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뭔가요?
공부가 굉장히 중요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머니가 극성이셨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전방위적으로 받아 왔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라고 압박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공부를 하라고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안한다. 그런 아이들도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공부를 하라고 해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왜, 강아지를 교육시킬 때, 강아지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바로 즉시 혼을 내야한다. 그렇지 않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혼을 내면 강아지는 자신이 왜 혼을 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일이 벌어진 즉시 혼이 나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혼을 내는구나 하고 감을 잡을 수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강아지는 무슨 일로 혼을 내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런 경향은 더 심할 것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혼을 내더라도 아이가 잘못이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해야 혼나고 나서 행동을 바꾸고, 혼난 것에 대해서 건강하게 소화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당연히 아이는 그냥 내가 미워서 혼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시험을 봐서 성적을 매기고 성적에 따라서 체벌도 가해지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시험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당시 내가 알기론 시험이란 학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그 들은 것을 적는 것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알고 있는 것을 작성하고 나오면 되지 무슨 공부를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물론, 시험은 완전히 망했다. 하지만 그런 망한다는 것도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냥 시험을 보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그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일 무렵, 시험을 대하는 나의 해맑은 태도가 친척들 사이에 퍼졌다. 시험 당일에 통학길에 사촌형을 만났는데 사촌형이 나의 유난히 밝은 얼굴에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봤고, 나는 시험이 있어서 일찍 끝나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사촌형은 살짝 흠칫했던 것 같은데, 다시 물어보길 시험 보는데 부담은 없냐고 물어봤고, 나는 정말 순진무구한 얼굴로 왜 부담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험결과와 함께 나의 순진무구함이 자신감이 아니라 ‘개념없음’으로 확증되었고 친척들은 이때의 내 태도를 지금까지 이야기 하고 있다.
너무 성적이 안 좋으니, 어머니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혼내고는 과제를 내주었다. 교과서의 앞에 3페이지를 외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외운다.’, ‘암기’와 같은 말들을 처음 들어봤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그 뜻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3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전부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3페이지를 토씨하나 빼지 않고 전부 암송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중간 중간에 아직도 다 못했느냐고 물어봤지만, 그럴 때마다 야속했다. 잔뜩 혼이 나서 위축된 상태에서 과제를 받았기 때문에 얼어있었고, 처음 해보는 암송이어서 그 막막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3페이지나 암송하는 것이 너무 버거워서 속으로 “엄마가 이걸 진짜로 하라는 의미는 아닐 거야.”라고 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눈치를 보며 있었다. 머릿속에 3페이지 분량의 정보를 집어넣는다는 행동이 불가능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2~30분에 한 번씩 아직 안 끝났냐고 물어보니 독촉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왠지 억울했고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교과서를 외우기 시작했다.
암송을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토씨가 자꾸 틀리게 된다. ~을, ~는, ~이 따위가 자꾸 헷갈리게 된다. 또, 머릿속에서 해당 문장을 새롭게 조합해버리기 때문에 문장의 내용은 같아도 문장 자체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처음 시도해보는 암송에 3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토씨가 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의 암송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속 언제쯤 끝나냐고 물어보다가 잠이 들었다(당시 어머니는 체력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아무리 암송을 해도 토씨가 틀리는 상황에 절망하면서 끊임없이 외웠다.
집안에 적막함이 돌고 밖에서는 즐겁게 노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가운데, 땅거미가 지면서 책을 암송하고 있던 나는 서러움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는 잠들었고 나는 기약없는 암송을 하면서 끊임없이 토씨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머니가 깨어났다. 나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다 외웠다고 이야기했고, 어머니 앞에서 암송을 했다. 중간에 토씨가 틀렸다. 나는 얼굴이 시뻘개졌고, 울면서 다시 외운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완전히 억울한 상태였을 것이다.
결국, 암송하는 것은 끝났고 난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이미 친구들은 다 들어가서 재미있게 놀 상대가 없었다. 잠깐 혼나고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책만 외워서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리고 과제가 끝났다고 이야기하면서 나를 내보내던 어머니의 표정이 머리에 깊이 남았다.
그 이후 나의 시험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어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단, 산수는 계속 시키고 공부를 했다. 하지만 다른 과목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성적을 받아와도 국어하고 산수만 어느 정도 받아오면 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다 같이 수업을 듣는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내용들을 친구들은 어떻게 맞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처음 생겼다. 특히, 체육 같은 과목은 수업은 없고 운동만 했는데 어떻게 친구들은 체육 시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첫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책에 나오잖아.”
충격이었다. 교과서는 선생님이 교과서를 피라고 할 때만 펼쳐서 보는 것 인줄 알았지 거기에 있는 내용이 시험에 나온다는 사실은 그 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시험공부를 하려면 책을 펼쳐서 해당 내용을 봐야 한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험문제를 맞추기 위해서 책을 암기한다는 개념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시험이라는 목적이 분명해지자 책을 암기하는 이유와 방법도 명확해졌다. 물론, 이로 인하여 시험이 아니면 책을 암기하지 않게 되었지만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책을 암기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대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이해한다. 아마도 어머니가 외우라고 했던 것은 시험공부 하듯이 암기하고 어머니가 책을 보면서 물어본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혼자서 전문을 암송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어머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공부를 한다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포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암기보다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숙련이 필요한 과목이고 나중에 하기 어려운 산수는 계속 시켰지만 그 외의 과목에 대해서는 공부하라고 전혀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훈 : 때론, 공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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