을 들으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드라마를 즐기는 것일까? 다행히 상당히 빠르게 이것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었다. 드라마 자체가 어려운 의학용어를 쓰기 때문에 당연히 의학에 문외한인 일반 시청자들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 시청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남발하면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드라마 제작자는 일반인들이 즐겁게 시청할 수 있도록 영상과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 의학용어가 무슨 의미인지 꼭 필요한 부분은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바이러스가 신체 곳곳에서 퍼지는 영상, 기생충이 세포 조직을 넘나드는 영상 등을 직접 제공하여 시청자들이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당 의학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모르는 의학용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본다고 내가 그것을 이해했을까?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디서 생겨나 어떻게 사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궁금증이나 답답함 없이 넘어간다.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문제를 왜 제시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현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만 맥락에 따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상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수준의 이해를 갖추어야 하거나 또는 그러한 부가 설명을 붙여서 말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 번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넘어간다.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무심하게 이해하거나 단정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상다반사인 일들을 갑자기 문제제기하는 것은 실은 나의 의문은 반전된 의문이기 때문이다. 만일, 영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황색의 기류가 퍼지는 영상 없이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냥 드라마의 맥락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드라마를 보려고 한 것이지 환자의 병을 토론하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드라마를 끌 것이다. 그런데 그 영상이 들어감으로써 시청자는 문제의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진진하게 여긴다. 영상으로 인하여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여기서 비약하여 한 가지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뜬금없게도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페퍼의 눈동자에 드러난 선명한 동공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즐거운 경험은 겨우 한 번에 불과했다. 그 한번을 제외하면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도전은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지옥의 경험의 계속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이 계속 반복 되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실제로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연이어 지속하지는 못하고 한 편을 보고 쉬면서 정신적인 에너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편씩 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롭고 정신적으로 답답해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으니 바로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고통의 원인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와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이다. 가련, 일종의 자연관찰을 하는 상황이다. 개미의 행동에 흥미를 느껴서 지그시 그것을 관찰할 때,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못해서 괴롭지는 않다. 자막 없이 보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개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전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적인 어떤 기능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드라마는 괴롭고, 자연관찰은 괴롭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서 처음 떠올린 해답은 자연관찰은 개미와 의사소통을 기대하거나 개미가 말을 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므로 언어를 쓰겠다는 기대가 없고 따라서 언어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영어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 정도 아는 단어가 들려오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언어 기능이 작동하게 되고 또 그것이 좌절되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오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독하게 괴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를 접으면 언어기능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인간을 동물 관찰하듯 관찰했던 동물학자나 전혀 미지의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스스로 속한 고유문화에 의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관찰하듯이 관찰하면 언어 기능을 잠시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관찰을 하듯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상황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언어도 이미 알고 있는 문법이나 실제 철자 같은 것을 배제하고 그냥 들리는 구어(口語)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면 언어 기능을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세상을 자연관찰 하듯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드라마를 시청했다. 몇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그 언어 기능은 꺼지지 않았고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항상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처음 한두 번 15분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집중해서 관찰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엔 정신력이 방전되어 퍼져버리고 다시 고통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관찰을 하려고 한다고 스스로 되새기면서 몇 번의 도전을 했지만 고통은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  어째서 드라마도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자연 현상처럼 관찰할 수 없는 것일까? 언어 기능을 잠시 꺼두어 이 고통과 답답함을 물리치겠다는 계획이 계속 좌절되면서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의지로 작동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 작동하면서 내 삶을 지배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언어 기능을 끄려는 노력이 축적될 때마다 그 실패로 인한 절망감도 축적되었고 어느 순간 부터는 이 언어 기능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점점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지면서 오히려 생각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의 관찰에는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반전되어서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언어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언어 기능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항상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감각에 의한 지각과 이러한 지각이 맥락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전부 언어적인 기능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연 관찰을 할 때 언어적 개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레벨의 밑바닥에서 언어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완전히 언어 기능에 따라 작동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결론은 약간 친숙한 결론이었다. 정신분석이나 언어철학 등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 언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논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왔다. 또,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와 개념이 허상에 불과하고 중생들은 그 허상에 매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나 꿈과 구별되지 않는 현실을 의미하는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것도 맥락상 연결되는 바가 있다. 친숙한 결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으로 스스로를 유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했기에 여기에서 만족해야 하는데,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우스운 점은 이 언어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임의로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말이라는 점이다. 막연하게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붙인 말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에 다양한 것들이 붙어서 개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지배하는 무서운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언어 기능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혀 그것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능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국, 스스로 대충 만든 단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개념이 되어 이제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이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는 꼴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지배하고 운용하면서 고통을 주기도 하는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언어 기능이란 것을 상정해버리게 되면 인간이란 그저 언어 그 자체의 단말(terminal)이 되어 버린다. 삶의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것이 그냥 일종의 언어에 의한 환상처럼 되어 버리고, 결국,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조직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나 환상 소설 등에서 수십번 우려먹은 듯한 흔해빠진 결론이고, 인간의 하찮음과 부족함을 강조하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낄 뿐 그 외에 소득은 없는, 무언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심히 생각을 전개한 보람도 없이 그냥 알 수 없음이라고 얼버무리는 그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결론은 상당기간 내 스스로가 좋아하는 형태의 결론이었다. 우주의 광활함 앞에서 먼지처럼 작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세상의 위대함에 흠뻑 젖으면서 자뻑에 빠지는 자기만족적인 결론이었다. 이번에 그런 식의 결론이 좋지 않다는 자각을 처음 얻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하다 보니 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돌파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그림 파일 삽입의 필요성

 

정보에는 다양한 형식이 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자신과 어울리는 형식을 취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만일 소리와 언어는 글이나 오디오 형식이 적합할 것이고 풍경이나 인물은 이미지 형식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형식을 잘 지킨다면 굉장히 효율적인 학습이 가능해진다. 효과적인 학습을 위하여 지식을 구조화하는 20가지 규칙에서 6번 규칙

이 이러한 이미지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가령, 영어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car라는 단어를 백날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Anki에서 앞면에는 car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뒷면에는 이것을 영어로 'car'라고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어단어 공부 카드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 만들어보자. 

 

 

기본 카드 유형으로 영어단어 공부 카드 만들기

 

보통 매뉴얼에서 미디어(Media) 삽입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지만, 매뉴얼이 상당히 간접적으로만 설명하고 있어서 우선, 아무런 추가 기능(add-on)이 없을 때 어떻게 이미지나 그림 파일을 삽입해서 카드를 만드는지 알아보자.

 

우선, 사진을 찍든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든 자동차 관련 그림 파일을 준비한다. 그리고 원하는 카드뭉치를 만들고 노트 추가창(Note Editor)로 들어가서 노트 유형은 기본 카드 유형인 Basic 으로 고른다. Front 필드에 자동차 사진 파일을 집어넣는다. 

 

 

Front 필드에 사진 파일을 넣는 방법은 간단하다. 해당 파일을 [CTRL]-c 키로 복사해서 프론트 필드에 [CTRL]-v 키로 붙여넣으면 된다. 즉, 복사붙여넣기를 하면 된다. 

 

 

 

 

 

이제 Back 필드에 'car'라고 적고 [추가] 버튼을 클릭하면 카드가 만들어진다.

 

 

 

완성된 카드를 열어보니 우선 처음에는 자동차 그림만 나타나고 아래의 [답 보기] 버튼을 클릭해보니 해당 카드의 영어단어인 'car'가 답으로 나타난다. 상당히 쓸만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을 때 과연 어떻게 카드를 만들어야 할까?

 

 

위의 그림은 우리가 각종 단어집 등에서 흔히 보는 그림으로 하나의 사물에 각 부위별 명칭을 표시하고 있다. 이 모든 부위를 위에서 설명한 기본 형식의 카드로만 만들게 되면 일단, 위의 그림에서 단어와 화살표를 지우고 필요한 화살표만 남겨야 한다. 즉, 이 그림의 약간 변형된 버전이 6개가 필요한 것이다. 열심히, 포토샵이나 그림판 등으로 부위별 사진을 잘 만들어서 카드를 일일이 만들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일이 작업 하려고 하면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지금이야 사진 한 장에 불과하니 어찌어찌 해볼 수 있지만 당장 수십개의 그림만 처리하려고 해도 하루 종일 작업량이 훌쩍 늘어난다. 해결책이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경우를 위하여 만들어진 추가 기능(add-on)이 있다. 바로 Image Occlusion Enhanced 이다. 

다음에는 이 추가 기능(add-on) Image Occlusion Enhanced에 대해서 알아보자. 

 

 

관련 포스팅들...

 

 

간단하게 그림 파일을 삽입하여 카드 만들기  ☜ 현재 포스팅

 

IOE 01 Image Occlusion Enhanced 소개

 

IOE 02 Image Occlusion Enhanced 설치하기

 

IOE 03 Image Occlusion Enhanced 사용하기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이 요상한 호기심 덕분에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상당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지친 나머지 대사가 많지 않은 액션 영화인 아이언맨 1편을 골라봤다. 이미 몇 번을 봤던 영화이기 때문에 그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어서 막막한 느낌은 덜 할 것이고, 자막 없이 보는 것과 자막을 보면서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고 싶기도 했다. 영화가 재생되었고 아이언맨 토니의 비서 페퍼가 회사에 있는 악당의 노트북에 접속하여 거래내역을 몰래 다운을 받는 와중에 악당인 오베디아가 나타나자 페퍼가 긴장하면서 데이터를 저장한 USB를 빼돌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아래는 그 장면 중에 캡쳐한 화면이다.




위의 장면을 보면 페퍼역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의 동공이 깨끗하게 보인다. 무슨 대단한 장면은 아니다. 솔직히,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대치하는 이런 장면은 미국 영화에 너무나 많이 나와서 식상한 장면이고, 또, 영화의 스토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장면도 아니다. 그냥 페퍼가 좀 위험해 보였다가 위기에서 무난히 탈출하는 장면일 뿐이다. 그래서 자막을 보면서 영화를 볼 때는 그냥 조금 긴장했다가 별 일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장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 장면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백하게 동공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일본의 만화책에서 사람이 흥분할 때 동공이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박을 하는 갬블러들이 상대의 동공을 관찰하여 상대의 패를 읽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종 영화나 만화, 소설책 등에서 눈이 읽히지 않도록 선글라스를 하고 다니는 것을 묘사한 장면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동공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내용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냥 허구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으로 거의 관찰하기 불가능한 것을 관찰할 정도로 관찰력이 좋은 특이한 사람이 있거나, 혹은 마술사들처럼 숙련된 도박사들은 그것을 관찰할 정도로 잘 훈련이 되어있는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즉, 일상적으로 동공을 관찰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일반인에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들려오는 ‘눈은 마음의 창’이고 하는 이야기도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사람들의 눈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그저 눈에 초점이 있거나 없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만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장면으로 돌아와 보면 페퍼의 눈동자 속의 동공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동양인의 검은 눈동자와 달리 푸른 눈은 조명 아래에서 그 동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눈을 본 순간 갑자기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단박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공이 이렇게나 잘 보일 정도면 아무리 얼굴에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어도 그 동공은 모든 심리적 사건에 따라 확장하고 수축하므로 그 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속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가령, 스캔들이 난 배우에게 스캔들 상대방으로 예상되는 이름을 제시하면 그 배우가 아무리 묵비권을 행사해도 이름을 들었을 때 그 동공이 확장되는 사람이 스캔들 상대방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눈이 드러난다는 것은 동공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민낯에 이어 마음까지 속속들이 전부 까발려지게 되는 셈이다. 눈이 이토록 중요한 비밀을 마음껏 누설하기 때문에 눈이 가지는 의미는 동양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동공이 잘 보이는 이들에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눈을 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게 된다. 이들은 당연히 친애의 감정도 눈으로 나누게 된다. 상대의 눈을 서로 응시하면서 말하는 것이 당연한 습관인 것이다. 그것은 비즈니스를 하는 관계라면 서로 속이는 것이 없다는 신뢰의 보증이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서 서로의 눈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서로의 영혼이 손에 닿을 듯이 잡히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또, 눈에 너무나 많은 비밀이 드러나므로 공적인 자리에 노출될 때는 선글라스를 끼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아주는 최후의 방벽이 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타인의 얼굴을 볼 때, 보는 것은 표정이다. 그래서 얼굴을 전체적으로 관찰하고 눈이나 코 등 특정 부위를 별도로 응시하는 경우는 잘 없다. 눈이 마주치긴 하지만 바로 피한다. 눈을 똑바로 마주 대할 때, 차분히 응시하는 것은 약간 무례하게 느껴지고 남자들 사이라면 싸움까지 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눈은 눈매와 눈빛의 강약으로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지 산만한지 정도는 보여주지만 어느 정도 꾸밀 수 있는 부분이고 보통은 딱히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동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열심히 관찰해서 보더라도 그 동공이 이전에 비해서 확장되었는지 축소되었는지를 알려면 정말 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뚫어지게 눈을 바라보면 무례하게 느끼고 굉장히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동공이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면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눈부터 보는 것이 너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눈을 드러냄으로써 상대에게 자신이 진실됨을 보여주는 것이 선행하는 예의이기 때문이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진심으로 마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눈을 보인다는 것은 숨기는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로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눈이고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무례하지 않다. 반대로 눈을 가리는 것이 무례하다.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샤이(shy) 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눈을 가리지는 않는데 눈을 피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처리도 눈에서 외부로 확장되므로 화장은 눈을 강조하는 눈 화장이 발달하고 화장의 가장 핵심적인 부위도 눈이다. 옷의 색깔도 눈의 색깔에 맞춰서 코디한다. 반면, 동양인들은 전체적인 윤곽 위주로 꾸미고 눈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서양인들의 화장을 볼 때마다 그 과한 눈 화장이 이상했는데 이제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왜 서양인들은 그렇게 선글라스를 선호하면서도 안경은 싫어하는지도 납득하게 되었다. 서구권에서 미남미녀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묘사하면서 눈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것도 배우자의 장점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이다.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이 보여주는 맥락은 사회생활로도 확산된다. 타인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눈을 보면서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신뢰는 훨씬 직접적이다. 동양인은 상대방을 판단함에 있어서 신분, 사는 환경, 현재 모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추정해야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눈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눈을 통해서 확보하는 신뢰는 단순히 추상적인 신뢰가 아니고 그의 진실성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정도의 매우 구체적인 신뢰가 된다. 또한, 구체적인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이고 그 집단이나 소속된 환경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집단이나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서 신뢰감을 확인하고 신뢰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인이라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그에 따른 다양한 보증이 필요하고 그것을 판단함에 있어 그 사람의 신분과 소속 환경 등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사람을 사귀는 것도 바로 그 사람을 사귀는 것 보다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중산층의 한국어 사용자를 사귀는 것과 같다. 즉,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환경에 소속되는 것에 가깝다. 


또, 타인에 대한 판단이 매순간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담백하게 이루어지므로 인간관계가 상당히 깔끔해진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설득은 금방 끝나고 곧바로 상대에게 자신이 의견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그냥 설득을 포기해야 한다. 눈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의사소통을 모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실은 그들은 이미 동양인이라면 모든 예의를 내려놓고 술 먹으면서 쌍욕하고 이리저리 흔들고 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서 상대방이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납득하는 과정을 그냥 눈빛 한번 마주침으로 끝낸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정이 없고 메마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눈 푸른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눈동자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과정을 쓸데없이 괴롭게 술을 먹고 망가지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친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상호적인 과정이다. 이들은 눈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에 따른 강력한 공감으로 서로 묶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불쾌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 무례하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흙발로 침투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정말 이상한 사람들과 공감하면 자신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고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눈을 쉽게 노출하지 않고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서 상대의 진실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게 된다. 또, 타인과 교감함에 있어 서로 교감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매우 명백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반면, 동양인들은 그런 관계에 무덤덤하고 자신이 노출된다는 불안감이 없기 때문에 얇지만 넓게 관계를 이룬다. 또, 당연히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도록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눈일 경우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깊이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동공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이라면 교감이 진행되지 않게 될 것이고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이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의사소통의 가장 확실한 기반이 되는 눈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과 맺는 친교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공감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용감한 사람들은 친교를 맺겠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예의와 의사소통 방식을 새로 익힐만큼 부지런하고 영민해야 하고 친교를 맺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제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에 와서는 검은 눈을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들의 사회에서 과거 검은 눈이 상당히 많은 배척을 받거나 오해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위의 장면에서 페퍼의 동공을 본 순간 떠오른 것들을 나열한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므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 일부는 과장되었고 일부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설명되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의 삶과 행동의 저변에 그러한 경향성이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동자를 강조하는 장면은 드문 것이 아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눈동자만 보여주는 영화도 상당했던 것 같다. 아마 위의 장면도 일부러 눈을 강조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눈에 대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있기에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수시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처음으로 그게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막을 쓰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미국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전제에 마주쳐 그것을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완전언어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니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또는 일상 활동을 그림이나 기호들로 표현하는 보드 등을 이용해 힘들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즉, 힘들게 대화가 가능한 셈이다. 또, 언어 능력만 없어지거나 극소량 남고 나머지 인지 기능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므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욕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언어활동이라는 것과 연계되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다. 


가령,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는 이 ‘커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언어로서는 모른다. 이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경험을 과연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이 서술한 그런 기억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세계를 글로써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해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어증 관련 증상을 확인해보니 물건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명칭실어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어증 환자에게 명칭실어증이 동반된다. ‘커피’라는 단어를 언어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완전언어상실증과 같지는 않겠지만 약간이나마 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은 체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칭을 몰라서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1996년에 이메일에 사용되는 @ 표시를 처음 봤다. 당시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삐삐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오직, 일부 PC통신 유저들만 이메일을 사용해봤던 시기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관련 도서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 @ 표시를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기호 하나 모르는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점점 @ 표시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이나 각종 유인물에 @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다가 문장의 중간에 @ 표시가 나타나면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고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고약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기호가 기억되지도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책만 덮으면 언제 그런 기호를 봤냐는 듯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양도 기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 바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 기호에 ‘골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이 기호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책을 읽을 때 장애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름 즉, 명칭을 알 수 없는 기호를 접하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텍스트 흐름이 끊긴다.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만나면 머릿속에 블랙홀이 열리면서 그 동안의 읽었던 모든 맥락과 지식이 빨려들어가고 오직 순수한 뇌만 남는 것 같았다(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상태를 마냥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훈련되면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호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 기호의 명칭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뿐 뒤돌아서면 그런 기호가 있었는지도 거의 바로 까먹는다. 이름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첫 번째 지식은 바로 이름을 아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생각의 흐름에 끼어들 때 우리는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앞의 사물을 정신에 정위치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한 순간 자신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라캉이 언급한 바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누빔점이 없어 끊임없이 맥락을 바꿔가면서 논리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 모르게 순식간에 몽골초원으로 이동시킨다면 그는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주위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삶의 맥락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남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맥락을 어찌어찌 복구하거나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명칭실어증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기억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어증에 걸렸을 때 갑자기 찾아올 혼란과 당혹감 같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느끼던 와중 별안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자꾸 뜬금없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해서 시작한 고찰이었는데, 솔직히 여기에 어떤 마법같은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의식이 신비로운 정답을 알려준다는 식의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고 명칭실어증으로 인한 답답함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왜 내가 그 사례를 계속 다시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본 경험을 내 무의식이 완전언어상실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가졌던 그 막막함과 고역감은 결국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답답함처럼 갑자기 언어적 맥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란 것이 명칭실어증을 유추하면서 가졌던 그런 류의 답답함과 당혹감을 한껏 늘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내가 완전언어상실증 비슷한 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손상이 진행된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정도 비슷한 경험일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전개하다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경험을 완전언어상실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개인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 고찰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