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을 쓰게 된 것은 사주팔자 때문이었다.

 

머리는 좋지만 학업 성적이 좋지는 않다.

 

이 말이 맞나 안맞나 생각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사주에서 말한 내용이 틀리지 않았지만 주위 환경과 스스로의 성격이 결합되어서 그것을 뒤틀었고 결국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 같다.

 

사주에서 말한 대로 머리는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역마가 있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하고 산만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자기 본위로 살고 인내심도 없고 흥미도 빨리빨리 바뀌며 치밀하지 못하고 항상 즉흥적이라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점은 공부를 잘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항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부해보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몸과 마음은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정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이어트나 금연을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신체에서 오는 신호와 무의식적 욕구에 얼마나 휘둘리는지 말이다. 그렇게 휘둘리다 보면 다이어트나 금연을 포기하게 된다. 시도할 때마다 좌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자존감을 깎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시도해보지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은 비비꼬이고 정신은 가출한다. 시간은 낭비되고 고통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공부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러니 사주에서 한 예측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공부에서 말하는 등수나 성적을 스스로에 대한 지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윗사람들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았고 완전히 혼자서 놀았다. 당연히, 스스로를 차분히 발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외부의 사건이나 평가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넓은 시야가 없었기 때문에 선입견도 없었다. 스스로 어떤 운명일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지 않을 수 있었고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무협지에 빠져서 꿈속에서 살다가 신비주의나 기공류도 연구하고 못하는 수학에 열을 올리면서 공부할수록 성적이 나빠지는 신기한 공부법도 시도하는 등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는 엄청나게 시간낭비를 했지만 스스로에겐 충실하게 모험을 시도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황된 연구와 모험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곳에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얻은 것들도 그런 것들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경험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생에 유리한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것이긴 하다.

 

두 번째로는 탐욕이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먹는 것도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씹으면서 느낄 수 있는 깊은 풍미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바로 달고 짠 것을 먹고 싶다. 탐욕이 슬픈 것은 결과를 즉각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탐욕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은 뛰어들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탐욕하는 것, 내 이성이 아닌 몸과 무의식이 탐욕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이것은 상당히 쓸만한 무기가 된다. 허황되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험을 어찌어찌 마무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심상을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유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탐욕은 정말 쓸만한 무기가 되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의 조합으로 다음과 같은 심상을 구축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어렵게 쓰고다양한 방식으로 쓸수록 많이 발전할 것이다

 

이 심상에서 발전의 부분이 매우 명확해야 한다. 당시의 나에게 이 발전의 부분은 무협지적 상상력과 만화책 그리고 기공류 따위의 논증이 결합되어 현실적이고 명백한 사실처럼 느꼈다. 그래서 실제로 해당 기관을 쓸수록 발전하는 느낌을 정말로 받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었기에 뇌를 10년 정도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과용하면 천재가 되거나 초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죽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그렇게 믿어도 별다르게 부작용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용례는 이렇다.

 

-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면 나의 뇌가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 창의적이고 복잡한 행위를 수행할수록 뇌의 가능성과 퍼포먼스가 올라간다.

 

초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기대와 이런 기대를 실천해도 현실적으로 부작용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어리석음과 탐욕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조형한 심상이다. 덕분에 무조건 이득을 보는 행위라는 생각으로 수학에 골몰할 수 있었다. 물론, 수학 공부는 할수록 성적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험 전날 밤새고 괴로워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상당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신적 피로감을 일종의 성과로 판단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물론, 비현실적인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흘러갔으면 그냥 자기 발전에 매몰된 바보로 끝났을 것으로 거의 확신한다.

 

내가 구체적이고 눈앞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초능에 가까운 능력에 대한 욕심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해도 현실적 욕망 앞에서는 그냥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심상 덕분에 전혀 하지 않았을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잘한 것은 아니다. , 대단한 끈기와 뚝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혹에도 무척 약하기 때문에 심상의 작동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험전날이나 정말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꼭 공부해야 할 순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시절을 거치면서 내 속에 삶에서 실패할지 모른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포가 자리 잡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지향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머니가 어느 날 당시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걸면서 나의 탐욕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공포와 욕망이 일으킨 추동력 앞에서 현실적인 모든 소소한 욕망은 힘을 잃었고 덕분에 나는 재수시절 기적 같은 경험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주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저 추론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맞았을 법한 그 예측은 현실의 무한한 변화를 완전히 추정해내진 못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갔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주가 추정해낸 나의 특성도 내가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나의 탐욕과 어리석음도 극복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을 간 것이 아니다. 우연과 우연이 마주쳤고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 책들과 각종 사건이 내 인생의 방향을 뒤틀었다. 나는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뒤튼 것이 아니다. 그냥 뒤틀어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얻은 결과를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또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우리에게는 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은 딴짓의 운명, 즉물적인 탐욕, 나쁘지 않은 머리,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대한 욕구, 어리석음, 인간적인 찌질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바둥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발바둥치면서 내린 결론은 차라리 뛰어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나를 부정하고 탐욕을 부정하는데 시간을 쏟느니 탐욕을 이용해서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찌질하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그 찌질함을 책을 읽는 기회로 바꾸는 것이 낫다. 허황된 것을 부정할 수 있다면 좋지만 항상 머리 한켠에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뛰어들어서 졸업하고 나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졸업이 된다. 어리석은 짓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 보이기도 한다. 탐욕을 이용하다 보면 갑자기 탐욕이 그냥 욕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찌질함을 기회로 이용하다 보면 그 찌질함이 사실은 개성이 되기도 한다.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함은 창의성과 추동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보려고 용을 써보다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보길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단순하고 명쾌한 이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동안 쌓아올린 것들이 조금 많았다. 대부분 두통과 체증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수면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 번의 실험이 있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최근 대두된 인지심리학과 불교의 영향력이 국제 심리학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평소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있던 터라 관련 공부를 하다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실험을 해본 것이다. 그것은 과연 번뇌가 제거 가능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어떤 욕구나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구는 그냥 치밀어 오르는 것이고, 생각은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규범이나 윤리에 거슬림이 없다면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참으면서 사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이다. 어떤 생각이나 욕구가 일어났을 때 그 생각을 억제하거나 배척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평생을 좋지 않은 생각과 욕구를 누르면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 없이 편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과 욕구를 제거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도박 중독자는 도박을 안하는 부작위의 행위를 끊임없이 해야만 도박을 안할 수 있고, 담배나 약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부작위의 행위를 의지라고 부른다. , 우리는 번뇌를 의지로 제어할 수는 있어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번뇌를 해탈한다는 식으로 그러한 생각과 욕구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이 말이 맞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내가 절대로 끊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왔던 담배를 불교식으로 해탈해보는 과정을 가져보기로 해보았다. 그 결과 20년 정도 담배를 피웠고 10번 정도 담배를 끊으려고 할 때마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구걸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져 꽁초를 찾아본 경험이 있던 내가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담배를 피고 싶은 욕구를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하여 불교적 방법론이 어느 정도 유효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서 명상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덕분인지 인생에 많은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다.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삶이 방향성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자극에 대한 욕구도 10초 참을 것을 11초 참는 식으로 조금씩 참을성이 늘어났고, 삶의 여유도 그런 식으로 늘어났다. 시도해 보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운동, 공부, 연구를 모두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내용들이 내 속에 축적되면서 그동안 멈춰있던 삶의 거대한 바퀴가 드디어 작동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삶을 나락으로 잡아당기던 검은 충동과 마주치게 되었다. 1년에 한 두 번 씩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공포를 느끼고, 스스로의 비루한 모습을 열등감과 함께 떠올리며 이룬 것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치고 흔적 없이 갈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마음속에 갑자기 떠올라서 생난리를 치다가 사라지면서 기분을 잡치게 해왔었다. 하지만 이 때는 달랐다. 그 날은 침대에 누워서 갑자기 떠오른 공포와 불안감에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 날은 공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냥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어째서인지 보였다. 그것은 그냥 죽음에 대한 무한한 규정하기 어려운 공포심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심어진 터무니없는 공포가 내 속에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죽으면 편해질 것인데 왜 무서워하는가?”(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 즉시 불안과 공포는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의 삶은 솔직히 대부분의 공포가 사라지면서, 내 스스로 나를 억누르던 많은 기제들이 날아갔다. 사회에서의 낙오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한 번 사는 인생을 충실하게 후회없이 살고 싶은 욕구만 남았다. 나 혼자 고통을 느끼면서 산다는 피해의식도 사라지고, 지금은 고통이 있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 관계나 관습적 관계에 따라 지고 있던 의무감과 부담도 전부 벗어버리고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개선에 몰두한 결과 올해 초에 25년간의 짐인 두통과 체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국, 올해에는 모든 것이 노력하면 성과가 나타나고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이 이러한 삶의 상승무드로 인한 것인가?

 

수면의 개선은 너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고 약을 복용하거나 식생을 바꾼 적이 없고 항상 하던 일과를 해오던 참이라 이 변화의 근저에 심리적인 변화가 원인일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심리적인 부분에서 상승무드의 삶이 나의 자존감을 넓히고 삶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어느 정도 느끼게 해주면서 수면을 개선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동안 각종 개선이 있었음에도 수면의 질은 여전히 좋지 않았었고 지금도 여전히 하지불안증후군(Restless legs syndrome)이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었고 바로 직전에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었다는 점도 조금 공교롭게 느껴져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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