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ki로 문장 암기하기 1

 

 

 컴퓨터 AI의 멍청함에 대해서 이야기되는 것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AI가 고양이를 학습할 수 있도록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AI는 고양이가 아닌 실타래 비슷한 것을 고양이로 인식했다고 한다. 이 사례는 AI에게 고양이를 가르칠 때 사용할 사진을 잘 골라야 한다는 뜻으로 나온 이야기이고 동시에 대단해 보이는 AI 학습이라는 것이 인간의 학습에 비해서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지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되는 이야기다. 사람은 고양이를 바로 고양이라고 인식할 수 있지만 AI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AI가 아직 사람을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하고 자긍심을 가져보지만, 정작 Anki로 많은 카드를 공부하다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AI 같은지 확인하곤 놀라곤 한다. 처음 새 카드를 공부할 때에는 앞면의 문제도 읽고 열심히 생각해서 뒷면의 답을 풀어낸다. 하지만 이미 익힌 카드를 두세번째 복습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기계적이 된다. 특히, 단순한 질의-응답 형식 문제들은 바로 패턴이 몸에 익어 바로 기계적인 응답이 이루어진다. 즉, 이런 형식의 카드들은 처음 30개의 카드를 익힐 때는 1~2시간이 걸렸다면 복습할 때는 2~3분이면 충분해진다. 

 

 기본적으로 새 카드 공부 보다 기존 카드 복습이 더 쉽다. 그래서, 새로운 카드를 학습할 때 걸리는 시간은 복습하는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든다. 하지만 1~2시간에 걸쳐 학습한 것을 2~3분 만에 복습한다는 것은 정도가 좀 심하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기계적 반응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익힌 문답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음과 같다. 가령, 카드의 질문이 “멕시코의 수도는?”이고, 답이 “멕시코 시티”라면, “멕시코”의 ‘멕’자만 보고 바로 “멕시코 시티”라고 답하고 넘어가게 된다. 이는 문제 풀이와 학습이 본질적으로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 풀이는 답을 내기 위한 가장 명확하고 효율적인 경로를 취하려고 한다. 반면, 학습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학습한 것을 문제 풀이로 학습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는 있지만 문제 풀이를 많이 한다고 학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 풀이를 많이 하면 문제를 학습할 뿐이다.

 

 문제를 학습할 경우 질문을 외어 답하는 식으로 시험공부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공부 그 자체를 통하여 질적인 발전을 꾀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지식을 온전히 향유하지 않고 문제 그 자체를 익히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공부하는데 단순한 기계적인 반응만 연습하게 되면 성취감이 떨어지고, 지겨워진다. 학습 의욕도 상당부분 꺾일 수 있다. 그렇다고 단순한 질의-응답 문제들의 패턴을 의도적으로 익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우습다. 또, 이런 단순 기계적 반응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지식이 아닌 문제의 패턴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질의-응답이 너무나 쉽게 기계적 암기로 변환되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빈칸 만들기(Cloze Deletion)로 그냥 필요한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적어도 문장을 외우기 때문에 기계적 암기라고 해도 필요한 지식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 기계적으로 암기되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질의-응답 방식은 다음과 같다. 

 

 

Q: 멕시코의 수도는?

A: 멕시코 시티

 

이러면 순식간에 기계적으로 암기가 되고 “멕시코”의 ‘멕’만 봐도 “멕시코 시티”를 답하고 다음 카드로 넘어간다. 빨라서 좋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기계적인 느낌이 강하게 오고 공부에 대한 회의감도 빨리 찾아온다. 그래서 다음처럼 문장 형태에 빈칸을 만들어 공부한다. 

 

아래와 같이 문장에 2개의 빈칸(c1, c2)을 만든다. 

    

노트(Note)

{{c1::멕시코의 수도}}{{c2::멕시코 시티}}다. 

 

그러면 아래와 같이 2개의 카드가 만들어진다. 

    

카드1

Q: [...] 는 멕시코 시티다.

A: 멕시코의 수도는 멕시코 시티다.

 

카드2

Q: 멕시코의 수도는 [...] 이다.A: 멕시코의 수도는 

멕시코 시티다.

 

 이러면 완결된 문장의 형태로 기억되기 때문에 “멕시코”와 “수도”와 “멕시코 시티”가 하나의 문장 형태로 묶인다. 그러면 기계적인 암기가 되어도 지식은 그 자체로 유효하게 유지된다. 앞서의 질의-응답은 “멕시코”와 “멕시코 시티”가 짝이 되는데 나중에 기계적인 반복으로 변질되면 그 관계가 무엇인지 잘 안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문장의 형태로 외워버리면 그 지식과 그 관계가 온전하게 보전되기 때문에 기계적 학습이 크게 나쁘게 여겨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문장을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여러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겪을 수 있게 된다. 

 

 

 

 

 Anki로 시험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평생 쌓아올리기 위한 공부 그 자체를 위하여 지식을 확고하게 다지면서 나아가기 위한 용도로 더욱 적합하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도로만 Anki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시험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평생 공부를 위하여 Anki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Anki로 정리하는 과정이 공부의 시작이다. 이때, 내용을 어떻게 축약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을 정리하는 과정이 1차적인 공부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일단, 공부가 되고, 실제로 카드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로는 Anki로 지식을 외우는 과정에서 공부가 된다. 제대로 된 암기는 지식의 이해과정이 동반된다. 사람들은 흔히, 암기를 하면 이해를 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일상에서 암기를 하는 과정이 시험을 앞두고 지식을 이해하지 않은 채로 그저 기계적으로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주입식으로 암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평생 동안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상황에서는 암기와 이해가 따로 갈 수 없다. 실제로 Anki로 암기를 하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잘 암기 되지 않고, 어떻게 임시방편으로 잠시 암기를 했어도 2~3일 지나면 다시 내용이 뒤틀리면서 암기한 내용이 틀려지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암기만 하려고 노력해도 저절로 지식에 대한 이해가 진행되는 것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지식을 외우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내용을 살피다 보면 그 지식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아마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이 내용을 지식으로 기억하겠다는 행위를 반복할수록 우리의 뇌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당 내용을 다른 배경지식에 연계시켜 장기기억 시스템에 편입시키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쾌락과 성취감과 고양감을 받을 수 있다. 이 순간만은 공부에 쾌락이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확인할 수 있다. 의미가 통합되고 내용이 확연히 파악되는 경험은 상당한 쾌락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중에는 해당 문구를 일부러 찾아서 반복적으로 되뇌이면서 이해를 높이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해당 문구들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부터는 그런 쾌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문구가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가 구축되는 과정이 쾌락을 준다는 점을 체감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고 넘어갈 때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암기를 시도하면 보다 깊고 자세하게 지식을 통찰하게 되고 자신이 가진 배경지식과 통합되면서 자기 것으로 변한다. 이 과정은 분명히 책을 읽기만 했을 때와는 구별되는 더 깊은 이해과정인 것이다. 덕분에 지식을 외우다 보면 앞서 발견하지 못했던 다양한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이 때, 이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수정해야만 한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중복되거나 필요 없는 카드나 노트는 삭제해야만 한다. 특히, 이 삭제는 매우 중요하다. 필요 없는 카드를 외우고 있었다면 반드시 삭제해서 미래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어나는 카드로 인하여 학습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카드는 쌓인다. 아무리 Anki가 효율적으로 카드를 분배해준다고 해도, 어느 시점부터는 카드의 개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암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수정해주어야 한다. 처음엔 카드를 많이 만들어서 해당 지식을 숙련시키고 내용을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 내용이 완전히 파악된 것들은 이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이해를 바탕으로 조금씩 응축시키고 필요없는 곁가지와 중복된 내용들을 잘라내고 응축시켜서 카드의 수를 줄이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그러면 더 적극적인 복습을 수행하면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쉬워지고 카드의 수가 줄어들면서 미래에 발생할 부담도 많이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험공부가 아닌 공부 그 자체를 위하여 지식을 정리하고 쌓는 관점에서 Anki를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내용을 적어보았다. 특히, 최근에는 카드의 수를 줄이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다. 이미 하루에 3시간 이상 Anki를 하고 있어서 조금씩 부담되는 것도 있지만 더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카드를 삭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후에는 카드를 만드는 단계에서 삭제를 위한 시스템적인 방법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기말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다. 당연히 평소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 밤을 꼴딱 새면 어찌어찌 성적은 나올 것 같다. 이제부터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갑자기 시험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엉뚱한 책을 읽고 싶거나 어떤 끝내주는 영감이 생기면서 시험공부를 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해본 적 있는가?

 

난 있다. 아니 항상 그래왔다. 시험 전날이 되어 더 이상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려고 하면, 갑자기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야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갑자기 너무나 뜬금없이 물구나무서기를 숙련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평생 쓰지 않던 소설에 대한 착상이 떠오르면서 소설을 쓰고 싶거나, 평소 어려워서 보지도 않던 전문서적에 대한 탐구심이 넘치게 되는 현상은 분명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이런 성향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드물게 나타나는 성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존 페리의 미루기의 기술을 읽어보니 이러한 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존 페리는 미루기의 기술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러한 미루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미루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도 보다는 미루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이를 오히려 합리적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를 존 페리는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로서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미루기 습관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위트가 넘치는 문장과 일상에서의 스스로의 단점을 수용하고 이를 인생의 즐거움과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지혜가 빛나는 책이니 여러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미루기의 습관이 있으신 분들은 정말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존 페리는 할 일을 미루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미루기라고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딴짓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딴짓은 나처럼 인생을 피해가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평생 딴짓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졸고, 무협지와 만화책을 보고 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욕구에 따라서 그럴 수 있지만 공부를 해도 딴 공부를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국어, 영어, 수학이 가장 주요한 과목이었고 다른 암기 과목은 시험을 보게 되어서야 암기하는 것이니 이런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국영수를 공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국어 시간에는 영어를, 영어 시간에는 수학을 공부하는 식으로 했다.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없고 내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만 공부가 가능했다. , 딴짓만이 내가 평소에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교육하는 방식도 대부분 그러하다. 우선,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목적을 갖고 목표를 세우게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할 일을 제시해주고 이를 하도록 강하게 종용한다.

 

아쉽지만 보통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일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목적과 목표가 너무 추상적이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존경 받는 것, 모두 추상적이다. 40대가 되어버린 나도 그런 추상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그런 목적을 세우고 목표를 만들어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추상적으로 세웠던 목적과 목표는 그저 추상적인 것에 머물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이 모든 빌어먹을 고통스러운 일들을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는 목적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고통을 자초하지 않을 인생을 살고 싶은 욕구로 가득차게 된다. 정말 모든 요건이 우연히 잘 맞아서 공부가 되고 공부를 통하여 스스로 이득을 얻고 그 이득에 만족하는 선순환을 구축하는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추상적인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의 고통에 질려서 쉬고 싶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은 다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쉬고 다시 그 목적을 생각하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친구들이다.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정상적인 친구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공부를 어느 정도 잘하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그렇지 않다. 고통에 질린 나머지 자신의 목적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의 공허함과 현실적인 고통 사이의 괴리를 발견한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추상적인 목적과 그 목표에 대한 괴리를 메우는 방식도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적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외치면서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려고 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행위를 추구하여 매순간 충만함을 기반으로 삶을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친구들이 현재의 고통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허하지 않은 목적과 목표를 찾아 다시 열정이 일어나면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목적을 찾지 못하면 현재의 쾌락에 머물러있게 된다. 두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의 고통이 너무 커 보이고 따라서 불공정한 거래인 것 같은 마음에 실제로 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지도 않고, 기존의 체계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냥 경계선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최악의 경우였다. 공부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벌고, 대우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런 것을 원하므로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우받지 못하고 돈도 없는 삶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니 현재에 고통을 감수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정을 불태워야 하고 하는 것을 알지만 내 몸은 절대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자극적인 것에 눈이 돌아가고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그리고 놀고 나면 죄책감과 무력감이 엄습한다. 이러다 보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한심하게 느껴져도 몸과 나의 무의식은 그저 노느라 바쁘다.

 

절대로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몸과 무의식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거나 통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놀아야 하니 전혀 공부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통제된 상황이 만들어져야 공부를 하는데, 아쉽게도 통제된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에 순응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 통제된 상황에서 비로소 한 가지 잘 정제된 욕망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 통제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하지만 육체는 이미 통제되어 있으니 정신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거기에 현재 수업과 다른 교과서가 있으면 그 교과서를 열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시간에 영어를 보고, 국어 시간에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수업시간에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공부법이다. 앞에서 선생님이 온갖 시청각 교재를 제공하고 있고, 판서하고 설명하고 있으니 이를 열심히 듣고, 보고 공부하는 것이 오감에 입체적인 효과를 부여하여 가장 효과적인 공부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한 공부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내가 그랬다. 나는 이중삼중으로 설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서 절대 공부가 목적이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이 공부가 딴짓이 될 때에만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에만 그 탈출구로 다른 교과서가 있을 때에만 그것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공부는 단 한번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공부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의 발견 덕분에 어떻게든 공부가 가능해지긴 했다. 멘탈이 약하기 때문에 공부가 중요하고 이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는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만 남게 된다. 그래서 일단, 다른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지금 바로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평소에는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험 때에는 시험에 대한 강력한 압박 덕분에 오히려 공부하기 더 편하다. 공부를 한다는 것 보다는 내일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서고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오히려 시험의 부담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 좋아서 빨리 해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수업시간만 공부해서는 부족하다. 자율학습을 할 때 공부를 해야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비주의류나 기공류의 연구 덕분에 스스로를 관찰하고 심상이라는 것을 구축하게 되면서 스스로 믿는 심상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공부가 가능해졌다. 주로, 수학 공부와 연구였지만 결국, 성공을 위한 공부라는 것을 뒤로 제치고 지금 당장 자신의 발전을 위한 연습이라는 것으로 구체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너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관찰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고 자신을 잘 관찰해보길 바란다. 구하면 얻어질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은 지금이나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몸의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이고 싶은데 그것을 제어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답해진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의 근육이 부들거리면서 떨리고 정신적으로 무척 부산스러워 진다. 이런 경향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면 상황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몸을 비비꼬면서 꿈틀거리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특이한 행동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에게 그런 행위는 자신의 혀를 빠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그냥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물론, 그러고 있을 때는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큰 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거나 누구나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인지하지만 그 외의 일들은 꿈결처럼 조용히 지나간다. 지속적으로 혀를 빠는 습관으로 인하여 혀의 근육이 너무 발달해서 혀로 내 코를 핥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 크고 강력한 혀가 앞니를 밀어버렸고, 앞니가 크게 앞으로 돌출되어 나와서 치과 교정을 해야 했다. 치과 선생님은 혀가 앞니를 밀지 못하게 혀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장치를 입안에 끼워넣었고 결국, 혀를 빠는 행위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혀를 빠는 행위를 대체한 행위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다. 왼손의 엄지손톱 끝을 살짝 다른 손톱으로 잘라서 뾰족한 부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뾰족한 부분으로 피부를 긁는 것이다. 이것은 자해와는 다르다. 자해와는 달리 상처가 나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를 손톱으로 긁으면 그 부위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행위가 혀를 빠는 행위보다 조금 나은 것이 적어도 손톱으로 피부를 긁으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혀를 빠는 행위는 몰입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나마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는 즉시, 이 행위에 1~2시간 씩 몰두하게 되므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앉기만 하면 몸을 비비꼬거나 손톱을 긁으면서 스스로를 잊고 망아의 상태로 몰입해버리니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분석해보면 1시간을 앉아 있을 때 30분은 몸을 비비꼬다가 30분은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무아지경에 있거나 망상에 빠져있는 것으로 실제 공부하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주관적 느낌으로는 책의 제목을 읽고 일단, 앞으로 펼쳐질 재미없는 공부시간을 떠올리면서 이런 재미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리고 펼쳐질 지옥같은 공부시간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다가 앉아있는 자신의 몸이 답답하다고 보내오는 신호에 짜증이 나고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못이겨 정신적으로 퇴행해서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가 될 수 없으니 시험성적을 잘 받고 싶었던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아이디어를 강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발악한 것에 가까웠다. 자세를 바꿔보고 다리를 꼬아보고 하면서 신체를 구속해보기도 하고, 수시로 기지개를 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퇴행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다보니 멍하니 앉아있지는 않게 되었고 반대로 몸의 답답한 감각은 계속 올라와서 조금만 힘들어져도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움직일 때는 정신이 맑아지는데 앉으면 다시 고통을 참다가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냥 앉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앉아서 공부가 되지 않으니 굳이 머리를 굴리는데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공부의 효율이 붙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실험을 하다보니 걸으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명확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체화된 방식은 아래와 같다.


우선책을 1페이지 가량 혹은 챕터 별로 잘게 쪼개서 집중해서 읽는다다 읽는데 2~3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책은 놓고 일어나서 걷는다걸으면서 그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걸으면서 관련 내용을 전부 떠올렸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돌아와서 확인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복습처럼 떠올리고 해당 내용을 확정한 후 책의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우선, 걷기 시작하니까 평소에 앉아서 공부할 때 느껴야 했던 신체의 답답한 느낌이 다 사라지고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신체에 걷는다는 목적과 방법을 부여해서인지 난잡하게 비비꼬이던 몸이 정렬되고 걷는다는 목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몸을 세워서 걷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주의력과 통제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도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주의력과 통제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집중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면 졸음이나 지겨움 같은 장애요소가 나타나지 않아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굉장히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걸음을 걷는 코스 동안 책을 보지 않고 해당 내용을 상기하려고 노력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책을 암기하지 않고 내용만 흝어본 다음에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을 암기한 것이 아니니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책을 달달 외울 수 있게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읽은 내용을 스스로 상상하고 구축하게 된다(물론, 이 때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계속 스스로를 북돋워야 한다.). 한 페이지의 짧은 구간의 이야기가 어떤 구조로 작성되어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당장, 책을 보면서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내가 떠올린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서로 비교하게 된다. , 잔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거하고 서로 안 맞으니까 이게 맞을 것 같아.” 따위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적은 정신에너지를 들여서 해당 내용을 완전히 떠올리게 된다. 원하는 코스를 다 걷기 전까지는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으므로 미심쩍은 부분과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추론을 하면서 코스를 걷게 된다. 그리고 책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읽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아쉽지만 요약이나 축약은 힘들다.).


이 방식이 훈련되기 시작하면서 중학생쯤 되었을 때는 머릿속으로 책의 전개를 쭉 이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돌리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이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는 정말 좋아서 하다보면 책의 내용들이 꿰어지면서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 때 스스로 내가 이것을 공부했고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엇다. 다른 친구들은 교과서를 끊임없이 베끼고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했는데 그렇게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혀를 빨거나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들은 모두 일종의 유아 퇴행현상이었다. 결국,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이런 퇴행은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큰 마이너스 요소였다. 결국,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적인 것은 이러한 퇴행현상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아쉽게도 많은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극복할 방법과 자원이 준비되어 있다면 시도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도 모르고 시도해서 실패할 경우 스스로의 자존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퇴행현상을 극복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내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게 퇴행현상이고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할 것이고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냥 내일 시험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 1차원적으로 아이답게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다. 만일, 그 때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추려서 극복하고 나서 공부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40이 넘는 시점까지도 이 습관인지 기질인지 모를 것들은 여전히 잘 남아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먼저 고치려고 했다면 인생이 헤어날길 없는 미궁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건드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나 다행인지!

 

퇴행현상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걸어다니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몸에 붙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기술을 얻었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은 평생을 줄기차게 써먹은 기술이다. 만일, 계속 앉아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면 평생 교과서를 연습장에 받아쓰면서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숙련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식의 공부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퇴행 덕분에 머리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힘든 일은 무료함이다. 물론, 질병, 가난, 가정 폭력 등과 같은 일이 더 힘들고 지옥 같은 일인 것은 자명하지만 이런 일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저 어머니 품속에 파고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료함은 그렇지 않다. 무료함, 심심함은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품속에서도 느끼게 되고, 그 엄마의 품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사람은 심심한 것을 극심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다. 실제로 사람을 고문하는 고문술에도 비슷한 종류가 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자극을 차단하면 정신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으로 매우 잔인한 고문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단편소설 체스를 보면 독방에 갇힌 주인공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스에 몰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방에서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느끼고는 머릿속으로 체스판을 그리고 끊임없이 체스를 두고 복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나의 어린 시절 무료함에 미쳐서 날뛰었던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일상이 안정되면 이제는 심심함에 몸서리친다. 물론, 고문하듯이 강제적으로 자극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친구와 진흙 위에서 구르지도 못하고 동네 뒷산에서 서바이벌을 즐길 수도 없고 재미있는 게임도 즐길 수 없다. 접시를 깨고, 유리창에 돌을 던져 시원하게 부서지는 모습이 보고 싶지만 엄마가 감시하고 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앉아서 숨 쉬는 것뿐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무료함에 정신이 나갈 듯 아득해지다가 본능적으로 이상한 놀이를 만든다. 파괴 본능이 앞설 때는 상상인지 백일몽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 악독한 마왕을 쳐부수거나 대량의 기물파괴를 한 후, 본인이 슈퍼맨 마냥 사람들에게 우러러 받들어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히죽 웃기도 한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을 새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책장 위의 조형물이 이상하게 생긴 것 같아서 갖고 놀고, 주위의 모든 것을 미친 듯이 갖고 놀기 시작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볼 때, 창의성을 발현시키고 싶다면 사람을 엄청나게 지루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광기에 가까운 창의성이 곳곳에 나타날 것이다. 괜히, 지루하기 그지없는 뉴질랜드에서 온갖 창의적인 발명과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유난히 정신이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모든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정신 사나운 사람으로 나를 꼽았으니 아마도 객관적으로도 매우 정신 사나운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말 끔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의 곳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나타나서 나를 미치게 했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고 마치 좀이 쑤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바로 일어나서 뛰게 만들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밤에 잘 때 발생하는 하지불안 증후군의 느낌과 거의 흡사하다. 이런 감각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정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 느낌이 지속되면 고통스러워 진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전부 개별적으로 무료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참지 못했으니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온 세상의 모든 기운을 모아서 버티는 것에 가까웠고 1시간만 앉아있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탈진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공부가 잘 될 리 없다. 앉아서 아무런 자극 없이 무료함에 시달리는 것도 싫은데 하고 싶은 놀이를 모두 금지당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라고 하면 더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앉아서 문제를 풀면서 몸을 이리저리 꼬다보면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가만히 좀 있으라면서 구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몸을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싫다 보니 자꾸 지우개를 식탁 밑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면서 몸을 움직이고 어머니가 안보는 틈을 타서 책 모서리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지우개질을 해서 나온 가루를 뭉쳐서 고무공을 만드는 행위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 퇴행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혀를 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어머니 젖을 빠는 것 같은 행위인데 스스로의 혀를 살짝 내밀고 그 혀를 빠는 것이다. 그렇게 빨다보면 정신이 가출했다고 돌아오곤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갔을 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혀를 빠는 행위로 인해서 앞니가 앞으로 돌출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치과 교정을 해야했다. 결국, 혀를 빠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래서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버릇이 생겼다. 손톱 끝을 살짝 날카롭게 찢어 그 부분으로 피부를 긁다보면 그 감각에 정신이 집중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행위도 하고 있으면 몇시간이고 집중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정신은 먼 곳으로 가출하게 된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해도 책상에 앉아서 읽지는 못했다그저 누워서 끊임없이 자세를 바꿔가면서 책을 읽었다.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신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방구석구석까지 몸을 돌리면서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면서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책이 흥미로우면 몸을 비비꼬면서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이 흥미롭지 않으면 몸을 비비꼬면서 책을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들은 공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서있지 않았을 때야 그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닫고 시험 성적이 잘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 내가 스스로 갖고 있던 시험에 대한 왜곡된 입자으로 인하여 사악한 교사가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시험 문제를 제출하고 이런 시험을 학생이 당당하게 극복하는 승부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 어머니한테 자랑하고 당당하게 용돈을 요구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걸린 보상도 커서 시험 성적을 좋게 나오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특이한 것이 그저 읽는 책은 몸을 비비꼬면서 읽어도 상관이 없지만 교과서는 몸을 비비꼬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기할 것을 고르고 암기하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 행위였다. 이 때, 사용되는 에너지가 있어서인지 다른 곳으로 정신이 분산되면 암기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몸을 비비꼬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몸을 비비꼬지 않으려고 하면 바로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비비 꼬는 것은 약간 자족적인 행위다. 나가서 마구 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욕구를 달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는다. 그리고 그 느낌에 중독된다.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는 책에서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내용 때문에 그런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 책에 몰입하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어느 순간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문서는 Anki 2.0 유저 매뉴얼을 번역한 문서입니다.


기본적으로 구글 번역을 통해서 초벌을 번역하고 이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본문에 충실한 직역보다는 매뉴얼을 숙지하기 쉽도록 의역 위주로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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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tered Decks & Cramming

(여과된 뭉치와 벼락치기)

 

 

 

 Custom Study(맞춤 공부)

 

 

여과된 카드뭉치를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맞춤 공부버튼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버튼은 카드뭉치를 클릭하면 카드뭉치 개요 화면 하단에 나타난다.

 

맞춤 공부버튼을 누르면 그날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다양한 맞춤 설정, 즉 잊어버린 카드 복습하기 같은 일반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설정할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앞당겨 복습하기 같은 것을 누르면  "맞춤 공부 세션"이라는 여과된 카드뭉치가 자동으로 만들어지면서 열린다.

 

 

 

 

 

기존에 이미 "맞춤 공부 세션" 카드뭉치가 존재했다면 새 것이 생성되면서 기존의 카드뭉치의 내용은 비우고 새 것으로 채운다.

 

기존의 맞춤 공부 세션 카드뭉치를 유지하려면 뭉치 목록에서 그 이름을 바꾸면 된다.

 

 

 

 

이제 맞춤 공부에 대한 각각의 옵션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오늘의 새 카드 제한 늘리기(Increase today’s new card limit)

 

현재 학습 중인 카드뭉치에 새로운 카드를 추가한다.

 

다른 옵션과 달리 여과된 카드뭉치를 새로 만들지 않고 기존 카드뭉치를 수정한다.

 

늘리고자 하는 만큼의 새 카드 개수를 지정하고 확인을 누르면 된다.

 

 

 

 

 

오늘의 복습 카드 제한 늘리기(Increase today’s review card limit)

 

일일 복습할 카드수 제한으로 인해 오늘 만기에 도달하는 모든 복습 카드가 표시되지 않는 경우 이 옵션을 사용하면 더 많은 복습 카드를 표시 할 수 있다.

 

늘리고자 하는 만큼의 복습 카드의 수를 지정할 수 있지만 기존 복습 카드의 만기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므로 만기에 도달한 복습 카드가 없다면 복습 카드가 늘어나지 않는다.

 

새 카드 옵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카드뭉치를 만들지 않고 기존 카드뭉치를 수정하기만 한다.

 

 

 

 

 

잊어버린 카드 복습하기(Review forgotten cards)

 

특정한 일 수 내에 난이도 평가에서 다시(Again(1)) 버튼을 누른 모든 카드들을 보여준다.

 

 

 

 

 

 

앞당겨 복습하기(Review ahead)

 

가까운 장래(지정한 일 수)에 만기에 도달하는 카드를 표시한다.

 

이는 휴가 전에 기존 카드 중 일부를 학습하는 데 유용하지만 최근에 배운 카드를 학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앞당겨 복습하기(Review ahead)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새 카드 미리 보기(Preview new cards)

 

최근에 추가 한 카드를 보여준다. 이 때 나타나는 카드들은 학습을 해도 복습 카드로 전환되지 않는다.

 

 

 

 

Study by card state or tag(카드 상태나 태그에 따라 공부하기)

 

학습할 현재 카드뭉치에서 특정 개수의 카드를 고른다. 새 카드만 고르거나, 만기가 된 카드만 고르거나 또는 모든 카드를 대상으로 고를 수 있다.

 

큰 시험을 보기 전에 공부할 때와 같이 카드뭉치에 있는 모든 카드를 봐야할 때가 있다.

 

이러한 경우 표시할 카드의 수를 해당 카드뭉치에 있는 카드의 수 이상으로 설정하여 해당 카드뭉치를 전부 공부할 수도 있다.

 

전체 카드의 무작위 순서 (벼락치기 모드)로 해당 카드뭉치를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옵션도 제공된다.

 

 

 

 

 

"Choose Tags(태그 선택)"를 클릭하면 선택한 카드를 다시 태그에 따라서 또 고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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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는 Anki 2.0 유저 매뉴얼을 번역한 문서입니다.


기본적으로 구글 번역을 통해서 초벌을 번역하고 이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본문에 충실한 직역보다는 매뉴얼을 숙지하기 쉽도록 의역 위주로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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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tered Decks & Cramming

(여과된 뭉치와 벼락치기)

 

 

 

 Introduction(도입)

 

 

보통 Anki에 등록된 카드뭉치를 공부할 때 제한된 수의 카드만 제시된다.

 

Anki의 알고리즘에 따라 사용자가 거의 기억에서 잊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카드들과 설정에 따라 일일 한도만큼 나타나는 새 카드들이 보통 학습을 위해서 제시되는 카드들이다.

 

일반적으로 평소에 카드를 제시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공부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적화 해주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평소의 학습방법은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기억을 탄탄히 다져가면서 꾸준히 학습량을 늘려가는 과정에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시험공부가 필요한 시점이나 특정 학습자료에 대한 집중적인 공부가 필요한 시점 등의 상황이 발생한 경우라면 이와 같은 평소의 학습 방식은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오히려 설정해놓은 시스템적 제약을 벗어나서 당면한 상황을 최고의 효율로 극복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우를 위해서 Anki에는 여과된 뭉치(Filtered Deck)라고 불리는 특별한 유형의 카드뭉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과된 카드뭉치 기능을 이용하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가령, 카드로 예습하기, 시험 전에 벼락치기용 카드 만들기, 특정 태그들만 공부하기, 특정한 순서로 만들어진 일정에 따라서 설정된 해야할 일들 따라 잡기, 원래의 학습일정보다 많이 복습하기, 하루의 잊어버린 카드 통과하기 등등 다양한 것을 해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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