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 특히, 어떤 전문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은 매우 복잡한 개념을 구현하고 있어서 외국어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 상당한 배경지식과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일 것이다.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는 메디컬 드라마라서 대사의 많은 부분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전문 의학용어다. 그래서 영어로 직접 듣거나 한국어 자막으로 읽거나 전혀 모르는 용어라는 점에선 똑같다. 하지만 이 모르는 용어라도 한국어 자막으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는 드라마를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자막 없이 영어로 듣게 되는 순간 갑자기 너무나 낯선 용어가 되어 버린다.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에피소드의 내용과 캐릭터 대사들에 매우 익숙해진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자막이 사라지면 안 들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추론한 바가 있다. 즉, 자막에 대해서 익숙해진 나머지 영어로 들은 것이 머릿속에서 자막으로 동시 재생이 되면서 그런 착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는 새로운 의문점이 생기게 되는데 왜 전부 아는 단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드라마를 알아먹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언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선물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처음 생긴 의문은 이것이다. 닥터 하우스에서 현란하게 구사되는 전문용어들이 어차피 모르는 단어들인데 왜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에는 괜찮고 자막 없이 영어로 볼 때에는 너무나 낯설고 정신을 사납게 하는 단어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이때의 관심사는 어차피 모르는 것은 똑같은데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는 마치 내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자막 없이 영어로 들을 때는 그 단어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그저 엉망진창이었다.
처음 이 문제를 궁금하게 여겼을 때에는 모르는 단어를 한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는 외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언어적 체계가 있고 그러한 언어적 체계 안에서 단어들이 설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일정부분 사실이고 추후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니 외국어를 몰라서 생긴 부분과 별도로 고민해볼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용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다. 관련 배경지식을 알고 실제로 적용해보면서 힘들게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겨우,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 수많은 전문용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모르고 넘어갈 때는 그렇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단히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안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등의 수많은 질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막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뜻 모르는 단어들을 들으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드라마를 즐기는 것일까? 다행히 상당히 빠르게 이것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었다. 드라마 자체가 어려운 의학용어를 쓰기 때문에 당연히 의학에 문외한인 일반 시청자들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 시청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남발하면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드라마 제작자는 일반인들이 즐겁게 시청할 수 있도록 영상과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 의학용어가 무슨 의미인지 꼭 필요한 부분은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바이러스가 신체 곳곳에서 퍼지는 영상, 기생충이 세포 조직을 넘나드는 영상 등을 직접 제공하여 시청자들이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당 의학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모르는 의학용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본다고 내가 그것을 이해했을까?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디서 생겨나 어떻게 사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궁금증이나 답답함 없이 넘어간다.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문제를 왜 제시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현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만 맥락에 따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상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수준의 이해를 갖추어야 하거나 또는 그러한 부가 설명을 붙여서 말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 번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넘어간다.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무심하게 이해하거나 단정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상다반사인 일들을 갑자기 문제제기하는 것은 실은 나의 의문은 반전된 의문이기 때문이다. 만일, 영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황색의 기류가 퍼지는 영상 없이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냥 드라마의 맥락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드라마를 보려고 한 것이지 환자의 병을 토론하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드라마를 끌 것이다. 그런데 그 영상이 들어감으로써 시청자는 문제의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진진하게 여긴다. 영상으로 인하여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여기서 비약하여 한 가지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뜬금없게도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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