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약간 신비적인 체험 이야기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종교적 경험이라고 해볼만한 이야기이지만 스스로는 그다지 종교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볼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번은 점술에 흥미가 생겨서 주역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역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고이 접고 그냥 규칙에 따라서 점을 치게 되었다. 주역으로 점치는 방법은 굉장히 단순한데, 동전 3개를 던져서 나오는 대로 표기해서 괘를 뽑고 그 괘에 따라서 책을 찾아서 읽으면 된다.

 

당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돈 관리를 잘 못해서 앞으로 15일은 매 끼니를 굶을 판이었다. 마침 점칠 내용도 없어서 돈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까 하고 점을 쳤는데, 곧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러다가 3일 후에 친척 결혼식에 갔는데 평생 한 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는 친척이 갑자기 용돈을 주는 일이 발생하면서 점의 결과가 무척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공무원 시험을 보는 동생이 공무원 시험 결과를 물어보았는데 사냥을 갔는데 잡을 사냥감이 없어 허탕을 친다는 괘가 나왔고 그 해 시험은 잘 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점을 처서 맞은 사례는 상당히 많았고 그래서 종종 혼자서 점을 치곤 했다.

 

점이 잘 맞으니 점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높아졌고 그러다 보니 신년이 되었을 때 1년의 운세를 점쳐보게 되었다. 점괘의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거의 되는 일이 없고 힘든 1년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끝에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당시,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딱히, 가리는 곳이 없어서 선배가 같이 일해보자는 말에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하루하루 근무하는 것이 지옥같았고 점점 위태로워졌다. 스트레스는 받고 매일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 났다. 그런데 이미 신년 운세를 점쳤을 때 되는 일이 없고 힘든 1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직, 한가지만 생각했다. 연말에 즐거움()가 있을 것이라는 점괘였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회사 생활이 힘들면 힘들수록 점괘에 대한 신뢰가 강해져서 반드시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져서 기대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마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말 지독하게 힘들었다. 해야 할 일들은 전부 맨땅에 헤딩해야하는 식의 일들이었고, 해당 업무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퇴사를 했거나 대립각을 내세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버벅이면서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업무를 파악해야 했고, 그래도 부족해서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물어봐야 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입사한지 한달도 안되어서 퇴사하고 싶어하는 분위기였고, 1년 이상 근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상사가 주는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다음 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스트레스가 정말 컸다. 언제 고소장이 날아오고, 언제 경찰서를 가야하고, 언제 법원에 출두해야 하고, 언제 노동청에 갈지 알 수 없었다.

 

불확실한 나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점을 치고 그 점을 해석하면서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안도하고 힘든 점괘가 나오면 하루 종일 초긴장하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점을 치면서 근근이 버티는 기간이 4개월가량 되었을 때, 지방의 공장에서 근무하는 내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후배에게 전화가 와서 암이라면서 치료비로 목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와서 넘어졌는데 버스의 바퀴가 얼굴 바로 앞을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수시로 지인들에게서 신세한탄과 소름끼치는 사건들 그리고 무언가 불길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전화로 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길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졌다. 갑자기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무당들은 천하다는 평가를 받았을까? 어째서 역사적으로 이름난 점술가들과 예언자들의 끝은 불행할까? 그리고 나 스스로 계시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 찾아왔다그것은 무슨 메세지도 아니었고 신의 음성도 아니었다. 그저 대단히 명료하고 대단히 확실한 의식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모든 사건을 하나로 연결해서 내가 점()을 칠 때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고 명징하게 보여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은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물어보는 형태와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추론하는 형태의 두 종류로 나뉜다.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묻는 방식의 점은 신점(神占)이라고 하고 그 방법은 무당과 도구점으로 나뉜다. 무당은 직접 귀신과 접하는 것이고 도구점은 동전을 던지거나 산대를 부리거나 하는 등 우연적인 요소들을 도입해서 귀신이 그것을 선택하게 하는 방식의 점이다. 반면,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추론하는 형태의 점은 사주(四柱)와 같이 어떤 법칙에 따라서 추론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계산한다고 해서 산점(算占)이라고 한다. 내가 친 점은 주역점으로 도구를 이용하여 귀신에게 묻는 신점(神占)의 하나였는데 나 스스로나 정말 가까운 친인의 개인사 정도라면 매우 잘 맞았다. 그런데 이 신점(神占)을 칠 때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추상적인 내용이 어떠한 근거도 없지만 절대적인 확신하게 되었다.

 

그 계시의 경험은 정말 강렬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든 사건들과 정황들이 하나로 엮였고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어떤 추상적인 무엇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치르고 있는 대가로 내 일생의 운, 에너지, 기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무분별하게 점을 치면 모든 대가를 치르고 내 주위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나는 일가친척 하나 없이 노숙하다가 객사할 것이라는 확신도 같이 왔다. 너무나 명료한 메시지와 내 운명에 대한 비전으로 인해서 나는 그 자리에서 신점(神占)을 더 이상 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그리고 그 동안 무지로 인하여 대가로 치렀던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불행이 찾아올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치는 것을 그만두고 더 이상 회사에서 버티지 않고 사직서를 내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불행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들었다고 생각했던 그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전화를 건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 소소한 것들은 그냥 과장된 표현이었을 뿐이었고, 어머니의 사고는 어머니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목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후배는 스스로 했던 말을 후회하듯이 그 내용을 얼버무렸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내가 치른 대가이고 만일 내가 점을 계속 쳤다면 그 모든 것이 현실화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계시로 보고 들은 것은 마치 주입된 것처럼 어떠한 근거도 없이 나에게 강력한 확신을 안겨주었다. 만일, 내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탐구했던 바가 없었더라면 이를 종교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여서 종교에 귀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스스로 인간의 의식이 얼마나 허술하고 기만에 차있으며 또 동시에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저 굉장히 특이한 경험 정도로 남아있고 오히려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주는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아무리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정도의 확신을 거스를 때 발생하는 찝찝함과 불확실성을 감당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신점(神占)을 더 이상 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점을 그만두자 모든 것이 빠르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회사는 퇴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정신적 요양을 하면서 스트레스로 고통 받던 자신을 힐링할 수 있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같이 회사를 다니다가 퇴산한 여직원과 생애 첫 연애를 하게 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 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을 쓰게 된 것은 사주팔자 때문이었다.

 

머리는 좋지만 학업 성적이 좋지는 않다.

 

이 말이 맞나 안맞나 생각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사주에서 말한 내용이 틀리지 않았지만 주위 환경과 스스로의 성격이 결합되어서 그것을 뒤틀었고 결국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 같다.

 

사주에서 말한 대로 머리는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역마가 있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하고 산만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자기 본위로 살고 인내심도 없고 흥미도 빨리빨리 바뀌며 치밀하지 못하고 항상 즉흥적이라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점은 공부를 잘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항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부해보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몸과 마음은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정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이어트나 금연을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신체에서 오는 신호와 무의식적 욕구에 얼마나 휘둘리는지 말이다. 그렇게 휘둘리다 보면 다이어트나 금연을 포기하게 된다. 시도할 때마다 좌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자존감을 깎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시도해보지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은 비비꼬이고 정신은 가출한다. 시간은 낭비되고 고통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공부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러니 사주에서 한 예측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공부에서 말하는 등수나 성적을 스스로에 대한 지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윗사람들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았고 완전히 혼자서 놀았다. 당연히, 스스로를 차분히 발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외부의 사건이나 평가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넓은 시야가 없었기 때문에 선입견도 없었다. 스스로 어떤 운명일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지 않을 수 있었고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무협지에 빠져서 꿈속에서 살다가 신비주의나 기공류도 연구하고 못하는 수학에 열을 올리면서 공부할수록 성적이 나빠지는 신기한 공부법도 시도하는 등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는 엄청나게 시간낭비를 했지만 스스로에겐 충실하게 모험을 시도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황된 연구와 모험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곳에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얻은 것들도 그런 것들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경험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생에 유리한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것이긴 하다.

 

두 번째로는 탐욕이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먹는 것도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씹으면서 느낄 수 있는 깊은 풍미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바로 달고 짠 것을 먹고 싶다. 탐욕이 슬픈 것은 결과를 즉각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탐욕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은 뛰어들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탐욕하는 것, 내 이성이 아닌 몸과 무의식이 탐욕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이것은 상당히 쓸만한 무기가 된다. 허황되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험을 어찌어찌 마무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심상을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유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탐욕은 정말 쓸만한 무기가 되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의 조합으로 다음과 같은 심상을 구축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어렵게 쓰고다양한 방식으로 쓸수록 많이 발전할 것이다

 

이 심상에서 발전의 부분이 매우 명확해야 한다. 당시의 나에게 이 발전의 부분은 무협지적 상상력과 만화책 그리고 기공류 따위의 논증이 결합되어 현실적이고 명백한 사실처럼 느꼈다. 그래서 실제로 해당 기관을 쓸수록 발전하는 느낌을 정말로 받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었기에 뇌를 10년 정도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과용하면 천재가 되거나 초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죽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그렇게 믿어도 별다르게 부작용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용례는 이렇다.

 

-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면 나의 뇌가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 창의적이고 복잡한 행위를 수행할수록 뇌의 가능성과 퍼포먼스가 올라간다.

 

초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기대와 이런 기대를 실천해도 현실적으로 부작용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어리석음과 탐욕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조형한 심상이다. 덕분에 무조건 이득을 보는 행위라는 생각으로 수학에 골몰할 수 있었다. 물론, 수학 공부는 할수록 성적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험 전날 밤새고 괴로워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상당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신적 피로감을 일종의 성과로 판단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물론, 비현실적인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흘러갔으면 그냥 자기 발전에 매몰된 바보로 끝났을 것으로 거의 확신한다.

 

내가 구체적이고 눈앞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초능에 가까운 능력에 대한 욕심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해도 현실적 욕망 앞에서는 그냥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심상 덕분에 전혀 하지 않았을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잘한 것은 아니다. , 대단한 끈기와 뚝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혹에도 무척 약하기 때문에 심상의 작동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험전날이나 정말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꼭 공부해야 할 순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시절을 거치면서 내 속에 삶에서 실패할지 모른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포가 자리 잡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지향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머니가 어느 날 당시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걸면서 나의 탐욕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공포와 욕망이 일으킨 추동력 앞에서 현실적인 모든 소소한 욕망은 힘을 잃었고 덕분에 나는 재수시절 기적 같은 경험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주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저 추론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맞았을 법한 그 예측은 현실의 무한한 변화를 완전히 추정해내진 못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갔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주가 추정해낸 나의 특성도 내가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나의 탐욕과 어리석음도 극복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을 간 것이 아니다. 우연과 우연이 마주쳤고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 책들과 각종 사건이 내 인생의 방향을 뒤틀었다. 나는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뒤튼 것이 아니다. 그냥 뒤틀어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얻은 결과를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또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우리에게는 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은 딴짓의 운명, 즉물적인 탐욕, 나쁘지 않은 머리,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대한 욕구, 어리석음, 인간적인 찌질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바둥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발바둥치면서 내린 결론은 차라리 뛰어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나를 부정하고 탐욕을 부정하는데 시간을 쏟느니 탐욕을 이용해서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찌질하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그 찌질함을 책을 읽는 기회로 바꾸는 것이 낫다. 허황된 것을 부정할 수 있다면 좋지만 항상 머리 한켠에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뛰어들어서 졸업하고 나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졸업이 된다. 어리석은 짓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 보이기도 한다. 탐욕을 이용하다 보면 갑자기 탐욕이 그냥 욕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찌질함을 기회로 이용하다 보면 그 찌질함이 사실은 개성이 되기도 한다.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함은 창의성과 추동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보려고 용을 써보다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보길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마찬가지로 공부도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오늘은 공부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고 싶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 있다. 안경을 쓴 차분한 이미지, 역동적인 느낌보다는 물처럼 고요한 느낌을 준다. 성격이 급하지 않을 것 같고 운동도 그다지 잘할 것 같지 않다. 또, 개인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지겹고 지루한 상황에서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실하게 일을 수행한다. 그래서 예습과 복습 같은 재미없는 일도 성실하게 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어서 큰 트러블이 없다. 아마도 이런 인상일 것이다. 이런 친구들은 뭐랄까? 공부계의 스테레오 타입들인 모범생이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날 때는 성실한 모범생을 떠올리면서 만나지만 실제로 그런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부에 임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범생이 될 수 있지만 그 정도의 난관이 없다면 본인도 모범생으로 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을 오자마자 공부를 놓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생일 때는 수학올림피아드 같은 곳에 나가서 수학천재 소리 듣던 친구들이 대학에 올라오고 1년도 되지 않아서 미적분을 혐오하는 모습은 정말 볼만한 모습이다.

 

반면에 또 다른 부류가 있는데 진짜 천재들이다. 같이 놀고 술 마시고 하지만 대학교 성적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성적이 말도 정말 잘 나온다. 물론, 이런 친구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만나긴 극히 힘들지만 대학에 올라와서도 모범생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정말 성실하고 무서운 친구들이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대학에 올라와서는 고등학생 때처럼 공부하지 않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천재도 아니고 때로는 머리가 나빠 보이는 친구들도 있다. 이 친구들하고 이야기할 때면 모두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고등학교 때 어떻게 그렇게 공부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게임, 연애, 동아리, 사업 등에 몰입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다.

 

타인의 인생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정리해본 적도 정리하기도 어려우니 결국, 내가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자기 자신 뿐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최근 1~2년간 사주 붐이 불었다. 덕분에 사주를 조금 보았는데 사주를 보면 모두들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린 시절에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않지만 머리는 좋다.”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자랑할 것이 좋은 대학 간 것 말고는 없어서, 바로 사주가 틀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하도 줄기차게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궁금해지긴 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해서 사주를 읽어본 결과 확실히 공부를 잘 할만한 사주는 아닌 것 같긴 하다.

 

왜 그런지 내 사주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역마가 많아서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한다. 세상에 대한 자세가 삐딱하고 손재주도 능력도 없지만 탐욕은 강하고 보이지 않는 자존심도 무척 강하다. 윗사람 말을 듣지 않고, 통제를 따르지 않으며, 자기본위로 산다. 인내심이 강하지 않고 흥미가 빨리빨리 바뀐다. 그리고 치밀한 성격이 되지 않고 항상 즉흥적이다.

 

스스로 해석해본 결과 잘 맞는다. 나는 정말로 15분도 제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체질이다. 눈앞에 집중하기 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조건이 필요하다. 특히, 내일이 시험이라는 극한의 긴장감이 있어야만 앉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부는 벼락치기로 전날 공부를 했다. 손재주가 없어서 미술, 음악은 전부 꽝이었고 평생 잘해본 적이 없다. 이 분야는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인내심도 없고 당연히 지켜야할 절차가 같은 것을 지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매일매일 스스로의 탐욕에 따라 휘둘렸고 그래서 매일 밤을 새고 학교에 가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 부분이 웃기는데 항상 수업시간에 딴 공부를 했다. 그건 정해진 패턴이었다. , 모든 행동이 삐딱선을 탔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공부를 그나마 했을까? 물론, 재수 생활을 하면서 맞이한 마법 같은 기적 때문에 좋은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나마 그것도 기초적인 공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초중고등학교 시절 공부 경험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