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결국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많은 것들이 설명되기 시작한다. 앞서 이 모든 이야기가 출발했던 의문점을 제시한 바 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서 출발함이라는 포스팅에서 처음으로 제시했던 질문들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거의 외우다시피 할 만큼 자주 봤던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는데 전부 외우고 있던 드라마의 스토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거의 들린다고 여겼던 영어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드라마는 완전히 낯설었던 경험을 말하면서 발생한 의문들을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다.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익숙했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찌는가?


그리고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더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의 대답은 처음부터 명백하고 단순했다. 바로 언어의 부재가 바로 그 답이다. 하지만 위의 질문들은 언어의 부재를 통하여 언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대답은 좀 더 심화될 필요가 있다.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봤을 때, 인식구조는 자막에서 영상과 소리로 넘어간다. 즉, 자막을 먼저 확인하고 그 확인된 자막의 내용을 영상이나 소리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자막이 말소리와 동기화(sync)가 맞지 않을 때, 드라마를 보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느껴봤다면 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막이 말소리와 동기화가 되면 그 때부터는 자막의 내용이 하나의 언어적 구조물로써 작동하면서 이야기가 성립되고 드라마의 말소리와 영상은 그 이야기에 실제감과 몰입감을 부여한다. 반면, 언어를 직접 들으면서 보는 드라마는 영상을 보는 와중에 소리를 듣기 때문에 영상과 소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 경우 소리가 언어적 구조를 형성하고 이 언어적 구조는 영상과 동시에 인지된다. 자막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 차이는 결국 정보량의 차이로 이어진다. 자막과 함께 보는 경우는 자막을 먼저 확인하기 때문에 주요 영상의 누락이 축적되고 영상을 길고 세세하게 살펴볼 시간이 부족하다. 또, 말소리에서 직접 전달될 수 있는 억양과 발음에 따른 미묘한 감정 표현, 그 캐릭터의 출신지역이나 성장환경 등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 등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자막으로만 나타나게 된다. 이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자막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은 시나리오에 영상과 배우의 목소리를 첨부하면서 글을 읽는 것과 같고 자막 없이 보는 것은 입체적인 공감을 통하여 충실하게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된다.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들은 주로 짤막한 대사들인데 이들이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자막 읽기에 숙련되었고 그 자막을 거의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자막이 머릿속에 해당 언어의 뜻을 이미 전개시켜 놓았고 그 다음 대사를 듣게 되거나 혹은 대사를 듣는 동시에 자막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후적으로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대사의 길이로도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 단어의 개수가 한 두 단어일 때는 자막과 배우의 대사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영어가 들린다고 생각하지만 대사의 길이가 늘어나면 영어는 무시하고 자막만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막을 보는 동안은 영상도 보지 못하게 된다. 여하튼, 자막을 통해 영어를 들을 수 있다는 인식의 오류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자막이 사라진 순간 잘 들린다고 착각했던 영어 안 들리게 되는 것이다. 


자막이 없어져서 영어가 들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직접 드라마의 영상을 눈으로 보고 대사를 듣게 된다. 자막이 있었을 때는 자막이 들어야할 것과 보아야할 것을 가이드 해주었지만 동시에 보고 듣는 것에 할애할 시간을 빼앗고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제시하기 때문에 주마간산 하는 식으로 드라마를 보게끔 했다. 자막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날 것으로 영상과 소리를 직접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풍부한 비언어적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그로 인하여 공감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은 언어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종합적인 인지를 구성하지 못하고 단지, 각 장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서적 요소나 캐릭터에 대한 미묘한 공감과 애정으로만 남게 된다. 대사와 같은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고 공감되지 못한 그러한 인지들은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들은 기억하기도 쉽지 않고 기억을 환기하기도 쉽지 않으며 접한 정보를 가공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의 드라마를 시청한 느낌은 현저하게 느낀 장면과 정서 몇 가지로 축약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드라마가 현실과는 달리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인식되는 정황을 통하여 이야기의 영상과 소리가 시공간을 도약하면서 정신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언어가 없을 경우 시청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언어가 영상과 소리의 널뛰기를 매개해서 드라마를 성립시켜 주는 것인데 그러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막도 사용하지 않으면 드라마가 하나의 연속체가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일관성 없는 묶음 같은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이에 대해서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포스팅한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결국, 일련의 실어증 체험으로 자막 없이 미국드라마를 본 것에 대한 의문점은 모두 풀었다. 실어증을 체험하는 것에는 실패했고, 드라마를 자연관찰하듯이 보는 것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통해서 그 동안 이론적으로 듣기만 했던 다양한 것들을 실제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자막을 통해서 어떻게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체감하게 된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개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자연은 아름답고 그 속의 다양한 동식물들은 아무런 말이 없어도 우리를 매혹시키고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언어를 모르면 보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처음에는 언어를 백지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니 어떤 언어적인 기능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고 또 다시 좌절되기 때문에 답답함과 좌절감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설정한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져서 ‘모든 것이 언어다’식의 얼버무리기 식의 결론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자연관찰에 몰입하게 되면서 그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선, 언어가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스스로의 가설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유사한 상황에 처해 보면 된다. 즉, 내가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인을 관찰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관찰이지만 동시에 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평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해답은 금방 튀어나왔다. 전혀 괴롭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모르는 외국어도 그 의미를 몰라서 괴롭지는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음성이 어우러져서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계속 시선을 주는 것으로 인한 무례가 아니라면 사람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웅얼거리면서 말하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니라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말은 모르는 외국어임에도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또렷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입고있는 옷과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은 그들이 일시적인 관광객인지 국내에 거주중인 것인지 알게 해주고, 표정과 목소리의 톤, 몸짓은 그들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려준다. 잠깐의 관찰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외국인을 관찰할 경우 모르는 언어가 개입하고 있지만 전혀 고통스럽지고 괴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척 흥미진진하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기능이 작동하고 다시 좌절하면서 고통을 겪는다는 가설은 폐기해야할 것 같다.


새로운 해답을 찾아 생각이 표류하다가 고통에 초점을 맞춰보게 되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 생기는 그 고통에 대해서는 앞서 포스팅한 미드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 대하여 고찰함 2에서 명칭실어증과 개인적인 경험을 버무려서 명칭을 모르는 것에 대한 고통과 답답함을 언급했다. 이 경우 소설이나 텍스트 등 언어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향유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기호 하나 때문에 무지의 벽에 부딪히고 답답해지면서 읽고 있던 맥락보다 지금 현재 눈앞의 기호 하나를 모른다는 맥락에 매몰되어서 전체 맥락이 단절되고 갑자기 글에 대한 흥미도 급격하게 사라지는 그러한 고통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고통과 답답함은 마치 자신의 위치와 맥락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생기는 당혹감 또는 갑작스러운 급격한 시공간적 변화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감과 매우 닮아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 되면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이 전부 동일하다. 앞서 명칭실어증에서 모르는 기호에 마주쳤을 때는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라면 자고 있는 사이에 본인도 모르게 대한민국에서 몽고로 옮겨진 사람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현실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과 언어적 맥락의 상실이라는 것에 천착한 나머지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겪는 고통도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언어적 맥락이 꼬일 때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이 꼬일 때도 비슷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드라마와 자연 관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자연 관찰은 언어 없이 가능한데, 드라마는 힘든 것일까?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대조하는 질문을 하니 갑자기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딱따구리를 발견했을 때, 딱따구리의 맥락은 무척 뜬금 없었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없었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날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그 외에 별도의 맥락이 주어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딱따구리는 날아와서 나무를 두들기다가 날아갔다. 딱따구리의 생태, 종의 종류, 서식지 등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딱따구리의 의사를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고통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몰입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과 드라마 시청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연 관찰은 일종의 현실이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수많은 엉뚱하고 알 수 없는 맥락들이 섞여있다.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마주치고 또 그것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경험세계라는 맥락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현실적 경험세계라는 맥락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내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금 신기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어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드라마의 맥락은 어떠한가? 우리는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의 동시에 관찰하고 그 사람만의 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엿보면서 관음증을 즐긴다. 1초전에는 뉴욕 맨하탄의 커피샵에서 노닥거리는 연인들을 보다가 그 다음 1초 후에는 사하라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제정신인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드라마가 실은 언어적 질서를 통하여 구축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결국 글이다. 하얀 노트 위에 글로 작성된 것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영상을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 배우들의 대사로 연결된 한편의 문학인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와 배경의 사실성 등은 그 문학을 더욱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집중해서 드마라를 보게 되면, 현실적 맥락에 충실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는 자연스레 관찰이 이루어지고 고통스럽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면이 확 바뀐다. 또,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도시에서 시골로 바다에서 사막으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관찰하는 사람은 갑자기 변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내용은 계속 전개되고 있다. 현실적 맥락은 이미 꼬였다. 물론, 용을 써서 바로 이전 맥락을 놓아버리고 다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한두 번은 어찌 노력해서 적응해도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피곤해지고 집중력은 떨어지게 된다. 결국, 길을 잃고 답답함과 고통에 매몰되고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맥락이 꼬이는 이유는 그 현실적 맥락의 전환을 언어적 맥락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에 대한 순수한 자연관찰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언어적인 산물이었고 그 사이에 있는 배우와 소품으로 이루어진 영상들도 현실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잘 통제된 언어적 배치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말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다. 당연히 평소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 밤을 꼴딱 새면 어찌어찌 성적은 나올 것 같다. 이제부터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갑자기 시험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엉뚱한 책을 읽고 싶거나 어떤 끝내주는 영감이 생기면서 시험공부를 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해본 적 있는가?

 

난 있다. 아니 항상 그래왔다. 시험 전날이 되어 더 이상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려고 하면, 갑자기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야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갑자기 너무나 뜬금없이 물구나무서기를 숙련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평생 쓰지 않던 소설에 대한 착상이 떠오르면서 소설을 쓰고 싶거나, 평소 어려워서 보지도 않던 전문서적에 대한 탐구심이 넘치게 되는 현상은 분명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이런 성향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드물게 나타나는 성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존 페리의 미루기의 기술을 읽어보니 이러한 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존 페리는 미루기의 기술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러한 미루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미루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도 보다는 미루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이를 오히려 합리적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를 존 페리는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로서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미루기 습관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위트가 넘치는 문장과 일상에서의 스스로의 단점을 수용하고 이를 인생의 즐거움과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지혜가 빛나는 책이니 여러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미루기의 습관이 있으신 분들은 정말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존 페리는 할 일을 미루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미루기라고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딴짓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딴짓은 나처럼 인생을 피해가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평생 딴짓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졸고, 무협지와 만화책을 보고 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욕구에 따라서 그럴 수 있지만 공부를 해도 딴 공부를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국어, 영어, 수학이 가장 주요한 과목이었고 다른 암기 과목은 시험을 보게 되어서야 암기하는 것이니 이런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국영수를 공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국어 시간에는 영어를, 영어 시간에는 수학을 공부하는 식으로 했다.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없고 내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만 공부가 가능했다. , 딴짓만이 내가 평소에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교육하는 방식도 대부분 그러하다. 우선,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목적을 갖고 목표를 세우게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할 일을 제시해주고 이를 하도록 강하게 종용한다.

 

아쉽지만 보통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일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목적과 목표가 너무 추상적이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존경 받는 것, 모두 추상적이다. 40대가 되어버린 나도 그런 추상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그런 목적을 세우고 목표를 만들어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추상적으로 세웠던 목적과 목표는 그저 추상적인 것에 머물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이 모든 빌어먹을 고통스러운 일들을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는 목적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고통을 자초하지 않을 인생을 살고 싶은 욕구로 가득차게 된다. 정말 모든 요건이 우연히 잘 맞아서 공부가 되고 공부를 통하여 스스로 이득을 얻고 그 이득에 만족하는 선순환을 구축하는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추상적인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의 고통에 질려서 쉬고 싶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은 다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쉬고 다시 그 목적을 생각하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친구들이다.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정상적인 친구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공부를 어느 정도 잘하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그렇지 않다. 고통에 질린 나머지 자신의 목적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의 공허함과 현실적인 고통 사이의 괴리를 발견한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추상적인 목적과 그 목표에 대한 괴리를 메우는 방식도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적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외치면서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려고 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행위를 추구하여 매순간 충만함을 기반으로 삶을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친구들이 현재의 고통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허하지 않은 목적과 목표를 찾아 다시 열정이 일어나면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목적을 찾지 못하면 현재의 쾌락에 머물러있게 된다. 두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의 고통이 너무 커 보이고 따라서 불공정한 거래인 것 같은 마음에 실제로 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지도 않고, 기존의 체계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냥 경계선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최악의 경우였다. 공부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벌고, 대우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런 것을 원하므로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우받지 못하고 돈도 없는 삶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니 현재에 고통을 감수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정을 불태워야 하고 하는 것을 알지만 내 몸은 절대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자극적인 것에 눈이 돌아가고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그리고 놀고 나면 죄책감과 무력감이 엄습한다. 이러다 보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한심하게 느껴져도 몸과 나의 무의식은 그저 노느라 바쁘다.

 

절대로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몸과 무의식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거나 통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놀아야 하니 전혀 공부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통제된 상황이 만들어져야 공부를 하는데, 아쉽게도 통제된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에 순응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 통제된 상황에서 비로소 한 가지 잘 정제된 욕망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 통제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하지만 육체는 이미 통제되어 있으니 정신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거기에 현재 수업과 다른 교과서가 있으면 그 교과서를 열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시간에 영어를 보고, 국어 시간에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수업시간에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공부법이다. 앞에서 선생님이 온갖 시청각 교재를 제공하고 있고, 판서하고 설명하고 있으니 이를 열심히 듣고, 보고 공부하는 것이 오감에 입체적인 효과를 부여하여 가장 효과적인 공부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한 공부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내가 그랬다. 나는 이중삼중으로 설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서 절대 공부가 목적이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이 공부가 딴짓이 될 때에만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에만 그 탈출구로 다른 교과서가 있을 때에만 그것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공부는 단 한번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공부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의 발견 덕분에 어떻게든 공부가 가능해지긴 했다. 멘탈이 약하기 때문에 공부가 중요하고 이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는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만 남게 된다. 그래서 일단, 다른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지금 바로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평소에는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험 때에는 시험에 대한 강력한 압박 덕분에 오히려 공부하기 더 편하다. 공부를 한다는 것 보다는 내일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서고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오히려 시험의 부담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 좋아서 빨리 해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수업시간만 공부해서는 부족하다. 자율학습을 할 때 공부를 해야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비주의류나 기공류의 연구 덕분에 스스로를 관찰하고 심상이라는 것을 구축하게 되면서 스스로 믿는 심상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공부가 가능해졌다. 주로, 수학 공부와 연구였지만 결국, 성공을 위한 공부라는 것을 뒤로 제치고 지금 당장 자신의 발전을 위한 연습이라는 것으로 구체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너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관찰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고 자신을 잘 관찰해보길 바란다. 구하면 얻어질 것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기적과 같은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 속에서 원인이 이것일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급작스러운 개선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내가 밤의 시간과 수면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어떤 모델의 변화였다.

 

원래의 모델은 이렇다.


일단, 밤의 시간에 대한 나의 모델은 아래와 같다.  


밤의 시간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으로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 없이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활동은 밤에 이루어지고 낮의 활동은 그저 부과된 의무 같은 것으로 짐에 불과하다. 내 삶의 핵심은 밤에 이루어지므로 낮에는 대충 활동하고 밤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다. 


수면이란 것은 그저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꺼지는 것이고 수면은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나에게 수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잔다. 하지만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신체의 자연스러운 적응으로 더 깊이 푹 잠들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할수록 수면의 질이 높아져 이득이다.


수면 개인사를 쓰면서 평생의 수면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나에게 이러한 모델이 작동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게다가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등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이 모델은 그 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수면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하나둘 삶의 방향성과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덕분에 혼란스럽던 문제들이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수면의 문제가 실체를 드러냈고 위의 모델은 결국 하나씩 깨지고 있었다.

 

밤의 시간이 나의 시간이라는 생각은 직장이나 학생들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프리랜서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제는 깨어있는 시간이 전부 소중하고 나의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서 주위에 함부로 간섭해 올 사람도 없고 주위가 시끄러우면 귀마개를 하면 되니 더 이상 밤에만 자유를 누릴 이유는 없게 되었다.

 

두통과 체증이라는 숙원이 해결되면서 삶의 스트레스가 내 스스로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지니 짜증도 줄었다. 나의 패턴상, 고통과 짜증은 그것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몰두하게 하는데, 금연으로 식탐이 생긴 것 말고는 단순하고 강렬한 자극에 대한 욕구 자체는 줄어들고 있었다. 자극적인 게시판 글이나 정치적 논쟁을 보는 것, 영화나 드라마를 밤새 시청하는 것과 헐벗은 사람들을 보는 단순하고 말초적인 욕구가 가라앉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밤의 시간에는 공부를 하거나, 강의를 듣고 운동을 하는 미치도록 건전한 일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조건이 무르익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때, 최후의 조각을 맞춰준 것이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서평을 다시 쓰겠지만 경험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던 내용이 무척 많아서 정말 쉽고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자주 낮잠을 자서 공부에 큰 효과를 보았던 나의 경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도 있고, 고등학교 때 잠을 자지 않고 버텼을 때 느꼈던 수면 부족의 파괴적 위험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덕분에 잠을 안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를 안고 사는 것인지 납득해버렸다. 이 납득으로 수면에 대한 나의 모델이 완전히 깨졌다.

 

불면증이 두통이나 체증, 스트레스, 생활습관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해서 불면증을 치료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잠을 못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 잠을 못자는 것이 지옥이었다. 단지 그 원인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불면증에 괴로워할 때는 꿀잠을 애타게 원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기존의 모델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각성 상태로 있을 수 없을 때야 잠을 시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 와이즈먼의 나이트 스쿨을 읽으면서 그 동안 내 속에 있던 중2 시절 읽은 3시간 수면법의 논리가 처음으로 깨지고 수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명확하게 확립되면서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현재의 개선된 수면상태는 일시적이다. 수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깨졌지만 현재의 낮아진 스트레스와 고통이 개선된 수면상태의 한 축이기도 하다. 이는 지병의 개선도 있지만 현재 일을 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을 하면 당연히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시 밀려올 것이고 그러한 고통에 대한 회피와 일을 한 자신에 대한 보삼심리로 다시 밤의 시간을 열심히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다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잠을 자지 않고 놀려고 할 것이다. 또한, 일을 많이 벌리는 본인의 성격상 밤에 일하는 것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면증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불면증이 단지 귀찮고 그 순간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면이 개선된 지금은 개선된 수면 상태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경험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잠을 못자는 삶은 삶아지고 있는 개구리의 처지와 같은 지옥이었다. 마냥 지속되는 고통과 피로, 인내심 저하로 삶이 비틀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어도 이를 인지하기도 어렵고 저항하기 어려운 그런 지옥이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항상 여유로운 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마 다시 수면이 박탈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어야 마음이 놓이리라. 그리고 그 시작은 나의 수면 습관을 개선하게 해줬던 최후의 조각인 리처드 와이즈먼나이트 스쿨을 씹어 먹는 것으로 해보려고 한다


몸무게가 세 자리 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무릎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한 끼 식사로 6~7천원짜리 시장피자를 먹어왔지만 세 자리수를 넘지 않던 내 몸무게는 담배를 끊으면서 늘어난 군것질에 세 자리수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몸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무릎이 나가고, 고혈압이 치솟아 성질머리가 나빠질 것이고, 무거운 몸 때문에 호흡 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건강검진에서도 대사질환 증후군이 있으니 감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해왔다. 이런 모든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몸무게를 대학시절의 몸무게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재로부터 20을 감량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아무나 하나 내 스스로를 잘 아는데 무턱대고 절식하기 시작하면 그 요요증상으로 몸무게가 200을 뚫고 올라갈지 모른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열심히 할 정도로 의지력이 세지 않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운동 후 피자 한판을 먹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기 때문에 운동만으로 살 뺀다는 생각은 이미 접었다. 존 다이어트 같은 책을 열심히 읽어봤는데 이건 뭐 영양사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로 보였다. 인생을 전부 다이어트에 갈아 넣을 각오라면 이런 방법을 실천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다이어트 관련 책들은 무척 많은데 각종 다이어트 방법들을 읽어보니 이 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적절한 적응의 기제가 있다면 사람은 그에 맞는 삶의 형태를 보이는 법이다. , 지금보다 20줄어들은 몸무게로 사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 있고, 그에 맞는 생활습관과 삶의 양태를 구축하면 자연스럽게 살은 빠지고 정신과 육체는 가장 조화로운 형태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살을 빼려면 그러한 상황을 만들고 생활로 고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삶을 모형을 생각해보다가 좀 더 단순한 질문에 도달했다. 그 질문은 , 나는 필요 이상 먹는가?” 였다. 삶의 모형을 구축할 필요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이것이 궁금해졌다.

 

다이어트 방법을 고민하면서 여전히 피자 한판을 한 끼 식사로 먹고 있던 삶에서 어느 순간 불면증과 올빼미 생활이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개선되어 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화로운 수면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야식이 중단되었다. 종종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해당 문제의 실체가 보이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야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야식을 줄여야 한다고 말할 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야식이 나의 정상적인 3끼니 중 한 끼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면증이나 수면관련 이슈를 경험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잠이 안 올 때는 무언가를 먹어야 그나마 잠을 자기 쉽다. 그래서 나에게 야식은 하루 세끼 먹는 식사로서 당연히 주어진 정당한 식사였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기아에 허덕이게 되고, 잠은 오지 않으며, 정당한 먹을 권리마저 빼앗긴 분노까지 솓구치니 잠을 잘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야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도 아쉬움도 허기도 같이 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야식은 내가 왜 필요 이상으로 먹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야식은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 잠이 와야할 시점에 잠이 오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오고 그 짜증을 벗기 위하여 잠을 자야한다는 핑계로 공격적으로 먹곤 하였다. 한 번 이와 같이 생각이 고정되니 그동안의 온갖 연쇄반응이 보였다. 공부하다가 폭식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폭식하고, 잠이 안와서 폭식하고, 문제가 안 풀려서 폭식하고,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려서 폭식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두통과 체증 외의 모든 고통에는 항상 식탐이 따랐다. 심지어 두통과 체증도 폭식이 너무 심해서 더 심해진 것이다.


그럼 나는 왜 폭식을 했는가?

 

짜증은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 보는 것이 싫어 외면하기 위해서 폭식을 했다. 먹을 때는 그 단맛에 주의가 집중되고 쾌락이 따르니 고통과 고통을 일으킨 상황과 자책감 등을 잠시 잊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고통이 쉽게 사라질리 없으니 당연히 배가 불러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먹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은 쉽게 남용된다. 사소한 짜증이나 귀찮음을 마주치게 되어도 일단 먹었다.

 

고통을 감내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서 자극적인 것으로 정신을 돌리는 행동 패턴을 내 안에서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이 패턴은 나의 삶의 핵심이었다. 괴로운 것을 잊기 위하여 다른 것에 몰두하는 이런 패턴은 지나친 몰입으로 나타났고 가끔은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 패턴을 발견하고 의식하면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감내하고 나아가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내 삶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상승무드를 타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통을 직시하고 피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야식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고통의 반작용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잠을 자지 못할 때마다 그 순간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낮에 활동할 때는 별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짝 피곤하다. 힘들다. 정도였다. 그래서 불면증의 개선은 단지 귀찮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수면이 개선되고 나니 그동안 받고 있었던 고통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미묘한 스트레스를 거의 먹는 것으로 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 고통을 항상 직시하고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수면 난조로 인한 고통은 피로와 인내심 저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하루 종일 영향력을 행사하니 단순히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 따로 고통으로 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고통을 직시한다고 해도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기는 거의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먹는 다는 것을 알았어도 수면의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면 지속적인 고통과 낮아진 인내심의 문제로 먹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동안 수면의 문제를 단순히 잠을 못자게 해서 피곤하게 만든다는 수준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수면을 개선해도 밤에 잠을 못자는 고통이 해결되겠지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면 습관이 개선되어 보니, 그 정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의 삶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질척질척한 진창을 걷는 것과 같다면 이후의 삶은 산뜻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정신은 맑아졌고 하루하루가 상쾌하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좋아지는게 느껴진다. 표정은 산뜻해지고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수면의 질이 개선되기 이전의 삶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스트레스와 고통 짜증이 상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식탐으로 더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으로 다이어트가 되고 있다. 


이전으로 돌아가기 싫다. 하지만 원인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일을 쉬고 있고 다른 스트레스를 놓아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개선된 수면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지만 다시 일을 하고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시간에 쫓긴다면 다시 수면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개선된 수면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개선된 수면을 반석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 동안 수면의 질을 악화시켰던 원인을 찾고 최고의 잠을 잘 수 있는 방법을 몸에 각인해야만 한다. 그래서 다시 수면을 악화시키는 다양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어가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고시에 도전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순전히 재수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재수생 시절의 마법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단 기간에 고시 패스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이 마법같은 경험은 대학교 공부를 할 때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해 학점은 참혹했지만, 그 때는 청춘의 교우 관계에 힘을 쏟고 각종 행사에 토론에 정신이 없었고 전공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대학 시험은 벼락치기로 간단히 넘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가면서 대입공부를 하던 때처럼 공부한다면 고시의 수월한 통과가 가능할 것이라고 속단한 것이다.

 

7년을 내리 놀기만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하려고 하니 공부가 잘 될 리가 없다. 솔직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는 것도 어려웠다. 몸이 공부에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정말 큰 문제였다.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공부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수면에 난조가 왔다. 어차피 다른 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니 졸리면 자고 일어나서는 공부하면 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묘사해야할까? 졸려서 자려고 누우면 정신이 맑아지고, 잠이 오지 않으니 일어나서 공부하려고 하면 미친 듯이 졸리고 피곤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누워있어도 고통스럽고 활동을 해도 고통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은 오직 강력한 자극으로 정신을 각성시키는 활동만 가능했다. 공부를 하거나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으려고 하면 너무 피곤하고 눈이 감기며 글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이제 누우면 자겠지 하고 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이런 저런 생각만 머리를 어지럽힌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이제 시험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고 싶었다. 아니 깨어있을 때는 정신이 맑고 잘 때는 푹 쉬고 싶었다. 하지만 오만가지 이유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첫 번째는 소리였다. 눕기만 하면 주위의 소리가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뇌로 쏙쏙 박히는 것만 같아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문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 대로변에서 차량이 이동하는 소리 등 정말 많은 소리가 침범해왔고 나는 그 소리를 감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소리에 분노하고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귀마개를 꽂아도 그런 소리는 여전히 너무나 잘 들렸다. 두 번째는 온도였다. 몸이 뜨거운 건지 항상 더워서 땀을 흘리고 그러한 땀이 배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었다. 세 번째는 욱신거림이었다. 지금에는 하지불안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해서 원인 불명의 증세가 나를 괴롭힌 것이다. 눕기만 하면 발을 쭉 뻗고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그 느낌이 신경을 미친 듯이 건드리고 있어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체증이었다. 나는 자주 체했다. 정말 자주 체해서 일주일에 5일은 체해있는 상태였다. 체하면 두통이 밀려오고 속이 뒤집어져서 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잠이 들기 전에 체증이 가라앉으면 다행이지만 일단, 체증에 걸려있는 상황에서는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쳐 쓰러질 때가지 걷거나 자극적인 인터넷 세계를 탐방하는 것, 만화책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서 체력을 완전히 소모하고 나면 체증이 가라앉고 지쳐 쓰러지면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러한 조치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눕기만 하면 누가 머리를 바이스 같은 도구로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꽝꽝 때리는 느낌도 왔다. 그것은 실질적인 통증을 동반했고 정말 무지 아팠다. 이제는 지쳐 쓰러지듯 잠을 자는 것도 만만하지 않게 되었다. 다양한 실험을 해보았는데 일단 베개를 사용하면 머리를 조이는 느낌이 강해졌고, 모로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엎드려 자는 것이 가장 심했기 때문에, 정자세로 누워서 목이 15도 정도 좌우로 기운 상태에서만 잘 수 있었다. 그 자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이제는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잠을 잘 수 있었고, 이러한 규칙은 종종 나를 배반했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져서인지 체증은 더 자주 찾아왔다. 이 체증에 대해서는 따로 말해야겠지만 중등 시절부터 자주 겪어온 증세였고 평생의 지병처럼 생각하고 있는 증세였다. 그리고 고시생 시절에야 이 증세의 이름이 체증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체증은 최근에야 완전히 극복되어서 극복하는데 25년이 걸렸다. 당시, 스트레스가 극심하고 무언가의 균형이 깨졌는지, 체증이 정말 극심해졌다. 평소에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뒤집어지는 정도였다면 이 때 부터는 항상, 오한을 동반하고 몸이 미친듯이 떨리고 고통으로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 없게 만드니 나중에는 이 체증이 말라리아 같은 학질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었다.

 

그러고 누우면 다시 공포스러운 고통이 찾아왔다. 너무 지쳐서 의식을 잃을 때까지 밀어붙여야 가까스로 잠을 잤는데, 일어날 때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서 고통스러워하며 일어나는게 일상이었다. 잠을 잔 것이 말끔하고 개운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을 주면서 허우적거리며 일어나서는 그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수면 무호흡증도 심했던 것 같다.

 

당연히, 병원을 찾아가서 이것저것을 하소연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의사들의 말은 한결같이 스트레스를 줄여라.”였다. 물론, 이 모든 증세에 스트레스가 한몫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또 증세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극심했기 때문에 증세를 없애는 것이 우선이어야 했다. 하지만 의사들의 처방은 스트레스 과다였고, 나는 좌절하면서 병원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고시 공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아프게 되면 아무리 주위 보기가 민망하고 인생에서 낙오하는 것 같아도 내가 살아야 했기에 고시의 포기는 깔끔하게 되었다이 상황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고시 공부를 포기해서 스트레스를 줄여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시 공부를 포기했어도 여전히 증세는 계속되었다. 오히려 고시 포기에 따른 우울증까지 겹쳤다. 끊임없이 악몽을 꾸었다. 악몽을 꿀 것을 알아도 자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수면은 어쩔 수 없이 지옥으로 입장하는 것이었지만, 그 지옥도 깨어있는 현실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아귀의 고통이 이런 걸까? 아귀는 먹고 싶은 탐욕에 미쳐있지만 먹을 기회가 거의 없고 가까스로 먹을 것을 구해 먹을 것을 넘길 때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낀다. 내가 바로 그러한 느낌이었다. 쉬고 싶고 자고 싶은 열망에 몸부림치지만 잠을 자면 첫 번째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미친 듯이 수면에 대한 욕구에 시달렸다. 두 번째로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 반드시 머리를 조이고 때리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고, 가까스로 잠을 자면 악몽이 덮쳤다. 그리고 깨어날 때는 전혀 개운하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으로 일어났다.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서 숨이 부족해 숨을 몰아쉬었고 기분에 끔찍했다.

 

3년을 버티다가 결국 수면제를 받아서 복용해보았다.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면제를 복용했는데, 일단, 잠은 바로 잘 수 있었다. 하지만 1시간 만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잠에서 쫓겨나듯이 일어났다. 처음 겪어본 고통이었던 것 같다. 평소 머리를 조이는 것 같은 고통과 머리를 꽝꽝 때리는 것 같은 고통을 한계가지 밀어붙이면 어떤 고통이 오는지 처음 알았다. 고통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머리를 부수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벽에다가 찍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고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고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끊임없이 머리를 벽에다가 찍었다. 나는 원래 겁이 많고 소심한 편이라 이런 식의 고통스러운 자해 행동을 매우 싫어하지만 당시는 살고 싶지 않았고 모든 두려움과 걱정은 없었다. 그냥 실행에 옮겼다. 다행히, 고통으로 힘이 없었는지 내 머리가 부서지지도 않았고 고통도 가라앉았다. 이 때의 고통은 지금도 떠올리기만 해도 무섭고 진저리쳐진다.

 

그리고 이 고통을 겪고 나서야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나는 이러한 수면의 장애가 체증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시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평소의 낮과 밤이 바뀐 불규칙한 생활습관이 맞닿아 일어난 증세라고 의심했었다. 체증은 항상 있었고 고시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너무 갑작스럽게 수면 장애가 왔기 때문에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조이는 통증과 꽝꽝거리는 통증도 그 동일선상에서 왔다고 생각했다그 때 내 스스로가 반쯤은 말 그대로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정신병원을 가서 확증하는게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고 자위하면서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통증도 내 자신의 광증의 소산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시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건강한 수면 패턴을 다시 찾으면 체증은 어떻게 안되더라도 수면은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 일환으로 수면제를 처방 받은 것이다(엄밀하게 확인할 정신은 없어서 진짜 수면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가 정신적인 것이었다면 수면제로 인한 그 지독한 고통이 설명되지 않았다. 이 때, 나는 잠시 차분해졌다. 그 동안의 전제를 내려놓고 상황을 둘러보다가 물을 마실 때마다 어금니 쪽이 시려지는 느낌이 갑자기 떠올랐다. 확신이 왔다.

 

치과에서 10년간 교정을 해서 치과에 매우 익숙하면서도 정말 싫어한다. 이빨을 가는 드릴의 소리와 느낌이 이상하고 그 뾰족한 도구들을 보는 것도 싫다. 숱하게 겪었던 치료와 진료도 지겨웠고 교정이 끝나면서 다시는 치과를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환호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치과를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은 그 모든 불쾌감을 무릅쓰고 결연하게 치과에 갔다. 어쩌면 치과를 싫어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동안 충치라는 가능성을 애써 외면해왔던 것이 아닌지, 그래서 그 보다 더 강력한 고통을 겪고 나서야 그 가능성을 떠올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과 선생님은 한 번 입안을 스윽 보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랑니가 다섯 조각으로 갈라져 균열이 갔습니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빨리 오시지.”

 

그 날 사랑니를 뽑고 집에 돌아오면서 앓던 이를 뽑는 느낌이 무엇인지 정말 확실하게 배웠다.

 

그리고 충치를 뽑자마자 머리를 바이스로 꽉 누르는 통증과 때리는 통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극히 일부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