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너무나 힘들게 꼬여가고 있을 때, 매일 밤마다 악몽이 나를 엄습했었다. 검은 개의 악몽이었는데 불길한 검은색이라는 점과 개꿈이라는 점에서 꿈에서도 최악이었지만 깨어났을 때도 인생의 방향이 꼬일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여러모로 밥맛없는 악몽이었다. 원래, 꿈이란 것은 깨어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 기억이 희미해지는 법인데 대부분 악몽이 동일하게 검은 개와 함께 하는 꿈이었고 거의 매일 이 꿈에 시달리다 보니 점점 꿈의 디테일한 부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꿈의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불길한 검은 개가 검은 오라를 내뿜으면서 무섭게 쫒아온다. 공포와 불안, 마비된 이성으로 눈을 감고 도망간다. 공포가 심해 눈을 뜨지 못한다. 검은 개가 쫒아오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땅이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늪에 빠진 것 같이 발이 무겁고, 유사에 빠진 것 같이 나락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며,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도망가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은 항상 검은 개가 나를 덮치면서 끝난다. 


이 악몽은 기분을 너무 우울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악몽을 꾼 날이면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하여 닥치고 쾌락에 몰두하며 뇌를 정지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몽이 3년이나 반복되다 보면 그것을 들여보게 된다. 매번 꿈속에서의 공포와 불안, 절망감을 안고 깨어나자마자 꿈을 관찰하다 보니,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꿈이 완전히 말이 안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개를 본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았는데 개를 볼 수 있었을까? 또, 현재 사막에 있는지 구덩이에 빠졌는지 늪에 빠졌는지 보지도 않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 사실, 꿈이 엉망진창으로 모순되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꿈의 차이점을 통해서 몇가지 영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또, 악몽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문제를 파고들었다. 


현실은 모든 것이 정합적이고 총체적이어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 굴뚝 아래에는 불을 붙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 대부분 옳다. 모든 것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보통 하나를 보면 그 외 나머지도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그러한 정합성과 총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꿈에서의 인식작용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즉, 꿈에서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어떻게 눈을 감고 있는데 개를 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의 고유수용감각과 사물의 모습이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사물이 보이는 것이다. 개가 있고 그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개를 보는 것이 현실의 논리라면 꿈에서는 개와 눈을 감는것이 각각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는 증오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주어지면 증오스러운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된다. 반대로 평소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과 추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주어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추하게 느껴진다. 즉, 꿈에서는 정보가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그 주어진 정보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는 부분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올리버 색스의 신경증 환자들 사례를 보면서, 환상과 환청이 바로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가 모자로 보이는 남자의 정신상태가 그랬다. 눈  앞의 노부인이 아내인 것도 알지만 동시에 모자라고 인식된다. 그냥 모자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내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내인데도 모자인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자를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주어진 정보에 따라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끌려다닌다는 점이었다.


주어지는 것을 단순히 정보라고만 말하는 것 조금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주어지는 이 정보는 어떤 행동의 방향성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상황을 조율하지 않는다. 즉, 아내이고 모자이기 때문에 아내인지 모자인지 분별하거나, 잘 모르겠으면 아무것도 안한다거나, 또는 그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눈앞의 모자를 쓰려고 할 뿐이다. 모자라는 정보는 반드시 그 모자를 당장 써야겠다는 충동을 같이 가져온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빅브라더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진 의문은 이 빅브라더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기듯이 말이다. 하지만 내쉬는 환상과 환청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분석해야만 했고 동시에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즉, 눈앞에 아내를 모자로 보는 순간 그 모자를 써야겠다는 강력한 충동이 따른다. 내쉬가 본 빅브라더도 끊임없이 내쉬로 하여금 암호를 해독하고 이것을 비밀로 유지하게끔 하는 충동이 발생한다. 실제 임상에서도 환상과 환청이 증세로 나타나면 그 사람을 거의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환청은 극단적인 이상행동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아 매우 주의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사력을 다해야만 겨우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 


나의 악몽도 결국, 주어진 정보들의 칵테일이었다. 처음에는 검은 개가 쫓아와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게 그렇게 논리적인 선후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즉, 그저 같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 꿈은 일종의 환상이고 꿈에서 느낀 공포와 불안은 바로 환상을 본 사람들이 느끼는 충동처럼 나를 사로잡는 충동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정보와 그에 따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충동이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꿈이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만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괜찮은 사람도 어느 순간 이상한 판단을 내리거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이켜 생각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경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았다거나 착각했거나 하고 말하면서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지만 명백히 정상인들도 그러한 주어지는 정보와 충동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더 미세하게 들어가게 되면 나는 내가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고 반응하는지 모른다. 그저 주어질 뿐이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어떻게 사과라고 인지하냐고 물어본다면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사과라고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 그저 ‘사과’라는 이름과 맛과 향이 떠오르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사과는 강력한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백설공주처럼 잠들게 된다고 믿는다면 사과를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과를 먹이려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 증명하면 되겠다. 하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람처럼 사과를 모자로 착각한다면 그는 의심없이 사과를 머리에 쓰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을 살피게 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있는지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짱구를 굴리면서 스스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양 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게 여기도록 주어진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유라는 말은 허황되게 느껴지고 주체라는 말은 꿈속의 망상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서 아니면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들에 우리는 끊임없이 꼭두각시의 춤을 추게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한 위험성은 항상 우리 곁에 상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지는 것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자유라는 것이 제한적으로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정보가 주어진다. 컵을 보면 컵이 떠오르고, 컴퓨터를 보면 컴퓨터가 떠오른다. 발 아래에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으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절로 나타나고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 무척 어렵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의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해야하고 피해야 하는지 주어지기 때문에 현실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매순간 그러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취사선택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주의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고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견본이 되어줄 것이다. 이들은 자동차 추돌사고, 대형 인재를 일으키는데, 한 순간의 주의력 부재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까딱 방심하면 옥상과 낭떠러지를 무시하고 밖으로 한걸음 내딛을 것이고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해 탐욕으로 인한 범죄가 만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어지는 것들이 우리의 자유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이 주어지는 것들이 적절하게 작동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보다 안정적인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주어지는 것들을 그저 무시하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어지는 것들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그 자동이라는 것이 우리가 쌓아온 삶의 개인사와 시공간적 상황, 시대정신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일단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앞에 무엇이 나타나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 의식에 주어지는 것에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주어지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어진 것을 대상으로 다시 자동으로 새로운 것이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충동을 참아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주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영원한 연쇄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 충동은 점점 약해지고 그 주어지는 것들은 점점 지혜롭게 변하게 된다. 즉, 생각을 정련하는 셈이다.


주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가장 올바르고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행동을 멈추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정련해야만 한다. 다행히 우리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비극에 빠진 것이 아니고 사물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고 충동을 제어할 수 있다면 충동을 흘려보내고 생각을 지속하여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마주칠 때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검증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지 물어보고 주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환상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환상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을 멀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쉬처럼 잠시 멈춰서 생각을 조금 더 끌어내면 된다. 연인이 또래의 이성이랑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봤다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연인이 바람을 핀다.’일 것이고 당장 연인을 추궁하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생각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생각이 옅어지면서 여러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새롭게 주어지는 생각들은 연인의 친한 친구나 선배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업무상 접대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게 하다 보면 가장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생각이 수렴되고 이를 단계적으로 검증하여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가장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멈추고 그만두면 된다. 비록 우리가 주어지는 것들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조작되지만 우리에게는 주어지는 것들을 참아냄으로써 그 주어지는 것들을 극복하고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생각과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멈추고 싶어서 멈추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만이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살펴 보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여기는 그것은 내가 하고 싶도록 밑도 끝도 없이 주어지는 프로그래밍처럼 느껴진다. 또, 내가 멈추고 싶어서 멈추지만 역시 그것도 내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면 자유는 불가능할 것 같고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제한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것은 충동을 가라앉히고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자유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날 때, 그것을 당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지그시 바라보며 충동은 흘려보내고 생각은 지그시 바라보는 그러한 자유다. 이 자유는 느리고 답답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자유지만, 인간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전체를 통해 얻어낸 최고의 지혜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명의 희롱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설적인 자유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악몽은 결국, 수면무호흡 때문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숨이 부족하니 몸은 내가 뛰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몸이 뛰고 있어야 하는데 몸은 잠자리에 누워있으뿐이고 몸이 무거우니 사막이나 늪에 빠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당시 상황의 암울함과 고민과 겹쳐지면서 검은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만들었고 이 수면무호흡과 악몽은 내 삶의 질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려 정신적 좌절과 불안을 심화시켰고 이는 다시 과식과 잘못된 생활습관을 심화시키면서 수면무호흡이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수년간 동일한 내용의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악몽의 연쇄를 극복하고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도 공포와 불안 좌절에 매몰되는 것을 멈추고 자학적인 충동을 흘려버릴 수 있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끌려다니지도 않고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였다. 조금만 빨리 깨달았으면 악몽의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 알파벳을 외워 두면 의외로 소소하게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스 알파벳을 실생활에 언어에 쓰지는 않지만 표기법, 음성기호, 각종 수식에 사용하는 변수 등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구권의 학문에서는 수식의 변수나 지표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해당 문자의 대문자와 소문자를 알고 읽는 법을 알아두면 그러한 문서를 읽는 것에 은연중 도움이 많이 되고, 언어학이나 문자 관련 자료를 읽을 때는 거의 필수적으로 알아두어야 한다.


그리스 문자 암기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다. 


외우려고 하기 보다는 카드를 보면서 한번씩 인상에 새기면 하루에 5분 정도로 3일이면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스문자.apkg



Anki 파일의 구성 내용


Anki에서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 문자 24개 각 문자별로 대문자와 소문자 그리고 읽는 법을 엮어 1개씩 노트를 만들어 총 24개의 노트를 만든다.


아래는 노트번호-대문자-소문자-읽는 법 순으로 배열했다. 


01 Α α alpha 알파

02 Β β beta 베타

03 Γ γ gamma 감마

04 Δ δ delta 델타

05 Ε ε epsilon 엡실론

06 Ζ ζ zeta 제타

07 Η η eta 에타

08 Θ θ theta 세타

09 Ι ι iota 요타

10 Κ κ kappa 카파

11 Λ λ lambda 람다

12 Μ μ mu 뮤

13 Ν ν nu 뉴

14 Ξ ξ xi 크시

15 Ο ο omicron 오미크론

16 Π π pi 파이

17 Ρ ρ/ς rho 로

18 Σ σ sigma 시그마

19 Τ τ tau 타우

20 Υ υ upsilon 업실론

21 Φ φ phi 피

22 Χ χ chi 키

23 Ψ ψ psi 프시

24 Ω ω omega 오메가



각 문자별로


대문자, 소문자, 읽는 법을 각각 빈칸으로 처리하여 각 노트마다 3개의 카드를 만들어 총 72개의 카드를 만든다.


만들어진 카드는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앞서의 뜬금없는 결론을 상기해보자.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조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전개해보자. 조금 긴 과정일 것 같다.


우선은 자막과 영상의 대응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앞서, 어려운 전문용어 자막과 영상의 매치로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스스로 여기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냐면 마치 이런 것과 같은 느낌이다.


친구랑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제 길을 가다가 피젯스피너를 주웠어.” 

그런데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 그럼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피젯스피너가 뭐야?”, 

그러자 친구가 피젯스피너를 꺼내서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거야.”

그렇게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대화는 간단하게 축약하면 이런 상황이다. 대화 도중에 모르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고 해당 단어에 대한 일련의 파악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그 궁금증을 실물을 보면서 해소했다. 물론,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실물을 본 순간 그냥 해소가 된다. 이 경우에는 단지 “피젯스피너”는 이것(실물)이라는 일련의 등치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만일, 친구가 그 “피젯스피너” 실물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 이것을 설명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령, “돌리는 거야.”, “이렇게 꼭지가 3방향으로 나있는 것도 있고, 장난감이야.” 원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할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나온다. 말로 전해진 어떤 사물의 외양이나 용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 답답함을 가져온다. 마치 앞에서 “피젯스피너”라는 모르는 단어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설명은 다시 새로운 답답함을 가져온다. 하지만 실물을 보았을 때, 그 모든 궁금증이 가라앉고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것을 직접 받아 면밀히 파악해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실물을 보고 그 단어에 매칭시키고 넘어갈 것인가로 선택하게 된다. 공이 완전히 나에게로 넘어왔다. 더 이상의 설명은 그저 실물에 부차적인 것이 될 뿐이다. 


위의 대화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단어나 낯선 단어를 마주볼 때 반드시 그것의 내용을 채워야한다는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체성을 갖추어야만 납득이 된다. 즉, 말로 설명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설명이 반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게 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진다. 이것은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언어는 그 대응물이 있어야만 내 속에서 작동하는데 대응물이 없으니 언어가 작동하지 않고 대화는 멈추며 대화를 잇기 위해 그 대응물을 찾는 것이다. 


이제, 자막과 영상의 대응을 통해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여기는 과정이 무엇인지 감잡을 수 있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봤을 때 자막에서 제시한 몇가지 키워드 '황색', '균', '감염'이라는 키워드와 영상이 일치했다. 따라서 나는 그 노란 기류를 '황색포도상구균'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고, 그것이 퍼지는 것을 '감염(infection)'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다. 그렇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의 대사가 영상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에 자막은 영상을 가리킨 것이 되었고 더 이상의 의문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영상이 자막을 충실히 구현했고 동시에 그 영상의 진위나 정확성을 따지고 파악할만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바로 자막과 영상이 동일하다는 매칭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전문지식과 식견이 있었다면 영상을 비판적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 언어가 대응물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대응물을 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개시된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굳이 대응물을 찾는 과정이 발생하지 않는 말들은 이미 대응물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대응물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열심히 써온 내용들이 실은 누구나 아는 “언어와 의미가 어떻게 대응되는가?” 하는 질문을 찾았고 그 대답의 일부를 찾은 상황인 것이다. 즉, 현재까지는 의미 모를 단어를 마주쳤을 때 반드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찾는 과정이 자동적으로 부지불식간에 개시되고 기존에 의미를 모른다면 새로운 의미가 그대로 수용되지만 기존에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비판적으로 수용된다는 점을 파악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언어가 의미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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