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을 정보로 인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연한 이야기라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인간이 오감으로 주위의 사물들과 교감한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인간은 그 오감으로부터 주입되는 정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자취하던 방의 위층이 옥상이었고 그 옥상에는 세탁을 할 수 있도록 세탁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세탁기를 돌렸는데 그럴 때마다 세탁기는 일정한 주기로 쿵쿵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그 쿵쿵 소리는 낮게 그리고 힘있게 울리면서 내 방과 공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규칙적인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발생하는 불규칙한 소음이라면 어지간히 큰 소리 아니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규칙적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규칙적인 주기를 머리가 자동으로 인식하고 그 주기에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쿵 소리를 마음속으로 따라하면서 다음 쿵 소리가 규칙적인 주기를 준수하는지 계속 신경쓴다. 그래서 쿵 소리가 들린 후 다음 쿵 소리까지 긴장이 발생하고 계속 쿵 소리를 따라간다. 쿵 소리에 신경쓰느라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보도를 걸을 때 바닥에 깔린 규칙적인 타일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그 타일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그 규칙성이 준수되는지 신경쓰면서 그 타일 위에 걷는 내 발도 규칙성을 갖추면서 걷게 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약간 강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세탁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활동이 강제로 정지되고 그 소리에 몰두하게 된다. 공부는 당연히 못하고, 글을 쓰거나 게시판을 둘러보는 등의 활동도 모두 하기 힘들어진다. 이 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크게 음악을 틀거나 매우 쉽게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을 시청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회피하거나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종속된다.


사람은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눈앞에 절벽이 있는데 아무 걱정 없이 그 정보를 무시하고 절벽 밖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눈앞의 절벽을 인식하는한 그 절벽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절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절벽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지 거기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 절벽 밖으로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할 의도 없이 태연하게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생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뛰어내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정보에 반응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방식들은 매우 다를지라도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절벽이 있기에 절벽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온갖 태도가 나온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그 핵심에는 반드시 절벽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절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이 그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정보 종속성”이라고 지칭한다. 왜냐하면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마음은 정보가 제공되면 반드시 그 정보와 함께 일어나서 그것에 얽혀 전개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정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감으로 지각된 사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면에서 올라온 마음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 종속성은 당연한 것들로 나타난다.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고, 맛있는 것을 보면 침이 꿀떡 넘어가면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나면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모두 그저 그것과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똥을 만나면 역하고, 향기로운 향에는 이끌리듯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이 과정을 의식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노력해보자. 노력해서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마다 눈이 썩는 것 같고, 맛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역겹고, 헤어진 옛 연인을 볼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다시 처음부터 사귀듯 하게끔 노력으로 할 수 있는가? 보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게 된다면 진화의 과정에서 일찍 탈락했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생각해보면 그 과정의 지독함과 지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평생 그냥 참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맛있는 것을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이 역겹게 느끼게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그만둔 순간부터 즉시 식습관은 원상복귀한다. 만일, 식습관을 제어해서 맛있는 것을 맛없고 역겹게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이어트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식증이라는 병적인 상태로 몰아넣을 정도의 압력이 필요하고 거식증에 걸린 순간부터는 삶이 다이어트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당연히 쉽게 되지 않는다. 


정보에 반응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은 인간의 생명체로서의 기능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또한, 경험이라는 사건을 통과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저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마약을 찾거나 마약을 찾아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에 중독되면 그 자극적인 경험은 그 때부터 끊임없는 갈증과 갈구를 낳고 일상생활 내내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경험이 없었다면 마약은 그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중독된다.”라고 하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경험된 방식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똑같은 상황,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는 좋아할 수 있고 누구는 싫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보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미 내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맛있다고 확립된 음식을 맛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이미 싫어하고 구역질 나는 똥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입맛대로 정보에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통해서 실제 그것을 체득하게 되고 해당 정보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델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을 쉽게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것일 뿐, 먹어보지 않은 것이라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일단 맛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렇게 부정할 수 없다. 마약에 중독되기 전이라면 삶을 건전하게 꾸려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회피할 수 있지만, 마약에 중독된 후라면 회피가 불가능하고 그저 감내해야만 한다.


마약이나 낭떠러지와 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보 종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은 그러한 정보 종속성의 향연이다.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상대는 그 호의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상호성의 법칙, 스스로 한 행동의 일관성을 스스로 깰 수 없게 되는 일관성의 법칙, 군중심리나 외모 그리고 권위 등에 종속되는 인간의 행동 같은 것도 정보 종속성으로 설명이 된다. 여기서 제시된 모든 법칙은 이미 법칙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 개인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정보 종속성이라는 개념은 꽤나 유용하다. 왜냐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잘못된 해법을 피해서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구역질나는 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똥을 피해 다른 길을 가거나 똥이 그 길목에 놓이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평소 좋아하던 맛있는 빵집이나 음식점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빵이나 음식을 먹고 자제력 없는 자신을 탓했다. 이건 마치 똥을 보고 구역질 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똑같다. 음식점이나 빵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식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자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열심히 외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다시 불행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좋아하는 음식점과 빵집이라는 정보가 나타나면 거기에 그냥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 종속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똥을 피해서 가듯이, 맛있는 음식점이나 빵집을 피해서 다녀야 한다. 정보에 노출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곳을 피해 다니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음식점이나 빵집을 보면서 식욕이 돌았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똥을 향기롭게 느끼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비하를 초래하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보다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상황을 전부 피할 수 없다. 항상 사건은 일어나고 세상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학원을 빼먹고 PC방으로 놀러가는 아들을 보고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동일한 상황에서 계속 화가 치민다. 무섭게 호통치면서 질타하는 상사에게 두려움이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그 상사가 입만 열어도 끔찍하고 두려워진다. 장시간의 노동 끝에 막걸리 한 잔에서 즐거움을 찾는 습관이 있다면 노동 후에 항상 막걸리가 그리워진다. 트라우마가 되었든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 되었든 한 번 결정된 것은 변하지 않고 반복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어서 피해갈 수가 없다. 정보 종속성은 이런 상황에도 도움이 된다.


정보 종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저절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의도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화나는 상황에 처하면 화가 나게 되고, 즐거운 상황에 처하면 즐거운 기분이 된다. 어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날아갈 듯이 행복했는데 다음날 삶의 목표가 없어졌다는 공허감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오늘 신기했던 장난감은 내일 바로 싫증나고 오늘 첨단 유행을 달렸던 옷들은 다음 시즌 유행에 뒤쳐진 퇴물이 된다. 이 모든 변덕에는 “나 자신”이 없다. 내가 화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에 저절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한다. 내가 너무 유행을 좇고 있거나 탐욕스럽거나, 소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려고 자신의 탐욕을 꾸짖고 소심함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보 종속성은 그런 자책이 똥의 냄새가 향기롭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애시당초 잘못된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연관관계를 만들지 않게 되면 많은 감정들이 날아간다. 죄책감, 자책감, 한심함, 스스로에 대한 경멸, 자랑, 자만 등이 모두 그저 반응하는 것에 스스로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따라붙는 2차적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이번엔 최면(hypnosis)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최면도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사해주는 바가 많기 때문에 꼭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최면이라고 하면 정신을 잃은 사람이 최면술사에게 조종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평소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답하거나 무척 오래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무언가 신비하고 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최면을 통하면 사람들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특정 암시를 심어놓으면 신호에 맞춰서 다른 사람을 암살하게 한다거나 기밀을 빼돌리게 하는 등 사람을 도구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실제로 이러한 내용을 전개한 영화나 드라마도 상당수 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꼭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최면에 걸리지 말아야 하면서 속으로 최면을 걸리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본다. 혹은, 최면에 걸린 척 하면서 적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다행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최면은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는 최면술사를 경계하는 것이다. 실수로 최면술사의 음모에 빠지게 되면 최면으로부터 저항하면 될 것 같다. 가령, 최면을 걸 때는 일정하게 깜빡이는 빛이나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진자 같은 것을 보게끔 하는데 그럴 때 눈치채고 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척 하면, 최면술사가 이제 나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몸이 이완됩니다. 몸이 편안해집니다.”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에 맞추어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척 하면 최면술사를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최면의 존재를 모르고 멋모르고 휘말릴 수는 있어도 최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경계하면 최면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최면은 무대 최면의 일종이라고 한다.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방식의 최면은 매우 오랫동안 있어왔고 조금 정형화된 최면의 방식이다. 최면은 무대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프로이트 시절부터 심리치료의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보다 나은 치료를 위하여 최면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왔다. 당연히 그 이론이 정밀해지고 기술이 발전해왔다. 현대에 와서 밀턴 에릭슨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최면은 정형화된 형식을 벗고 그 근본적인 원리를 응용하여 일상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그것을 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대의 최면은 보통 데이브 엘먼이 정의한 아래의 내용과 같이 소개된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여 받아들일만한 선택적 사고를 확립하는 것”


세상은 다양한 메시지를 보낸다. 메시지는 선언이 될 수도 있고, 정보가 될 수도 있고, 의견이 될 수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러한 메시지가 수용되면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과를 손에서 놓으면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새삼 당연한 정보를 수용하게 되면, 그 때부터 이 정보에 어긋나는 것은 다른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현실에서 누군가 사과를 손에 놓아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시작하면 속임수가 있다고 믿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염동력이라는 것을 설정할 수 있다. 요컨대 받아들여진 진실은 최대한 고정되고 그 외부를 수정하게 된다. "개인의 인권은 존엄하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비판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회사원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회사를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메시지가 개인에게 수용되는 순간부터 메시지는 그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지가 사람들 속에 아무런 여과없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수많은 메시지 속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여과해줄 필터가 필요하다. 


메시지를 여과해주는 필터가 바로 의식의 비판적 사고다.  이 비판적 사고는 사려깊은 숙고를 통해서 작동할 수도 있고, 단순히 슬쩍 보고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의 수준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개인의 상황과 맥락, 사회문화계급적 상황,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서 결국, 해당 메시지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은 자신을 사회적 메시지로부터 적절하게 보호하고 일관성과 개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간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라는 용어는 무척 합리적인 사고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비판적 사고의 수준은 깊은 숙고에서 본능적이 직관적인 판단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개인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내부로부터 그냥 그대로 나오는 우리 자신 그 자체다. 그래서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심하거나 못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인종차별주의자는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말하는 메시지를 적극 수용한다. 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해당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먹어야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등 분열된 메시지를 수용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는 까닭은 최면이 보통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하는 것들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게끔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 극복, 다이어트, 편식하는 습관 교정 등에서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장애물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즉,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는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실천해볼 수 있다. 햇빛을 본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고 등등 여러가지를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기 파멸적인 내용을 주로 메시지로 수용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우울해질 근거를 찾게 된다. 당연히 그런 계획들을 실천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게 된다. 하지만 주위에서 자신이 변하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억지로 흉내를 내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성공할 수 없다. 계획한 긍정적인 습관은 계속 좌초되고 그 좌초됨으로 인하여 다시 절망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비판적 의식이 문제가 되므로 을 우회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적 사고는 메시지 그 자체를 확고하게 굳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면 메시지가 수용된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메시지가 온전히 수용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 만일, 최면을 통하여 우울증 환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킨다 하면,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본인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는 성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기존의 성향이 다시 튀어나오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우게 된다. 따라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키면서 기존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지 않는 것은 무시하게 하는 확증편향적 사고를 선택적 사고라고 하는데, 그러한 확증편향이 발생하여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만 그 최면에 의해서 심어진 긍정적인 메세지가 온전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최면은 심은 메세지에 대한 믿음을 구축하여 선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선택적 사고를 확립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최면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보통은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피시술자의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여 원하는 선택적 메시지를 심는다. 즉, 무대최면에서 자주 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최면에 잘 걸리지 않아 트랜스 상태로 유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전이라면 최면을 걸 수 없었겠지만 현대 최면은 구태여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으려고 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한 번에 하나만 집중할 수 있다. 의식의 초점 아래에 있는 것이 의식의 대상이 되고 그 외의 다른 정보는 배경으로 받아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만 대상이 된다. 소매치기들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의 속성을 이용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서 소매치기를 한다. 한 사람이 목표가 되는 사람과 먼저 부딪히거나 시비를 붙어서 그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사람의 의식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처리할 수 있으므로 시비를 붙거나 강하게 충돌할 경우 모든 주의가 시비를 붙은 사람이나 충돌에 쏠리게 된다. 그 때, 다른 사람이 몰래 다가가 지갑을 집어간다. 평소라면 소매치기가 지갑을 집어가는 것을 의식했을 테지만 주의가 다른 것에 쏠려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거나 뒤늦게 눈치채게 된다. 


현대 최면의 방법은 소매치기들보다 교묘하게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는다. 가령, 낮은 자존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하면서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보통 자학에 빠진 사람들은 그 말을 빈말이나 거짓말로 여기면서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면 어떨까? 밑줄을 친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탁자를 두드리거나 손바닥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강조하면서 말한다.


당신은 1990년에 착하고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표면적인 메시지는 이 사람의 부모님이 착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므로 이 사람이 부모님을 좋아한다면 이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이다. 이 사람의 의식은 표면적인 메시지에 주목하여 그것에 집중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의식을 우회하여 그에게 전달된다.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할 수 없으므로 효율이 좋지는 않지만 반복을 통하여 의식을 우회하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면 그 사람은 약간의 자존감 회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척 단순화된 설명이다. 


이제 현대 최면의 정의를 살펴보았고, 현대 최면의 정의를 통하여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도 최면이 어느 정도 가능함을 간단하게 단순화하여 설명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최면에 대해서 살펴보니 영감을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의식을 우회하여 전달되는 메시지라는 것이 과연 최면만 있는 것 같지 않고 의식과 수용이라는 주제도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최면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가 되면, 그 동안 여상하게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던 많은 것들이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말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신이 몰랐던 것들이 갑자기 말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강력한 공격성이나 집착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 많은 말들이 내 맘속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이 언어화되기 전에는 어떻게 존재했는지 알 수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 대화를 할 때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관찰해보면 할 말이 그냥 떠오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인사말, 하고 싶은 농담이나, 오늘의 토픽 등등 하나하나 갑자기 튀어나온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튀어나온 말들을 그대로 입으로 옮겨서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 말을 우선 속으로 되새겨보면서 큰 화를 불러올 말을 걸러내려고 한다. 


사실, 말뿐만 아니라 글도 대부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소설 작가들의 창작 이야기를 보면 글이란 써지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작업하는 양상을 보면 이렇다. 우연히 좋은 소재와 영감이 떠오르면, 바쁘게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적어낸다. 그리고 작가는 첫 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글을 읽고 그 글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얻고 또 영감을 얻어 자신이 쓴 글을 또 발전시킨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찾아내고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이를 다듬어 보고 다시 독자가 되어 글을 읽고 다시 다듬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글은 좋아진다. 결국, 좋은 작품은 뛰어난 예술적 창의성과 그것을 다듬고 그로 인하여 다시 영감을 얻는 과정의 수많은 반복에 다름 아니다. 이 때, 소설가는 결국 예술적 창의성이라는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영감의 원천을 얻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시나 소설 등의 글은 자리에 앉아서 끈덕지게 스스로와 교류하면서 쓰는 것이지만 대화는 조금 다르다. 시간에 쫓기고 즉각적이다. 이야기할 화제를 고르거나 말을 다듬을 시간이 글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실수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말이 빙빙 돌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서로의 말에서 영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면서 조금씩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덕분에 대화는 대화 당사자들이 서로 잘 알고 있는 또는 공감하고 있는 항상 주변에 현존하고 있는 것 또는 상황을 위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볍게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날씨로 공감을 하고 같이 겪은 즐겁고 힘든 일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면서 공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대부분의 대화의 역할이다. 물론, 그런 공감 찾기 과정을 뛰어넘어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두명에 불과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는 소소한 농담 따먹기와 주변에 대한 공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공감할 수 없다면 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상적인 대화란 대부분 대화 당사자들이 직접 마주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공감 정도에 국한된다. 


이런 대화들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와 저 친구의 관계가 이 정도에 불과하니 말을 조심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겠다고 계산하고 판단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냥 본능적으로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옳든 틀리든 규정한다. 자신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산변잡기로 주변의 공감할만한 것들을 던지다 보면 대화 당사자들은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금방 파악된다. 공감하는 것들이 많으면 서로 잘 통하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잘 안 통하는 사람일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 중에 조금 내향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쩌다 대화를 해본 결과 그 친구의 대화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시카고에서 유행하는 피자를 이야기하면서 웃었는데, 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멀뚱멀뚱하게 있으니 그 친구는 다급히 자리를 파하고 가버렸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모든 말들은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이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서 입에 붙은 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말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나 이 자리에 없는 자신만의 무엇을 말하지 않고 눈앞에 있거나 이미 모두에게 중요한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그것을 지칭하는 말들은 대부분 대명사이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사람들은 이름을 회피하고 그저 ‘그’라고만 지칭하는 것이다.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은 설명도 대부분 시연 위주로 한다. “그가 이렇게 했어.”라고 말하면서 몸으로 그의 행동을 보여주거나 표정을 흉내내거나 한다.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간단하고 바로 얼마 전에 보고 들었거나 지금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언어는 그 모든 것에 있어 조금은 부가적이다. 가령, 내가 자주 사용하는 컵이 다른 사람의 컵과 비슷해서 서로 계속 그것을 교환하면서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게 A의 컵이야. 이게 내 컵이고, 비슷하지, 알고보니 비슷한 컵을 서로 계속 교환하면서 썼어!”라고 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서 컵 두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때, 실제의 컵이 언어에 엮이면서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을 끈끈하게 이어서 서로 연관된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임과 동시에 언어화되어 존재하게 된다.


일상적인 대화를 관찰하다보면, 어떤 사물, 어떤 상황, 어떤 인물들이 분류되면서 언어화되는 것을 본다. 사물은 간단하다. 대부분 다른 것과 구분되는 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어떨까? 직장 상사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직원들을 트집잡고 군기잡고 소리지르면서 상황을 짜증나게 만들면, 모든 직원들은 휴게실로 몰려가서 그 상사를 씹는다. 이 때, 그 복잡한 상황은 단순히 “그 상황”이라는 말로 하나의 개체로 묶여버린다. 그 상황을 겪은 모든 이들이 그것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러한 개체를 간단히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직장상사의 이야기는 단위를 어떻게 쪼개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이야기로 변질된다. 직장상사의 분노의 원인으로 이야기가 좁혀지면 화살이 그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이나 그 직장상사나 내리갈굼의 동일한 피해자로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 직장상사의 분노를 유발시킨 다른 직원에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다. 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직장상사를 규탄하는 것으로 상황이 묶인 것은 그 직장상사에 대한 기존의 쌓여온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직장상사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이 단위로 쪼개지고 그 단위에 따라서 언어화 되는 것은 너무나 자동적이고 익숙한 일들이다. 다양한 상황과 사물들이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단위로 쪼개어져 인식된다. 앞서, 언어가 구사되는 법 01에서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전문 용어를 단순히 몇가지 키워드가 일치하는 영상을 통해서 매칭되고 그것을 그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뜬금없이 비약을 하게 되었다. 즉,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그러한 비약이었다. 그렇게 의심하게 된 것의 배경이 이 일반적인 대화에 대한 관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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