넒은 교정 때문인지 아니면 젊음에 대한 동경때문인지 대학교에 광인들이 잘 모이는 것 같다. 광인들은 광인이라는 것이 테가 난다. 어떤 광인은 짧은 치마를 입고 4발로 뛰기도 하고 어떤 광인은 하의 실종으로 나무 밑에 앉아서 속없이 즐거운 미소만 흘리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마주칠 수 없었던 광인들을 보는 기분은 마치 포르노처럼 인간성의 치부가 여과 없이 마구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거나 혹은 밤새 놀다가 가끔씩 밖에서 밤을 새야할 때면 없는 돈에 여관이나 모텔에서 자기는 어렵고 24시간 만화방을 찾아가 만화책을 뒤적이면서 잠들곤 했다. 만화방에 앉아 있으면 나이 드신 아저씨들이 종종 나타나 만화를 얼굴 앞에 세워놓고 말을 한다. 연극투의 선명한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분노하고 애처롭게 울길래 처음에는 만화책의 대사를 따라하는 줄 알았다. 만화책을 보다가 호통치는 목소리에 깜짝깜짝 놀라서 보면 그 아저씨다. 길게 살펴보아도 만화책의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말은 너무 많다. 혼잣말이다. 그 아저씨는 밤새 호통을 치면서 내 잠을 깨우곤 했다. 

            

대학에는 정말 다양한 군상들이 돌아다녔다. 방언 터지듯 선교하는 선교사와 도를 설파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그리스를 주제로 언쟁했고, 학교에서 거주하면서 노숙자 같이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수다를 쏟아부어 도망가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차비를 구걸하는 분도 있었다. 간혹 식사 후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일면식도 없이 다가와 왕년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길고 긴 질곡 같은 삶에 대해 푸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응수도 하고 귀를 기울여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존해오는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가게 되었다. 먼 거리에서 그 사람이 보이면 빙 둘러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동기, 선후배, 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징후가 보인다. 고교시절 전국 1등을 했다는 후배는 별 다른 이유 없이 방바닥에서 숨만 쉬면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종적이 끊긴 사람이 있고, 차이고 와서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질까 싶은 폐인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나타난다. 악의에 가득 차 비방에 비방을 하느라 정신줄을 놓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고 누가 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호의와 선의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대놓고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얼핏 얼핏 교정을 돌아다니는 광인들과 닮아가는 것이다. 결국, 어찌해보지 못하고 관계가 멀어지거나 도망가게 된다.

                 

감당할 수 있는 정상인 사람들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후배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성적인 후배는 사람들을 일정한 거리 위에 두려고 한다. 그 거리보다 멀어지면 친절하게 다가가 상냥하게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끌어당긴다. 하지만 그 거리보다 가까워지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해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그 후배의 주위에는 친절에 반해 사랑을 느끼고 쫓아다니는 다수의 남자들과 밀어내기와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는 호의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남자친구로 구성된 인간관계를 보여주기만 한다. 그 친구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항상 동일한 상황이 구현되고 이루어진다. 어떤 후배는 애정을 무척 갈구했지만 애정이 입바른 소리로 구박하거나 사실을 바로잡는 것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본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애정을 의심하고 시험해보면서 결국, 상대가 애정을 접으면 그제서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안도하는 것이 보인다. 어떤 친구는 자신을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자신이 비련과 연결 지었다. 가끔은 슬픔을 원해서 일부러 망가질 것이 뻔한 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패턴을 바꿔보기 위하여 이야기도 해보고 토론도 해보고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을 같이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 때뿐이다. 알콜 중독자들이 항상 입으로는 술을 끊어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하지만 정작 술 앞에서는 마셔야할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 결국 술을 마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입으로는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탓하지만 누가 봐도 불구덩이인 곳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그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패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패턴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패턴 위에서 모두 맹목적이었다. 그나마 자기 파괴적인 패턴이 아니고 스스로의 패턴이 주위 환경과 잘 조화되면 정상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턴이 정착되지 못해서 주위 환경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거나 자기 파괴적인 패턴으로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그 속의 유일한 대죄인처럼 살고 있었다. 처음 대학에서 마주쳤던 광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더 이상 광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정상인이란 자신의 좋은 패턴과 좋은 환경이 어우러진 운좋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패턴과 환경이 어긋날 때 사람들은 광인처럼 행동한다. 스스로에게 칩거해 들어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기 위안에 몰두한다. 결코 패턴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저 운이 좋은 광인과 운이 나쁜 광인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는 어떤 광인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 패턴을 조건으로 문자열 바꾸기

 

앞서 vim의 문자열 바꾸기는 특정 패턴의 문자열을 원하는 문자열로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문자열을 바꿀 때, 단순히 문자열 패턴을 찾아서 바꾸는 것만으로 부족한 경우가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이 이름과 거주지 그리고 그 사람의 집 전화번호를 데이터로 기록했는데 이 전화번호에 지역 번호가 빠져 있어 지역별로 지역번호를 부여해야하는 경우다. 

 

이름    거주지    전화번호

철수     서울     888-8888

영희     광주     888-8888

재범     서울     777-7777

선영     부산     888-8888

호동     서울     666-6666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전화번호 앞에 지역번호를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번호는 살고 있는 거주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가령, 서울의 지역번호는 02이므로 서울에 사는 철수, 재범, 호동은 전화번호 앞에 02- 라는 문자열이 첨가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자열 패턴과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문자열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렇게 찾는 문자열 패턴바꿀 문자열 패턴다른 경우 찾는 문자열 패턴을 조건으로 바꿀 문자열바뀐 문자열로 바꾸면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명령 라인에 명령어를 입력하면 된다

 

:g/[찾을 문자열]/s/[바꿀 문자열]/[바뀐 문자열]/[바꾸기 옵션]

 

이를 해석하면 문서 전체에서 [찾을 문자열]이 있는 행을 모두 찾아서 그 행에 [바꿀 문자열]이 있으면 이를 [바꾸기 옵션]에 따라서 [바뀐 문자열]로 바꾼다로 해석한다. 

 

[바꿀 문자열], [바뀐 문자열], [바꾸기 옵션]앞서 포스팅한 내용대로 하면 적용된다. [찾을 문자열]도 [바꿀 문자열]과 마찬가지이다. 명령의 가장 맨 앞에 g는 항상 입력하도록 하자. g를 생략할 경우도 작동하지만 별로 쓸모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위의 명령에서 [바꿀 문자열]을 생략하면 [찾을 문자열]이 [바꿀 문자열]의 역할을 한다.

 

:g/[찾을 문자열]/s//[바뀐 문자열]/[바꾸기 옵션]

= :%s/[찾을 문자열]/[바뀐 문자열]/[바꾸기 옵션]

즉, 모두 문서 전체에서 [찾을 문자열]을 찾아 [바꾸기 옵션]에 따라서 [바뀐 문자열]로 바꾸라는 명령이다. 

 

이제까지 설명한 방식에 따라서 위의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 앞에 지역번호를 추가하는 명령어는 다음과 같다.

 

:g/서울/s/\(\d\+-\d\+\)/02-\1/g

문서 전체에서 '서울' 이라는 문자열이 있는 행에서만 숫자의 연속 하이픈(-) 숫자의 연속 형태의 문자열을 그 앞에 '02-' 라는 문자열을 붙인 형태로 다음과 같이 바꾼다

 

이름    거주지    전화번호

철수     서울     02-888-8888

영희     광주     888-8888

재범     서울     02-777-7777

선영     부산     888-8888

호동     서울     02-666-6666

 

만일, 다음과 같이 명령어를 입력한 경우라면 내용이 조금 달라진다.

 

:g/\(\d\+-\d\+\)/s//02-\1/g

이것은 :%s/\(\d\+-\d\+\)/02-\1/g 와 동일하므로 [찾을 문자열]이 숫자의 연속 하이픈(-) 숫자의 연속 형태의 문자열이고 동시에 [바꿀 문자열]이 되므로 다음처럼 모든 전화번호 앞에 '02-' 라는 문자열이 첨가된 형태로 바뀐다.

 

이름    거주지    전화번호

철수    서울    02-888-8888

영희    광주    02-888-8888

재범    서울    02-777-7777

선영    부산    02-888-8888

호동    서울    02-666-6666

 

Anki 파일

 

아래는 본 포스팅의 내용을 갈무리하기 위한 Anki 파일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045 vim 특정 패턴을 조건으로 문자열 바꾸기.ap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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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다. 당연히 평소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 밤을 꼴딱 새면 어찌어찌 성적은 나올 것 같다. 이제부터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갑자기 시험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엉뚱한 책을 읽고 싶거나 어떤 끝내주는 영감이 생기면서 시험공부를 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해본 적 있는가?

 

난 있다. 아니 항상 그래왔다. 시험 전날이 되어 더 이상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려고 하면, 갑자기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야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갑자기 너무나 뜬금없이 물구나무서기를 숙련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평생 쓰지 않던 소설에 대한 착상이 떠오르면서 소설을 쓰고 싶거나, 평소 어려워서 보지도 않던 전문서적에 대한 탐구심이 넘치게 되는 현상은 분명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이런 성향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드물게 나타나는 성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존 페리의 미루기의 기술을 읽어보니 이러한 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존 페리는 미루기의 기술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러한 미루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미루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도 보다는 미루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이를 오히려 합리적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를 존 페리는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로서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미루기 습관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위트가 넘치는 문장과 일상에서의 스스로의 단점을 수용하고 이를 인생의 즐거움과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지혜가 빛나는 책이니 여러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미루기의 습관이 있으신 분들은 정말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존 페리는 할 일을 미루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미루기라고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딴짓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딴짓은 나처럼 인생을 피해가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평생 딴짓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졸고, 무협지와 만화책을 보고 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욕구에 따라서 그럴 수 있지만 공부를 해도 딴 공부를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국어, 영어, 수학이 가장 주요한 과목이었고 다른 암기 과목은 시험을 보게 되어서야 암기하는 것이니 이런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국영수를 공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국어 시간에는 영어를, 영어 시간에는 수학을 공부하는 식으로 했다.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없고 내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만 공부가 가능했다. , 딴짓만이 내가 평소에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교육하는 방식도 대부분 그러하다. 우선,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목적을 갖고 목표를 세우게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할 일을 제시해주고 이를 하도록 강하게 종용한다.

 

아쉽지만 보통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일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목적과 목표가 너무 추상적이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존경 받는 것, 모두 추상적이다. 40대가 되어버린 나도 그런 추상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그런 목적을 세우고 목표를 만들어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추상적으로 세웠던 목적과 목표는 그저 추상적인 것에 머물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이 모든 빌어먹을 고통스러운 일들을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는 목적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고통을 자초하지 않을 인생을 살고 싶은 욕구로 가득차게 된다. 정말 모든 요건이 우연히 잘 맞아서 공부가 되고 공부를 통하여 스스로 이득을 얻고 그 이득에 만족하는 선순환을 구축하는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추상적인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의 고통에 질려서 쉬고 싶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은 다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쉬고 다시 그 목적을 생각하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친구들이다.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정상적인 친구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공부를 어느 정도 잘하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그렇지 않다. 고통에 질린 나머지 자신의 목적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의 공허함과 현실적인 고통 사이의 괴리를 발견한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추상적인 목적과 그 목표에 대한 괴리를 메우는 방식도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적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외치면서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려고 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행위를 추구하여 매순간 충만함을 기반으로 삶을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친구들이 현재의 고통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허하지 않은 목적과 목표를 찾아 다시 열정이 일어나면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목적을 찾지 못하면 현재의 쾌락에 머물러있게 된다. 두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의 고통이 너무 커 보이고 따라서 불공정한 거래인 것 같은 마음에 실제로 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지도 않고, 기존의 체계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냥 경계선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최악의 경우였다. 공부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벌고, 대우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런 것을 원하므로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우받지 못하고 돈도 없는 삶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니 현재에 고통을 감수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정을 불태워야 하고 하는 것을 알지만 내 몸은 절대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자극적인 것에 눈이 돌아가고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그리고 놀고 나면 죄책감과 무력감이 엄습한다. 이러다 보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한심하게 느껴져도 몸과 나의 무의식은 그저 노느라 바쁘다.

 

절대로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몸과 무의식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거나 통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놀아야 하니 전혀 공부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통제된 상황이 만들어져야 공부를 하는데, 아쉽게도 통제된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에 순응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 통제된 상황에서 비로소 한 가지 잘 정제된 욕망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 통제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하지만 육체는 이미 통제되어 있으니 정신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거기에 현재 수업과 다른 교과서가 있으면 그 교과서를 열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시간에 영어를 보고, 국어 시간에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수업시간에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공부법이다. 앞에서 선생님이 온갖 시청각 교재를 제공하고 있고, 판서하고 설명하고 있으니 이를 열심히 듣고, 보고 공부하는 것이 오감에 입체적인 효과를 부여하여 가장 효과적인 공부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한 공부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내가 그랬다. 나는 이중삼중으로 설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서 절대 공부가 목적이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이 공부가 딴짓이 될 때에만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에만 그 탈출구로 다른 교과서가 있을 때에만 그것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공부는 단 한번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공부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의 발견 덕분에 어떻게든 공부가 가능해지긴 했다. 멘탈이 약하기 때문에 공부가 중요하고 이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는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만 남게 된다. 그래서 일단, 다른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지금 바로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평소에는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험 때에는 시험에 대한 강력한 압박 덕분에 오히려 공부하기 더 편하다. 공부를 한다는 것 보다는 내일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서고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오히려 시험의 부담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 좋아서 빨리 해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수업시간만 공부해서는 부족하다. 자율학습을 할 때 공부를 해야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비주의류나 기공류의 연구 덕분에 스스로를 관찰하고 심상이라는 것을 구축하게 되면서 스스로 믿는 심상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공부가 가능해졌다. 주로, 수학 공부와 연구였지만 결국, 성공을 위한 공부라는 것을 뒤로 제치고 지금 당장 자신의 발전을 위한 연습이라는 것으로 구체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너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관찰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고 자신을 잘 관찰해보길 바란다. 구하면 얻어질 것이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고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러한 책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댔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하거나 스승없이 수행하면 주화입마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것인가?

 

한문도 모르고, 배경이 되는 동양철학도 모른다. 일단, 한글로 번역된 책들을 찾아서 읽어본다. 너무 어려워 나에게 맞는 수준의 책을 골라서 읽는다. 수도 없이 책을 펼쳐보고 사보고 읽어본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조금 다른 관점으로 말하고 있는 책을 읽어본다. 그랬더니 서로 말이 다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다시 질문이 나온다.

 

어떤 책은 믿을만 하고 어떤 책을 믿을 수 없을까?

 

어떤 것은 허황된 것 같고 어떤 것은 조금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읽어본 책들을 현실 가능성, 근거 제시 등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해보고 신뢰 등급을 매긴다. 그리고 신뢰등급 수준에 따라서 서로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비난하는 사실을 나누어 가장 안전하게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 위주로 방법을 구축한다. 실행 방법에 있어서도 큰 부작용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실행하기 편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방법을 구축한다. 결국, 이구동성으로 옳다고 말하는 바를 중심으로 실행할 수 있고 큰 부작용이 없을 것 같은 것으로 실행 플랜을 짠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 세계가 이해되며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기공류, 요가류, 명상류 등이 말하는 바는 결국, 심상(心象)의 구축이고 그 외의 내용들은 내 스스로의 욕망에 내가 휘둘리고 있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관련 내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비웃음 당하고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본다. 부모님은 걱정했고, 친척들은 괴짜에 천방지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이 중2병스러운 집착과 탐욕으로 연구를 하니 연구의 동력은 충분했다. 겉으로는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척 열심히 꾸며댔지만 속으로는 곧 무림이 고수가 되어서 그 결과를 보여주마 하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어리석음처럼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아무리 충고해도 그것을 듣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이것은 분명한 어리석음이었다. 현실적으로 무림의 고수가 있다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알려질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유명한 무술가는 수십년의 고련 끝에 소의 뿔을 꺽은 최배달, 이소룡, 역도산 같은 이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술도 어린 아이 눈에는 너무 대단해 보였지만 너무 어렵고 고된 길로 보였고, 그 때 당시의 현실에서는 도전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친구들 어른들 모두 이러한 어리석음을 바로잡아 주려고 말했지만 스스로는 그럴수록 더 현실을 부정하고 연구를 계속했으니 완전히 탐욕에 물들어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었던 것은 분명하고 결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이 때 잘못 배우고 내린 결론 때문에 20년간 체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연구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진위를 판단하고 실천해보고 하는 과정이 모두 동반되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마다 그 희열에 기뻐했고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낙담하기도 했다. 비록 공부해야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이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연구가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사색하고 가정하는 버릇이 생겼고 스스로의 머리와 눈으로 진위를 가리려고 노력해볼 수 있었다. 비록 원하는 만큼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음악과 게임에 빠지듯이 나도 이러한 연구에 빠진 것이니 꼭 낭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충분할 정도로 이득을 얻은 것 같다.

 

우선, 나는 개성이 생기고 권위자가 되었다. 전교생 중에서 이런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유일하다는 자신감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째로는 이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부수적으로 얻은 기술들이 정말 많았다. 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과 여러 수행을 통해서 단기적으로나마 상당히 강력한 집중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이미지 트레이닝 기술, 다독(多讀), 밤새기, 공부를 지속할 경우 발생하는 어깨의 통증과 허리 통증 다루기, 운동 방법, 그리고, 사람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쌓이면서 나의 불안한 기질과 산만함 등을 정면으로 꺾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연구를 한다는 개념을 알게 되었던 점이 가장 컸다.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체계를 세워보고 진위를 가리고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기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잘못된 결론도 내가 열심히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고 당연히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책에서 읽은 것을 주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 움직이는 지식들이 구축되었고 그러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이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나마 열심히 호기심을 탐구하고 진위를 최대한 가리고 연구하고 사색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기공류 등 신비의 세계를 파헤친 결과 얻은 또 하나는 자기 계발서를 발견한 것이다. 정확히는 자기 계발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것이다.

 

, 자기 계발서는 나의 욕망이 현현된 것이고 거기에 심상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나에게 자기 계발서는 무공비급처럼 보였다. “○○○을 하시면 ○○○이 됩니다.”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구조는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삼시 세끼를 들깨로 120일간 먹으면 몸을 날릴 수 있습니다.”와 같은 문구는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그저 그대로 하면 된다. 특히, 내공류나 기공류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보다 훨씬 쉽게 다가오는 친절한 무공비급처럼 보였다. ‘3시간 수면법을 읽고 하루 3시간만 수면하면 하루 21시간의 시간을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타인의 심리를 읽는 법, 여자 꼬시는 법, 사기치는 법, 안마하는 법 등 온갖 책을 읽고 가능한 경우에는 시도도 해보았다. 신비주의 계열도 많이 읽어봐서 점성학부터 연금술까지 열심히 읽어 봤다.

 

자기 계발서는 항상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사람들을 성공시키고 뛰어난 능력을 주고 온갖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해준다. 이 모든 자기 계발서가 허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자기 계발서도 있고 허황되어 보이고 믿을 수 없는 자기 계발서도 있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를 읽는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 허황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기 계발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를 바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핍에 대한 반작용으로 욕망이 발생할 때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 계발서를 읽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일에 바빠서 그러한 자기 계발서를 들추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기 계발서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주는 ‘How to’ 시리즈 같은 매뉴얼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기공류나 연금술, 신비주의 등은 정말 오래된 자기 계발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계발서는 언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유를 사용하고 약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해야할 절차 등을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여 상상한다. 저자는 그저 독자가 그러한 상상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처음에 욕망을 자극하고 어느 정도 가능해 보이는 절차를 상상해서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몇 가지 성공사례를 보여주면 나머지는 독자가 알아서 빠져든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이나 내용이 상당 부분 개연성 있게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닌자들이 높이 뛰기 위한 기술을 수행하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을 따르면 어지간한 집들 정도는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게 된다고 하는 능력을 익히는 방법이다. 이 기술은 초능력 같은 것을 준다는 자기 계발서의 핵심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방법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핵심은 나무 묘목을 마당에 심고 매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 묘목을 뛰어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나무 묘목은 천천히 커진다. 따라서 사람이 매일 열심히 훈련을 하면 그 나무 묘목이 자라는 속도에 맞추어 뛰는 능력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작은 초가집 정도는 뛰어넘게 자란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능력도 집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커진다.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구축하려고 하는 심상(心象)이 보이는가?

 

묘목이 낮게 땅위에 모습만 보인 상태일 경우에는 사람은 당연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의 상태를 당연히 긍정할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열심히 연습한다면 그 구체적인 연습량이나 발전 정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나무 묘목이 매일 0.1밀리미터 정도 올라가는 수준이라면 가능하겠지 하는 식의 등식이 성립된다. 따라서 사람은 나무의 성장속도에 따라서 스스로의 점프 실력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나무가 집보다 커짐으로써 사람의 점프 실력도 자연스럽게 집보다 높이 뛸 수 있게 된다.

 

실제로는 따져야할게 더 많다. 첫 번째는 훈련량이 얼마나 되어야 하며, 매일 훈련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두 번째는 인간의 발전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문학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뛰어넘어 버렸다.

 

, 첫 번째로 묘목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한번 동의하게 되고, 두 번째 구절에서 그 묘목이 적당히 낮다고 스스로 전제하면서 당연히 그 묘목이 커지는 속도에 따라서 일정하게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의가 그야말로 해당 명제에 대한 동의이므로 그냥 나무가 집보다 커진다면 사람의 점프실력도 그냥 집보다 높게 뛸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게 되면 내 머릿속에 등록된 심상은 충분히 노력한다면 극히 작은 정도의 발전을 언제나 이룩할 수 있다.”가 된다. 이러한 심상은 사실 본인이 가진 욕망 즉, “높이 뛰고 싶다.”라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구축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인정 욕구와 성적인 욕구도 아마 동반될 것이다. 사실, 이것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심상을 이용해서 다른 영역에서 스스로 노력할 수 있다면 오히려 노력하게 하고 발전하게 해주는 좋은 심상이 된다. 하지만 진짜로 집보다 높이 뛰겠다고 노력하게 되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좌절이 심상의 긍정적인 면까지 파괴하게 되고 인생이 헝클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계발서를 볼 때, 그 자기 계발서를 고른 나의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당연히 내가 낚인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깔고 보게 된다. 그러면 예외 없이 너는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응원을 본다. 이 부분은 천천히 즐긴다. 현실에서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 계발서에서라도 가능하다고 말해주니 참 다행이다. 미약하나마 자존감을 추스릴 계기가 되어준다. 그리고 읽는다. 역시 나의 욕망을 자극하니 짜릿하고 흥분된다. 큰 바위를 쪼개고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집을 뛰어넘는 자신을 생각해본다.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일을 쾌도난마로 해결하는 본인의 모습도 상상해본다. 책에서는 그런 자신이 가능하다고 연신 다독여준다. 잠시 고조된 자존감과 함께 그렇게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방법을 찾는다. 방법을 실천하는 자신을 생각해본다. 거듭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구축된 심상이 보인다. 많이 읽다 보니 어느 순간 패턴이 보이는 것이다.

 

자기 계발서의 기본 패턴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될거야”, “너의 잠재력을 믿어봐라는 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심상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이것을 설득하는 과정은 대부분 원효대사의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와 같은 패턴이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한다. 이 부분은 제일 좋아하는 심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구축하기 어려우므로 자기 계발서를 통해서 고양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기 계발서에서는 저마다 근거를 가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심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볼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있고 새로운 관점으로 나에게 이 심상을 제공해주었다. 이 맛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자기 계발서를 찾는 것에 중독되어버리기도 했다.

 

그 다음 즐길 거리는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이다. 가능할 것 같은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너무 어렵기도 하고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때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그대로 재미있다. 그야말로 병맛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마주치기 어렵거나 수행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동시에 가능할 것 같다고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그것도 나름 문학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축지법을 쓰는 방법을 해설한 책을 봤는데, 몸을 완벽한 오각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우주가 알아서 축지를 일으켜 준다나? 너무 재미있었다. 완벽한 오각형은 대단한 떡밥 아닌가? 누구도 그 사람의 자세가 완벽한 오각형이라고 말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해볼법한 쉬운 해결책이고 또, 동시에 객관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부정하기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고 실제로 오각형을 만들려고 버둥대는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너무 웃긴다. 게다가 이런 것을 진짜 축지법을 쓰는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서 역시 세상은 넓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책들은 점점 창의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보았던 책에서는 축지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보폭을 늘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완벽한 오각형이라니 아마도 이러한 떡밥은 개연성 위주의 방법을 버리고 신비주의 방식으로 바꾼 것 같다. 다음에는 어떤 방법이 등장할지 내심 기대가 된다. 그러한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도 대단한 창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도해보지 않을 테지만 정말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그것은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 결론적으로 나는 자기 계발서를 이해함과 동시에 그 자기 계발서 읽기에 중독되었다. 이것은 무협과는 다른 읽는 재미가 있고, 때로는 내 정신을 정말 판타지로 옮겨주기 때문에 무척 즐겨 읽었다. 물론, 실행은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정말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 속에서 원인이 이것일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급작스러운 개선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내가 밤의 시간과 수면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어떤 모델의 변화였다.

 

원래의 모델은 이렇다.


일단, 밤의 시간에 대한 나의 모델은 아래와 같다.  


밤의 시간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으로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 없이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활동은 밤에 이루어지고 낮의 활동은 그저 부과된 의무 같은 것으로 짐에 불과하다. 내 삶의 핵심은 밤에 이루어지므로 낮에는 대충 활동하고 밤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다. 


수면이란 것은 그저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꺼지는 것이고 수면은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나에게 수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잔다. 하지만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신체의 자연스러운 적응으로 더 깊이 푹 잠들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할수록 수면의 질이 높아져 이득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평생의 수면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나에게 이러한 모델이 작동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게다가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등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이 모델은 그 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수면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하나둘 삶의 방향성과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덕분에 혼란스럽던 문제들이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수면의 문제가 실체를 드러냈고 위의 모델은 결국 하나씩 깨지고 있었다.

 

밤의 시간이 나의 시간이라는 생각은 직장이나 학생들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프리랜서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제는 깨어있는 시간이 전부 소중하고 나의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서 주위에 함부로 간섭해 올 사람도 없고 주위가 시끄러우면 귀마개를 하면 되니 더 이상 밤에만 자유를 누릴 이유는 없게 되었다.

 

두통과 체증이라는 숙원이 해결되면서 삶의 스트레스가 내 스스로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지니 짜증도 줄었다. 나의 패턴상, 고통과 짜증은 그것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몰두하게 하는데, 금연으로 식탐이 생긴 것 말고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대한 욕구 자체는 줄어들고 있었다. 자극적인 게시판 글이나 정치적 논쟁을 보는 것, 영화나 드라마를 밤새 시청하는 것과 헐벗은 사람들을 보는 단순하고 말초적인 욕구가 가라앉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밤의 시간에는 공부를 하거나, 강의를 듣고 운동을 하는 미치도록 건전한 일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조건이 무르익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때, 최후의 조각을 맞춰준 것이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서평을 다시 쓰겠지만 경험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던 내용이 무척 많아서 정말 쉽고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자주 낮잠을 자서 공부에 큰 효과를 보았던 나의 경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도 있고, 고등학교 때 잠을 자지 않고 버텼을 때 느꼈던 수면 부족의 파괴적 위험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덕분에 잠을 안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를 안고 사는 것인지 납득해버렸다. 이 납득으로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 완전히 깨졌다.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해서 불면증을 치료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잠을 못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 잠을 못자는 것이 지옥이었다. 단지 그 원인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불면증에 괴로워할 때는 꿀잠을 애타게 원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기존의 모델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각성 상태로 있을 수 없을 때야 잠을 시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으면서 그 동안 내 속에 있던 중2 시절 읽은 3시간 수면법의 논리가 처음으로 깨지고 수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명확하게 확립되면서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현재의 개선된 수면상태는 일시적이다. 수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깨졌지만 현재의 낮아진 스트레스와 고통이 개선된 수면상태의 한 축이기도 하다. 이는 지병의 개선도 있지만 현재 일을 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을 하면 당연히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시 밀려올 것이고 그러한 고통에 대한 회피와 일을 한 자신에 대한 보삼심리로 다시 밤의 시간을 열심히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다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잠을 자지 않고 놀려고 할 것이다. 또한, 일을 많이 벌리는 본인의 성격상 밤에 일하는 것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면증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불면증이 단지 귀찮고 그 순간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면이 개선된 지금은 개선된 수면 상태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경험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잠을 못자는 삶은 삶아지고 있는 개구리의 처지와 같은 지옥이었다. 마냥 지속되는 고통과 피로, 인내심 저하로 삶이 비틀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어도 이를 인지하기도 어렵고 저항하기 어려운 그런 지옥이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항상 여유로운 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마 다시 수면이 박탈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어야 마음이 놓이리라. 그리고 그 시작은 나의 수면 습관을 개선하게 해줬던 최후의 조각인 리처드 와이즈먼나이트 스쿨을 씹어 먹는 것으로 해보려고 한다


몸무게가 세 자리 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무릎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한 끼 식사로 6~7천원짜리 시장피자를 먹어왔지만 세 자리수를 넘지 않던 내 몸무게는 담배를 끊으면서 늘어난 군것질에 세 자리수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몸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무릎이 나가고, 고혈압이 치솟아 성질머리가 나빠질 것이고, 무거운 몸 때문에 호흡 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건강검진에서도 대사질환 증후군이 있으니 감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해왔다. 이런 모든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몸무게를 대학시절의 몸무게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재로부터 20을 감량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아무나 하나 내 스스로를 잘 아는데 무턱대고 절식하기 시작하면 그 요요증상으로 몸무게가 200을 뚫고 올라갈지 모른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열심히 할 정도로 의지력이 세지 않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운동 후 피자 한판을 먹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기 때문에 운동만으로 살 뺀다는 생각은 이미 접었다. 존 다이어트 같은 책을 열심히 읽어봤는데 이건 뭐 영양사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로 보였다. 인생을 전부 다이어트에 갈아 넣을 각오라면 이런 방법을 실천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다이어트 관련 책들은 무척 많은데 각종 다이어트 방법들을 읽어보니 이 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적절한 적응의 기제가 있다면 사람은 그에 맞는 삶의 형태를 보이는 법이다. , 지금보다 20줄어들은 몸무게로 사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 있고, 그에 맞는 생활습관과 삶의 양태를 구축하면 자연스럽게 살은 빠지고 정신과 육체는 가장 조화로운 형태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살을 빼려면 그러한 상황을 만들고 생활로 고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삶을 모형을 생각해보다가 좀 더 단순한 질문에 도달했다. 그 질문은 , 나는 필요 이상 먹는가?” 였다. 삶의 모형을 구축할 필요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이것이 궁금해졌다.

 

다이어트 방법을 고민하면서 여전히 피자 한판을 한 끼 식사로 먹고 있던 삶에서 어느 순간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개선되어 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화로운 수면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야식이 중단되었다. 종종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해당 문제의 실체가 보이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야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야식을 줄여야 한다고 말할 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야식이 나의 정상적인 3끼니 중 한 끼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면증이나 수면관련 이슈를 경험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잠이 안 올 때는 무언가를 먹어야 그나마 잠을 자기 쉽다. 그래서 나에게 야식은 하루 세끼 먹는 식사로서 당연히 주어진 정당한 식사였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기아에 허덕이게 되고, 잠은 오지 않으며, 정당한 먹을 권리마저 빼앗긴 분노까지 솓구치니 잠을 잘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야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도 아쉬움도 허기도 같이 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야식은 내가 왜 필요 이상으로 먹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야식은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 잠이 와야할 시점에 잠이 오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오고 그 짜증을 벗기 위하여 잠을 자야한다는 핑계로 공격적으로 먹곤 하였다. 한 번 이와 같이 생각이 고정되니 그동안의 온갖 연쇄반응이 보였다. 공부하다가 폭식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폭식하고, 잠이 안와서 폭식하고, 문제가 안 풀려서 폭식하고,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려서 폭식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두통과 체증 외의 모든 고통에는 항상 식탐이 따랐다. 심지어 두통과 체증도 폭식이 너무 심해서 더 심해진 것이다.


그럼 나는 왜 폭식을 했는가?

 

짜증은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 보는 것이 싫어 외면하기 위해서 폭식을 했다. 먹을 때는 그 단맛에 주의가 집중되고 쾌락이 따르니 고통과 고통을 일으킨 상황과 자책감 등을 잠시 잊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고통이 쉽게 사라질리 없으니 당연히 배가 불러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먹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은 쉽게 남용된다. 사소한 짜증이나 귀찮음을 마주치게 되어도 일단 먹었다.

 

고통을 감내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서 자극적인 것으로 정신을 돌리는 행동 패턴을 내 안에서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이 패턴은 나의 삶의 핵심이었다. 괴로운 것을 잊기 위하여 다른 것에 몰두하는 이런 패턴은 지나친 몰입으로 나타났고 가끔은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 패턴을 발견하고 의식하면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감내하고 나아가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내 삶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상승무드를 타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통을 직시하고 피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야식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잠을 자지 못할 때마다 그 순간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낮에 활동할 때는 별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짝 피곤하다. 힘들다. 정도였다. 그래서 불면증의 개선은 단지 귀찮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수면이 개선되고 나니 그동안 받고 있었던 고통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미묘한 스트레스를 거의 먹는 것으로 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고통을 항상 직시하고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수면 난조로 인한 고통은 피로와 인내심 저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하루 종일 영향력을 행사하니 단순히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 따로 고통으로 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고통을 직시한다고 해도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기는 거의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먹는 다는 것을 알았어도 수면의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면 지속적인 고통과 낮아진 인내심의 문제로 먹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동안 수면의 문제를 단순히 잠을 못자게 해서 피곤하게 만든다는 수준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수면을 개선해도 밤에 잠을 못자는 고통이 해결되겠지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면 습관이 개선되어 보니, 그 정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의 삶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질척질척한 진창을 걷는 것과 같다면 이후의 삶은 산뜻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정신은 맑아졌고 하루하루가 상쾌하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좋아지는게 느껴진다. 표정은 산뜻해지고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수면의 질이 개선되기 이전의 삶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스트레스와 고통 짜증이 상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식탐으로 더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으로 다이어트가 되고 있다. 


이전으로 돌아가기 싫다. 하지만 원인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일을 쉬고 있고 다른 스트레스를 놓아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개선된 수면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지만 다시 일을 하고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시간에 쫓긴다면 다시 수면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개선된 수면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개선된 수면을 반석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 동안 수면의 질을 악화시켰던 원인을 찾고 최고의 잠을 잘 수 있는 방법을 몸에 각인해야만 한다. 그래서 다시 수면을 악화시키는 다양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어가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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