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 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 - 03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불안감과 공포는 점점 구체화되고 빈번해졌다. 처음에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귀신이 뒤에 달라붙어서 속삭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신체적 이상이 있는지 살폈고, 일시적인 기력 저하인지도 실험해보았다.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이 두 가지 모두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심리적 원인뿐이다.


 물론, 누군가 실제 귀신이 있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반론할 수 있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 전부 귀신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귀신, 악몽, 환상 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친구였고 이들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나를 공포와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트라우마로 군림했다. 처음엔 완전히 패배해서 삶이 파괴되었지만 15년 정도 아등바등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방법을 개발하고 조금씩 상황이 개선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경우 진짜 귀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딱히 귀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경험상 진짜 귀신이라고 판단할만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이다. 직면한다는 것은 그 심리적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것이다. 보통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고독한 사색가가 되어 그 사건을 기억해내어 분석하려고 한다. 기억을 들여다보고 차분히 분석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무척 좋은 방법이지만 결코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결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흡연자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그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저 그 담배의 맛을 기억해서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면 그는 매우 어이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기억으로 그 맛을 생생하게 떠올린다면 담배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는커녕 담배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렬해질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 즉시 모든 욕구가 가라앉고 평온해진다. 하지만 기억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그런 효과를 낼 수 없다. 이는 기억이 실제 생활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저 욕구가 존재했다는 기억과 그 욕구가 해소되었다는 기억 정도만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욕구를 해소시킨 실체는 기억으로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결코 경험이 될 수 없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억을 통하여 트라우마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고, 불안해질 수 있다. 심하면 발작이 일어나거나 완전히 방어적으로 행동하여 모든 것을 피하고 잠수를 탈 수 있다. 이 때, 기억은 심리적 문제를 불러오기 위한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 것일 뿐, 심리적 경험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를 혼동하면 엉뚱한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가령, 지금과 같이 불안과 공포가 귀신으로 구현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는 귀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고 순식간에 귀신이 생생하게 구현되기 시작한다. 기억과 분석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신적 믿음을 질책한다. 스스로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귀신을 떠올리고 이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귀신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잘못된 감각기관을 질책하고 이 귀신이 환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므로 다시 재발하게 된다. 믿음에 따라 거부된 귀신은 낯선 타인, 범죄자 등으로 본인의 믿음에 부합하는 형태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려면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귀신이 나타나 공포와 불안을 뇌 속에 주입하는 상황에 서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를 바라보는 것이 직면이다.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위하여 귀신의 공포가 극대화하는 상황을 만들어 본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을 끄고 거의 헐벗은 몸으로 덥고 습한 바람을 맞는다. 무더운 습기가 피부를 덮으면서 피부에는 땀이 흐른다. 습기와 땀이 조금씩 맺히면서 불쾌함이 올라오고 온 몸이 질척질척 거리고 답답해진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응결된 수분을 증발시키면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으스스한 한기가 더해진다. 몸은 더위에 힘들어하면서 땀을 흘리지만 으스스한 한기가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렇게 더운데 몸이 으스스한 것은 귀신 때문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뇌리를 덮고 귀신의 존재를 불러온다. 어둠은 귀신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강조하여 두려움을 키운다. 그리고 그 귀신은 다시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켜 마음을 흔든다. 이 때,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일어나는 작용들을 차분히 바라본다. 

 

 우선 차분해야 한다. 일상에서 갑자기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면 거기에 휘둘려 벌벌 떨게 된다. 눅눅하고 음습한 환경과 심리적 요인이 공포와 불안을 불러오고 그 공포와 불안은 귀신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현현한다. 그리고 그 귀신이 다시 공포와 불안을 실체화하고 극대화하여 마음을 핀치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일어날 상황을 떠올려 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면 이를 막을 수 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오면 휘둘리는 마음을 코끝으로 전환한다. 콧구멍에서 들락날락하는 숨을 구체적으로 느낀다. 코끝에 스치는 기류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집중하면 정신적 에너지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코끝의 감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렇게 하면 공포와 불안을 형성하던 에너지가 코끝으로 이동하면서 귀신을 구체화하던 에너지가 약해진다. 귀신이 희미해지면 그로 인한 공포와 불안도 약해지게 된다. 여기에서 집중력을 더욱 강화하고 유지하면 귀신과 공포 그리고 불안을 완전히 잠재우고 온전히 명상에 들어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봉인하게 되므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주도권을 되찾아 차분해지는 정도에서 집중을 멈춘다. 


 마음의 주도권을 찾아왔으면 머릿속에서 활개치고 있는 귀신이나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약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때, ‘본다’라고 하는 행위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이는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다. 


 경험상 주의를 기울이면 심상이 보인다. 가령, 코를 스치는 숨을 ‘본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코를 스치는 숨을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새 숨이 내 코 사이를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머릿속으로 코를 들락날락 거리는 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코에서 느껴지는 실제의 감각과 어우러져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해준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겪어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에 따라 퍼포먼스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상황에 대한 그림 또는 모델이 본능적으로 그려지고 이를 인식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차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그려지는 그림이나 상황 모델을 본다.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 주의를 집중한다. 즉, 으스스한 한기나 피부에 돋은 소름, 귀신의 환상 등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공포나 불안 등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요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악몽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 - 02



 전쟁 같은 환상을 피해 거실에서 숙면을 취하고 난 뒤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여행은 순탄했고 지하에서 본 귀신과 묘실 체험도 하나의 무용담 마냥 여행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뿐 어떠한 불길함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졌다.


 여행이 끝나고 밀린 일을 바쁘게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여름에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올라왔다. 장마로 인한 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다가 또 소름이 돋았는데, 이번엔 다이어트 삼아 하루 단식을 하던 중이라서 배고픔에 따른 우울감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장마로 인한 습기를 무척 싫어하는데, 거기에 다이어트로 인한 우울감이 겹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취약한 상황이었다. 즉, 체력이 떨어져서 사소한 자극에도 과하게 반응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점점 상황이 심각해졌다. 


 한 번은 밤에 열린 틈으로 화장실 변기 위를 보다가 뜬금없이 거기에 귀신이 앉아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면서 소름이 확 끼쳤다. 그 뒤로는 항상 뒤에 무언가 따라오고 있는 느낌을 받으면서 수시로 한기를 느끼게 되었다. 


 바쁜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쫓기던 심신도 조금 쉬었는데도 기가 허한 느낌, 귀신이 끊임없이 따라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점점 빈번해졌다. 급기야는 불만 꺼도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하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우선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지 살펴봤다. 의사가 아니므로 병을 진찰할 순 없고 그저 신체에 고통, 불균형, 불편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봤다. 항상 있는 증세들만 있다. 어깨의 통증, 살찐 배의 더부룩함, 골반의 뒤틀림과 밤마다 찾아오는 불편한 감각 등은 항상 그대로 존재했던 그대로 여전했다. 이 증세들은 평생의 지병으로 어차피 병원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므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증세들이 충분히 괴롭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활력의 문제일 수 있다. 활력이 떨어지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기가 허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허해지는 느낌을 계속 받아왔기에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오랜 기간 스스로에게 실험하면서 깨달은 활력의 처방은 홍삼과 운동이다. 운동을 할 의욕과 에너지가 없는데 운동을 하면 운동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운동을 한다고 해도 활기가 도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오고 축나는 느낌이 든다. 이 때 잘 써먹는 것이 홍삼이다. 홍삼을 반티스푼 정도만 소량으로 먹어주면 반나절 정도는 각성이 되면서 활동적이 된다. 이렇게 활동적이 될 때, 운동을 하면 몸이 상쾌해지면서 활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홍삼을 반티스푼 정도만 먹는 것은 경험을 통하여 익힌 것이다. 홍삼은 내 체질과 잘 안 맞는다. 그래서 평상시에 정량(한 티스푼)을 먹으면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식욕이 지나치게 늘어나 과식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홍삼의 부작용에 시달리지 않는 방법은 너무 피곤하거나 힘든 상황일 때 홍삼을 먹거나, 먹고나서 바로 상당한 강도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 때 반티스푼 정도로 정량의 반만 먹으면 거의 부작용이 없고 상당한 활력을 얻을 수 있다. 


 기가 허한 것을 보충하고 활기를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으스스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기 보다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 심리적 문제가 아직은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다년간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심리적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어찌어찌 스스로 알아내 익혔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구제를 시도해보기로 한다.


 처음부터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접근하지 않은 이유는 오랜 기간의 경험 때문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모든 마음의 문제는 그 원인이 대부분 몸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경험상 옳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을 힘들게 할 정도의 마음의 문제는 대부분 신체나 외부적인 상황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명상이나 상담 등으로 해결하거나 자신의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버티면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가령, 혈압이 오르면 지속적으로 감정이 과잉되고 분노에 시달리기 쉽다. 이를 상담이나 명상 등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일시적으로 분노를 완화할 수 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근본 원인이 남아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치미는 분노에 결국 먹혀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압이 문제라는 것을 알면 간단하게 조절할 수 있다. 따라서 심리적인 문제로 보이는 것들도 우선적으로 몸에 병이 있는지 혹은 노화에 따른 증세가 아닌지 확인하고 병을 치유하거나 영양제 등으로 신체의 문제를 방어하는 것이 먼저다. 


 물론, 모든 것이 신체의 문제일 뿐 심리적인 문제는 부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으로 마음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기 어렵다. 그게 자신의 본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조급한 성격 때문에 인생이 망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외부에서 보기에 그 사람의 문제는 조급한 성격이다. 하지만 조급한 성격을 가진 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어쩔 방법이 없다. 그런 성격이 자신의 본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물고기에게 물속에서 사는 것이 모든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물론, 사람은 이성적으로 사고하여 자신의 조급한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바꿀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포기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참기 어려운 느낌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다만, 지금의 경우 마음의 구조를 개선하는 수준의 대공사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발생한 이상 현상을 바로잡는 수준이므로 마음을 돌아보는 방법을 통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악몽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01


 최근 가족 여행으로 대부도에 펜션을 빌려 1박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기대했던 활동들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펜션에 배치된 다양한 놀이 활동에 가족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에 나는 지하에 위치한 방에서 홀로 자기로 했다.


 여행을 오기 전날 잠을 설쳤고, 여행 당일도 많은 활동으로 지쳐 비몽사몽한 상황이므로 어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지하방에 눕자마자 뭔가 낯설었고, 불편했다. 눕자마자 으스스한 느낌이 밀려왔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그리고 앞에 귀신이 나타났다.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의 귀신이 천장에서 내려다보면서 톱니같이 듬성듬성 난 날카로운 이빨을 혀로 핥고 있었다. 입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핏줄기가 흐른다. 입으로 ‘여길 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너무 생생하게 펼쳐지는 상상에 소름이 끼쳤다. 이 상황에서 눈을 뜨면 그 귀신이 ‘드디어 나를 봤구나.’ 라고 말하면서 저주를 내릴 것 같았다. 숨막힐 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귀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이런 환상과 악몽을 다루는데 이골이 나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런 악몽과 환상을 진저리나게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거의 좌절과 절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아득바득 다시 일상성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식의 환상은 나락에 빠졌던 과거가 떠올라서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또, 그 익숙함에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지하방에 나타난 귀신은 그 동안 겪은 환상과 악몽에 비추어 봐도 압도적으로 생생했다. 평소 겪던 것이 조악한 화질이었다면 이번에 겪은 것은 4K급 4D 영상 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귀신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패턴이 항상 겪던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질이 아무리 좋아도 스토리는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은 악몽과 문법이 비슷해서 인과관계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난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눈앞에 보이고,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상황이 일어나는데 아무런 의문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직 생생한 공포만 느껴질 뿐이다. 공포는 착실하게 주입된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같은 모양과 그로테스크한 톱니이빨이 전형적인 공포의 외형을 구성했고 거기에 공포의 아우라가 덧입혀져 귀신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인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자, 바로 눈을 뜨면 귀신이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주입된다. 마치 내가 눈을 뜰까봐 협박하는 것 같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악몽이었다면 잠을 깨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상황을 정리하고 하는 등 귀찮은 과정을 겪으면 되지만 환상이었기 때문에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전개되는 일련의 환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그저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집중한다. 숨의 느낌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점차 머릿속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환상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잠을 청한다.


 사람이 너무 굶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점점 단순해진다. 사람의 정신도 결국,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필요한 정신 활동에 에너지를 쓴다. 이 원리를 응용하면 환상을 금방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즉, 지금처럼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행위로 에너지를 돌리는 것이다. 그 행위로 쏠리는 에너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환상을 구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없어지므로 환상은 힘을 잃고 잦아들다가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물론, 환상을 일으키는 다른 기저 요인이 없을 때 이야기다.


 내 경우 잘 사용하는 방법은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식 명상을 훈련해왔기 때문에 이 감각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데 익숙하고 이 감각이 매우 중립적이어서 번뇌를 털어버리고 다시 수면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즉, 공포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술을 마시거나 매우 자극적인 컨텐츠를 보는 등의 중립적이지 않은 행위는 지금 당장은 공포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지만 욕망이 자극되고 정신이 각성된다. 이는, 지금 당장 수면에 장애를 주고 장기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포와 불안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부정적인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렇게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면서 환상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4K급 화질의 4D로 보던 귀신의 화질이 흑백화면 마냥 조악해지다가 잊혀졌다.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다시 잠을 청하면서 숨에 집중하던 마음을 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공포와 불안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지하에 잠들었다는 점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지하’, ‘지하’, ‘지하’ 라는 메아리가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내가 지금 관 짝에 들어가 지하에 묻혔구나 하는 확신이 굳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딱 맞는 관에 누운 것 마냥 불편하게 조이기 시작하면서 환상이 사실인 것처럼 몸을 구속했다. 다시 찾아온 환상은 환상 그 자체와 더불어 신체 구속이 발생하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었다. 환상이 너무 빠르고 강렬하여 순식간에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환상이 공포를 불러오고 신체적 불편함이 그 공포를 실체화시켰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켰다. 


 기본적으로 불을 키면 환상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지만 이 환상은 그렇지 않았다. 불을 켜니 숙박시설 특유의 몰개성적인 벽지와 삭막한 풍경이 보였다. 낯설고 지루한 공간이다. 생동감을 느낄 수 없는 풍경과 눅눅하고 음습한 느낌은 묘실을 떠오르게 했다. 수천년 동안 단 하나의 변화도 없는 삭막하고 정적인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수천년간 이 낯설고 지루한 공간에서만 살아왔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수만년은 더 이 공간에서 박제된 채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토할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온다. 마음이 무너졌다. 통제가 사라지면서 다시 귀신이 부활했다. 더 생생해진 느낌이었다. 


 호흡을 통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지만 매우 위태위태했다. 이미 무너진 정신의 한 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집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무 리얼한 환상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번뇌를 다루다 보면 이 환상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 욕망, 공포, 불안 등의 기저에는 인식하기 어려운 미세한 환상들이 실제로 작동한다. 이런 환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환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부분 되찾을 수 있다. 이게 불교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튀어나오는 환상이나 번뇌를 인식하고 이를 제거할 때에는 보통 그 기저 원인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작용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내 경우 PC방에 놀러가야지 하는 욕망이 나타나면 대략 6시간 전쯤에 그 번뇌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리고 대략 6시간 후나 PC방에 갈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면 번뇌는 일어나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PC방에 가고자 하는 마음에 쏠린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몰입된 마음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해결된다.


 하지만 번뇌의 원인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령, 배고픔을 생각해보자. 배가 고프면 몸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요구한다. 배고픔은 실제의 허기와 허기로 인한 탐욕,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분노 등을 일으킨다. 정신을 집중한다면 허기로 인한 탐욕과 분노 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허기는 그대로 남는다. 집중력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허기로부터 탐욕과 분노 등이 올라온다.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무너지게 된다. 물론, 고도의 수행을 통해서 확신을 갖추었다면 이를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적절하게 먹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어렵다.


 두 번째 환상을 보면서 이제 어떤 기저 원인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습기로 인한 축축함, 에어컨의 작동으로 인한 한기,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 지하라는 점이 맞물려 번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지친 체력과 수면에 들면서 마음이 무저항 상태로 놓이게 되는 것도 원인으로 보였다. 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극복할 수도 있지만 바로 포기했다. 기저 원인이 없다면 가능하겠지만 이미 계속 작동하는 원인이 있다면 총하나 들고 홀로 백만 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격이고 작은 제방 하나로 홍수를 막겠다고 설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치고 힘든 상황인데다가 다음 날은 또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중요한 급소를 찔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환상은 이미 내 약점을 찔렀다. 그것은 생사관이었다. 개인적으로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불교도가 아니다). 그래서 죽는 과정은 싫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저 죽음이 영원에 가까운 휴식이라면 찰나의 삶 동안은 충만하게 살고 미련 없이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내 삶의 모델이다. 그런데 이 환상은 나를 사후세계에 영원의 시간 동안 유폐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삶의 큰 버팀목 중 하나였나 보다. 사후세계의 영원한 유폐라는 환상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고독과 비애로 내 정신을 무너뜨렸다. 결국, 통제력을 잃고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악몽과 환상에 숙련된 환자로서 재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방을 벗어났다. 방을 벗어나 1층 거실에서 눕자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마음속에 불안감과 공포는 남았지만 더 이상 기저원인이 작동하지 않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머지 꿈도 꾸지 않고 꿀잠을 잤다.

 앞서, 망상을 관찰하고 이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뿌리째 뽑으려 했다가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 정신적 파국은 2004년에 있었고 2016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12년간 이 파국에 대한 경험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악몽이었다. 이미 많이 좋아졌다고 여겨지는 현재에도 언제 다시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이 파국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나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렇게 개인적으로 곱씹으면서 파악해본 파국의 근원과 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만일, 누군가 이 경험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절대 그러지 않기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이 나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경험인지 알 수 없지만 구태여 10여년의 기간 동안 폐인이 될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구태여 파국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통제 불가능해진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경험을 경계로 하여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 이전과 이후의 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즉,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이 경험이 있기 전에도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열광하면서,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이야기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동의했다. 즉,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래서 효율 중심의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나 모든 것이 통제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계몽적 인간’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감정에 의해서 통제되는 ‘동물’의 하나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은 역설적이게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들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방법론과 광범위한 관찰이 적용되었고,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건조할 정도로 철저하게 과학적 원인에 집착한다. 그것을 보고 전개되는 논의들도 대부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외피를 위하여 철저하게 논리성을 추구한다. 어쩌면 이는 이성과 합리성의 극단을 추구한 결과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괴델, 에셔, 바흐』 식으로 말하면 자기 부정에 도달할 정도로 고도의 이성과 합리성인 셈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으로 관찰한 결과 인간에게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는 것 같다.”라는 패러독스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입으로는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은연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은 훈련받은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라는 선민의식도 같이 즐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입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하지만 파국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그냥 동물 레벨로 떨어져서 온갖 욕구에 매순간 꿈틀거리기에 바빴다.


 망상을 뿌리째 뽑으려는 의도 뒤에는 각종, 생각과 망상이 결국, 어떤 연쇄 반응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가정이 있었다. 즉,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면서 점차 망상으로 전개되고 그 망상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일종의 망상-모델로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은연중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 한가지의 근원적 망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근원적 망상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리비도일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그 경계를 뚫고 허무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의 모델은 칼릴지브란과 무협지의 합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항상 성욕에 관련된 잡념이 많이 나타나므로 프로이트를 같다 붙이고 거기에 주워들은 불교 상식과 무협지적 망상, 각종 형이상학적 모델을 짬뽕해서 얼기설기 만든 어떤 정신 모델을 은연중 신봉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망상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단기 기억상실을 몇 번 경험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의 망상을 확인하고 그 망상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하나의 망상을 잡아서 그것을 응시하면서 이 원인이 되는 망상을 보려고 할 때, 강하게 집중하면 의식이 날아갔고, 집중하지 못했을 때는 그저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다. 하지만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일어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망상 속에서 허우적댈 때나 의식이 날아가서 망상 한 가운데서 깰 때나 결국은 비슷했다. 현재 망상의 원인이라고 할 만한 앞서의 생각이나 망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은 이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비약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단지, 그 중간에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큰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생각의 근원이 다른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감지하려고 하면 의식은 그대로 전원이 꺼져버렸고, 감지하려 하지 않았을 때는 생각의 도약을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연쇄’라는 말이 붙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용출하는 욕구에 바로 달라붙은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어떤 근원적인 망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성욕, 게임욕, 식욕, 명예욕이 생각의 근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든 내부의 자극을 받았든 생각과 상관없이 촉발되었다. 가령, 성욕이 가장 대표적이다. 성욕이 용출할 때마다 그에 따른 의식적 생각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성욕을 추적했을 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일단, 성욕은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이성이 지나가면 그 이성을 눈과 몸이 따라가고 그 뒤에서 생각이 달라붙어서 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의식에서 만들어내는 이유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반응보다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고 선후를 뒤바꿔 놓는다. 즉, 자신이 그 이성을 매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눈과 몸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제 고개를 돌리고 내 일에 집중해야지라고 마음먹어 보려고 노력해보라. 일단, 그런 생각이 잘 들지도 않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서 움직여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감과 온갖 핑계가 순식간에 떠오른다. 즉, 욕구가 우선이고 생각은 부수적이다.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성욕, 게임, 담배, 식욕 등등이 용출할 때마다 자주 찾아오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겪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의 이면에 욕구가 용출하기 이전 상황과의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책이나 스마트폰을 집중해서 보거나, 동행인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수 있고 중요한 생각을 진행시키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이성에 의해서 성욕이 용출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성욕으로 인한 생각과 제어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갑자기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잊게 되는 찰나의 기억상실이 있다. 게임, 좋아하는 연인, 담배 등등 우리 주위에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것들은 비슷하게 작동한다. 


 나 자신의 망상을 들여다볼수록 내 생각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욕구에 붙어서 일어난다는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고 욕구가 이동할 때, 내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의식도 강제로 바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과 의식은 그야말로 곁다리에 불과하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과 의식도 같이 점프하지만 의식은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것을 속이고 연속적인 것처럼 은폐할 뿐이었다. 


 아무리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부정해 왔어도, 노력하고 경계하고 의식하면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라고 하는 어떤 일관되고 연속적이고 고유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파국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이 ‘의식’의 거짓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확신과 함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그 동안 스스로 통제하고 일관된 ‘나’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항상 욕구에 맞추어 생각하고 의식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통제되고 일관된 ‘나’가 조악한 환상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최후의 심리적 방어까지 무너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20대 중반의 1년 정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로부터 지금까지 대략 20년간 내 삶의 방향은 이 책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선배의 펌프질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자마자 총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괴델 에셔 바흐는 당시 읽었던 다른 어떤 종류의 책으로부터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구성으로 방대한 분야를 통합한 책이다. 바흐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패러독스를 거쳐 에셔의 그림과, 현대 수학이 마주친 혁명적인 변화 그리고 불교의 선문답을 어우러지게 하면서 알고리즘과 생물학까지 통섭하고 있는 미친 책이다. 언급한 모든 분야에서 수박 겉핥기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핵심을 전문적으로 간결하게 짚어나가고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난이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각의 내용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선배와 같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정말 독서를 많이 했고 박학한 교양과 깊은 지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문과였기 때문에 수학, 논리학, 컴퓨터 부분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바흐의 음악 이론은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에셔의 그림들과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고 몇 번 접해본 그리스의 패러독스, 불교의 선문답 위주로 책을 읽고 해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모임은 간단하게 한 번 읽는 수준으로 흐지부지 끝났지만 개인적으로 그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나름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서사와 지식 위주의 독서를 했다면 이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 경험은 간결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와 조각조각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조화로운 가운데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강렬한 열망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괴델 에셔 바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그렇다 변주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음악, 논리학, 생물학, 수학, 패러독스, 인공지능, 그림, 불교의 선문답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심도 있게 펼쳐지지만 그 핵심에 어떤 비슷한 무엇인가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징적으로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은 인간의 지성이 극대화 되는 부분이고 동시에 인간 지성의 한계가 노출되는 무한히 순환하는 어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잘 모르니 계속 이렇게 감상적으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사와 현대 수학 그리고 논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패러독스와 선불교의 선문답을 읽어보고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도 읽어보게 되었다. 덕분에 어떤 환상적인 비전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한세계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이었다.

       

칸토어의 무한 증명, 또, 튜링머신으로 그것을 증명한 튜링, 그들이 증명한 것은 오직 극도의 추상적인 사유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 상상과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하게 초월한 영역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려보기도 힘든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 말하고 있는 양자의 행동도 계산하고 증명은 가능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저 계산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기괴한 세계다. 마지막으로, 괴델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참인 명제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 무슨 말인가? 증명되지 않은 참인 명제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지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시절에 제시된 패러독스를 통해서 다시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선불교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분야에서는 혁명적인 발전과 동시에 어떤 지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지성 자체가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을 알게되는 지성, 진리의 극한에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해버린 지성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 상태,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는 상태를 다시 어떤 절대적인 일관된 이성으로 뛰어넘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으로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가능성과 다양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거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책을 통해서 결국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이 통찰하였고 덕분에 그 지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무한하고 항상 옳다는 식의 계몽주의적인 맹목적인 믿음을 거둘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 제한이 있고 부족한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때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본인도 인지심리학자로서 인간 정신의 구조나 지성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의 곳곳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통찰을 조금씩 읽어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접근을 20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지속하게 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를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추상적인 느낌만 있는 수준이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꼭 알아야 할 어떤 진리가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얻었고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관련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덕분에 꽤 오랜 기간 방황하기는 했지만 좋든 나쁘든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되었다. 

     

덧붙이면 괴델 에셔 바흐』에서 선불교를 인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저자가 지성의 한계를  지성의 미혹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불교의 지혜를 선문답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해석이 되었고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불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서유기를 통해서이다. 천방지축 날뛰는 손오공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는 이야기와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삼장법사가 천축으로 향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가장 멋진 판타지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손오공이 좋았지, 답답하고 무능해 보이는 삼장법사가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삼장법사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았을 때에는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관광을 하면서 사찰을 가보기도 하고 신자들로부터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잘 와닿지 않았다. 그냥 구도자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일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복을 위하여 치성을 드리고 기도를 올리는 무속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 다음으로 불교를 접한 것은 무협지에서였다. 소림사로 대표되는 무술의 고향 이미지는 젊은 남자에게 어필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불교도 무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협지의 세계에서 이단적인 존재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협지에 깨달음이라는 요소를 가장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작가인 백상이었다. 당시, 그의 글의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이 전혀 노력도 안하고 빈둥빈둥 살고 있고 찌질하고 전혀 존중받기 어려운 이라고 해도 깨달음을 거치면서 이 모든 것을 한번에 뒤집는 다는 점이다. 그의 무협에서 깨달음은 불교적 깨달음이기도 했고, 도가적 곡선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힘이 바로 구현되는 권능에 가까운 힘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어떤 근원적인 지혜를 동시에 획득한 느낌을 준다. 비유하자면 구석기 시대의 부족전쟁에 꼬맹이가 갑자기 양자역학을 깨닫고 최첨단 핵미사일을 투하하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차원이 달라지는 셈이다.

 

무협지로 봤을 때는 그냥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즐기기만 했을 테지만 마침 그 때 영화 매트릭스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 하면서 나타났다. 주인공 네오가 죽었다 부활하면서 매트릭스 내부의 세상을 코드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이를 마음껏 변화시켜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권능을 구사하는 장면이 바로 그 백상 무협에서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장면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매트릭스 상영 후에 많은 비평가들이 이를 기독교적 삼위일체와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읽었지만 나는 이를 백상의 무협에서 읽은 불교적인 깨달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무협지에 자주 나타나는 불교의 경전이 금강경이다. 소림의 4대 금강, 금강불괴, 나한금강기공 등, 금강이라는 말은 그 근원을 금강경에 두고 있고, 무슨 깊은 깨달음이 어쩌구 하면 대부분 금강경이 주된 핵심 깨달음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사실, 이것은 금강경이 대한민국 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적 토양이 금강경에 대한 찬사를 많이 들을 수밖에 없는 토양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호기심이 생겨서 민족사에서 나온 금강경을 사서 읽어보았다. 정말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름 문해력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관련 설명서나 주해서 역사서 등을 흝어 보면 불립문자(不立文字)이므로 말로 전할 수 없고, 오직 깨우쳐야만 알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책을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정도가 심해지기만 했다.

 

가령, 이런 경구가 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곧 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가는가? 서로 모순된 말들을 배치해서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창의력을 발휘하고 불교에 관련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여 위의 경구를 말이 되게끔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불교를 진심으로 믿고 이 경전에 보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나처럼 그냥 지나가면서 무슨 내용인가 한 번 슬쩍 보기만 하려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동문서답으로 가득한 소리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모순된 경구가 딱 한 구절 나와서 그 부분만 풀면 어떤 전체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경전의 대부분이 이런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략의 느낌도 받기 어려웠고 솔직히, 경전이 스스로 독해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독해를 포기했다.

 

그 후에는 다른 경전을 찾아서 읽어봤지만 반야류와 금강류의 경전은 알아듣기 어려웠고 쉬운 경전은 어린이 동화책 같은 우화에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단순하고 명쾌한 이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동안 쌓아올린 것들이 조금 많았다. 대부분 두통과 체증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수면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 번의 실험이 있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최근 대두된 인지심리학과 불교의 영향력이 국제 심리학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평소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있던 터라 관련 공부를 하다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실험을 해본 것이다. 그것은 과연 번뇌가 제거 가능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어떤 욕구나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구는 그냥 치밀어 오르는 것이고, 생각은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규범이나 윤리에 거슬림이 없다면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참으면서 사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이다. 어떤 생각이나 욕구가 일어났을 때 그 생각을 억제하거나 배척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평생을 좋지 않은 생각과 욕구를 누르면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 없이 편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과 욕구를 제거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도박 중독자는 도박을 안하는 부작위의 행위를 끊임없이 해야만 도박을 안할 수 있고, 담배나 약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부작위의 행위를 의지라고 부른다. , 우리는 번뇌를 의지로 제어할 수는 있어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번뇌를 해탈한다는 식으로 그러한 생각과 욕구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이 말이 맞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내가 절대로 끊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왔던 담배를 불교식으로 해탈해보는 과정을 가져보기로 해보았다. 그 결과 20년 정도 담배를 피웠고 10번 정도 담배를 끊으려고 할 때마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구걸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져 꽁초를 찾아본 경험이 있던 내가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담배를 피고 싶은 욕구를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하여 불교적 방법론이 어느 정도 유효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서 명상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덕분인지 인생에 많은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다.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삶이 방향성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자극에 대한 욕구도 10초 참을 것을 11초 참는 식으로 조금씩 참을성이 늘어났고, 삶의 여유도 그런 식으로 늘어났다. 시도해 보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운동, 공부, 연구를 모두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내용들이 내 속에 축적되면서 그동안 멈춰있던 삶의 거대한 바퀴가 드디어 작동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삶을 나락으로 잡아당기던 검은 충동과 마주치게 되었다. 1년에 한 두 번 씩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공포를 느끼고, 스스로의 비루한 모습을 열등감과 함께 떠올리며 이룬 것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치고 흔적 없이 갈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마음속에 갑자기 떠올라서 생난리를 치다가 사라지면서 기분을 잡치게 해왔었다. 하지만 이 때는 달랐다. 그 날은 침대에 누워서 갑자기 떠오른 공포와 불안감에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 날은 공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냥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어째서인지 보였다. 그것은 그냥 죽음에 대한 무한한 규정하기 어려운 공포심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심어진 터무니없는 공포가 내 속에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죽으면 편해질 것인데 왜 무서워하는가?”(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 즉시 불안과 공포는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의 삶은 솔직히 대부분의 공포가 사라지면서, 내 스스로 나를 억누르던 많은 기제들이 날아갔다. 사회에서의 낙오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한 번 사는 인생을 충실하게 후회없이 살고 싶은 욕구만 남았다. 나 혼자 고통을 느끼면서 산다는 피해의식도 사라지고, 지금은 고통이 있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 관계나 관습적 관계에 따라 지고 있던 의무감과 부담도 전부 벗어버리고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개선에 몰두한 결과 올해 초에 25년간의 짐인 두통과 체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국, 올해에는 모든 것이 노력하면 성과가 나타나고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이 이러한 삶의 상승무드로 인한 것인가?

 

수면의 개선은 너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고 약을 복용하거나 식생을 바꾼 적이 없고 항상 하던 일과를 해오던 참이라 이 변화의 근저에 심리적인 변화가 원인일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심리적인 부분에서 상승무드의 삶이 나의 자존감을 넓히고 삶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어느 정도 느끼게 해주면서 수면을 개선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동안 각종 개선이 있었음에도 수면의 질은 여전히 좋지 않았었고 지금도 여전히 하지불안증후군(Restless legs syndrome)이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었고 바로 직전에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었다는 점도 조금 공교롭게 느껴져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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