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뇌를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에 대해서 처음 배웠다. 이를 통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 영감의 하나는 2000년 당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던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를 본 것이다. 당시 비판의 포인트는 기계적 환원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한 것으로 분할함으로써 모든 인간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는데 별로 동감하지는 못하다가 기계적 환원주의가 복잡성을 다루기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원래, 기계적 환원주의는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쪼개는 전략이다. 즉,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것들로 쪼갰는데 상호작용이 더 복잡해져 버리면 기계적 환원주의 전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는 항상 쪼개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만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층위, 역사적 층위, 개인사적 맥락, 신체의 기능, 유전, 세포의 개별 행위 까지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세포를 연구해도 사람의 사회적 층위나 역사적 층위를 알아내긴 어렵다. 이것들은 개별 세포의 합으로 설명할 수 없고, 그 위에 얹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단순한 것으로 쪼개어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면 다 상위의 층위를 관찰하여 연구하고 이들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보다 종합적이고 완전한 통찰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이공계로서 기계적 환원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이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역할을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물리학이 통계물리학을 받아들이고, 양자역학이 확률적인 존재 양태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새로운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유효한 관찰과 실험을 하는데 많은 난제가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것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뇌와 신체기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신체와 뇌는 컴퓨터와 각종 디바이스처럼 전선으로 연결되어 꼈다 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신체 전반에 신경이라는 뿌리를 내리고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모델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뇌에는 손가락 끝이 존재하는 상호 반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체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곰곰이 따져보니 뇌가 신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기관의 각 부위가 뇌라는 곳으로 모여서 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가 신체의 모든 부위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뇌가 어떤 자체적인 역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뇌에는 이성, 지능, 이타심 등 고등한 정신적 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 고등한 정신작용들은 신체의 모든 기관들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앞서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심리학 강의는 지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심리학은 지능이라는 것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신경세포를 보고 신체 기관 위주의 정신모델을 새롭게 상상하면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이라는 것을 스스로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인간의 조건 하에 있다. 인간의 고등한 정신적 능력은 신체 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모델이므로 신체 기관이 있어야 그에 부수한 지능도 있는 것이다. 즉, 팔다리가 있으면 지능은 그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문제를 풀 것인지 알아낸다. 하지만 팔다리가 없으면 지능은 팔다리를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즉, 지능은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는 지능인 셈이다. 팔다리가 선천적으로 없으면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눈과 귀가 있고 기억이 있으므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떠올리고 그 정보에 따라 지능이 작동한다. 선천적으로 시각이 없으면 본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고, 시각적 정보는 반영되지 않는다. 지능은 인간처럼 보고 듣고 움직일 수 형태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현대과학의 정수들은 그렇게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추상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반직관적이고 상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양상을 발견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신체적이고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 있어서 가능하다. 추상화된 것을 현실적인 것처럼 다루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다. 물론, 이 문자와 수식을 넘어서서 작동하는 추상적인 정신활동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문자나 수식 ‘사이’에서만 작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문자는 인간의 짧은 기억을 극복하게 해준다. 7개 정도만 저장할 수 있는 작업 기억을 시각으로 보충해주어 매순간 모든 것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부족함을 보충해준다. 수식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진리의 형태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다양한 개념을 기호화하고 이를 수식으로 배열함으로써 다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청각적인 신호를 통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신호를 이용하여 기억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는 문자와 수식이 없다면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지극히 찰나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신체기관의 ‘사이’에서는 오감과 기억이 연합되고 신호 정보를 추상화하고 방향성을 부여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 중 일부를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과학의 출현과 함께 예감, 본능, 직감 등 다른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구분하고 이상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취사선택되는 정보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현실 기반 증거일 때, 지능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 예감이나 직감 등으로 부르는 것일 뿐 그 근본적인 작용방식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신경세포를 보면서 받은 영감으로 이것저것 추론과 생각을 나열했지만 검증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 가설들이 나름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세포 단위에서부터 연구해 올라가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별 성과를 이루기 어려운 특히, 한국에서라면 더더욱 성과가 없을 것 같았고 그 과정도 매우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것은 종합적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 즉 사람의 행위와 사상에 대한 관찰이었다. 우리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신체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생각의 또 다른 결론은 추상적인 정신만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고 동시에 그러한 모델로는 고등한 정신작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뇌라는 기관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감과 신체의 결합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와 사상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곧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시행착오라는 생각이었다. 또, 추후 신경에 대한 환원주의적 연구가 좀 더 궤도에 오르게 되면 스스로 발견한 것들을 그것과 맞추어 봄으로써 보다 종합적인 통찰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항관계의 발견과 같은 인간의 구조적인 특성을 발견하다 보면 보다 추상적인 단위에서 인간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도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이런 생각은 철학이나 인문학에 끌리던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이공계 공부에 과학철학의 도움을 받은 이후 마음이 급격히 인문학 공부에 쏠렸고, 특히 정신분석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에 마음이 쏠리면서 이공계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경세포를 보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설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자화자찬 하면서 그 뒤 몇년간은 인간의 사상을 관찰한다고 인문학 독서에 푹 빠진 채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탐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현학적인 생각만 많아졌을 뿐 스스로 만족할만한 새로운 발견이나 발전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미쳐있었던 수학은 지금 돈을 계산할 때 사칙역산 하는 것 말고는 잘 쓰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무슨 공식이 나오면 머리만 아프고 생각하기도 귀찮다. 대학교 때에는 각종 사회과학과 철학, 정신분석학 등에 천착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저 흐릿한 느낌이라 그런 것을 스스로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1년 정도 양자역학에 미쳐서 살았지만 “파동방정식”이라는 이름 하나만 기억에 남았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천자문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지금은 天地玄黃만 남아있다. 그동안 공부하고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흥미를 가지고 살고 있지만, 이건 지금 눈에 들어왔을 뿐 곧 잊혀진다는 것을 항상 깨닫는다. 그저 흥미를 느끼는 것을 읽고 그 와중에 마음에 와 닿는 내용 한 두 가지가 잠시 남아서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1주일 이내로 사라진다. 그래서 발전하고 싶으면 그에 관한 내용을 더 읽어야 한다. A가 쓴 책으로 얻은 것이 있으면 그 논지를 발달시킨 B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몇 년여에 걸친 독서 끝에 그 분야에서 사용하는 어휘가 익고 논리 전개에 익숙해지면서 이제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알았으니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현실에서 그 내용을 업으로 삼았다면 모를까? 쓰지 않는 지식과 생각은 조금씩 사라지다가 어느 순간 그 흔적도 남지 않는다. 몇 년 후에 돌이켜 보면 너무나 허무하다. 그래도 별 수가 없었다. 그저 익히고 배우면서 조금씩 남기면서 지나가다 보면 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착실히 양분이 쌓이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지식을 다시 일일이 찾아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해보지만 다시 지나간 책들은 그저 과거의 빛바랜 생각인 경우가 많다. 다시 몇 년을 투자하여 흥미가 없는 분야를 다시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새로운 수험생활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과거의 것을 들출 여유가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마음속에는 이런 궁금증이 있다. 삶의 환경에서 정신분석학을 검증하고 철학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지내왔으면 어땠을까? 수학을 이용하여 상황을 모델링하고, 통계와 확률을 끌어들여 보다 나은 의사판단을 해왔으면 어땠을까? 잘못된 지식을 거르고 삶의 고민마다 결론을 이끌어냈다면 지금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내 삶 속에서 지식이 검증되고 정련되고 현실을 깨닫는 틀이 되며 다시 현실을 반영하는 지혜가 되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충실해졌을까? 이런 궁금증 말이다.


이런 궁금증이 들 때마다 호기심을 해결해줄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처방은 없었다. 그저 옛날 선비들처럼 하루에 일만번씩 성현의 지식을 낭독해서 영혼에 때려 박으라는 식의 처방 말고는 없었다. 이럴 때 만난 것이 Anki였다. 더 이상 일만번씩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이 잊을만하면 예전에 공부했던 내용들이 카드로 나타난다. 어떤 카드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어떤 카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어떤 카드는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환기해준다. 덕분에 지금 하고 있는 수많은 활동들이 과거의 기억과 함께 항상 재평가되고 재검토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현재의 발전된 수준으로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Anki의 카드마다 사적인 사족이나 당시의 생각을 적어놓는다.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 과거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독서는, 공부는 그저 한때의 흥미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미래의 자산이 되고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남게 되었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나의 독서 경험은 크게 3단계로 발전되어온 것 같다. 우선은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것이고 그 다음은 쾌락의 독서로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시기였다. 마지막은 최근인데 지식을 흡수하고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하는 독서다. 앞에서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시기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서유기로 시작되었고 각종 위인전과 동화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독서는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약간 부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책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놀았고, 책보다 재미있는 것을 열심히 찾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워낙 친구들이 안 놀아줘서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하지만 두 번째 단계인 쾌락의 독서로 넘어갔을 때에는 친구보다 책이 더 중요했다. 사실, 이것을 독서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본 것은 무협지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지만 무협지를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책 이야기는 빼고 무협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무협지를 스스로 찾아서 본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겨울에 무협지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친구 아들이 영웅문이라는 무협지를 본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두껍고 깨알 같은 글로 쓰여진 소설책을 읽는 친구 아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아들도 그런 책을 봤으면 하는 마음에 권유했다(무협지를 권유한 것에 대해서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책이나 다 읽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끌려야 독서는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까지 읽었던 책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면 각종 그림책에서 출발해서 서유기에서 폭발했고 계림문고에서 나온 문고판 150권 정도를 읽다가 먼 나라 이웃나라에 푹 빠져서 읽다가 메르헨 시리즈의 동화와 조금 더 성숙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에이브 시리즈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무협지라는 장르는 처음 접해보는 장르였다. 책은 두껍고, 글자는 작아서 보는 것도 부담되었고 겉표지도 이상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어서 거부감이 더 심했다. 하지만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중심부위의 표피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직접 책을 빌려와서 손에 쥐어주면서 읽어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해서 별다른 생각없이 페이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세계가 펼쳐졌다. 어머니는 총 3부의 영웅문 중에서 11권만 빌려왔는데 첫 페이지를 열고 2시간 만에 숨도 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저녁 9시쯤에 2권을 빌리기 위해서 어머니의 친구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친구 분이 많이 당황스러워 하셨다.

 

아마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본 쾌락 중에서 가장 강렬한 쾌감을 맛 본 것이 무협지 영웅문을 읽었을 때 얻었던 쾌감이었던 것 같다. 쾌감이라는 측면만 본다면 불가능해 보였던 대학입시를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깊은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충족감과 쾌감, 갑자기 많은 액수의 공돈이 생겼을 때의 쾌감도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하고 강렬하면서도 그 여운마저 사랑스러운 쾌감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몰입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이만큼 몰입된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영웅문에 대한 몰입 경험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책을 펼칠 때는 그냥 읽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읽고 있다는 의식적 행위가 점점 희미해지고 글의 내용이 점점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림의 고수들이 저마다 보여주는 재주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주인공의 심상이 손에 잡힐 것 같이 느껴지면서 주인공이 웃을 때는 내 마음도 웃고, 주인공이 울 때는 내 가슴도 찢어진다. 각각의 인물들은 스스로 실체화되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한다. 드높은 무학의 이치가 알 듯 말 듯 내 마음 속에 스치면서 아쉬움을 낳고 상황의 공교로움과 무학의 이치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거대한 세계가 흐르는 법칙의 조각을 살짝 내비치고 삶의 무상함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사무치게 느껴지면 마음을 격동하게 한다. 마음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과 그 필연성에 울고 웃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응원하면서 어느새 대단원의 끝이 다가왔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나의 호흡과 아픈 팔과 뻣뻣한 목 등 육체가 느껴지고 현실에 돌아오면서 이 현실의 지루함과 하찮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현실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격동과 감동을 다시 맛보고 싶은 나머지 마치,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다시 허겁지겁 영웅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이것은 마약 같은 쾌감이었고 책을 덮고 있으면 그 금단증세도 빨리 왔다. 그래서 영웅문을 읽고 또 읽었고 총 318권의 책을 대략 300번은 읽은 것 같다. 당연히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다시 맛보진 못했다. 그러니 다시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엄청난 집착으로 영웅문의 작가 김용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었다.

 

추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나와서 유행했지만, 솔직히 독서의 몰입 경험에 비하면 솔직히 너무 약했다. 어린 마음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열심히 분석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분석결과와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글과 그림, 영상이라는 매체의 차이 때문이다. 히로인의 외모를 설명할 때, 글은 몇 가지 특징만으로 그녀를 묘사할 뿐 그녀의 외모와 매력이 묘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바를 그대로 공감시킨다. 하지만 영상 매체나 그림은 그녀의 외모를 보여주고 그녀의 매력에 공감하길 바란다. 당연히 좋고 싫음이 발생한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림체를 고르면서 보는 이유도 그림에 공감해야만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쓴 글은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그 본질적인 경험이 이전된다. 나는 글의 묘사를 읽으면서 글쓴이의 심정에 공감하면서 그 심정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히로인을 맘속에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화자의 주요한 감정에 반응하면서 글의 의도를 느끼면서 글에서 보여주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여백을 자신만의 심상으로 가득 채운다. 반면, 영화나 만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은 심상을 전부 제시하고 있어 주인공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고, 고증이 안 맞고, 연기가 엉망이고 등등을 따지면서 보기 때문에 시청자는 오히려 해당 내용을 즐기기 위해서 통과해야할 것들이 많다.

 

, 글로 잘 쓰여진 것은 몰입하기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쉽고, 그 풍부함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더 크다. 물론, 디테일한 사실이나 복잡한 내용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물론, 독서는 훈련되어야 한다. 그 훈련이라는 것은 책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글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고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준비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요약하고 축약하고 그런 훈련은 공부의 기술이지 독서의 기술은 아니다.

 

한 번 마약을 맛본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약을 찾게 된다. 마찬가지로 몰입독서의 쾌감을 제대로 맛 본 사람은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재미있는 책을 열심히 찾게 된다. 내가 그랬다. 이전까지는 그저 심심할 때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읽는 것이 책이었다면 이젠 눈에 불을 켜고 광적인 집착으로 재미있는 책을 찾게 되었다. 이 경험은 정말 중요한데, 이후로 모든 책을 볼 때마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보물일지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심리 때문에 책을 볼 때마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을 것 같고, 정말 훌륭한 생각이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확인하는 기대심리로 책을 읽게 되었다. 


영웅문은 대단한 작품이고 김용은 신필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협지를 보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영웅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독서 경험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이 영웅문에 대한 이야기로 해보아야겠다. 



알 수 없는 질병과 고통으로 삶이 밑바닥을 쳤을 때,

 

자신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고 행동은 제어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자존감이 밑바닥을 쳤을 때,

 

평생 이루지 못하던 것, 회피하던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평생 해보지 못한 턱걸이를 성공했을 때, 기뻤다.

 

훌라후프를 10분 이상 돌리고 나니 성취감이 들었다.

 

화학 주기율표를 외웠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렇다. 화학 주기율표를 외웠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10년 내에 가장 맑았다.

 

머리로 외우느니 몸으로 숙련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나이 40대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더듬더듬 따라하면서 외우는 것이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집중하기에 좋았다.

 

이후, 많은 기억술 계열도 살펴보았지만 단순히 정보를 빨리 외우는 것보다는

 

좋은 것을 외우고 그 뜻을 살피면서 내 인생에 밑바닥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에 집어넣다 보면

 

단순히 학교 공부에서 시험을 잘보기 위해서 공부하던 때에는 얻을 수 없었던

 

스스로가 커지고 발전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또, 그저 독서가 좋아서 책을 한번 흝어보고 그저 공감되는 내용에 공감하고 넘어가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실감이 있었다.

 

또한, 책을 읽고 요약하고 주요한 내용을 정리해서 암기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머리에 외우는 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 근육이 강해지면서 점점 암기가 수월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운동에 스쿼트가 있다면, 정신을 단련하는데는 정신을 집중하고 암기하는 것이 최고인 듯 싶다.

 

흥미로운 것들, 갈구하는 것들을 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자.

 

그리고 읽고 정리하고 암기하자. 머리는 맑아지고 정신은 튼튼해지고 영혼은 살찔 것이며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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